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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슬로모션
<도성>(1990)
이른바 ‘주성치 신드롬’이 시작되던 위대한 순간. 특별한 신통력을 지닌 주성치가 친척을 찾아 홍콩으로 오고 오맹달은 그를 십분 활용해 일약 유명해진다. 이후 국제도박대회에 참석한 주성치는 초반의 촌뜨기 스타일을 완전히 버리고, 올백에 롱코트 차림으로 마치 <정전자>의 주윤발처럼 멋지게 슬로모션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기의 안배로 이뤄낸, 실제로 천천히 움직이며 포착한 경이로운 발걸음이다. 어떤 기계적 조작도 없이 고도의 집중력으로 완성한 장인정신의 승리다.
맥당복 뮤지컬
<도협2>(1991)
‘시간여행’이라는 장치를 활용한 도박영화 <도협2>에서 주성치는 1937년의 상하이로 간다. <도성상해탄>이라는 부제에서 보는 것처럼 인기 TV시리즈 <상해탄>의 변주이기도 하다. 시간여행은 물론 세상 모든 것을 거침없이 패러디하는 키치정신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맥도널드
인간 슬로모션의 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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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멀쩡한 얼굴로…
<홍콩 마스크>(1995)
90년대 중반 홍콩 영화계에선 유명한 할리우드영화의 저질 패러디영화가 물밀 듯이 쏟아져나왔다. 주성치 역시 빠지면 섭섭할 이름. <홍콩 마스크>가 대표적이다. 장인정신이 엿보이는 할리우드 프로덕션 디자이너들의 특수효과와는 무관한 마구잡이식 특수효과가 눈을 사로잡는다. 특히 <홍콩 마스크>의 과학자 장박사(서금강)는 한번 죽은 이적성(주성치)을 인조인간으로 만들어 되살려주는데 이때 등장하는 각종 실험작들이 괴이하기 짝이 없다. 아버지(오맹달)조차 얼굴이 네모가 된 채로 살아난 이적성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
몸개그도 왕입니다요
<파괴지왕>(1994)
주성치 영화 중 최고로 유치찬란한 작품을 꼽는다면 단연 <파괴지왕>일 것이다. 마귀근육인(오맹달)은 성룡을 제자로 두었다는 둥 중국 고권법부의 대가라는 둥 모를 소리를 지껄이며 어리숙한 하금은(주성치)을 제자로 받아들
액션도 코미디도 여기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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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 세계의 영원한 미녀
장민
주성치의 영화 안에서 장민만큼 망가지지 않는 여배우가 또 있을까. 망가져봤자 <도성>(1990)에서 겨드랑이에 슬쩍 굵은 점을 찍은 정도다(물론 몸개그는 오군여가 한다). 주성치와는 <소자병법>(1988)에서 처음 만나 <도성>을 계기로 첫 ‘연인’ 자리를 공고히 했다. 초기 주성치 영화에서 주로 당당하고 고혹적인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대개 주성치가 장민을 보자마자 홀딱 반하는 설정이다. 가까운 연인이라기보다 주성치가 우러러보는 이상향의 여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도성>에선 주성치의 은인이자 힘의 원천이 되는 여인이었고 <무장원 소걸아>(1992)에선 주성치가 결혼하고 싶어 안달하는 미모의 기녀를 연기했다. <녹정기>(1992)에선 힘 있고 도도한 태후 역으로 주성치와 대립한다. 1988년 미스 홍콩 출신의 진짜배기 미녀!
주성치의 개그 라이벌?
오군여
오군여는 장민의 대
동료와 연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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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서유쌍기>는 주성치 영화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힌다. 주성치가 20년 만에 다시 <서유기>를 들고 찾아왔다. 이번엔 주연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말이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은 2013년 중국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 기록을 줄줄이 갈아치우며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다. <쿵푸허슬> 이후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가 싶더니 주성치 특유의 가벼움과 뻔뻔함, 그리고 눈물 한 방울의 힘은 여전히 살아 있다. 88년 <벽력선봉>으로 웃음의 신세기를 연 지 어언 28년. 주성치에게도, 우리에게도 특별한 <서유기>를 통해 주성치의 영화 세계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가늠해봤다. 자신의 영화엔 언제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지만 배우 주성치와 감독 주성치를 비교해보기에 이만큼 적합한 기회도 없을 것이다. 키워드로 읽는 주성치 영화 명장면도 더한다. <서유기>, 모험의 아니 주성치의 시작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록 소
주성치 비긴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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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해고시키고 복직할 순 없어요.” <내일을 위한 시간>이 첫 상영되었던 201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적지 않은 관객은 산드라가 이 대사를 하는 순간 일제히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고 그것들은 이례적으로 더 우렁차고 뜨거웠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는 세상과 영화의 간극을 느끼며 그 박수갈채 속에서 잠시 의문스러워하며 망설였다. 다르덴이라는 진귀한 창작자들이 만들어냈고 우리 사회의 가련하지만 명예로운 한 인물의 초상이 철학적으로 담겨 있는, 하지만 영화적으로 완벽히 동의할 수만은 없는 이 작품에 관한 복잡한 심중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고민된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네편의 진술은 각자 서로 뜻이 다르고 별개의 귀결을 지닌 네개의 단상으로 읽혀도 좋고 하나의 글을 위한 네개의 장으로 읽혀도 좋다.
선택
선택이라는 화두에서 시작해보자. 선택은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중요한 화두다. 이 영화에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신 전영객잔] 영화와 세상의 ‘투명한’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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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투성이의 땅에서 모든 것이 끝난다. <강남 1970>은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를 잇는 유하 감독의 ‘강남 3부작’을 완성하는 영화다. 자신의 욕망을 향해 부나방처럼 질주하다 끝내 현실의 벽에 부딪혀 비운의 결말을 맞는 밑바닥 인생들. 전작을 통해 유하 감독이 보여줬던 청춘과 폭력과 어둠의 이미지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지만, <강남 1970>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모든 욕망과 비극의 시발점인 ‘강남’이라는 공간이다. 개발의 진통을 겪기 전, ‘야지’라고 불렸던 강남의 시뻘건 흙과 먼지구덩이 속에서 유하 감독은 무엇을 건져내려 한 걸까. 현란한 간판들이 늘어서 있는 현대 강남의 한복판에서, 강남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물었다.
-<하울링> 이후 3년 만의 복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지난해에 개봉했으면 2년 만이었겠다. (웃음) <하울링>을 마무리한 뒤 지난 3년은 ‘강남 3부작’을 완결하
[유하] 지갑이 형님이 되는 뒤틀린 세상의 기원을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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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모래시계>(1995)가 혈기왕성한 30대 최민수의 모든 것이 집약된 작품이었다면,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오만과 편견>(2014)은 50대 최민수가 가진 경험과 노련함을 가감 없이 보여준 작품이다. 이 드라마에서 문희만 부장검사를 맡았던 그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 되기 위해 ‘최민수’를 싹 지워버렸다. 감정 표현이 솔직하고, 아직도 철들지 않은 그가 자신과 전혀 다른 인물에 흠뻑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하나는 현재 극장 개봉하고 있는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서 노숙자 대포 역할로 거의 8년 만에 영화에 출연하기 전까지 그를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다는 아쉬움. 또 하나는 이제부터 ‘배우 최민수’를 좀더 자주 접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 <오만과 편견> 촬영이 끝난 그에게 뒤늦은 만남을 청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혼자 음악 창작하고, 사람 안 만나고, 그러고
[최민수] 살아가는 게 내 직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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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밝은 밤이었다. 정자에 앉아 달을 보며 손수 빚은 술을 마시자고 산기슭에 모인 무도인들은 내가 신은 앵클부츠를 보더니 난색을 표했다. “힘드실 텐데….” “동네 등산로 정도는 괜찮아요.” “그게… 길이 없거든요.” 이보시오, 무도를 걷는 이들은 도(道)가 아니면 검을 뽑지 않으며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거 아니었소. 그날 밤 나무뿌리와 덤불에 걸려 비틀거리면서 길이 아닌 길을 오르며, 나는 꿈을 꾸었다, 만화 <비천무>의 진하처럼 대나무 향기 그윽한 죽엽청주를 음미하는 꿈을. 천신만고 끝에 버려진 정자에 오르니, 과연 그러했다, 나는 그저 꿈을 꾸었던 것이다.
제대로 익었는지 모르겠다며 무도인들이 꺼낸 술은 맥주요, 신경 써서 마련했다며 내놓은 안주는 하몬이었다. “저, 전통 무예를 하면 전통주를 마시는 거 아니었….” 달빛에 비친 무도인들의 눈빛은 서늘했다. “저희는 맥주 좋아합니다.” 아, 네.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며 무도인들은 살찌는 법을 논하기 시작했고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강해지고 싶나? 천천히 들어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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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뜻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있냐’의 신버전
속뜻 ‘아이폰 배터리 갈아 끼우는 소리 하네’의 구버전
주석 당신의 친구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그녀에게 애인이 있다고 하자. 당신은 십중팔구 저 말을 떠올릴 것이다(이 말을 발설하지 않기를 추천한다). 친구가 짝사랑하는 이의 애인이 축구를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그가 아침마다 조기축구회에 나가는지 뒷조사도 안 해봤으면서, 왜 우리는 저 이상한 비유를 떠올리곤 하는 것일까?
사실 이 비유의 원형은 신화시대의 영웅담이다. 아르고호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다. 부왕의 땅에 돌아온 이아손에게 삼촌은 콜키스에 있는 황금 양털을 가져오면 왕위를 넘기겠다고 말했다. 천신만고 끝에 콜키스에 도착한 그는 한 여자의 도움을 받아(그녀가 용에게 졸음이 오는 약을 뿌렸고, 용이 잠든 새에 양털을 훔쳤다) 임무를 완수한다. 저 속담은 영웅 이아손과 보물인 황금 양털 그리고 보물을 지키는 괴물이라는 삼각구도를 축구 이야기로 변환한 것이다. 키커
[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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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언어에도 감촉이 있다면, 이 단어가 단군이시다. 첫사랑!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심금이 오케스트라 연주되어 설렘과 애틋함으로 영혼에게도 떨리는 살결을 부여하는 바로 그 단어, 첫사랑! 기억 속에 언제나 아스라이 남아, 정화수를 떠놓고 오체투지 백일기도 드려도 꿈속에서나마 몇년에 한번 다시 볼까 말까 한 첫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을 알면서도, 신에게 저항한다는 각오로, 온몸의 호르몬을 유일한 무기 삼아 목숨 걸고 사랑했던 바로 그 첫사랑! 첫사랑이 그렇게 애절한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첫사랑은 운명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첫사랑이다. 즉 첫사랑은 언제나 과거형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애절한 사랑이다. 아아, 다시 들려온다. 이 어설픈 이론에 저항하려는 어설픈 반론들이. 혹자는 “나는 첫사랑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으하하하, 부럽지”라고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재반박하련다. 안 부럽다. 백년이 지나봐라. 그 가약도 과거형이다. 아니, 백년 지나기 전에 그대
[곡사의 아수라장] 첫사랑과 첫사랑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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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모로랜드> Tomorrowland
감독 브래드 버드 / 출연 조지 클루니, 휴 로리, 브릿 로버트슨, 주디 그리어
애니메이션 작업에 푹 빠져 지낸 감독이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만든 SF영화는 어떤 모습일까. <인크레더블> <라따뚜이> 등을 연출한 브래드 버드 감독의 <투모로랜드>는 집단기억 속에 존재하는 제3의 시공간인 투모로랜드를 무대로 한다. 소녀 케이시(브릿 로버트슨)와 발명가 프랭크(조지 클루니)가 투모로랜드와 지구에 얽힌 미스터리를 파헤쳐간다. 5월22일 북미 개봉예정.
[WHAT'S UP] <투모로랜드> Tomorrow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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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허삼관> 13월의 헌혈
[정훈이 만화] <허삼관> 13월의 헌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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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는 배낭 멘 여자의 이미지가 종단하는 영화다. 건조 식량과 간이 정수기, 몇벌의 옷가지와 텐트, 반복해 읽을 책과 노트.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의 파란 배낭에는 그녀의 의식주와 정신이 몽땅 들어 있다. 한명의 인간이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자신의 등에 짊어질 수 있다는 사실, 나아가 짊어질 수 있는 부피를 넘어선 물건은 삶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소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게 예기치 못한 위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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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면 피터 잭슨 감독의 ‘중간계 6부작’만큼 주제와 스타일이 일관된 장기적 연작 영화도 없다. 혹자는 피터 잭슨이, 두벌의 <스타워즈> 3부작을 세상에 내놓고 세 번째 3부작을 디즈니의 손에 위탁한 조지 루카스 병에 걸린 게 아니냐며 놀리기도 하지만 <스타워즈> 프랜차이즈는 조지 루카스 외 다른 감독들도 메가폰을 잡았고 심지어 그들이 연출한 <제국의 역습>과 <제다이의 귀환>이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새해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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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최혁준은 고등학교 재학 기간 동안 자체적으로 국내 주요 동물원 평가를 진행해 그 결과물로 이 책을 엮었다. 동물원에 대한 관심사를 본격적으로 기록에 남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이던 2011년부터. 이쯤에서 그의 나이를 가늠하고는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다니고 있겠군 지레짐작할 사람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이 책과 블로그 활동 등의 비교과 활동을 모아 2015학년도 대학입시에서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수의예과, 생물학과, 동물자원학과 등에 지원하였으나 전부 1차 서류전형에서부터 탈락하여 학위를 가진 진짜 전문가로 거듭나는 데는 시간이 좀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동물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동물원이 인간을 위해서만큼이나 동물을 위해서도 건강한 장소였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책에서 국내 동물원을 평가하는 기준도 그래서 동물과 관람객의 입장으로 나뉜다. 종보전(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의 전시와 존속을 위한 조치들), 동물복지(오락성 프로그램 운영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건강한 동물원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