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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코미디가 세계의 관객을 기쁘게 한 데는 세명의 발군의 배우, 곧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 버스터 키튼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전부 영화 초창기에 한롤(roll)짜리 짧은 영화에 출연하며 경력을 쌓은 뒤, 1920년대 장편영화를 통해 스타가 됐다. 거의 동시대에 활약했기 때문에 서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개성을 계발하는 노력도 그런 경쟁 과정에서 나왔다.
이들 세 배우의 공통점은 슬랩스틱인데, 거의 곡예사 수준의 기량들을 갖고 있다. 채플린의 코믹한 몸동작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로이드와 키튼은 스턴트맨들도 하기 힘든 고난도의 동작들을 능숙하게 해내곤 했다. 로이드는 <마침내 안전!>(1923)에서 보듯 손에 땀이 바짝바짝 나는 서스펜스 곡예를 잘했다. 너무 오래 고층건물의 시계에 매달려 있어서, 심장 약한 관객이라면 중간에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다. 반면에 키튼은 더욱 역동적이다. 넘어지고 자빠지는데, 그것이 서커스의 곡예를 넘어서는 수
개성을 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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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치는 말한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관에 들어가 불빛이 꺼지는 순간은 마술적인 느낌이 든다. 순간 사방이 조용해지고 커튼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아마 커튼은 붉은색이리라. 그러면 당신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린치의 영화는 꿈이다. 흔히 몽환적, 환상적이라고 표현되는 모호한 분위가 그렇고 최면을 걸듯 당신을 이끌고 들어가는 과정이 그렇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딱 들어맞는다는 점에서도 그의 영화는 꿈의 표상이다. 가령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두고 개연성과 서사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어도, 연결되지 않는 듯 보여도 이 영화 속 각 장면들은 살아 움직여 관객을 납득시킨다. 당신의 꿈이 그런 것처럼 린치의 영화는 우리를 설득시키는 대신 헤어나올 수 없도록 만든다.
린치는 영화와 꿈의 유사성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커튼을 활용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주인공 리타는 갑자기 갈 곳이
꿈으로 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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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것처럼>에서 세번 놀랐던 순간이 있다. 그 첫째는 영화의 초반부 장면에서 역 앞에서 손녀를 기다리는(듯한) 할머니 주변을 회전하는 택시의 운동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고다르는 남자와 여자와 자동차가 있으면 영화가 성립한다, 고 말했는데 마찬가지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젊은 여자와 할아버지(할머니)와 자동차만으로 영화를 성립시켰다. 두 번째 장면은 할아버지 타카시가 차에서 잠깐 잠들었다 깨어나는 순간이다. 대부분의 관객이 그러하듯 나도 잠깐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세 번째는 영화의 마지막, 갑작스레 날아온 돌에 타카시 집의 유리창이 깨지는 순간이다. 만약 창문이 그의 영화에서 스크린의 비유라면 그것이 깨지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이 세번의 경이로운 순간이 키아로스타미 영화에서 주요한 사물인 자동차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키아로스타미 영화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자동차는 무엇보다 영화적 운동의 원초적인 등가물이다. 자동차는 중단 없이
움직이는 감정의 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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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나열하면 지루해질 것 같다. 몇편만 꼽아보자. <바틀 로켓>의 귀여운 삼인조 멍청이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의 지소와 그의 심심한 부하들, <로얄 테넌바움>의 정서 불안증 아버지(벤 스틸러)와 그의 어린 두 아들, <문라이즈 킹덤>의 씩씩한 주인공 소년과 그의 카키 스카우트 단원 동료들, 공통점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실은 이렇게 물어야 맞다. 웨스 앤더슨의 모든 (거의가 아니라 모든!) 장편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물은 무엇인가. 삼인조 멍청이들은 노란 옷을, 지소와 그의 부하들은 빨간 모자와 파란 옷을, 아버지와 두 아들은 빨간색 바탕에 흰 줄무늬가 있는 트레이닝복을, 소년과 카키 스카우트 단원 친구들은 갈색의 단원복을 입는다. 그러니까 ‘유니폼’, ‘유니폼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앤더슨의 영화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사물이 유니폼만은 아니지만 유니폼만큼 절대적인 것은 없다.
헐렁한 듯 끈끈한 유대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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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국내의 한 평론가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심사위원들과 담소를 나눌 자리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한국 감독들에 관한 이야기도 오갔다고 합니다. 그러다 홍상수 감독이 화제에 올랐고 누군가가 홍상수 감독을 아느냐고 물어왔답니다. 그와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밝혔더니 질문자는 몹시도 궁금하다는 뉘앙스로 불쑥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럼 당신은 홍상수 감독과 소주라는 걸 마셔본 적이 있나요?” 그 일화를 전해주던 평론가는, 다른 것도 아닌 소주를 딱 집어 물은 것, 그게 참 재미있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질문의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해외의 평자였을 그 질문자는, 당신은홍상수 감독과 얼마나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요, 하고 더 캐묻는 대신, 당신은 홍상수 감독과 소주라는 걸 마셔보았나요, 하고 특정한 사물을 매개로 한 호기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말하자면, 뻔하게 교분과 친분의 깊이를 묻는 대신 특정 사물을 공유해본 경험에 대해
그 물건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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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호기심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참에 마음먹고 한번 시도해봤다. ‘영화감독의 사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 한번 모아봤다. 모아놓고 보니 특정한 영화감독과 특정한 사물들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하고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웨스 앤더슨의 유니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자동차, 데이비드 린치의 커튼, 홍상수의 소주, J. J. 에이브럼스의 카메라, 리들리 스콧의 선풍기, 허우샤오시엔의 밥상, 무성영화 희극배우 3인의 사물들에 관한 새롭고 풍성한 이야기. 한국영화의 뛰어난 미술감독 3인이 그들만의 감식안으로 꼽은 영화 속 그 사물들 그리고 박찬욱, 봉준호, 이명세, 이준익 감독의 비장의 사물 목록도 놓치지 말자.
영화의 사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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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폭력이라는 문제는 사실 생소한 화두였다. … 나에게는 그 폭력을 비주얼로 표현할 수 있는 영화적 언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개의 이야기 속 폭력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다루면 좋을지 그 마법의 언어를 찾지 못해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전 무협영화 한편, 즉 <협녀>가 생각났다. … 호금전은 영화에서 사회적, 경제적 상황 속의 억압과 불평등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에 반응하는지를 폭력이라는 언어를 통해 보여주었다.”(<씨네21> 906호)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천주정>이 공개된 뒤, 지아장커가 한 말이다. 급변하는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폭력 사건들, 그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 네개의 이야기, 그리고 무협 장르. 영화를 보기 전, 감독의 인터뷰를 읽는 편은 아니지만 지아장커와 무협의 만남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인터뷰들을 먼저 읽고 말았다. <천주정>과 관련해 <씨네21>과
[신 전영객잔] 패턴화된 폭력이 지워버린 현실의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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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블릭 오브 시네마’(Republic of Cinema). 충무로에 있는 이준익 감독의 사무실 문에 크게 붙어 있는 문구다. 그 아래에는 타이거픽쳐스, 영화사 아침, 씨네월드, 세개의 제작사 로고가 나란히 있다. 제작사 3개가 모여 영화 공화국을 꿈꾼다는 뜻일까. 이준익 감독은 “영화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붙인 지 오래됐다. 거창한 건 아니고, 따로 또 같이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그가 한국영화감독조합(이하 감독조합)의 조합장을 맡은 지 1년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지난 1년 동안 그는 복귀작 <소원>을 만들었고, 동료 감독들과 함께 감독 표준계약서를 내놓았고, 한국영화산업전략센터(소장 최현용)와 함께 한국 영화산업 불공정 행위 모니터링 작업에 참여했다. 현재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한국영화 공화국’은 어떤 모습일까.
-감독조합장을 맡은 지 1년이 지났다.
=조합장으로서 성실하지 못했다. 지난해 <소원>에 ‘몰
[이준익] 감독 표준계약서가 영화산업 상생의 길 이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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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박주원은 현재 한국 재즈신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 중 하나다. 스페인의 집시음악인 플라멩코에 음악적 기반을 둔 그의 기타 연주는 이국의 멜로디와 리듬을 유려하게 실어 나른다. 여섯줄의 기타 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현란한 속주 기법도 인상적이지만, 그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뮤지션의 목소리와 연주를 낯설게 만드는 프로듀싱 능력에 있다. 그런 그가 4월12일 오후 7시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에서 기타콘서트 <캡틴>을 연다. 최백호와 어반 자카파의 조현아,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가 게스트로 참여하는 이번 공연과, 콘서트의 중요한 테마가 될 3집 앨범 ≪캡틴 No.7≫에 대해 박주원에게 물었다.
-3집 ≪캡틴 No.7≫을 발매한 뒤, 지난 12월24일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열었다. 이번 공연은 지난 겨울 콘서트와 어떻게 다른가.
=12월24일은 크리스마스이브라서 아무래도 연말 분위기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 새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충실히 들
[trans x cross] 캡틴, 오 마이 캡틴 박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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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영화전문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10년마다 발표하는 베스트영화 리스트의 부동의 1위는 <시민 케인>(1941)이었다. 1962년부터 내리 5년 연속 1위다. 말하자면 <시민 케인>은 50년 동안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세계의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이 리스트에 처음 변동이 일어난 게 최근에 발표된 2012년의 결과다. <시민 케인>을 50년의 왕좌에서 끌어내린 작품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이다. 이 결과에 많은 이유들이 제시됐다. 그 가운데 한 가지만 우선 기억하고 싶은 것은 히치콕이 말한 대로 시체애호증(necrophilia)이라는 무의식의 강박이다. 그 강박의 경이로운 대상으로, 유령 혹은 비너스처럼 스크린에 출몰한 배우가 바로 킴 노박이다. 시체처럼 죽은 듯 무표정하고, 동시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야수처럼 도발적인 여성이라는 이중성으로, 누구도 닮을 수 없는 개성을 남긴 것이다
[한창호의 오! 마돈나] 유령처럼 비너스처럼, 신비한 이중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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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와 정은채. 멀찍이 떨어진 두 여인의 옆얼굴이 대구를 이룬다. 잔다르크가 주인공인 흑백영화 앞에서 정은채가 주인공인 또 다른 흑백영화가 펼쳐지는 것 같은 인상마저 든다. 전혀 다른 시대의 여인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만나 내밀한 감정이라도 주고받는 것일까. 묘한 긴장감이 어린다.
“잔다르크의 감정이 느껴져 고통스러웠다.” <잔다르크의 수난>을 처음 보고 느낀 감상을 ‘아픔’이라고 말하던 그녀. 현장에서 다시 만난 잔다르크가 이번에는 그녀에게 어떤 잔상을 남길까. 카메라를 등진 정은채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잔다르크의 애상에 젖은 얼굴을 통해 짐작해볼 뿐이다.
“나중에 눈물이 마르면 그때 음악의 힘을 빌릴게요.” 무성영화라는 컨셉에 맞춰 현장에도 음악이 따로 없는 상태. 하지만 정은채는 곧바로 감정을 추어올려 눈물을 떨군다. ‘컷’ 소리가 난 뒤에도 그녀의 눈물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춘정>으로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미랑 감독.
[씨네스코프] 여인의 얼굴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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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정아는 부지런히 살다가 노동운동에 눈을 뜨는 싱글맘 선희를 연기한다. <간첩> 이후 드라마에 전념하다가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다. 강도 높은 일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장에서 분위기를 리드하는 그녀는 아들로 출연하는 그룹 엑소의 멤버이자 신인배우인 디오에 대한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카트>의 후반부는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을 대변하는 강도 높은 장면들로 꾸려진다. 작은 힘이지만 아줌마들, 여성노동자들이 뭉쳤다. 노동자들의 살길은 연대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가슴 절절한 장면. 피켓 하나하나가 현실을 방불케 하는 <카트>의 중요 장면이다.
<카트>의 촬영은 김우형 촬영감독이 맡는다. 부지영 감독과는 실제 부부 사이. 24시간 내내 <카트>를 고민할 최적의 파트너다.
마트의 유니폼, 노동조합의 단체복으로 하나가 된 배우들. 김영애를 주축으로 문정희, 신인 천우희(왼쪽부터) 등 여배우들의 앙상블이 카트를 끌고 나가는 동력
[씨네스코프] 우리는 카트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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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 시티2> Sin City: A Dame to Kill for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 프랭크 밀러 / 출연 브루스 윌리스, 제시카 알바, 조셉 고든 레빗, 에바 그린
<씬 시티>가 9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아직 자세한 줄거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밀러의 원작 그래픽 노블 <씬 시티 2: 목숨을 걸 만한 여자>가 메인 플롯이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씬 시티> 특유의 영상미와 액션이 그대로 이어질 전망이다. 두 감독은 이미 세 번째 시리즈를 준비 중이다. 북미에서 8월 개봉예정.
[WHAT'S UP] <씬 시티2> Sin City: A Dame to Kill 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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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즈 다이어리]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어떤이의 예술세계
[헌즈 다이어리]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어떤이의 예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