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찌 고골의 ‘코’뿐이랴. 어찌 체호프나 톨스토이뿐이랴. 도스토옙스키도 있고, 고리키도 있지 않겠는가. 문학판이라면 문학 얘기여야 마땅한 것. 그러고 보면 작가 정태언씨의 소재의 창고에는 보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없을까.”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이런 평은 우연이 아니다.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모스크바에서 유학 생활을 한 정태언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과 러시아 인문주의에서 태동한 소설을 쓰는 작가다. 그의 첫 번째 소설집.
[도서] 러시아 인문주의에서 태동한 소설
-
전방위적으로 글을 썼던 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 소설가였던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를 묶은 <다시 태어나다>를 읽기 전에 사유의 원형이나 지성의 비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글 중 하나는 그녀의 아들인 데이비드 리프가 쓴 엮은이의 글이다. 리프는, 어머니가 평생 써온 막대한 분량의 일기를 언급하며, 어머니가 그 존재를 입에 올렸으나 어떻게 처분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불에 태워버릴까 고심하다가 책으로 출간하기로 마음먹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책은 1947년부터 63년까지, 즉 14살부터 30살까지 손택의 일기 묶음인데, 리프는 어머니를 신화로 포장하기 위해 보기 좋은 것만을 추리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밝힌다. 손택이 일기에 적은 젊은 시절은 대개는 두서없고, 지적 열망에 시달리느라 읽을 것들을 나열하며 느낌표를 반복해 쓰기도 하고, 심지어는 24번째 생일을 앞두고 ‘규칙과 의무들’이라는 제목하에 자세를 더 곧게
[도서] 수전 손택도 20대에는…
-
<쥬라기 공원>의 저자 마이클 크라이튼은 1999년에 쓴 <타임라인>에서 이렇게 말한다. “100년 전 19세기가 막을 내릴 때, 세계 각지의 과학자들은 이제 물질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며 흡족해했다. 물리학자 앨러스테어 리의 표현대로 ‘19세기 말까지는 물리적 우주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들이 두루 밝혀진 것 같았다.’ … 그러나 누군가가 만일 1899년의 물리학자에게, 100년 뒤인 1999년에는 하늘에 떠 있는 위성을 통해 전세계의 가정들에 동영상이 전송될 거라고 말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 여성들이 투표권과 함께 출산을 조절할 알약을 갖게 될 거라든지, 사람들이 전화선도 없이 전세계 어떤 곳에 있는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느니…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그 물리학자는 그 사람이 미쳤다고 판단할 것이 틀림없다. 1899년에는 이런 종류의 발전들을 대부분 예측할 수 없었다. … 따라서 20세기의 문턱에서
[금태섭의 서재에서 잠들다] 그리하여 진보는 여기 도착했을까
-
<모차르트 타운>(2008), <애니멀 타운>(2009), <댄스 타운>(2010) 등 이른바 ‘<타운> 3부작’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전규환 감독은 가장 왕성한 창작욕을 과시하고 있는, 한국 영화계의 진정한 독립영화감독 중 하나다. 이후 <불륜의 시대>(2011)를 지나 <무게>(2012)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베니스 데이’ 부문에 초청돼 ‘퀴어사자상’을 수상했다. <무게>는 시체안치실에서 시체를 닦아 관에 담는 일을 하는 ‘꼽추’ 정씨(조재현)와 성기를 잘라내고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그의 배다른 동생 동배(박지아) 등 태생적인 ‘무게’를 떠안은 채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또한 지속적인 장르 실험을 해오고 있는 그에게 <무게>는 ‘판타지 멜로’다. 물론 그는 이후 몇번의 실험을 더 끝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마이 보이>(2013)와 유준상 주
[flash on] 비울수록 많이 보이는 법이다
-
-
-<월터>는 제임스 서버의 단편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1939년작)을 원작으로 한다. 더불어 대니 카가 주연을 맡은 영화 <월터의 비밀 인생>(1947)도 있는데, 이 점이 부담이 되진 않던가.
=늘 영화의 전반적인 면모를 먼저 보는 편이다. 스티브 콘래드의 시나리오는 원작을 좀더 감성적인 측면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현재의 나 자신이나 연출가로서, 배우로서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때문에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나에겐 새로운 시도였다.
-월터의 실생활은 무척 지루해 보인다. 당신의 인생에선 이런 경우가 없었을 것 같은데.
=부모님이 배우라 어릴 적부터 쇼비즈니스쪽에 관심이 많았다(그는 유명 코미디언 부부 제리 스틸러와 앤 미어러의 아들이다.-편집자 ). 재미있고 화려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나도 배우 지망생 시절에 카메라 가게 점원이나 쓰레기 수거 등 많은 일을 했다. 다행히 월터처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
[현지보고] “코미디언의 눈으로 이 작품을 보지 않았다”
-
할리우드 코미디영화의 대표적인 얼굴, 벤 스틸러가 연출에도 재능이 있다는 점은 종종 잊혀지곤한다. 그는 X세대의 상징적인 영화 <청춘 스케치>와 더불어 <미트 페어런츠> <쥬랜더> <트로픽 썬더> 등의 작품을 연출한 감독이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이하 <월터>)는 그런 그가 다시 한 번 연출과 주연을 겸한 작품이다. 벤 스틸러 하면 으레 떠오르는 <미트 페어런츠> <쥬랜더>의 코믹한 이미지를 먼저 생각하지 말 것. 이 영화는 스틸러의 연출작 중에서는 <청춘 스케치>의 정서와 가장 비슷하다. 다시 말해 <월터>는 인물들의 솔직함과 소박한 꿈을 담고 있고, 때로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처럼 약간은 비현실적이지만 환상적인 장면과 현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작품이다.
월터 미티(벤 스틸러)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16년 동안 잡지 <라이프&
[현지보고] 웃기고 슬픈, 평범남의 백일몽 속으로
-
<엘리시움> 감독 닐 블롬캠프 / 출연 맷 데이먼, 조디 포스터, 샬토 코플리, 윌리엄 피츠너
<인 타임> 감독 앤드루 니콜 / 출연 아만다 시프리드, 저스틴 팀버레이크, 킬리언 머피, 올리비아 와일드
SF 블록버스터에서 ‘지구’는 외계인 등과 같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구해야 할,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서기 2154년 <엘리시움> 속 지구에는 적어도 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 가난과 질병, 노동 착취, 악취 나는 쓰레기 더미로 변해버린 지구는 웬만하면 누구든 버려야 할 땅이다. ‘할 수 있는 자’는 모두 떠났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엘리시움’으로. 1%의 부유한 계층이 거주하는 대기권 밖 엘리시움의 세계는 풍족한 생활과 의료시스템이 보장된 미래형 낙원이다. 애써 구해놓아봤자 별 희망이 없는 지구에 의미를 부여하고 애정을 쏟느니 기회만 있다면 (불법 난민이 되어서라도) 빨리 엘리시움으로 가는 게 가장 현실적인 대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
[digital cable VOD] 지구를 깨뜨려라
-
흔히 ‘이스라엘영화’ 하면 팔레스타인 분쟁이나 유대인이 언급되는 내용들, 혹은 종교의 성지순례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영화 역시 변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기법적으로도 다양해졌지만 종교적인 틀 또한 과감히 뛰어넘는다. 서울아트시네마는 11월12일부터 17일까지 엿새간 ‘이스라엘영화제’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에 초대되는 작품은 총 7편으로, 이미 국내에 개봉된 <젤리피쉬>(2007)와 <밴드 비지트: 어느 악단의 조용한 방문>(2007) 외에도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여러 신작들이 포함돼 있다. 이스라엘영화의 최근 경향을 확인할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촉망받는 신예 기 나티브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노아의 홍수>(2009)는 이스라엘을 비롯해 해외의 유수 영화제에서 진가를 인정받은 작품이다. 작은 키가 불만인 13살 소년 요니는 유대인 성인식 행사인 ‘바르미츠바’를 앞두고 있다. 현재 아이의 부모는
[영화제] 열린 사회를 향하여
-
11월4일 저녁 CGV대학로 무비꼴라쥬관에서 열린 시네마톡의 열기는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공지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녀>의 주연 배우들이 깜짝 방문을 했기 때문이다. 예매 오픈 직후 바로 매진을 기록한 것에 대한 제작진의 감사의 표시일지도. 실제로 최진성 감독과 두 배우는 관객의 높은 관심에 놀라워하며 고맙다는 말로 대화의 장을 열었다.
<소녀>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된 영화다. 진행을 맡은 이화정 기자는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가기에 앞서 남동철 프로그래머에게 이 영화를 초청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남프로그래머는 “시골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른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질서와의 대비가 잘 표현된 영화다. 동화적이고 장르적인 표현이 좋았다. 영화제를 통해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길 원했는데 이렇게 개봉까지 하게 되어 뿌듯하다”는 답변으로 영화에 대한 만족감을 표했다. 최진성 감독은 연출 의도를 묻는 질문에 대해 “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시네마톡] 보이지 않는 폭력에 관하여
-
사랑 때문에 살해 위협까지 받는 한 남자가 있다. 세계 성공회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주교가 된 진 로빈슨이다. 하느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과 파트너 마크를 향한 애정은 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하나의 삶을 이룬다. 그런 그의 사랑을 뒤흔드는 건 외부로부터 온다. 성경의 권위를 위협하고 성공회 분열을 부른다는 이유로 성공회 주교 전원이 모이는 램버스 회의 참석을 불허한 교회 원로들이나 동성애가 추잡한 이유를 열거한 협박 메일들 그리고 주님이야말로 동성애를 혐오한다고 말하는 신자들까지.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은 엄숙과 권위로 무장한 교회가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었던 동성애 이슈를 실존 인물, 그것도 주교를 전면에 내세워 보여준다. 공공연히 알려졌지만 쉬쉬해온 교회 내의 다양한 성적 취향과 입장 차를 근거리에서 감지할 수 있었던 데는 로빈슨 주교를 섭외한 공이 컸다. 이어서 <로빈슨 주교의…>는 주교의 사생활을 드러내며 교회의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힌 주교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
-
지구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꿈의 나라 페나리나사에서 요술공주 밍키가 돌아왔다. 마법을 이용해 어른으로 변신할 수 있는 꼬마 밍키(김현지)는 부모를 태운 비행기가 남태평양의 섬 근처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고 보니 섬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가 터져나오고 있었던 것. 더 놀라운 건 그 섬이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어린이들과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어른들이 모인 ‘어린이 나라’라는 사실이다. 어린이 나라를 만들어온 피터(신용우)는 에너지를 뺏는 데 눈먼 어른들을 보면서 자신은 절대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밍키에게 말한다. 마침내 어린이들은 신비한 에너지를 이용해 악당 어른들로부터 무사히 섬을 지켜내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던 본래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1980, 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며 TV 좀 봤다면 <요술공주 밍키: 꿈속의 윤무>의 극장판 개봉 소식에 귀가 솔깃할 만하다. 어린 시절, 어른들처럼 키도 커지고 예쁜 옷
“어른이 된다는 건 마음을 잃는 것” <극장판 요술공주 밍키: 꿈속의 윤무>
-
‘진링’은 ‘난징’의 옛 지명으로 이 작품은 살육의 광기가 휩쓸고 지나갔던 1937년의 ‘난징 대학살’ 당시 그 지역의 윈체스터 대성당 수녀원 학교의 소녀들을 둘러싼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성당 신부의 장례를 치르러 왔다가 어쩔 수 없이 소녀들의 보호자 역할을 맞게 된 장의사 존(크리스천 베일)과 제네바조약으로 중립지역으로 선포된 성당으로 다짜고짜 피신 오게 된 홍등가의 여성들이 소녀들과 어우러져 무자비한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면서 갈등과 화해의 극적 드라마를 만든다.
현란한 색채와 화려한 미장센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영상을 보여주었던 장이모는 이번 영화에서 전장의 피폐함과 가녀린 육체를 뚫는 총칼의 무자비함을 무채색이 주조를 이루는 화면을 통해 구현했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의 다채로운 유리 조각들이 살육전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으로 오버랩되는 영상편집은 비극성을 아이러니하게 강조한다. 하지만 순수한 소녀들의 삶의 가치와 타락한 홍등가의 여성들의 삶의 가치를 교환함으로써 희생
전장의 피폐함과 총칼의 무자비함 <진링의 13소녀>
-
꽃집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여인 홍채(문지영)에게는 그녀를 2년간 쫓아다닌 스토커(김재록)가 있다. 그는 어느 날 홍채의 지인을 다치게 한 뒤 모습을 감추지만 이번에는 다시 그녀의 엄마(유안)에게 접근해 홍채 앞에 등장한다. 그렇게 세 사람이 집에서 맞닥뜨린 순간 모녀에게는 악몽의 시간이 시작된다. 남자가 천연덕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두 여자의 손발을 묶은 채 홍채에게 잠깐이라도 함께 살자며 애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의 다음 행동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녀는 과연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남자의 행동도 사랑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할까.
아파트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남자가 두 여자를 감금한다는 단순한 설정으로 시작한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2>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설정을 밀고 간다. 남자는 여자들을 괴롭히고 여자들은 몸을 뒤틀며 소리를 지르는 게 이 영화의 거의 전부다. 이처럼 단순한 설정의 영화가 자신만의 특색을 만들기 위해
아파트에 감금당한 모녀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2>
-
은행 강도 존(클레인 크로퍼드)은 경찰을 피해 낯선 집의 초인종을 누른다. 마침 친구들과 저녁 파티를 준비 중이던 집주인 워릭(데이비드 하이드 피어스)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의 느닷없는 방문에 잠시 주저하지만 자신의 친구 줄리아의 지인이라는 존의 말을 듣고 그를 집 안으로 들인다. 강도를 당해 빈손이라고 둘러대는 존을 기꺼이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워릭. 때마침 라디오에서 자신의 수배 소식이 전해지자 더이상 정체를 숨길 수 없게 된 존은 워릭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이 순간에 상황 파악이 안되는 건 워릭이 아니라 존이다.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기까지 하는 워릭이 실은 자기만의 망상과 환상 속에 살고 있으며 그 실체를 지금 막 드러냈기 때문이다. 초대 손님들도, 줄리아도 모두 워릭의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 저녁 식사의 실제 손님은 존이 유일하다.
미니멀한 가구들, 유려하게 흐르는 아리아의 선율 사이로 멋스럽게 차려입은 호스트가 정체를 드러내며 단박에 상황을 역전시키는 <퍼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반전스릴러 <퍼펙트 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