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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4일, 미국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갑상샘암 재발로 다시 입원했다는 소식이 날아든 지 하루 만이었다. 누가 뭐래도 대중과의 소통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영화평론가였기에 유독 그의 죽음을 서글퍼하는 이들이 많았다. 갑상샘암과 침샘종양 수술로 아래턱과 목소리를 잃은 뒤에도 평론을 멈추지 않았던 그로부터 우리도 적지 않은 위안을 받았었다. 이 불굴의 ‘신문장이’에게 뒤늦게 어떤 헌사를 바치면 좋을까를 고민하다 2007년 그를 ‘내 인생의 영화평론가’로 꼽았던 송효정 영화평론가에게 이별의 편지를 청했다. 더불어 <씨네21>이 2002년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그와 가졌던 인터뷰 중 일부도 발췌하여 싣는다. 그의 목소리가 그립다.
여긴 4월인데 여전히 춥습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다니, 그리울 정도로 오랜만의 일이군요. 벚꽃이 피고 있고요, 4월인데도 날씨는 괜스레 쌀쌀맞아 옷깃을 동동 여미게 됩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 설핏 당신이 암 치료를
당신에게 로즈버드는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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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독살음모에 휘말려 도망자가 된 내의원 의관 '최원'(이동욱)의 불치병 딸을 살리기 위한 사투를 그린 드라마 '천명: 조선판 도망자 이야기'는 오는 4월 24일 오후 10시 첫 방송 예정이다.
[이동욱]"첫 사극에 아버지 역할도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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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로뽑아안그럼다쳐.’ 띄어쓰기도 하지 않은 열개의 글자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취재팀에서 편집팀으로 적을 옮긴 뒤 그에게 받은 첫 메일의 일부다(당시 <씨네21> 막내기자들은 1년간 편집팀에서 순환 근무를 했다). 글의 요지는 분명했다. 글자 수를 값으로 매기는 전보를 쓴다는 생각으로, 가능하다면 열자 이내로 간결하고도 적확하게 기사의 제목을 뽑아야 한다는 것. 게다가 그 제목은 섹시해야 한단다. 나도 덩달아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초짜 편집자로 1년을 보내며, 매주 ‘열자’와 사투를 벌이며 자주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서 제목을 가장 잘 뽑는 편집자로 정평이 난 사람답게, 고경태 편집장은 독자의 시선을 재빨리 가로채는 헤드라인의 중요성을 결코 가벼이 보지 않았다. 기사들이 터진 댐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마감날에도 특집과 기획, 표지의 제목을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교체하며 편집기자들과 함께 최선의 ‘후킹’을 고민했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
유혹하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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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
오늘도 어김없다. 4시44분이다. 왜 오후 4시44분만 되면 시간을 확인하게 되는가. 3일 전에도, 그제도, 어제도…. 아니, 몇달 전부터 그랬다. 우연이겠거니 했다. 필연처럼 다가왔다. 사무실 책상 앞에서, 회사 옥상정원 벤치에서, 화장실에서, 택시 안에서, 그 어디서든 4시44분을 피할 수 없다. 며칠 전은 날짜까지 같았다. 4월4일 4시44분.
스마트폰이 죄다. 아니다. 죄다 스마트폰을 본다. 오늘 아침 출근길 전철 안의 풍경화를 되새겨본다. 한둘만 예외다. 앉아 있든 서 있든 죄다 눈을 44도 각도로 내리깔았다. 오직 그것만을 본다. 소리치고 싶다. 책 좀 봐라 인간들아! 아님 내가 만드는 신문 좀 봐라!! 그것도 아님 <씨네21> 같은 영화잡지 좀 보라고!!! 돈 주고 콘텐츠를 소비하는 인간들은 가뭄에 콩이다. 나도 하릴없이 주머니를 뒤져 스마트폰을 꺼낸다. 몇시지? 아침인데 이상하다. 4시44분.
몇달 전 <씨네21> 후배의 상가(喪
더 총명하고 오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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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네.” 그는 이 한마디로 기자들을 장악했던 편집장이다. 데스크 시스템에 올라간 기사가 교열과 편집을 거쳐 편집장의 통과만 기다리고 있는 순간. 그냥 통과하면 선방한 것이고, 불려가면 당연한 거였는데, 가끔 그는 이름을 불렀다. “병진~.” 이 말투가 참 오묘했다. “병진아!”도 아니고, “강병진!”이라고 끊어 부르는 것도 아니고, 이름의 끝자를 은근슬쩍 올리는 이상한 말투였다. 그러곤 잠시 침묵. 호명된 이상 나는 바로 달려갔다. 그에게 달려가면 기사의 품질에 대해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지적이 아니라 칭찬을 하려 할 때, 그는 침묵을 끊고 “재밌네”라고 말했다. 칭찬치고는 짧은 한마디였지만, 당시 <씨네21> 기자들에게 그의 “재밌네”는 밥값을 했다는 인증이었다. 그에게서 누군가가 “재밌네”라는 소리를 들으면, 다들 데스크 시스템으로 들어가 어떤 글이 왜 재밌는가를 살폈다. 지금 생각해봐도 긴장감이 탄탄한 호명과 침묵의 리듬이다.
그의 짧은 칭찬에 무게감을 느낄
기자를 춤추게 한 한마디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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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아직도 나를 편집장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만난다. 대개는 지금의 나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 거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씨네21>에서 일했던 걸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쩐지 친근감이 들기 때문이다. 전에 한번도 만난 적 없는데도 알고 지냈던 사이 같은 느낌. 그건 <씨네21>을 누군가는 읽고 기억해준다는 반가움이기도 하다.
<씨네21>을 떠난 지도 4년이 넘었다. 사람이 하는 일에 뭐든 후회가 따르지만 편집장을 그만두면서 마음에 걸렸던 것이 있다. 하나는 기자들의 잠재력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했다는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후배들에게 더 많이 칭찬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야신’이라 불리는 김성근 야구감독의 인터뷰를 읽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리더는 결코 부하들을 불쌍하게 여기면 안되고 그들의 한계를 규정해선 안된다는 말 때문이다. <씨네21>을 만들면서 이건 영화 주간지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 지레 겁을 먹었던
독자가 편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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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않는 그의 표정들이 있다. 튀밥과 산나물을 한 봉지씩 양손에 번쩍 들고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정말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튀밥과 산나물과 그걸 들고 저토록 흐뭇해하는 영화지 편집장이라니, 그 조합이 신기했다. 그건 선한 학생들로 가득한 어느 농업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받아온 귀한 강의료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물론 그의 가장 침통했던 표정도 기억난다. 갑작스럽게 퇴직 의사를 밝힌 뒤, 편집장으로서 마지막 호를 만들던 그 밤에 그런 표정을 보았다.
편집장 재직 시절에 그가 써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해주었던 ‘편집장이 독자에게’라는 에디토리얼에 앞선 두 일화가 다 담겨 있다. 특히 마지막 에디토리얼(410호, 2003년 7월8∼15일)의 제목은 ‘선택’이다. 그러고 보면 튀밥도 산나물도 퇴직도 결과는 다르지만 전부 그의 선택의 다양한 결과다. 그리고 그의 에디토리얼은 상당수 일상의 경험과 영화적 경험을 경유하여 이 선택이라는 문제를 묻고 또 묻고
묻고 또 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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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 종종 이런 꿈을 꾸었다. 광고팀장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다급한 목소리로 알린다. “이번주 광고가 3분의 1로 떨어졌어요!” 이 악몽은 편집장을 그만두고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편집장일 때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에 안도했고, 그만두었을 때는 내가 더이상 편집장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피 말리는 일이다. 더구나 비평지와 연예지와 산업지의 성격이 혼합된 전대미문의 영화 주간지가 시장에서 오래 버텨낸다는 것은, 지금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매체를 창간했고 2년도 안돼 <씨네21>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조선희 초대 편집장의 공적은 아무리 치켜세워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종이매체의 전성기가 지난 뒤에도 시장에서 분투해온 후배 편집장들의 고뇌도 그에 못지않게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매체를 만드는 일과 국수 가게를 운영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최상의 국물을 내는 객관적 공
끝까지 살아 질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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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이렇게 (잘) 쓸 수가 있지?” 안정숙 편집장은 정말 좋다고 생각되는 글을 만날 때면 감탄사를 아끼지 않는 선배로 기억된다. 어떤 기사든 일단 그 기사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기다리고 읽는가 하면, 만족스러운 글에는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간혹 편집장의 데스크에서 그 즐거운 탄성이 들려올 때면, 어떤 날카로운 지적이나 조언을 듣는 것 이상의 자극을 받곤 했다. <한겨레> 문화부를 포함해 15년 이상 기자생활을 해온 베테랑 선배의 감탄사를 듣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랴마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틈틈이 건네는 깨알 같은 칭찬으로 기자들을 춤추게 하는 편집장이었다.
깨알 같은 건 칭찬만이 아니었으니 방심은 금물. 조금이라도 궁금하거나 동의가 되지 않는 대목을 발견할 때면, 의문점이 풀릴 때까지 질문이 이어지곤 했으니 말이다. 지난 5년 동안의 습관으로 당연시하고 넘어가기 쉬운 것도 다시 묻고 되짚어보는 것. 돌이켜보면 기자들을 독려하는 칭찬과
저예산영화의 든든한 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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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봄, 창간편집장 조선희가 떠난 자리에 내가 왔을 때, <씨네21>은 이미 생명력 넘치는 유기체로 한국영화와 독자들 속에 예민해서 더욱 강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양적, 질적으로 급팽창하던 한국영화의 힘과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새로운 세대의 영화열은 <씨네21> 생장의 필요조건이었다.
영화‘시장’이 확대되면 독자 역시 증가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잡지들이 연이어 새로 등장했다. 한데 2000년 하반기부터 이듬해 초 사이에 등장한 잡지들은 왜 월간지가 아니라 주간지였을까. 나는 <씨네21>에 머물던 이태 동안 세 종류의 영상 주간지 창간호를 읽었다. 혼자 서 있던 지경 안에 경쟁자가 들어서는 데 우리가 초연했다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긴장하니까 좋은 점도 있었다. 우리는 광각 또는 깊은 초점, 때로는 길고, 때로는 경쾌한 호흡, 앵글 등 다양한 시도를 끊임없이 탐냈다. 크게 보아 영화를 중심에 두되 곳곳에 사회와 문화를 향
이곳에서 세상과 호흡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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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4월 동시에 태어난 <키노>와 <씨네21>은 서로 비교를 피할 수 없는 ‘엄마 친구 딸’이었다. 숱한 편집회의의 결론을 되살려 “우리는 주간지이기에 갈 길이 다르다”고 소심하게 말해봤자 사람들은 건성으로 끄덕일 뿐이었다. 당연했다. 영화 주간지는,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었으니까. 이른바 ‘다른 길’이 뭔지 <씨네21> 초대 편집장이 독자에게 설명할 방도는 매주 한권씩 쌓이는 <씨네21>뿐이었다. 어차피 맨땅에 헤딩할 바에야 백지가 낫다는 판단이었을까? 조선희 편집장은 대담하게도 연예잡지 경력이 전무한 평론가, 신문기자, 1년차 프리랜서로 창간팀을 구성했다. (내 기억에) 그녀가 시야에서 놓치지 않은 푯대는 “저널리즘의 규율과 시선으로 영화에 접근한다”는 원칙이었다. 여기엔 영화를 가십거리로 다루지 않는다는 기본 전제와 더불어 가판에서 신문을 사보는 보편적 독자와 눈을 맞춘다는 위치 설정이 포함된다. 1년에 극장 한번 가
진지하거나 섹시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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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을 한번 하면 5년은 해야지. 나는 그런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일했는데 내 후임자 중에 나만큼 질긴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창간 준비기간까지 하면 내가 <씨네21>과 함께한 시간은 무려 5년하고도 5개월이다!!
내가 편집장이었던 5년 동안 에디토리얼은 무기명 칼럼이었다. 나는 주로 기자들의 원고가 다 들어오고 데스크 작업이 한산해지는 마감날 저녁에 에디토리얼을 썼다. 그런데 한주 걸러 한주씩은 정말이지 할 말이 하나도 없어 막막한 마음으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끄응~ 하고 용을 쓰면 몇 마디 말을 짜낼 수 있었지만 다음주는 또 어떡하나. 그래서 나는 도저히 에디토리얼을 쓸 수 없을 때 취재팀장이나 다른 누구에게 대신 쓰게 하려고 포맷에 캐리커처는 물론 편집장 이름조차 박아두지 않았다. 운 좋게도 5년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 다음으로 편집장을 한 사람들이 모두 나보다는 담대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씨네21>을 떠
기본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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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도 어느덧 열여덟살이 됐습니다. 함께 선의의 경쟁을 벌이던 뭇 매체들 없이 홀로 받는 생일상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네요. 많은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시대, 영화를 사유하는 놀이터는 점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개편을 준비하던 우리도 문득 멈춰 서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영화 천만 관객 시대, 영화주간지 <씨네21>은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이 질문을 미리 던져봤을 이들에게 답을 구했습니다. <씨네21>의 데스크를 맡아 매주 영화계 사안과, 원고와, 기자들과, 마감과 사투를 벌였던 다섯 전 편집장들이 글을 보내왔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씨네21>의 미래에 대한, <씨네21>의 과거로부터의 에디토리얼입니다.
씨네리 편집장 다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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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광장’에 진입하려면 우선 고속도로를 타고 톨게이트를 통과해야 하는 법. 야근 중에 그가 내미는 초밥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일과 사랑을 성취하려면 우선 취직을 해야 한다. 이때 채용면접장은 여주인공이 유학파 본부장님 또는 실장님과 두 번째 조우하는 장소가 되고, 해프닝으로 쌓은 인연은 면접의 하이패스가 되어주는 셈. 이것이 처지를 보완하는 인맥과 연줄이란 것은 SBS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의 마지막 회에서 밝혀진다. 다시 취업전선에 나선 한세경(문근영)이 의류회사 면접에서 아르테미스 회장의 비공식 스타일리스트였다는 것을 어필하자 면접관들은 그녀가 한때 패션업계 거물의 피앙세였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점수를 고친다. ‘조금 전까지 난 D였을 거다. 그리고 이젠 A로 매겨지겠지. 헤어지고 나서야 난 정말 그 사람을 이용하게 되었다.’
트렌디 드라마에서 근사한 전문직으로 자아 실현하던 주인공들은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규모 실업사태를 꿈으로 버티는 백수시대를 지나, 취업경쟁
[유선주의 TVIEW] 현실이 어두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