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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대로 임권택 감독은 김훈의 소설 <화장>을 원작으로 동명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화장>은 화장품 회사의 중역 오 상무(안성기)가 투병 중인 아내(김호정)에게 헌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사의 젊은 여직원 추은주(김규리)에게 몸과 마음이 끌려 갈등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힘든 거요, 만족을 못하는 거요.” 임권택 감독은 인터뷰 도중 종종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이 곧 그가 이번에도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는 바로 그 뜻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작품이 완성된 지금, <화장>을 만들어온 과정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100편 넘게 해온 감독이기 때문에 기왕에 찍어왔던 영화들 바깥으로 빠져나와 다른 것으로 보이는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에는 했다. 원작 소설의 문장이 지닌 힘, 이런 걸 영상으로 담아내보자 하는 것이었다. 찍어가면서 이런 것들을 해결해야 했다. 완고 시나리오가 완성되지 않은 채 촬영을 시작
저런 것까지 앓아가며 사는구나, 보여주자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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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거장 감독 허안화는 일부러 어려운 수수께끼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황금시대>는 여러모로 힘든 길을 택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허안화는 줄곧 홍콩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오며 홍콩 사람들의 오랜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천재 소설가 샤오홍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다. 제작비도 문제였다.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라 투자자를 찾기 어려웠다.”
이게 끝이 아니다. 샤오홍은 이미 수차례 영화화된 인물이다. 하지만 허안화는 “또다시 샤오홍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이전 작품들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길을 찾은 걸까. “작가로서의 면모보다는 샤오홍의 사랑, 특히 샤오쥔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무엇보다 <황금시대>는 재연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결합이라는 생소한 화법이 돋보인다. 마디마다 샤오홍의 지인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인터뷰를 하듯 그녀가 겪은 일에 대해
수많은 주석 위에서 균형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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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지구의 끝에서 단 두 사람만이 살고 있다는 이미지”가 가장 아름답고 기이하게 구현될 수 있는 장소로 구마키리 가즈요시 감독은 홋카이도 유빙을 떠올렸다. 서늘한 풍광을 배경 삼은 그의 신작 <내 남자>에서 배우 아사노 다다노부(오른쪽)는 품어서는 안 될 상대를 사랑하다 파국을 맞는 준고를, 니카이도 후미(왼쪽)는 준고를 파멸로 이끄는 매혹적인 소녀 하나를 연기한다. <내 남자>에서 준고는 점점 피어나는 하나와는 정반대지점에 서 있다.
아사노 다다노부가 특유의 무표정으로 체화한 준고는 점점 더러워지고, 너덜너덜해지다 끝내는 버석버석 말라버린다. 이상한 말이지만, 아마도 ‘무표정’을 가장 뛰어난 표정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있다면 그건 아사노 다다노부일 것이다. 건조한 무표정으로 그는 하나와 동행한 15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내 남자>는 2011년 부산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 지원을 받아 사쿠라바 가즈키의 원작 소설
무표정의 극점×마성의 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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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야생마가 왔다. 아시아 아르젠토가 <아리아>를 들고 부산을 찾았다. 전작 <이유 있는 반항> 이후 무려 10년 만의 장편 연출작이다.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와 배우 다리아 니콜로디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9살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연기를 해온 배우이자 데뷔작 <스칼렛 디바>(2000), <이유 있는 반항>(2004), 신작 <아리아> 등 장편영화 3편을 만든 감독이다. 5년 전 부산을 찾았던 아버지 다리오 아르젠토처럼 그 역시 부산에 홀랑 빠졌다. “아버지로부터 열광적인 관객이 많은 영화제라는 얘길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이를 먹으면서 감동을 받는 날이 많은데 부산이 그런 날인 것 같다. 좀 피곤했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아버지 다리오 아르젠토가 5년 전 부산을 찾은 적 있다. 알고 있나.
=아버지와 함께 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러지 못했다.
어린 배우 연출, 아역 시절 만난 감독들보단 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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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전작 <고백>(2011)이 차가운 영화라면, 그의 신작 <갈증>은 부글부글 끓어올라 폭발하는 작품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피가 낭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깜짝 놀랄 것까지야. 우리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을 통해 그가 만들어낸 지옥을 이미 맛본 바 있지 않나. 그 지옥에서 한 송이 꽃은 핀다는 사실도 보았다.
<갈증>은 전직 형사 후지시마(야쿠쇼 고지)가 실종된 딸 가나코(고마쓰 나나)의 행적을 좇다가 딸의 무시무시한 과거를 알게 되는 이야기다. 후카마치 아키오 작가의 소설 <끝없는 갈증>이 원작이다. 사건이 단순하게 진행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딸을 찾는 아버지의 현재와 가나코와 그의 남자친구의 3년 전 이야기가 재빠르게 교차하며 진행된다. 무엇보다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이 원작을 읽고 매료된 건 남자주인공 후지시마.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폭력밖에 없는 남자. ‘죽여버릴 거야’
지옥의 관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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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세계 최고의 영화들이 언급되는 자리마다 빠지지 않던 영화 한편이 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라는 신예감독이 연출한 장편 데뷔작인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이다. 1965년 쿠데타로 집권한 인도네시아 군부정권이 공산주의자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벌인 대학살, 그 현장에 참여했던 가해자들이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을 요란하고도 섬뜩하게 그려낸 영화다. 가해자들은 지금까지도 세력을 잡고 있으며 심지어 과거 잔인한 학살 행위를 무용담 늘어놓듯이 자랑하며 스스로를 주인공 삼아 영화제작까지 한다. <액트 오브 킬링>이 대대적 관심을 얻는 가운데 오펜하이머는 발빠르게 후속작 <침묵의 시선>을 완성했고 2014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이번에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주요 인물이다. 대학살로 형을 잃은 ‘아디’라는 인물이 그의 형 ‘람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들을 차례로 만나러 다닌다는 내용으로 <액트 오브 킬링>과는 동전
가해자가 승리한 세계에서 피해자가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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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축제 부산국제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귀한 게스트들이 많았고 <씨네21>은 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데뷔작 <액트 오브 킬링>으로 전세계 영화 평단을 깜짝 놀라게 한 뒤 두 번째 장편영화 <침묵의 시선>을 만들어 부산에 온 조슈아 오펜하이머, 다리오 아르젠토의 딸이며 <아리아>라는 자신의 연출작을 들고 온 감독이자 여배우 아시아 아르젠토, 프랑스의 동시대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명인 베르트랑 보넬로, <내일까지 5분전>의 주연이자 현재 일본의 가장 뜨거운 청춘스타 미우라 하루마, 그리고 102번째 영화 <화장>을 완성한 임권택. 그 밖에도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감독과 배우와의 소중한 대화들이 여기 가득하다. 당신에게 부산을 바친다.
영화를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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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로케이션 매니저
로케이션 매니저
영화 <슬로우 비디오>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 <히어로> <아이 러브 이태리> <아이리스2>
프로덕션 슈퍼바이저 <허삼관>(가제)
프로듀서 <가문의 영광5: 가문의 귀환>
제작팀 <시선너머-바나나 쉐이크>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하모니> <날아라 펭귄> <해운대> <색즉시공2> <바르게 살자>
김현철 제작팀장
제작실장 <족구왕>
제작팀장 <슬로우 비디오> <집으로 가는 길> <점쟁이들>
제작팀 <블라인드>
“골목길을 지나면 (감독님이 원하는) 그 카페가 보였는데… 꿈을 꾼 거더라. (웃음)” <슬로우 비디오>의 박정훈(오른쪽) 로케이션 매니저의 애잔한 일화다. 동네 길을 따라 드라마가 펼쳐지는 <슬로우
[STAFF 37.5] 길과 벌이는 전쟁 같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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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류작가가 낡고 오래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내 마음을 애달프게 만들었어요.” <황금시대>의 한 장면, 격동의 시대로부터 살아남은 어느 중국 문인은 당대의 여성 작가 샤오홍을 이렇게 추억한다. 항일전쟁과 혁명의 기운이 가득했던 1930, 40년대 중국, <생사의 장>과 <상가> 등의 걸작을 남긴 채 서른한살로 세상을 떠난 샤오홍(1911~42)은 너무 일찍 피어 안타깝게 시들어버린 꽃이었다. 그녀의 일대기를 조명한 허안화 감독의 <황금시대>에서 가난과 사랑, 오해와 스캔들로 점철된 샤오홍의 삶을 재현하는 이는 중국 배우 탕웨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어디에도 쓰지 않았기에 끝내 알 수 없었던 샤오홍의 미스터리한 속마음을 헤아리고 상상하는 건 전적으로 탕웨이의 몫이었다. 그녀가 다사다난한 여인의 초상을 그려내는 데 탁월하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황금시대>의 샤오홍을 보면서는 유독 묘한 기분이 들었다.
[탕웨이]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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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삐삐롱스타킹, 원더버드, 모조소년의 보컬이었던 고구마가 권병준이라는 본명으로 미디어퍼포먼스, 사운드아트를 선보인 지도 4년이 지났다. 1990년대 말 파격적인 무대매너와 실험적인 전자음악 사운드를 선보였던 그는 2005년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나 ‘아트-사이언스’ 석사과정을 마쳤고 그곳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소리를 만들고 악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공연 <모든 것을 가진 하나>(2010), <여섯개의 마네킹>(2011) 등을 통해 넘치는 실험정신을 선보인 그가 최근 신작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10월9일과 10일 LIG아트홀 강남에서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은 10여년간 그가 해온 작업을 하나로 꿰어놓은 공연. 첫 공연을 사흘 앞둔 날 저녁, 리허설 중인 공연장을 찾았다. 무대 정면엔 수증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수증기
[trans x cross] 통과할 수 있는 벽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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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햇> Blackhat
감독 마이클 만 / 출연 크리스 헴스워스, 바이올라 데이비스, 탕웨이, 존 오티즈
미국과 홍콩, 자카르타 일대에서 조직적인 사이버 범죄가 연이어 일어난다. 미국 정부는 수감 중이던 전직 해커 니콜라스(크리스 헴스워스)를 특수요원으로 발탁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미국과 중국 수사팀에 니콜라스가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범죄 소탕이 시작된다. 마이클 만 감독이 <텍사스 킬링 필즈> 이후 오랜만에 내놓는 신작 영화다. 내년 1월16일 북미 개봉한다.
[WHAT'S UP] <블랙햇> Black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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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뜻 밀고 당기기의 준말
속뜻 비밀당원의 준말
주석 연애를 잘하려면 밀고 당기기에 능통해야 한다고들 한다. 선수들의 가르침이다. 입질을 시작하면 살살 풀어주고 한동안 줄다리기를 벌이다가 상대가 달아나는 데 지치면 슬슬 당겨서 마침내 포획해야 한다는 거다. 이때의 밀당은 실은 낚시용어다. 팽팽한 손맛에 연애의 긴장감을 빗댄 것은 그럴듯하지만 상대를 월척으로 대하는 일이 개운한 것만은 아니다. 상대를 ‘노는 물’에서 건져내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다음 회를 뜨거나 탕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애가 칼산지옥이나 화탕지옥도 아닌데 말이다.
밀당을 밀고 당기기로 보는 것은 사랑이 전쟁의 일종이라는 관점을 수락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때 상대는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라 정복 가능한 땅으로 변한다. 상대의 마음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 진지전, 기동전, 포격전, 유격전, 백병전 따위를 벌여야 한다.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할 때가 있고, 마구 진입해 들어갈 때가 있으며, 먼 데서 쏘아댈
[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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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마담 뺑덕> 심청전의 뒷 얘기
[정훈이 만화] <마담 뺑덕> 심청전의 뒷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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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넌이 생전에 남긴 편지들을 한데 모은 최초의 책이다. 비틀스 전기를 집필했던 헌터 데이비스는 존 레넌이 친척과 친구, 팬들과 애인, 심지어 세탁소 앞으로 쓴 편지와 엽서 300여점을 추적했다. 존 레넌은 편지에 낙서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우스갯소리를 써놓기도 했다. 레넌이 남긴 편지는 1951년 그가 10살이었을 때 리버풀에 살던 이모에게 쓴 감사편지부터 1980년 12월8일 그가 40살로 암살당하던 날에 교환원에게 건네준 사인까지 다양하다. 시인 김경주가 번역했다.
[도서] 존 레넌이 남긴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