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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시력이 꽤 좋은 편이었다. 한창일 때는 1.5와 2.0 사이를 왔다갔다했고, 중간에 잠깐 1.0 아래로 떨어진 적이 있었지만 군대에서 오랫동안 경계 근무를 하다보니 시력이 다시 좋아졌다. 시력이 다시 좋아질 수 있다고 얘기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직접 경험했다. 먼 곳에 있는 녹색을 지속적으로 바라보고, 컴퓨터나 책을 멀리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 눈이 좋아질 수 있다. 최근 내 시력은 1.0과 1.2 사이쯤 어딘가에 있다.
눈이 좋던 어린 시절부터 안경 쓴 사람을 무척 부러워하곤 했는데(어릴 땐 별게 다 부러운 법이다) 요즘엔 나도 안경을 쓰고 있다. 시력은 좋지만 난시 때문에 눈이 빨리 피곤해져서 안경을 써야 눈의 피로를 줄일 수 있다. 안경 쓴 사람을 부러워하던 어린이답게 안경점에 가서 시력 검사하는 걸 무척 좋아한다. “자, 턱을 고정시키고 화면을 보세요. (네, 했어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아니 실제 그림인 집이 보이시죠? (네,
[김중혁의 바디무비] 왼쪽으로 달리는 게 안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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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의 정중앙을 차지하는 꽃꽂이처럼, 영화에도 종종 센터피스 구실을 하는 장면이 있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의 오스카(마이클 B. 조던)는 집행유예 중인 청년이다. 너무 늦기 전에 좋은 아빠와 파트너, 아들이 되고 싶어 안달하지만, 남아 있는 나쁜 습관과 사회의 선입견 탓에 진전은 더디다. 영화가 담은 그의 힘든 하루 중 오스카는 길 잃은 온순한 개가 뺑소니 사고를 당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가해자는 자취를 감추고 결백한 피만 아스팔트를 적신다. 죽은 개에게 감정을 이입한 오스카가 가족사진을 응시하는 동안, 지금까지 중립적 기록자의 자세를 유지하던 영화는 잠시 숨을 죽이고 속도를 늦춤으로써 무언의 해석을 개입시킨다. 감독이 보는 인물의 DNA가 축약된 시퀀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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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집을 떠나 독립한 10여년 전 겨울, 나는 좁은 원룸에 입주할 책을 엄선하느라 책장 앞에서 고심을 거듭했다. ‘안데르센 동화전집’ 10권 중에서는 <주석병정>이 수록된 7권과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눈, 눈물,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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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태어나서 문화혁명을 겪고 프랑스로 건너가 작가 생활을 하는 다이 시지에의 이 자전적 소설은 우리를 실제로 있었으면서도 너무나 비현실적인 세계로 데려간다. 모두가 알 듯이 1968년 말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이자 혁명의 기수인 마오쩌둥 주석은 나라를 일대 변혁하는 운동을 벌인다. 모든 대학이 휴교하고, 중/고등학교를 마친 ‘젊은 지식인들’은 농민들로부터 재교육을 받기 위해서 농촌으로 추방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두 10대 소년이 바로 이런 상황에 놓였다. 의사 아버지를 가졌다는 이유로 ‘인민의 적’으로 분류된 이들이 재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확률은 ‘3퍼밀’(1000분의 3). 말하자면 끝내주게 운이 좋지 않은 이상 남폿불을 밝히는 산골에서 인생을 마칠 것이 거의 확실한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끝까지 부르주아적인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몰래 숨겨온 바이올린을 처음 본 촌장이 도시의 장난감이라며 불태워버리려고 하자, 모차르트의 소나타가 ‘
[금태섭의 서재에서 잠들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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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역사를 다룬 문헌사학의 고전.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가 아랍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지고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면서 등장한 인쇄된 책은 당시 서구 사회에서 완전히 새로운 발명품이었다. 수많은 필경사들의 손을 거쳐 탄생한 필사본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던 그 이전 시기에 책은 권력자들과 귀족들, 일부 엘리트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귀족 중심이던 유럽 사회에 책이 사상의 전파 역할을 해온 과정을 살핀다.
[도서] 완전히 새로운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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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는 <노예 12년>이 여러 번역본으로 출간되고 있다. 납치, 인신매매를 통해 12년간 노예로 살며 미국 남부의 농장을 전전했던 솔로몬 노섭이 자신의 이야기를 적었다. 1852년 출간된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더불어 노예제를 공론화하는 데 기여한 작품이다. 영화가 이미지로 말하는 많은 것들을, 경험한 이를 통해 직접 들을 수 있는 진귀한 기회다. 문장이나 구성을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담담하고 묵직한 경험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도서] 영화의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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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시민’(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말이 공감보다는 비아냥에 사용되고 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거의 모두 정치색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왜 정치는 우리를 배신하는가>는 그런 한국 사회에 대한 일종의 비평서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도 2부 ‘숨은 정치’ 부분이 흥미롭다. 종교와 자본의 정치세력화에 집중하는 이 대목들은 이념논쟁 이후의 한국 사회를 생각하게 돕는다.
[도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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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개봉을 앞두고 열 가지도 넘는 소설 번역본이 시장에 쏟아져나왔다. 판본별 비교를 해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고 8종의 책과 원서를 놓고 크게 세 챕터를 비교했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문체 자체의 독특함은 둘째치고라도,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다양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영어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수없이 쓰지만 한국어로 그대로 옮기면 어쩐지 지겨워 보이는 “(s)he said”의 처리 문제, 관계대명사로 끝없이 이어지는 구문을 어느 지점에서 분리하는가의 문제,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에는 이제 쓰이지 않는 표현 “old sport”를 한국어로 어떻게 옮기느냐가 있었고, 영어로 쓰인 모든 소설들을 옮길 때 마주하는 존댓말과 반말의 딜레마도 있다. 번역에 있어 완벽은 없고 문제는 끊이지 않는 법이다.
프린스턴대학에서 프랑스어와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데이비드 벨로스의 <내 귀에 바벨 피시>는
[도서] 번역과 반역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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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먼츠 맨’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나치에 의해 도난당한 각국의 예술품과 문화재를 되찾아 본국에 돌려주기 위해 결성된 미군의 프로그램을 일컫는다. 조지 클루니가 제작, 감독, 각본, 주연까지 1인4역을 맡은 영화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은 전쟁의 포화 속으로 예술품을 지키기 위해 뛰어들었던 7명의 ‘모뉴먼츠 맨’에 대한 이야기다. 전성기가 지난 박물관 관장, 건축가, 큐레이터, 예술사학자 등으로 구성된 이들의 사명은, 전장에서는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들의 뜬구름 잡기일 뿐이다. “예술품을 지키는 일이 사람의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모뉴먼츠 맨’을 시작할 때 불거졌던 질문은 어디서나 이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질문에 대한 답은 예상이 가능하지만, 그 답을 말하는 것은 영화에서도 쉽지 않다.
지난 1월16일 베벌리힐스의 한 호텔에서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 기자회견이 열렸다. 조지 클루니를 비롯해 케이트 블란쳇,
[현지보고] 위대한 유산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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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일본의 한 대형출판사에서 ‘대도해’라는 이름의 국어사전을 편찬하기로 한다. 기인적이면서도 은둔자의 기질을 가진 영업부서 직원 마지메 미쓰야(마쓰다 류헤이)가 사전편찬부에 스카우트되는데, 현재 사전편찬부에는 ‘은퇴를 앞둔 숙련된 편집자와 나이 지긋한 언어학자, 외향적이지만 기획에 능숙한 마사시(오다기리 조)’ 등 다양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그중 한명의 아내가 병에 걸려 사무실을 떠나면서 미쓰야가 이곳으로 발령받은 것이다. 하지만 사전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방대하고 까다롭다. 대도해는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단어의 바다를 이어서, 사람들간의 격차를 없애고자 기획된 사전이다. 그러니 그 망망대해를 잇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힘껏 고군분투하던 미쓰야는 어느 날 하숙집 주인의 손녀 카구야(미야자키 아오이)를 발견하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마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듯 힘겨워하는 그를 향해 상사인 마츠모토(가토 고)가 ‘사랑’이란 단어의 정의를 직접 채워넣으라고 주문한다.
영
단어의 바다를 잇는 일 <행복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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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머물면서 수명이 다한 인공위성 ‘우리별 일호’가 멀리 지구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구에 도착한 위성은 마법사 멀린(이돈용)의 도움으로 소녀로 변신하고, ‘일호’ (정유미)란 이름을 갖게 된다. 인간의 모습이지만 위성의 성능은 여전히 작동한다. 일호는 하늘을 날아오르기도 하고, 몸의 일부를 발사시킬 때도 있다. 한편 가수지망생 경천(유아인)은 남몰래 짝사랑하던 친구에게 애인이 생기자 좌절한다. 결국 마음이 공허해진 경천은 얼룩소의 모습으로 변하고, 도시의 불안이 만들어낸 괴물 ‘소각자’에 쫓기게 된다. 그런 경천을 일호가 도우면서 이야기가 발전한다. 마법에 걸린 사람들을 태워 없애는 악의 무리에 대항해 그들은 힘을 모은다.
한국 애니메이션을 논할 때 이제 장형윤 감독의 이름을 빠뜨려선 안 될 것 같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5년간의 긴 제작기간에 답례하듯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유쾌하고 재기발랄한 에피소드가 얽힌, 군더더
유쾌하고 재기발랄한 한국 애니메이션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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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소설가인 윌리엄(그렉 키니어)은 3년 전 부인인 에리카(제니퍼 코넬리)와 헤어졌다. 추수감사절날 고등학생인 아들 러스티(냇 울프)와 음식을 만들지만 쉽지가 않다. 대학생인 딸 사만다(릴리 콜린스)가 찾아오고 그녀는 자신의 소설이 저명한 출판사에서 출판하게 됐다는 소식을 알린다. 아이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도 윌리엄은 에리카의 자리를 만들어놓는다. 윌리엄은 이혼 뒤에도 재혼한 에리카의 집을 찾아가서 창문 너머로 그녀를 몰래 훔쳐보곤 한다. 러스티는 동급생인 케이트를 좋아하지만 남자친구가 있는 그녀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어머니의 외도와 부모의 이혼에 상처를 입은 사만다는 일년 넘게 에리카와 통화조차 하지 않는다.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만다는 상대를 바꿔가며 자유로운 섹스만 즐긴다. 그러던 중 같이 수업을 듣는 루(로건 레먼)가 끈질기게 그녀에게 접근한다.
영화는 추수감사절에서 다음해 추수감사절까지 일년 동안 한 가정을 중심으로 그들이 겪는 변화와 다양한 사랑의 양상을
사랑의 다양한 모습 <스턱 인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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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의 소년, 소녀가 그려내는 순정의 세계를 담은 애니메이션. 첫사랑, 일기장, 숨바꼭질, 머리핀, 불꽃놀이,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면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진땅, 멘마, 유키아츠, 아나루, 츠루코, 폿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6명의 아이들은 ‘초평화 버스터즈’라는 그룹을 만들고 비밀기지도 마련한다. 마을과 연결된 다리 건너편 숲에 있는 작은 창고가 이들의 아지트다. 아이들은 거기서 숨바꼭질도 하고 일기도 쓰고 불꽃놀이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우정을 약속한다.
그러나 어느 여름 갑자기 멘마가 그들의 곁을 떠난다. 아이들은 멘마를 잃은 상실감과 각자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는 죄책감을 안고 5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룹의 리더인 진땅은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고 방황하고, 유키아츠는 여장을 하고 숲을 달리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 가장 유쾌했던 폿포는 멘마가 사라진 곳에 핀 꽃을 주머니에 넣어 목에 매달고 다니는 등 아
소년, 소녀가 그려내는 순정의 세계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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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는 AD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18시간 만에 증발된 도시다. 1592년 발견된 폼페이의 인간 화석은 후대 사람들의 상상력과 감정을 자극했고, 1908년 이탈리아 대서사극을 필두로 이미 대여섯 차례 영화화됐다. 마일로(키트 해링턴)는 로마의 켈트족 학살사건의 생존자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그는 죽은 것으로 위장해 살아남지만 부모는 그의 눈앞에서 로마군 손에 죽는다. 이후 강한 신체와 정신력으로 무장한 전사로 성장한 그는 검투사로 차출돼 폼페이로 팔려간다. 폼페이로 향하는 길에서 마일로는 폼페이 영주의 딸 카시아(에밀리 브라우닝)를 만나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폼페이에 도착한 마일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가족을 죽인 코르부스(키퍼 서덜런드)와 맞닥뜨린다. 그는 로마의 의원이며, 카시아와 정혼을 맺으려 한다. 마일로는 이제 과거의 복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카시아 공주를 지키기 위해 코르부스와 싸워야 한다.
이 영화는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과 닮은 점이
사랑은 함께 죽는 것 <폼페이: 최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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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드리 헤밍웨이)은 애완견 스타렛과 함께 친구 멜리사(스텔라 매브)와 마이키(제임스 랜슨)의 집에 얼마간 머물게 된다. 무료하던 그녀는 방을 꾸밀 소품을 구하기 위해 집 근처 벼룩시장에 들른다. 한 가게에서 그녀는 꽃병으로 쓸 만한 물건을 발견하는데 알고보니 그것은 오래된 보온병이었다. 제인이 보온병을 꽃병이라고 부르며 사가려 하자 꼬장꼬장한 노년의 주인 세이디(베세드카 존슨)는 환불은 안 된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어느 날 제인은 꽃병으로 쓸 보온병을 씻던 중 그 속에 몇장씩 뭉쳐져 있던 1만달러가량의 지폐를 발견한다.
영화는 보온병에 든 지폐에서 시작되는 젊은 여성과 나이 든 여성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돈은 윤리나 양심의 문제보다는 ‘쓰임’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제인은 세이디의 가게에서 처음 보온병을 본 뒤 그것을 유골함으로 오인하는데 그것은 그곳에 있던 돈의 상징적인 죽음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제인은 보온병을 꽃병으로 사용하면서 다른 쓰임을 발견했듯 ‘돈을
젊은 여성과 나이 든 여성의 우정 <스타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