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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퀴어 시네마(new queer cinema)가 황금기에 이를 즈음이었다. 루비 리치라는 영화평론가는 새롭게 등장한 성소수자 영화들의 흐름을 뉴 퀴어 시네마라고 명명하였다. 데릭 저먼, 그렉 아라키, 토드 헤인즈, 톰 칼린, 그리고 아이작 줄리언 같은 감독들이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 감독들은 스크린 위에 성소수자들을 긍정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연쇄살인범 게이를 기꺼이 찬양하였고, 성소수자 사회 내부의 갈등과 차이에 대하여 대담하게 말을 건네며, 문화의 역사에서 억압되었던 이단적 취미를 자신이 기꺼이 상속할 전통으로 내세웠다. 모두들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뉴 퀴어 시네마를 에워싼 소문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로빈 우드를 만났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가 번역된 행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역시 지금은 반쯤 뇌리에 잊힌 영국의 리처드 다이어와 함께 영화의 역사를 성의
읽기의 수고를 생각하며, 로빈 우드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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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속도감의 문체로 씌어진 <헐리웃 문화혁명: 어떻게 섹스-마약-로큰롤 세대가 헐리웃을 구했나>는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뉴아메리칸 시네마를 유행시킨 당시 새로운 영화 세대가 어떻게 할리우드의 낡은 문법을 혁신시킨 뒤 좌절했는지에 관한 방대한 기록이다. 미국 영화 월간지 <프리미어> 기자 출신인 피터 비스킨드는 유머와 빈정거리는 어투와 진지한 비평적 논평을 결합해 예술적 야심이 탐욕으로 바뀌는 과정을 거리낌 없이 기술하고 있다.
데니스 호퍼가 마약에 취해 만든 <이지 라이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할리우드는 젊은 히피 감성을 지닌 감독들이 새로운 돈줄이 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좋은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월요일 아침에 흥행 성적을 가지고 서로 굵기를 다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스튜디오 수뇌부는 “오로지 누가 삼삼한 영화를 가지고 있는가, 누가 사람들의 화제에 오른 영화를 가지고 있는가”만을 문제 삼았다. 영화평론가 폴린 카엘이 마틴 스코시즈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흥망성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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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절판이라고? 영화애호가들이라면 누구나 거쳤음직한 ‘바이블’과도 같은 책들이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 로빈 우드의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 피터 비스킨드의 <헐리웃 문화혁명: 어떻게 섹스-마약-로큰롤 세대가 헐리웃을 구했나>, 토머스 샤츠의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등 단순한 흥미를 넘어 이른바 ‘영화탐독’에 이르게 해주는 길잡이 같은 책들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대부분의 책들이 꽤 기나긴 ‘절판’ 상태라는 것이 충격이었고, 더 나아가 ‘영화책 시장’이라는 얕은 지반에 한숨이 나왔다. 여기 힘들게 고른 10권의 재출간 촉구 서적이 있다. 그리고 필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대체할 만한 또 다른 책도 추천했다. 더불어 세명의 ‘영화책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 긴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로저 코먼의 자부심 넘치는 책 제목처럼 ‘백권의 영화책을 만들고 한푼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아마 당신의 머릿속에는
SAVING CINEMA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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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은 평판이 좋다. 올해 오스카 작품상을 받았으며, 김영진과 김혜리도 지난호(945호) <씨네21>에 호의적인 글을 썼다. 나는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노예 12년>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이 있지만 관습적인 화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주류영화라고 생각한다. 수작 혹은 범작. 서로 견해를 경청하는 평자들 사이에서도 이 정도의 견해 차이가 생기는 일은 드물지 않다.
다만 이 영화는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 나는 여기서 <노예 12년>이라는 영화의 내용은 거의 거론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우리의 자리를 생각해보고 싶다. 그 자리는 우리가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한편의 영화 앞에서 종종 잊는 종류의 상식에 가깝다. 다소 원론적이고 뻔한
[신 전영객잔] 진실이 고통 이미지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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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이런 레퍼런스 무비까지 만들지 않았겠나.” 수월하게 투자받은 건 아닐 것 같다는 질문에 <몬스터>의 황인호 감독이 선뜻 보여준 건 자신의 휴대폰에 담긴 동영상 편집 클립이었다. <웰컴 투 동막골> <아저씨> <괴물> <황해> <밀양> 등의 장면이 편집되어 있고 거기에 짧은 설명들이 붙어 있는, 자신이 <몬스터>에서 그리려는 캐릭터나 장면 컨셉을 투자자들이 잘 알고 있는 영화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동시에 구미가 당길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프레젠테이션용 동영상 자료다. 이것이 영화 <몬스터>의 태생을 말해주는 적절한 일화일 거다. 별도의 변칙적인 설득 과정이 반드시 요구될 만큼 <몬스터>의 지향이 별스러웠다는 사실. 우리는 그 별스러움에 이끌려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몬스터>를 만든 몬스터는 누구인가 만나보고 싶어진 것이다.
-원래는 시나리오
[황인호] 내 시나리오는 내가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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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번이 벌써 세 번째면 인연도 보통 인연은 아니다. 뮤지컬 배우 차지연과 뮤지컬 <서편제>의 만남을 두고 하는 말이다. 차지연은 2010년 <서편제>가 처음 뮤지컬로 만들어졌을 때부터 눈먼 소리꾼 송화를 연기했다. 세 번째 송화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각별하고 남달라 보인다. 전과 달리 그녀는 과감한 캐릭터 해석을 시도했고 그 결과 이번 송화는 확실히 강해졌다고 한다. <아이다>의 아이다, <카르멘>의 카르멘처럼 기운 세고 거친 운명의 여성들을 꾸준히 맡아왔던 그녀인지라 송화의 이런 변화가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데뷔 8년차 배우에게서 좀처럼 나올 수 없는 공력이자 배우 차지연만의 에너지다.
-어떻게 <서편제>를 세번씩이나 하게 된 건가.
=힘들지 않은 작품이 어디 있겠냐마는 <서편제>는 정말이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작품이다. 어린 송화부터 60, 70대 소리꾼 송화까지 한 사
[trans x cross] 에너지는 아껴 써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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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 선택된 줄 알았어요.” 가족에게마저 혹독한 심판의 잣대를 들이미는 아버지에게 실망한 아들이 쏘아붙이자 돌아오는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분이 나를 선택한 것은 내가 그 일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야.”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노아>에서, 창조주의 대리자인 노아는 가혹한 수행자다. 아름답고 선한 존재들만 살아남은 새로운 낙원을 열기 위해, 그는 무시무시한 집요함으로 타락한 세계의 완전한 종말을 이끈다. 하지만 그의 추진력을 막아서는 건 언제나 ‘인간적인’ 마음이다. 대홍수에 휩쓸린 생명체들이 울부짖고 애원하며 죽어가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방주 속에 앉아, 노아가 경험하는 건 ‘생지옥’이다. 그의 완고한 모습에 사랑하는 아내마저 저주를 퍼붓는다. “당신이 좋아하는 모두가 당신을 증오할 거예요. 그게 ‘정의’예요.” 신인류 최초의 슈퍼히어로가 감내해야 할 정신적 고통은 그가 지은 방주만큼이나 거대하고 깊다.
노아를 연기하는 러셀 크로는 언젠가 “<
[러셀 크로] 불완전한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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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스타들은 자기를 알아주는 감독을 한번쯤은 만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데, 그럴 때 배우와 감독은 각각 자신의 경력에서 절정에 이른다. 존 포드에게 존 웨인이 없었다면, 또 반대로 존 웨인이 존 포드를 못 만났다면, 두 영화인의 위상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명감독과 스타의 만남은 대개 한번이고, 이것도 행운인 셈이다. 평생 이런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는 영화인들이 더 많다. 그런데 그런 만남을 훈장처럼 여러 개 달고 있는 배우도 있다. 그런 화려한 경력의 대표적인 배우가 잔 모로다.
루이 말, 프랑수아 트뤼포의 연인
잔 모로는 배우로선 뒤늦게 서른이 다 돼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모로를 스크린의 스타로 발굴한 감독은 루이 말이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를 통해서다. 프랑스에서 누벨바그가 막 시작될 때인데, 루이 말은 누아르 스타일의 범죄물에서 팜므파탈이기보다는 자포자기의 비관주의자로 모로를 묘사했다. 사랑을 위해 범죄까지
[한창호의 오! 마돈나] 누벨바그 세대 지성과 퇴폐의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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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딩턴> Paddington
감독 폴 킹 / 출연 콜린 퍼스, 니콜 키드먼, 샐리 호킨스, 휴 보네빌
고향 페루로 가는 길을 잃고 영국에 정착하게 된 ‘패딩턴 베어’는 런던의 패딩턴역을 상징하는 마스코트다. 영화는 베스트셀러 동화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며, 콜린 퍼스가 패딩턴 베어의 모션 캡처와 목소리 연기를, 니콜 키드먼이 악역 박제사를 연기한다. 영국에서 11월 개봉예정.
[WHAT'S UP] <패딩턴> Padding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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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즈 다이어리] <300: 제국의 부활> 빈 깡통
[헌즈 다이어리] <300: 제국의 부활> 빈 깡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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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며 손에 땀을 쥐던 기억이 있다. ‘파란해골 13호’와 일합을 겨루던 ‘태권동자 마루치’의 활약처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도 재미가 있었지만, 이병주의 소설 <마술사>를 각색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허공을 향해 밧줄을 세우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영상 없이 목소리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만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의 힘.
이런 이야기의 힘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가가 바로 찰스 디킨스다. 빚을 지고 채무자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 아버지 때문에 열두살 때 구두약 공장에서 10시간씩 일을 했던 디킨스는 자신이 살던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올리버 트위스트>나 <크리스마스 캐럴> 혹은 <위대한 유산>이 시대를 배경으로 개인들의 사연에 치중한 소설이라면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 자체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프
[금태섭의 서재에서 잠들다] 프랑스 혁명을 이야기한 디킨스의 시대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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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제목이 주는 인상만 비슷한 것이 아니고 문제의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철학책을 혼자 힘으로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투명사회>가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고, 대중인문서가 장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단속사회>가 늘어진다고 느낄 수 있다. 사생활이 종말을 고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일에 대한 두 학자의 통찰과 분석을 찬찬히 음미해볼만하다.
[도서] 사생활이 종말을 고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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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오솔길. 문장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다 보면, 걸려 넘어지는 문장이 있어. 그 문장 앞에서 넌 작아지지.” 책 속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압도당하는 느낌을, <책섬>에서는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 문장 속으로 기어들어갈 만큼 사람이 작아지는 그림. <책섬>은 그림-책이다. 김한민 작가가 ‘책’이라는 동반자에 바치는 헌사이다. 그림과 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작가 특유의 자유로움이 인상적이다.
[도서] ‘책’이라는 동반자에 바치는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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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최승호 시인의 <아메바>로 시작되어 얼마 전 49번째로 박태일의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까지 선보인 ‘문학동네 시인선’의 50호 기념 자선 시집 <영원한 귓속말>이 출간됐다. 49명의 시인들이 각자 자신의 시집에서 한편의 시를 고르고 짧은 산문을 더해 한권이 완성되었으니 시집이면서 시집 그 이상. 산문이라 해도 바로 옆자리의 시와 각운이 맞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되는 글모음이기도 하다.
[도서] 시집 그 이상의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