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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나이트>(1997)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영화 속 인물들이 1980년, 새해를 맞이하는 연말 파티장에서 벌어진다. 마치 유사가족을 구성하듯 한데 거주하며 포르노 필름을 제작하는 이들은 새해를 경축하며 1980년을 향한 카운트다운을 외친다. 그러나 그 순간 영화의 스탭이었던 ‘리틀 빌’(윌리엄 메이시)이 외간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아내를 총으로 쏴죽이고,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그를 직시하는 순간, 총구를 입안에 넣어 자살하고 만다. 1980년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70년대 LA를 배경으로 호황을 이루었던 포르노 필름 산업은 마치 비극의 예고장처럼, 한 남자의 고통스런 절망과 살해, 그리고 자살을 함께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두 번째 장편영화 <부기 나이트>는 감독 스스로 경험하고 향유했던 LA 포르노 필름 산업의 흥망성쇠에 대한 연대기이자 동시에 애가였다. 그는 언제나 시대적 변화에 부대끼고 상처받는 인간들에 대한 지
상상적 노스탤지어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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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내 임무는 영화화가 그렇게 어렵다는 토머스 핀천의 소설을 어떻게 폴 토머스 앤더슨이 영화화하는 데에 성공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미리 말하겠지만 이 결론은 다소 싱겁다. 질문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무비 데이터베이스(IMDb)를 확인해보면 토머스 핀천의 소설을 각색했다는 영화는 단 두편이다. 오늘 이야기할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 그리고 2002년에 나온 독일영화 <Pr¨ufstand VII>. <Pr¨ufstand VII>는 <중력의 무지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진 작품이니 온전한 각색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제대로 된 핀천의 각색물은 <인히어런트 바이스>, 단 하나만 있는 셈이다.
장르물로서도 만족스러운
이는 엄청난 성취처럼 들린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위대한 작가의 성공적인 소설이 모두 그렇게 쉽게 영화화되는 것은 아니다. 제임스
각색 불가능성을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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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이게 뭔가, 싶었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그런 영화다. 코카인에 취한 내러티브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신작 <인히어런트 바이스>다.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영화화된 적이 없는 토머스 핀천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영화의 지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미지의 땅을 탐험한다는 것과 같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우리를 누아르의 세계로 초대한다. 비밀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여인의 등장, 탐정과의 만남, 그리고 음모로 가득한 사건 의뢰 등. 하지만 거기까지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탐정이 진실 앞에서 미끄러지며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누아르의 서사적 틀을 빌린 후, 우리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에서 헤매게 한다. 기이한 영화적 경험.
원심력의 내러티브
우리는 폴 토머스 앤더슨이 <부기 나이트>(199
초현실주의이거나 코카인 누아르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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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랬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 역시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더 많은 의문이 생긴다면 영화를 제대로 본 셈이다. 이 영화를 이해하려는 당신의 노력에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말들을 모아봤다. 부디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해줄 실마리가 되길 희망하며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 <롤링스톤>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편집, 재구성하여 옮긴다.
-토머스 핀천의 작품 중 영화화되는 첫 작품이다. 그의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재미. 핀천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새로운 세계에 푹 빠져버린다. 그의 작품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도전적이면서도 재미있다. 처음 접한 소설은 <중력의 무지개>라는 작품이었다. 순전히 작품의 명성에 이끌려 읽었는데 토머스 핀천에 대해 알고 싶은 이에게 첫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진 않다. 너무 두껍다. (
“핀천의 원작보다는 웃기게 찍으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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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뒤집어 말해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될 때 애정도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폴 토머스 앤더슨(이하 PTA)은 매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그의 영화는 열정적인 지지자들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로 확연히 갈린다. 하지만 그것이 PTA의 영화를 극장에서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될 순 없다. PTA의 신작 <인히어런트 바이스>가 극장 개봉 없이 IPTV로 직행한다는 황망한 소식을 듣고 실망한 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PTA를 사랑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그에게 관심이 없는 이들마저 PTA를 거부할 기회를 빼앗겼다. 그럼에도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일단 보고 나서 이야기를 나눌 가치가 있는 영화다. 극장 개봉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히어런트 바이스>에 대한 논의를 멈추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비록 늦었지만 <인히어런트 바이스>에 대한 여러 필자
폴 토머스 앤더슨으로부터 온 도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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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과 두려움, 집착과 강박증. <버드맨>이 주요하게 다루는 테마를 한 시대 앞서 선보여왔던 ‘선배’ 영화들이 있다. 예술가의, 예술가에 대한 영화들을 한데 모았다.
<선셋 대로> 1950
“좋아요, 데밀씨. 난 클로즈업 준비가 되어 있어요”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수작.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진 무성영화 시대의 대스타 노마 데스먼드가 주인공이다. 화려한 시절에 대한 향수와 재기에 대한 집착이 극대화된 캐릭터인 노마 데스먼드는 영화사에서도 손꼽을 만한 강렬한 여성 캐릭터로 남아 있다. 그녀를 연기하는 이가 실제로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였던 글로리아 스완슨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몰려든 경찰과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스튜디오의 조명처럼 느끼는 데스먼드의 광기를 성공적으로 소화해낸 건 20여년의 공백기를 가져야 했던 스완슨의 상황과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캐스팅의 묘가 영화에 한층 복합적인 맥락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버드맨>과 관련지
명성의 쌍둥이는 강박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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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떤 작품이 탄생할 것인가. 지난 2012년, <버드맨>의 제작 소식이 처음으로 들려왔을 때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었을 거다. 당대를 풍미했던 슈퍼히어로영화의 주인공이었으나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져 퇴물배우가 되어버린 남자. 그 남자가 자신의 커리어를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제작하려 한다. 이것이 당시까지 알려진 <버드맨>의 기본 줄거리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고개를 갸웃하게 한 건 코미디 장르로 알려진 이 영화를 멕시코의 중견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연출한다는 소식이었다.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 <바벨>, 이른바 ‘죽음 3부작’이라 불리는 그의 전작들은 파괴적 에너지와 상실감으로 가득한 작품이었으며 <21그램>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뒤에도 이냐리투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보다 국제영화제 관계자들이 더 사랑하는 이름이었다. 슈퍼히어로와 코미디. 할리우드 상
추락하라 그리하면 비상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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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술가에게나 빛나는 재능으로 무장한 전작을 넘어서는 작품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의 신선한 충격은 작품이 거듭될수록 옅어지고, 예술가가 작품에 인장처럼 새겨놓은 고유의 개성은 종종 동어반복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솔직히 고백하면, 4년 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비우티풀>을 세상에 공개했을 때 이 감독에게 앞으로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버드맨>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귀환했고 지금은 그 누구도 이냐리투 영화세계의 제2막이 시작되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버드맨>을 통해 그는 어떻게 다시 비상하게 되었나. 영화의 제작 과정과 이 작품을 더 돋보이게 하는 다양한 영화적 요소들, <버드맨>과 맥락을 함께하는 예술가에 대한 영화들을 소개한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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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2, 3월은 아카데미 특수 효과를 노리는 양질의 외화들이 국내 관객을 만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영화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여기 개봉 전부터 화제를 불러모은 두편의 미국영화가 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4년 만의 신작 <버드맨>과 토머스 핀천의 탐정소설을 원작으로 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가 그것이다. 각각 뉴욕과 LA를 배경으로 하는 이 두 영화는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버드맨>), 뉴욕영화제(<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첫선을 보인 뒤 2014년의 베스트영화를 꼽는 영미권 평단의 리스트에서 종종 그 이름을 비쳤다. 유난히 자국영화에 호들갑스러운 영미권 평단의 반응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지만, 믿을 만한 매체와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투 섬 업’을 외치는 영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된다. 올해 오스카의 최대 수혜자로
TWO THUMBS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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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이경영이 안 나오네?” 무려 <인터스텔라> 리뷰 밑에 달린 댓글 중 하나다. 지난 1년간 오죽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면 그런 댓글까지 등장했을까. 도대체 그는 왜 그렇게 강박적으로 많은 영화에 얼굴을 비쳤던 걸까. 2011년 <씨네21> 신년호(786호)를 통해 거의 10년 만의 공식적인 인터뷰를 가졌던 그를 다시 만났다. 그가 사는 일산으로 갔다. 촬영이 없는 날이면 그는 동네라는 ‘구역’을 정해두고, 그곳을 중심으로 지낸다고 했다. 겉으로는 조용한 생활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는 이 휴지기에 시나리오를 보고, 감독과 제작자를 만나고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무실도 매니저도 없는 그에게 일산에서의 시간은 다음 작품을 위한 암중모색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산에서 그를 만난다는 건 이 모의의 시간이 어떻게 구성되나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1997년 5월, 박찬욱 감독의 <3인조> 개봉을 앞둔 이경영은 당시 데뷔 11년차의
누가 그를 대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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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금슬금, 소리도 없이 누군가가 카페 안으로 슥 들어왔다. 예의 부스스한 머리와 동그란 안경에 보랏빛 점퍼를 걸치고 베이지색 민무늬 스니커즈를 신은 김창완이다. 그런데 표정이 영 멍하다. 얼핏 봐도 방금, 그것도 겨우 잠에서 깬 듯한 얼굴이다. 그도 그럴 것이 김창완은 지난밤 김창완 밴드의 3집 ≪용서≫의 발매 기념 콘서트에 흠뻑 취해 있었다. 공연의 여흥과 숙취의 고됨이 채 가시기 전일 텐데도 그는 힘든 내색이 전혀 없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며 달콤쌉싸름한 아포가토를 주문하더니 후루룩 넘기고 말 뿐. 그러고는 내리 음악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꼽을 때면 그는 단 한번도 빼놓지 않고 기타와 공연이라 말해오지 않았던가. 그렇게 가수 김창완으로 살아온 지 올해로 꼭 38년째다. 막내동생과의 사별 이후 그는 더이상 ‘산울림’으로 활동하지 않고 있지만, 2008년부터 ‘김창완 밴드’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이어오고 있다. ≪용서≫는 밴드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김창완] “아름다움은 뒷전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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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가 에세이집 <가능한 꿈의 공간들>을 출간했다. 90년대 후반부터 SF작가로 활동한 듀나는 소설 집필과 더불어 각종 매체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사회 곳곳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왔다. <씨네21> 초창기부터 영화에 관한 글과 평론을 기고해온 오랜 필진이기도 하다. 광활한 여백이 연상되는 제목에서부터 책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가능한 꿈의 공간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은 ‘잡식에세이’다. 영화에 관한 글과 사회 비평을 비롯해 극장 환경, 디지털 문화 등 듀나가 꾸준히 관심을 표현해온 이슈들까지 빼곡하게 담았다. 듀나는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SF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의 영역을 커버한다. 일반적인 이야기꾼은 현실세계에서 가능할 법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SF작가는 존재 가능한 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룬다.” 뾰족한 듯 섬세하고, 냉정한 듯 사려깊은 그의 글을
[trans × cross] 40대를 넘어도 아줌마 역할에 갇히지 않는 여배우들이 많아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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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상속자들>이 끝난 지난해 1월, 2014년을 빛낼 신인배우로 강하늘을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강하늘은 가능성의 배우였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매일 무대에 오르고 있다. 한달에 한편꼴로 자신의 영화가 개봉하고 있다. 2014년을 그 누구보다도 바쁘게 보낸 강하늘과 다시 마주 앉았다. <상속자들> 이후 강하늘은 <소녀괴담> <엔젤 아이즈> <쎄시봉> <순수의 시대> <스물> <미생>을 차례로 찍었다. 작품과 작품 사이 쉴 틈도 없었다. 2015년의 시작은 연극과 함께였다. 1월9일부터 3월1일까지 두달 가까이 월요일을 빼곤 매일 무대에 섰다. 자신의 생일(2월21일)과 설 연휴까지 몽땅 연극에 바쳤다. “생일이요? 그냥 토요일이에요. 공연 두 타임 있는.” “설이 뭐예요? 3시 공연밖에 몰라요.” 능청스럽게 말한 뒤 크게 웃음을 터뜨리던 강하늘은 오히려 연극 <해롤드 앤 모드>
[강하늘] 내일 또 봅시다, 강하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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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뜻 호구고객이란 뜻
속뜻 호랑이굴[虎坑]이란 뜻
주석 휴대폰이 필수품이 되고나니 단통법, 호갱, 직구… 같은 말들에도 익숙해져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단통법이란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어떤 이들은 ‘전국민호갱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갱이란 ‘호구고객’의 준말이지만 ‘호객’이 아니라 ‘호갱’이 된 것은 뒤에 ‘님’자가 따라붙어서 자음동화 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손님을 존대하면서 뒤로는 호구로 여기는 장사치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비꼬는 말이다.
한국은 휴대폰 단말기 가격과 무선통신 비용이 제일 높은 나라다. 그나마 발품을 팔면 단말기에 지급하는 보조금을 챙길 수 있었으나 단통법으로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줄어든 보조금이라도 받으려면 7만원이 넘는 높은 요금제에 가입해야한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2년 약정만 하면 아이폰6를 0원에 판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보조금이 100%인 셈인데, 우리는 단말기도 비싸, 내는 요금
[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호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