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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의 명저 <코스모스>(1980)는 이런 헌사와 함께 시작된다. “앤 드루얀을 위하여. 광대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속에서, 하나의 행성과 하나의 시절을 앤과 공유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다.”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에게 바친 이 헌사를 나는 감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식의 감동에는 어떤 상투성이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왜 우리는(영화는) 우주를 생각하면(우주로 나아가면) 갑자기 지구에서의 삶에 새삼스러운 애착을 느끼게 되는가. 왜 그 ‘숭고’의 순간에는, 이 행성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주고받는 상처는 모두 뒷전으로 밀려나고, 소중한 사람과 “하나의 행성과 하나의 시절을 공유하는 것”이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지는가. 이런 감정/태도에 ‘스페이스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는 이 단어를 조금 노려본다. <그래비티>도 그런 서사구조의 상투적인 반복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태어나라, 의미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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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를 3D로 처음 보았을 때, 대체 무엇을 새롭다고 느껴야 할지 난감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감을 이야기했지만, 그 실감의 정체도 모호했다. 영화는 등장인물에 대한 동일시 혹은 나비족의 판타지적 세계에 대한 동화를 의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3D 안경이 주는 멀미를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튀어나오거나 창공을 가로지르는 이미지들이 나의 육체를 건드렸던 기억은 없었다. 어느 정도는 이 영화의 서사적인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영화가 나의 육체를 통과하는 경험과 나의 육체가 영화 속 세계에 말초적으로 동화되는 경험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3D영화의 목적 아니, 효능은 결국 관객이 영화 속 세계 ‘안’에 있다는 완벽한 환영을 주는 데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궁극의 영화적 경험일까. 영화를 본다는 행위와 그 안에 들어가길 희망하는 욕망은 얼마나 맞닿아 있을까.
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를 3D로 보았을
[신 전영객잔] 카메라여, 당신은 어디까지 갈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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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암에 걸린 노인과 그를 간병하는 젊은 여인 사이에 피어나는 욕망에 관한 영화 <야관문: 욕망의 꽃>의 주연을 맡은 신성일 선생과의 인터뷰가 있던 날이다. 선생께서 골목길을 지나 카페에 들어선 순간, 사진기자의 표정이 굳어진다. 영락없이 운동복 차림이다. 일정을 착각했다는 말씀과 동시에 장소를 당신 집으로 옮기자고 한다. “그게 사진 찍기도, 말하기도 편하겠다”며. “우리 집으로 가자. 머리에 물이라도 묻혀야 사진을 찍지, 안 그래?” 1시간 뒤쯤, 공덕동 어느 아파트. 책이 가득한 책장, 조각상, 각종 트로피가 벽에 둘러져 있다. 탁자 위에는 서양 고전음악 해설서와 피카소 전시회 자료집과 영화 사설이 스크랩되어 있는 신문 뭉치들, 먹다 남은 음식 부스러기 몇개가 널려 있다. 그리고 저 멀리 운동기구. 텔레비전 아래에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이만희 컬렉션> <로마의 휴일> DVD가 뒤섞여 있다. 그렇게 집
[신성일] 꽃보다 할배? 말로만 그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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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가를 인터뷰할 때, 요즘 젊은 작가 중 누구를 좋아하시나요 물으면 가장 자주 나오는 이름이 있다. 바로 황정은이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말과 글의 맛이 고루 살아 있는 문장과 환상성, 숨어 있는 유머감각은 빠지지 않는다. 경장편 <百의 그림자>로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고, 단편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을 쓴 그녀의 신작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도 어머니의 폭력에 노출된 여린 형제의 아픈 현실과 솜털처럼 간질거리는 유머가 기묘하게 손가락을 얽은 그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사실적인 상황 전개마저 환상적으로, 비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는 소설을 잘 쓴다. 소설을 쓸 때 분위기와 내용, 어떤 걸 먼저 생각해내나.
=소설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장소나 장면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 장면을 소설로 이야기하고 싶다’에서 시작한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세상이 곧 망할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빨
[trans x cross] “무엇을 쓰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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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시>는 근미래 SF영화다. 블랙홀 내 웜홀을 통해 시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이론에 근거, 정우석(정재영) 박사는 지구 핵 에너지인 코어 에너지를 활용해 웜홀을 지탱하고 타임머신이 진입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난무하는 <열한시>에서 정재영은 ‘박사’다. 거대한 시간여행 연구소 앞의 정우석 박사는 얼핏 그가 지금껏 연기해온 캐릭터들과 무척 달라 보인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오랜 기간 촬영했다는 점도 이전과 다른 요소 중 하나다. 이에 대해 정재영은 “최근 빠듯한 일정 때문에<그래비티>를 보지 못한 게 가장 안타깝다”며 “<열한시>는 시간여행 혹은 SF 장르에 대한 오랜 관심으로 출연하게 된 작품”이라고 말한다. 참고로 이런 부류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대니 보일의 <선샤인>(2007)이라고. 말하자면 ‘이런 작품을 하고 싶어 기다려왔다’는 얘기다. 어쩌면 <열한시>는 우리가
[정재영] 정재영 시대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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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레이의 <자니 기타>(1954)에서 조앤 크로퍼드는 서부의 남자들을 부하처럼 부리는 여장부 비엔나로 나온다. 비엔나의 기가 얼마나 센지, 서부 최고의 총잡이 자니 기타(스털링 헤이든), 그리고 무법자 댄싱 키드(스콧 브래디)도 그녀 앞에선 왜소한 부하처럼 보일 정도다. 비엔나는 여성이기보다는 불패의 서부 사나이처럼 행동한다. 단호하고, 용기 있고, 거침없다. 하지만 지독하게 외로워 보인다. 비엔나라는 캐릭터에는 모든 난관을 혼자 헤쳐나가는 여장부의 이미지가 뚜렷하지만 동시에 주위에 사람이 너무 없는 고립된 분위기가 덧씌워져 있다. 조앤 크로퍼드의 삶이 바로 그랬다.
‘길거리 캐스팅’ 신화로 유명
영화이론가 리처드 다이어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길거리 캐스팅’은 1920년대 할리우드가 개발한 홍보 전략이다. 영화계와 전혀 관계없는 순진한 처녀(특히 하층민 출신)가 우연히 영화인의 눈에 띄어 연기자가 됐고, 졸지에 스타가 됐다는 이야기는 ‘아메리칸드림’의 할리
[한창호의 오! 마돈나] 여장부, 홀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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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그래비티> 무중력, 무개념
[정훈이 만화] <그래비티> 무중력, 무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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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전후 관계가 이상한 것이 참 많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건 고민거리도 아니다. 조지 클루니가 멋있어서 좋아하는 걸까 내가 좋아하니까 멋있어 보이는 걸까. 이런 고민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자학을 맛동산처럼 깨물어먹고 후회를 무좀처럼 달고 산다. 앙꼬 작가 역시 그런데, 고민은 이렇다. 과자를 너무 좋아하는 앙꼬는 노래방용 포스틱도 한번 뜯으면 끝장을 보는 열정의 소유자다. 맛만 보겠다던 처음의 결심은 오간 데 없고, 빈 봉지를 앞에 두고 자학에 빠지기를 여러 차례. 그러다 어느 책을 읽고 알게 된다. 자신의 우울증은 바로 설탕에서 온 것임을. 설탕을 끊고 나니 몸무게는 44kg까지 빠졌다. 설탕 없는 음식은 없으므로. 그러다 그만, 선물로 받은 고급 초콜릿과 함께 설탕의 참맛을 느끼고, 술만 취하면 설탕주정을 시작,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손으로 퍼먹기에 이른다. 결론? “난 좀더 건강해진 것 같고”(다음에 안 먹으면 되지), “설탕을 안 먹었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웃픈 일상의 연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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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사전>의 저자로 김소연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수학자의 아침>은 그녀가 시인이었음을 일깨우는 시집이다. 도시의 후미진 곳에, 명명되지 않은 시간들에 대해 속삭이는 시들을 만날 수 있다. 상가의 컴컴한 내부가 최대한 컴컴해지는 때, 쓰레기차가 쓰레기봉투를 쓸어담을 때, 창문 열린 원룸 밖에서 앞집 가게의 옥외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올 때,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도시는 이렇게 시가 된다.
[도서] 시간에 대해 속삭이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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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중 7번째 작품으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본 사람이라면 반길 만한 소설이다. 그 캐스팅 그대로 영화화도 진행 중. 은퇴한 늙은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는 과거 자신과 함께 싸웠던 에스토니아 출신 망명자 장군 블라디미르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위험 속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이어나가다 죽은 블라디미르의 복수를 위해 스마일리는 다시 한번 첩보전의 중심에 복귀한다.
[도서] 은퇴한 늙은 스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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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을 중심으로 뮤지션, 에세이스트 등 여러 필자들이 여행에 대한 에세이를 쓰는 <어떤 날> 시리즈 4권에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각별한 글이 하나 실렸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오즈, 만춘 그리고 교토>. <만춘>의 줄거리를 아주 길게 소개하면서 시작하는 이 글은 <만춘>의 장소에 가본 그의 소회를 전한다. 료안지의 가레산스이(돌과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정원을 오즈 야스지로는 왜 찍었을까. 여행만큼이나 영화 권하는 글.
[도서] 영화 권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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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소설가란 이름의 인종은, 학교 선생이나 중처럼 끊임없이 인간과 사회를 테마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킬 수 있는 홀가분함 덕분에, 즉 무절제한 사고에 브레이크를 걸 실질적인 체험이 뒷받침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중요한 테마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머지 전혀 실태를 모르는 구석이 있다. 특히 오랜 세월 작가생활을 하거나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예술가라고 믿는 자들 중에 많은 것 같다.”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 <소설가의 각오>에 나오는 말이다. 저 책을 읽었을 때 짐작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뛰어난,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을 쓴 기타노 다케시와 같은 독설능력자다. 그 사실은 이번에 출간된 에세이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 증명된다.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필경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다) 소설 <물의 가족>이나 <천년 동안에>를 읽어보라고 권
[도서] 독설능력자의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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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감독일 거라고 생각한 건 이성은이라는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성은 감독의 첫 장편영화 <사랑해! 진영아>는 서른살의 여성 시나리오작가 진영(김규리)의 사랑과 진로 그리고 가족에 대한 고민을 그려낸 작품이다. 때로는 섬세하게, 또 때로는 귀엽게 진영과 그의 주변 인물을 묘사한 솜씨 때문에 감독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여성 감독의 영화로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여성 감독인 줄 알았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얘기 많이 들었다. 예전에 초등학교 여학생 진영이의 성장통을 그렸던 <진영이>(2006)로 서울독립영화제 사전 감독모임에 갔는데 강릉씨네마떼끄 박광수 사무국장이 여성 감독인 줄 알고 나를 한참 찾다가 내 얼굴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 돌아선 적도 있었다. (웃음)”
-<사랑해! 진영아>는 단편 <진영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들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데 한 학생이 <진영이>를 보
[flash on] 서른, 비로소 성장하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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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영화의 발굴과 제작지원을 목표로 한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의 야심이 제대로 들어맞았다. 방글라데시의 영화감독 모스타파 사르와르 파루키의 발견은 단연 돋보이는 성취다. 2009년 BIFF에선 그의 <제3의 인생>이 소개됐고, 아시아영화펀드 지원으로 완성된 <텔레비전>은 지난해 BIFF 폐막작으로 선정된 뒤 각종 해외 영화제로부터 기분 좋은 관심을 받고 있다. 방글라데시 영화계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파루키 감독이 <텔레비전>의 개봉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에게 방글라데시영화라는 신세계에 대해 전해 들었다.
-<텔레비전>은 2003년 투레쿠에 마수드 감독의 <클레이 버드> 이후 방글라데시영화로는 두 번째 해외 개봉작이다.
=대단히 기쁘다. 두 번째 해외 개봉까지 굉장히 긴 시간이 걸렸다. 그간 방글라데시의 젊은 영화감독들은 아시아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지만 끊임없이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의 방식으로 해보
[flash on] 잘 만든 픽션은 다큐처럼 다가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