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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되면서 나의 활동 범위가 종로와 중구, 광화문과 명동 일대로 넓어졌다. 몇달에 한번씩 짝이 바뀌고 친해지는 친구가 새로 생기면 으레 그래야 하는 것이 친구 집 방문하기였다. 반 친구들 중에는 충무로와 장충동, 남대문에 사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집에 놀러가면서 낯선 곳의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가장 기억나는 것이, 얼굴이 탁구공처럼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구김살 없고 재미있는 친구의 집에 간 일이었다. 그를 따라 서울역 건너편 대우빌딩의 으스스한 뒷골목으로 들어갔는데, 붉은 벽돌로 된 오래된 건물 벽에 빨랫줄이 못으로 박혀 있었고 그 줄에 여자 팬티와 브래지어들이 널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벽에 팬티와 브래지어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골목에는 커튼이 쳐진 유리문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고 이따금 만나는 사람들이라고는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들뿐이었는데, 친구는 그들에게 활기차게 인사를 하면서 통통 튀듯 오르막길을 걸어올라갔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직감적으로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독고탁을 기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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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도시락 하나 달랑 싸들고 산으로 산으로. 호시절의 등산객 얘기가 아니다. 지난여름 매일같이 산을 타야 했던 <대호> 연출부의 사연이다. 2인1조로 팀을 이뤄 하루에 산 하나를 오르고 또 올랐다. <대호>는 지리산을 배경으로 하지만 지리산은 험준하기로 유명한 데다 촬영 허가가 쉽게 나지 않아 대체할 수 있는 산을 찾아야 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길 6개월여 끝에 제천, 포천, 곡성, 합천, 남해, 전주, 대관령 등 10여 군데가 넘는 전국의 산들을 로케이션 장소로 확정했다.
최종 헌팅까지 다녀온 뒤 이모개 촬영감독은 <대호>의 산에 대한 생각이 확실해졌다.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대호>는 천만덕과 대호 그리고 산이 주인공이구나 생각했다. 산은 이야기의 무대만이 아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곧은 정신과 같은 것을 영화 속 산이 품고 있어야 했다. 산이 주는 경외감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호랑이 등 CG 작업을 하기에 용이한 지형의 산
시원(始原)적 정신의 숲속으로 가는 인간과 CG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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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히말라야 눈밭에서 대체 얼마나 구르다 온 걸까. 예상과 달리 휴먼 원정대는 강원도 영월의 한 채석장에서 두달 반을 보냈다. 에베레스트와 칸첸중가 근접 촬영의 대부분이 영월 채석장에서 촬영됐기 때문이다. 비전문가 눈엔 눈 덮인 산이 거기가 거기 같지만 에베레스트와 칸첸중가는 산을 구성하는 돌의 색이 크게 다르다. 주승환 프로듀서는 근 2년간 경남을 제외한 전국의 채석장을 죄다 돌아보았다고 한다. 주승환 프로듀서는 강원도 군청을 통해 영월군수와 만났고 영월군에서 60년 넘게 성업 중인 채석장 쌍용양회를 소개해줬다. 워낙 넓은 곳이라 회색빛의 에베레스트와 갈색빛을 띠는 칸첸중가의 표현이 모두 가능한 곳이었다. 베이스캠프 장면도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폐채석장에서 찍었다. 폐채석장은 손질이 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기 때문에 산 초입의 베이스캠프 장면을 촬영하기에 적절했다. 뜻밖에도 다른 영화 제작진이었다면 쌍수들고 환영했을 ‘따뜻한 겨울’은 <히말라야>팀엔 이도저도 못할 계륵
장비를 몸처럼 다루며 산을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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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대호(大虎)를 어떻게 만들어내서 관객에게 보여줄 것인가. 이 막막한 질문 앞에서 <대호>의 박민정 프로듀서는 확실한 비전을 제시했다. “호랑이는 <대호>의 주인공이지만 호랑이만이 이 영화의 전부는 절대 아니다. 명포수 천만덕(최민식), 천만덕과 대호가 살아가는 지리산이야말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천만덕, 호랑이 그리고 산을 통해 서사의 균형을 맞추는 게 호랑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했다.” 호랑이를 100% CG로 구현하기로 결정한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호랑이를 실사로 촬영할 때 호랑이를 조련하는 등의 한계도 있었지만 산을 CG로 처리해야 하는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건 <대호>의 서사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었다. “무엇이 <대호>에 필요한가를 정확히 파악해 선택과 집중을 했다”는 게 박민정 프로듀서의 설명이다.
호랑이 만들기는 방대한 자료 수집에서부터 시작됐다. 연출팀, 미술팀, VFX팀
내가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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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 2005년, 휴먼 원정대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에서 눈감은 고 박무택, 백준호, 장민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겠다는 숭고한 결단을 내린 것은 산악인들이 산으로 향하는 궁극적 이유가 결국 사람에 닿아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히말라야>에서 이동규 대장으로 나오는 실제 인물, 손칠규 원정대장에게 엄홍길 대장이 무전을 친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무택이를 만났는데 도저히 함께 내려갈 수가 없어 동쪽 해 잘 드는 데에 묻어줬다’고 하는데 그 목소리가 강하게 각인이 됐다.” 엄홍길의 그 목소리가 주승환 프로듀서를 히말라야 설산으로 한발 한발 내딛게 만들었다. 실화의 위엄이 막강한 만큼 JK필름은 4년에 걸쳐 <히말라야>의 이야기를 다듬었고, 완결된 이야기로서의 구색을 갖춘 뒤에야 프로덕션에 제대로 시동이 걸렸다.
2004년 5월18일 오전 ‘2004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이끌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박무택 산악대장은 불과 한
영화가 다 말할 수 없었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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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 현장에는 총 네 마리의 ‘호랑이’가 상주하고 있었다. CG로 구현될 가상의 호랑이 대호와 호랑이띠인 배우 최민식과 정만식, 박훈정 감독이 그들이다. “갖다붙이려면 뭔들 못 갖다붙이겠나”라며 박훈정 감독은 웃었지만, 사실 호랑이는 오래전부터 그의 무의식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던 존재였다. “어렸을 때부터 가끔씩 호랑이꿈을 꿨다. 스윽 지나가기도 하고, 곁에 와서 잠도 자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1년에 한두번씩은 호랑이꿈을 꿨다.” 그렇게 아득한 존재였던 호랑이에 현실감과 정서를 불어넣은 영화를 만드는 건 어쩌면 박훈정 감독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호>를 통해 그는 모두의 머릿속에 조금씩 다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미지의 동물, 호랑이를 하나의 명징한 캐릭터로 구체화하는 데 성공했다. <혈투>와 <신세계>를 거쳐 <대호>에 당도한 감독 박훈정의 ‘신세계’는, 그렇게 확장되어 있었다.
-몇달 전 SNS에 ‘중경외폐’(中
호랑이가 포스 넘치게 보이는 계절이 바로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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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안 하는 영화감독이 어디 있겠냐마는 최근작만 보면 이석훈 감독은 제대로 고생할 팔자인가보다. 전작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 2014)이 바다 CG와 사투를 벌인 블록버스터였다면, <히말라야>는 무거운 실화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해발 8750m 높이의 산을 담아낸 산악영화다. 충무로가 산악영화의 불모지인 걸 감안하면 다소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도전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산악영화를 찍고 나니 산이 좀 달라 보인다”고 말한다. 막 언론 시사회를 마치고 인터뷰 장소에 들어온 이석훈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었던 지난 1년 반은 인생에서 중요한 시간이었다. 좋은 추억이 됐다. 배우, 스탭들도 그렇게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겨울 시장에 나서는 출사표를 던졌다.
-평소에 등산을 즐기나.
=즐기진 않지만 산을 좋아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좋아하는 영화인들과 6개월 정도 산을 오르기도 했다. 요즘은 그렇게 못하고. 꼭 정상을 오르기보다
“자연 풍광보다 사람을 보여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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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질문 하나. 우리는 왜 괴수에 매혹되는가? 거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으로는 괴수의 크기와 힘, 기묘한 모양새와 인간을 뛰어넘는 어떤 초월성에 매혹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음지를 배회하던 괴수가 서스펜스를 자아내다가 마침내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마침내 압도적인 파워로 상대를 제압하는 순간을 사랑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괴수가 등장하는 영화의 성공 여부는 괴수를 얼마나 멋지고 효과적으로 구현해내느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괴수의 매력은 물리적인 존재감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괴수가 지닌 사연과 정서가 복합적일수록 이 미지의 존재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 사례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면 <혹성탈출> 시리즈의 시저나 <킹콩>(2005)의 콩,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 등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박훈정 감독의 신작 <대호>
아름다운 괴수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가 부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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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K2, 칸첸중가, 로체, 마칼루,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초오유, 낭가파르바트, 안나푸르나 등.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를 높이 순서대로 나열해보니 산에 오른 것도 아닌데 괜히 머리가 아찔해진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8611m)보다 훨씬 위에 있는 히말라야 8750m에 방치된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엄홍길 대장이 휴먼 원정대를 꾸렸다는 소식을 10년 전 처음 들었을 때 꽤나 무모해 보였던 것도 그래서다. 그곳은 난다 긴다 하는 산악인도 제 한몸 가누기조차 힘든 ‘죽음의 지대’(해발 7500m 이상의 높이는 데스 존이라고 불린다.-편집자)가 아닌가. 그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오르려 했을까. 단지 동료의 시신이 거기에 있으니까? 이석훈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히말라야>는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산에 오른다’는 산악인들의 기본명제와 다른 성격의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찾아가는 산악영화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찾기
그곳에 동료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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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폭풍전야다. 2015년 12월 둘쨋주 한국영화계의 풍경이 딱 그렇다. 12월7일 월요일 <히말라야>가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됐고, 그다음날인 화요일 <대호>의 시사회가 열렸으며 수요일에는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제작진이 내한해 한국 관객과 만남을 가졌다. 12월 셋쨋주부터 이 세편의 영화는 겨울 극장가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레이스에 돌입하게 된다. <암살>과 <베테랑>이 맞붙었던 여름 시장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른 최근 극장가의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서는 화제작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다. 이 지면에서는 연달아 공개된 두편의 한국영화, <히말라야>와 <대호>에 대한 심층기사를 마련했다. 영화에 대한 소개글과 더불어 감독과의 인터뷰, 제작과정을 좀더 상세히 알 수 있는 스탭들의 코멘터리도 함께 전한다. 이번 특집은 좌우로 기사를 나누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두 영화에 대
자연과 인간 그 사이 영화적 상상력이 숨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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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규정해야만 속이 후련해지는 흔한 남자로서, 김형경에게 단 하나의 수식을 붙여야 한다면 소설가가 옳을지 심리 에세이스트가 옳을지 망설이곤 한다. 다만 그녀가 내놓은 책의 목록이 점점 쌓일수록 결정은 후자에 기울게 되는 게 사실이다. 새 책 <오늘의 남자> 역시 심리 에세이스트 김형경의 면모를 잘 엿볼 수 있는 글들이 모였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사람의 감정에 대해 사색한 <사람풍경>(2004)을 필두로 이어진 산문집이지만, <오늘의 남자>는 특히 남자를 탐구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남자를 위하여>(2013) 옆에 놓이는 책이다. 활동 초기부터 줄곧 여성을 향해 예민한 시선을 던졌던 작가의 커리어를 떠올린다면, 두해 간격으로 출간된 두권의 책은 분명 독특한 행보다.
남자에 관해 처음으로 쓴 책 <남자를 위하여>와 이번 <오늘의 남자> 사이의 차이를 묻자, 김형경은 “이번에는 쫄
씨네21 추천 도서 <오늘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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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통해서는 여간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지만, 수필에서는 자전적인 내용이나 자신이 일상 속에서 만난 사건과 감정의 편린을 솔직히 늘어놓곤 한다. 신간이 나오자마자 그 안에 쓰인 음악들부터 따로 갈무리될 만큼 널리 알려진 음악 취향,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경험한 위스키 삼매경, 유럽 여행 중에 기록한 문학에 대한 견해 등 별별 이야기들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 아래 단정하게 모인다. <시드니!>(2000)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의 유력 스포츠지의 청탁을 받고 특별취재원으로서 시드니올림픽을 기록한 에세이다. 매일 400자 원고지 30매에 기관총을 쏴대듯 거침없이 써내려간 흔적은 그 분량을 소화하는 작가의 스태미나에 감탄하는 것만으로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시드니!>는 (2000년 시드니가 아닌) 별안간 1996년 애틀랜타에서 시작한다.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마라토너의 경기를 생생하게 그린 이 오프닝은 마치 &l
씨네21 추천 도서 <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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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널리 보급될 수 있도록 값이 싸고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부문별, 내용별 등 일정한 체계에 따라 자그마하게 만든 책.” 문고의 사전적 정의는 <파울로 코엘료 베스트 컬렉션>의 많은 걸 나타낸다. <연금술사>(1988)의 어마어마한 성공 이후 현재까지 그의 (비블리오그래피 대부분에 해당하는) 열네 작품을 출간한 바 있는 문학동네가 코엘료 컬렉션 중 세 작품을 엄선했다. <연금술사>를 비롯해 <브리다>(1990), 에세이 <흐르는 강물처럼>(2006)이 한데 묶인, 사람과 삶에 대한 깊은 시선이 담긴 경전 같은 책 세권은, 곁에 놓고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는 조그만 판형을 만나 이 겨울을 지낼 온기를 불어넣어줄 것이다.
<연금술사>는 가벼운 문체로 풀어낸 장중한 이야기로, 56개 언어로 번역돼 6500만부의 판매고를 올리며 파울로 코엘료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양치기 산티아고가 피라미드 근처에서
씨네21 추천 도서 <파울로 코엘료 베스트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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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비로소 작가로 남을 수 있는 건 그들이 문자 그대로 쓰는 이가 아닌, 스스로의 시각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2015년 마지막 북엔즈에 꽂힌 세 작가의 책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구축해온 관찰자로서의 능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작가로 세상에 등장한 이래 한시도 거르지 않고 인간의 삶을 통찰하는 성숙한 우화를 통해 세계의 갈채를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올림픽 ‘특별취재원’이라는 대외적인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올림픽 자체에 대한 어떠한 흠모도 드러내지 않은 채 1996년과 2000년의 어느 27일을 자유롭게 기록했다. 김형경은 여자의 연애에 관해 쓴 많은 소설들을 지나 영영 정확히 알 수 없을 존재인 남자를 여러 학자들의 고견을 빌려 더듬어나갔다.
<파울로 코엘료 베스트 컬렉션>은 작가의 커리어에서 뚜렷하게 빛나는 소설 <연금술사>와 <브리다>, 산문집 <흐르는 강물처럼>을 작게 만든 컴필
파울로 코엘료, 무라카미 하루키, 김형경이 본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