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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에로배우를 만났다(아니, 그런 식으로 만난 게 아니고 인터뷰를 했다). 그때까지 에로비디오 한번 본 적이 없던 나는 맨날 어려운 영화만 빌린다며 나를 감탄의 시선으로 보던 동네 비디오 가게 아저씨의 눈총을 받으면서 에로비디오를 잔뜩 빌렸고(이왕 이렇게 된 거 그동안 궁금했던 <젖소부인 바람났네>도 함께 빌렸다), 열 시간 가까이 벗은 몸을 보며 신음을 듣다가 멀미가 났다. 세상이 온통 살색이었다.
나는 억울했다. 왜 나한테 이런 걸 시키는 걸까, 사무실에서 놀고 있는 남자 선배들 중에는 분명 이걸 다 본 사람도 있을 텐데, 남자 배우는 만나기 싫다 이거지. 배우를 만나기로 한 압구정동 길바닥에 서서 짧은 인생 최대의 회한을 씹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아우디 한대가 내 앞에 서더니 잘생긴 남자가 창문을 내리고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타세요.” 오오, 이것이 지금은 전설로만 남은 압구정동 ‘야타족’인가. 그 후 그 에로배우는 나와 동료들 사이에서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크기가 많이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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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실패한 시인’이라 칭했다. 그러면서 단편소설을 ‘시 다음으로 까다로운 형식’이라고 덧붙였다. 이 말은 단편소설을 비교적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던 시각을 재고하게 만든다. 무리하게 덧대, 이 말을 영화에 대한 것으로 옮겨온대도 영 엉뚱한 소리만은 아닌 것 같다. 적절한 순간을 낚아채 긴 여운으로 바꿔놓는 단편영화들이 이를 증명한다.
제12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가 11월6일(목)부터 11일(화)까지 6일간 씨네큐브 광화문과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다. 경쟁부문에는 109개국 4215편이 출품돼 지난해에 이어 최다 출품작 수를 경신했다. 그중 37개국 66편의 영화가 경쟁부문에서 상영된다. 특별프로그램도 마련된다. 이름난 감독의 단편을 소개하는 ‘시네마 올드 앤 뉴’ 섹션에서는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 웨스 앤더슨의 <호텔 슈발리에>, 테리 길리엄의 <홀리 패밀리> 등 서로 다른 온도의 작품이 이름을 올렸다
[영화제] 삶의 표정을 담은 긴 여운의 짧은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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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을 앞둔 큰딸 영희(도지원)와 의사 사위 상호(송일국), 수능을 앞둔 둘째딸 꽃잎(김소은)은 어머니 영임(김영애)과 함께 전원주택에 기거한다. 자꾸만 깜빡하며 치매의 전조증상을 보이는 엄마, 출산 후에도 생계를 위해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는 큰딸, 고아로 자라나 가족과의 경험에 서툰 사위, 수능을 앞두고 있지만 학교의 일진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둘째. 가족 각자가 품은 균열들은 조금씩 벌어지다가 우발적 사건을 계기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현기증>은 위선과 무관심이 만들어내는 광기와 몰락을 따라가는 영화다. 이돈구 감독은 데뷔작 <가시꽃>(2012)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작은 관계들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붕괴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중요한 시선은 증상이 심해져가는 엄마 영임의 망상에 맞춰져 있다. 김영애의 열연은 <깊은밤 갑자기>(감독 고영남, 1981)에서 보여주었던 섬뜩한 망상에 빠진 여성상을 상기시킨다. 아
작은 관계들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붕괴 <현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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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마을 지하에 박스트롤들이 살고 있다. 착하고 순박한 박스트롤들은 험악한 외모 탓에 오해받아왔다. 빨간 모자 일당은 박스트롤을 괴물로 몰아붙여 영웅이 되려고 한다. 박스트롤과 함께 자란 소년 에그(아이작 햄스터드 라이트)는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소녀 위니(엘르 패닝)와 함께 빨간 모자 일당의 음모를 깨부수고 박스트롤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박스트롤>은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명가 라이카 스튜디오의 세 번째 작품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겨우 세번 만에 이 분야의 마스터피스에 도달했다. 전작들에 비해 한층 나아진 묘사는 이제 세밀함을 넘어 자연스러운 영역에 접어들었는데, 영국 작가 앨런 스노의 동화 <Here Be Monsters!>를 바탕으로 꼼꼼히 구현한 고딕 호러풍의 배경과 기괴한 분위기가 의외로 정겹다. 험상궂게 생겼지만 속마음은 착하기 이를 데 없는 트롤들처럼 음산한 배경과 귀엽고 아기자기한 캐릭터 디자인들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 명가의 세 번째 작품 <박스트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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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혜선의 세 번째 장편영화 <다우더>는 한 모녀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되는 영화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지만 어딘가 신경질적인 엄마(심혜진)는 사춘기 딸 산이(아역 현승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금욕적 삶을 강요한다. 남편과의 불화를 딸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엄마와과 관계 속에서 산이는 흔들리는 성장기를 겪는다. 이후 성장한 산이(구혜선)는 자신의 임신을 확인하지만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덜됐음을 느낀다. 그녀는 병으로 죽음을 앞둔 엄마를 찾은 후 엄마와 자신의 관계를 되돌아본다.
제목 ‘다우더’는 딸이라는 영어단어를 거칠게 발음한 것이라고 한다. 엄마와 딸들이라는 여성의 공감대에 대한 영화이지만 그 초점은 주로 딸인 산이에게 맞춰져 있다. 아무리 분위기와 감성의 영화라 하더라도 등장인물 설정의 도식성이 영화를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통해 엄마의 사연이 더 궁금해지는데도, 어쩐지 딸 산이를 이해해주기를 너무도 갈망하고 있다
한 모녀의 과거와 현재 <다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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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이후’가 할리우드 활극의 한 갈래를 이뤄가는 와중인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늘 그랬듯이” ‘재앙 앞에서 인류를 구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나왔다. 나사(NASA) 소속 우주비행사였던 쿠퍼(매튜 매커너헤이)는 지구에 몰아친 식량난으로 옥수수나 키우며 살고 있다. 거센 황사가 몰아친 어느 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딸과 함께 도착한 곳은 인류가 이주할 행성을 찾는 나사의 비밀본부. 쿠퍼는 만류하는 딸을 뒤로한 채 우주선에 탑승한다.
<인터스텔라>는 <아마겟돈>이 아니다. 영화는 ‘사이’(inter)에 주목한다. 성간(星間•Interstellar)여행을 감행하는 <인터스텔라>의 인물들은 무엇과의 접점(interface)을 찾느라 힘겹다. <인셉션>이 뇌 속 상호작용(interaction)에 관심을 뒀다면 <인터스텔라>의 항로는 상대성(relativity)에 지배받는 인물 사이의 관계(relation)에 맞춰진다. 우주
‘재앙 앞에서 인류를 구하는’ 이야기 <인터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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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고기를 좋아하는 스님 지월(원태희)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여신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다 절에서 쫓겨난다. 아픈 엄마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탁발을 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술에 취한 연화(차승민)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그 ‘인연’은 돌이킬 수 없는 죄로 이어지고, 죄책감을 씻기 위해 지월은 연화의 동생 연서(차승민)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광신도 집단에 속해 있는 연서에게 지월은 또 한번 욕망을 느끼게 되고, 죄책감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한다. <엄마는 창녀다>와 <바비> 등으로 ‘파격과 센세이션’의 감독이 된 이상우의 신작 <지옥화>는 지난 4월 ‘제한 상영가’ 판정으로 소란을 일으켰지만, 다행히도 어떤 장면도 삭제되지 않은 채 4년여 만에 개봉하게 된 작품이다. 섹스와 폭력에 대한 거칠 것 없는 묘사가 일으키는 불편함이나 반감을 걷어낸다면, 영화는 오히려 순진해
죄책감과 욕망 사이 <지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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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때문에 축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역아동센터 소속 아이들이 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지만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이 아이들을 위해,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2011년에 경남지역아동센터 유소년축구팀 희망FC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돈이 많이 들까 걱정하는 부모 때문에 축구를 그만두어야 하는 아이, 잘 먹지 못한 탓에 키가 작아 후보선수로 벤치를 지켜야 하는 아이, 학교에서 왕따로 놀림받는 아이, 자신을 버린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풀어내는 아이, 여기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축구를 탈출구로 만들어주겠다는 욕심에 아이들을 다그치기만 하는 코치까지, 시작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해체 지경에 이른 희망FC에 새로운 코치가 부임하고, 그의 칭찬과 격려가 아이들과 축구팀을 바꾸어놓기 시작한다.
다큐멘터리가 ‘소재주의’에 빠지는 것을 많은 이들이 경계하지만, 종종 어떤 다큐멘터리는 그 소재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그저 기록에 가까운 화면들 속에서도 기꺼이 의미를 발견하도록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아이들 <누구에게나 찬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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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모든 것> The Theory of Everything
감독 제임스 마시 / 출연 펠리시티 존스, 에디 레드메인, 에밀리 왓슨, 찰리 콕스 / 수입•배급 UPI 코리아 / 개봉 12월 초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에디 레드메인)은 대학 시절 미술학도인 제인 와일드(펠리시티 존스)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에까지 이른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스티븐에게 전신이 마비되는 루게릭병이 찾아오면서 두 사람의 행복은 위기를 맞는다. 의료진은 스티븐이 길어야 2년을 버티지 못할 거라 예상하고 지인들도 두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시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티븐은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세계가 놀랄 연구 성과를 줄줄이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가 이런 성과를 내는 데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준 사람이 다름 아닌 아내 제인. 실제로 이들은 훗날 이혼에 이르렀지만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과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을 촘촘하게 담아냈다. 워킹타이틀이 제
[Coming Soon] 스티븐 호킹과 그의 아내 <사랑에 대한 모든 것> The Theory of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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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바디무비’를 읽고 마음이 괴롭다. “자신도 모르게 자주 쓰는 문구가 있다.… ‘이를테면’, ‘다시 말해서’, ‘그게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등…. 그렇게 말하게 된 데는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씨네21> 975호)
나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많다. 위의 모든 문구에다가 ‘내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내 말 알겠지?’, ‘왜 사니’, ‘미친 거 아냐’, ‘오프 더 레코드, 아니 오프 더 메모리’… 이 지면에 다 옮겨 적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이 말이 내 일상과 인간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부끄러웠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 안 적은 것도 있다. 실은(아, 이 말도 많이 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길질을 해대며 자학했다. 게다가 나는 강의로 먹고산다. 강의 중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옆길로 새면서 “오늘의 주제는 아니지만”과 “제 말 전달됐죠?”다. 세상에 이런 비호감이 없다.
나는 왜 이럴까. 정확한 소통의 욕망, 자기과시,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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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타니 시노부의 원작 만화 <라이어 게임>은 상대를 속여서 돈을 빼앗는 게임에 휘말린 여대생과 그녀를 돕는 천재 사기꾼 콤비의 이야기로, 2007년 <후지TV>에서 제작한 동명의 드라마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원작의 게임 룰과 트릭, 반전을 가져오는 ‘필승법’이 사실상 공개된 상황, tvN 드라마 <라이어 게임>은 원작과 다른 성취를 위해 게임이 성립하는 조건을 ‘리메이크’하는 길을 택했다. ‘LGT 사무국’이라는 비밀스런 주최자가 선별한 참가자들이 외부와 차단된 채 게임을 벌이는 원작이 변수가 통제된 실험실이라면, tvN의 리메이크는 거액의 상금을 내건 신생 방송사 주최의 ‘리얼리티 쇼’ 포맷을 취하며 다양한 변수가 개입한다. 참가자들을 따라다니는 카메라, ‘그림이 되는’ 후보를 밀어주라는 방송사 간부의 압력, 쇼에 반응하는 시청자, 기사로 논란을 재생산하는 인터넷 언론, 댓글을 다는 네티즌, 방송사 주식에 투자하는 투자자들까지. 이들은 서로 영
[유선주의 TVIEW] 돈 앞의 자기합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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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4 <나의 독재자> <마녀> <우는 남자>
2013 <관상> <고양이 소녀>
2009 <김씨 표류기> 외
뮤지컬
2014 <비스티 보이즈> <글루미데이> <나쁜자석> <빨래> 외
“철주 하자!” 이규형은 <나의 독재자>의 이해준 감독이 했다는 이 말을 잊을 수 없어 보였다. 연극과 뮤지컬로 연기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왔지만 상업영화에서는 눈에 띄는 역할을 맡지 못하던 차에 철주라는 비중 있는 역을 맡게 됐다. 철주는 서울대 국문과 출신의 주사파로 중앙정보부가 김일성 대역 배우인 성근(설경구)의 사상 교육을 위해 성근 옆에 붙인 인물이다. 이규형은 유약해 보이나 ‘똘끼’가 느껴지는 엘리트 청년을 표현하기 위해 한달 반 동안 14kg 가까이 체중을 감량했다. 대사에 나오는 교조주의, 주체사상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야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것 같아 중국
[who are you] 이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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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1월9일이면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지도 벌써 25주년이 된다. 이에 맞춰 독일 극장가에선 민간인 사찰로 악명 높았던 동독국가보안부 슈타지와 관련된 다큐멘터리영화들이 개봉했다. <호헨쇼엔하우젠에서 쉐네바이데까지>와 <안더존>이 그들인데, <호헨쇼엔하우젠에서…>는 동독 시절 반체제 정치범 형무소인 베를린의 호헨쇼엔하우젠 지역부터 공장지대였던 쉐네바이데 지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주민들의 소회를 듣는 다큐멘터리이며, <안더존>은 동독비밀경찰의 프락치였다는 사실이 탄로나면서 숱한 사회적 지탄을 받았던 동독 출신 작가 자샤 안더존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특히 여기 소개할 <안더존>은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부문에서 선보였던 다큐멘터리로, 안네카린 헨델 감독이 야심차게 제작 중인 ‘배신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90년대 초 ‘자샤 안더존’ 스캔들은 수많은 독일인들에게 아직도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1980년대 독
[베를린] 분단은 그들에게 무엇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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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극장 기획실에서 근무할 경력사원을 모집한다. 11월5일까지 seoul_cinema@naver.com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면 된다. 2년 이상 경력자. 극장 마케팅 및 프로모션을 주로 담당할 예정.
*인디스페이스의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들’ 11월 행사에서 오정훈 감독 기획전을 준비했다. 11월3일(월) 19:00 <약속 하나 있어야겠습니다> | 20:00 <세 발 까마귀>+GV, 11월17일(월) 19:00 <호주제 폐지, 평등 가족으로 가는 길> | 20:00 <새로운 학교-학생인권 이등변삼각형의 빗변 길이는?>+대담을 진행한다. 대담회 참석자는 오정훈 감독, 허은광(영화평론가), 전상진 (<주님의 학교> 감독) 등이다. 입장료는 6천원(인디스페이스 후원회원/멤버십 무료입장)이다. 문의 070-8236-0366, www.indiespace.kr.
*인디스페이스 개관 7주년 기념 행사가 11월1일부터 19
[소식] 서울극장 기획실에서 근무할 경력사원을 모집한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