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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1994) 한편이 창출하는 수익이 자동차 수출 수익과 맞먹는다는 이유로 문화 지원 정책이 들썩이던 그해 영화사 백두대간도 창업했다. 창립 작품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유작인 143분짜리 영화 <희생>(1986)이었다. 지구 종말의 가운데,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아이의 이미지를 그린 마지막 장면을 보는 ‘신성한’ 관람 이행을 위해 관객들은 이 생소한 영화를 보고 또 보며 괴로워(?)했다. <희생>을 보지 않고 영화를 말할 수 없었고, 영화를 보지 않고 문화를 말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예술영화라는 말, 그 관객층의 태동을 가져온 상징적 작품 <희생>이 백두대간 21주년 기념 영화제 ‘20+1 Film Festival’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21년 만에 35mm 필름으로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다시 상영된다. 백두대간에서 제작한 <아름다운 시절>(1998)의 조감독으로 초창기인 19
[최낙용] 한국영화 제작은 우리의 핵심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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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고독과 외로움
김성수_오래전 <무뢰한>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부터 너무 좋았다. 시나리오 초기부터 기획자 중 하나로 이름이 올라간 박찬욱 감독의 모호필름에서 만들어질 뻔했던 시절까지, 이 작품이 지나온 과정을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프로젝트다. (웃음)
오승욱_같은 작품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김성수 감독님에게는 박광수 감독님 연출부 출신이라는 진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게다가 좋아하는 영화 성향이 비슷하다. 싸이더스 전신 우노필름 시절에도 차승재 대표님이 “어쩌면 너희 둘은 좋아하는 영화도 똑같고, 생각하는 것도 똑같냐”, 이런 얘기까지 하셨을 정도니까. (웃음)
김성수_굳이 나누자면 나와 이현승, 여균동 감독이 박광수 감독님 연출부 1세대이고 오승욱 감독은 허진호, 박흥식, 이창동과 같은 2세대다. 이른바 ‘박광수 아카데미’ 출신들이 잘 뭉치다 보니 함께한 작품이 없어도 만날 일도 많고 친했다. 특히 오승욱
내 영화의 주인공들이 행복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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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시간이 있다. 하루에 단 두번, 낮이 밤으로 밤이 낮으로 바뀌는 새벽과 해질녘. 그 시간을 일컬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부른다. 저기 저 언덕 너머에 보이는 형체가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때다. 적과 동지를,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힘든 이 모호한 시간 안에서 모든 사물의 윤곽은 흐릿해지고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맥이 풀린다. 이때를 빌려 사물의 실체를, 저간의 사정을 명확히 포착해내려 한다면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였는지 모른다. <무뢰한>은 이처럼 이상한 시간에 기대고 있는 영화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는 시종 여명인지 어둠인지 알 수 없는 푸르스름한 빛 사이를 부유한다. 이것은 단지 영화의 분위기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무뢰한>의 남녀주인공 정재곤(김남길)과 김혜경(전도연)은 이 애매하고 불명확한 시간 속에서 운신하는 사람들이다. 살인사건의 용의자 박준길(박성웅)을 쫓는 형사 정
이 남자,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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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뢰한>은 ‘이해할 수 없는 남자’에 대한 질문의 영화다.”(<씨네21> 992호) 오승욱 감독의 말 그대로다. 감독이 <킬리만자로>(2000) 이후 무려 15년 만에 내놓은 신작 <무뢰한>(개봉 5월27일)은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형사 정재곤(김남길)을 따라간다. 영화는 정재곤이 용의자의 애인인 김혜경(전도연)을 만나면서 겪게 되는 감정적인 변화에 주목한다. 오승욱 감독은 누아르 장르 안에서 주인공들의 폭발하는 감정을 보여주는 대신 시종일관 인물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쪽을 택했다. 인물의 속내를 더 많이 보여주기보다는 조금 덜 드러냄으로써 얻게 되는 묘한 긴장감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다. 한국영화계에 오랜만에 찾아온 묵직하고 서늘한 누아르, 오승욱 감독표 하드보일드 멜로물에 대한 궁금증을 짧은 영화 리뷰로 풀어냈다. 이어서 <무뢰한>으로 올해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돼 칸을 다녀온 오승욱 감독과, 역시
하드보일드 멜로 혹은 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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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철학자와 이상용 영화평론가가 <씨네샹떼>를 출간했다. 25주간 CGV아트하우스와 진행한 시네토크의 일부와, 그들이 이야기 나눈 영화에 대해 각자 ‘철학자의 눈’, ‘비평가의 눈’이라는 섹션으로 나눠 쓴 영화글들을 한데 모으고 정리한 책이다. ‘씨네샹떼’는 우리말로 옮기면 ‘영화에 대한 예찬’이라는 의미라고. 주관이 뚜렷한 두 작가가 하나의 영화를 논하며 어떤 갈등과 동의의 여정을 보냈는지, 두툼한 책 한권을 만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 비화가 듣고 싶어졌다. 예상대로 두 작가가 들려주는 말의 색과 결은 성격만큼이나 사뭇 달랐다. 강신주 철학자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고, 이상용 영화평론가는 숙고하며 천천히 말을 놓아두려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 말들은 큰 물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흘렀고 마침내 한곳에 도달했다.
-이상용 영화평론가가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그 자리에 강신주 철학자가 함께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강신주_지금은 종영한
[trans × cross] 대화의 역동성 읽힌다면 가장 잘 읽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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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벌어진 어깨와 큰 키, 선하고 따뜻한 이미지. 유연석을 규정하는 이런 요소들은 “키다리 아저씨” 혹은 “백마 탄 왕자” 캐릭터에 자연스레 부합된다. <은밀한 유혹>의 성열은 그러한 유연석의 이미지가 중요한 시발점으로 작용하는 캐릭터다. 마카오 카지노 그룹 회장(이경영)의 젊고 유능한 비서인 성열은 빈털터리 신세인 지연(임수정)에게 은밀하게 접근해 위험한 거래를 제안한다. 괴팍한 성격의 회장 마음을 움직여 재산을 상속받은 뒤 그 유산을 절반씩 나눠 갖자는 것. 회장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지연이지만, 지연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성열이다. 지연이 덥석 성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성열의 남자로서의 매력이 크게 작용한다. 그것은 곧 영화가 유연석에게 기대는 지점이기도 하다.
“성열은 매너 있고 젠틀한 반면 치밀함과 냉철함도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배우로서 다양한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여서 욕심이 났다.” 영화의 스포일러를 의식해 한참 말을 고르던 유연석은 성열
[유연석] 로맨스와 미스터리의 경계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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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순위로 캐스팅 제안을 받는다는 것, 배우에겐 매우 짜릿짜릿한 일이다.” 윤재구 감독은 배우 임수정을 생각하며 <은밀한 유혹>의 지연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지연은, 가족도 친구도 없이 마카오에서 하루벌이 인생을 살다 마카오 카지노 그룹 회장(이경영)과 그의 비서 성열(유연석)을 만나 삶의 행로를 급선회하게 되는 기구한 운명의 여자다. 성열의 계획하에 회장과 결혼을 하고 그의 유산을 상속받지만, 회장의 초호화 요트에 승선한 순간부터 지연의 삶은 그녀의 의지를 벗어난다. 수수한 동시에 우아하고, 여린 듯하지만 강하고, 세속적이지만 로맨틱한 꿈을 꾸는 지연은 임수정을 통해 현실감을 얻는다.
임수정이 지연에게 끌렸던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만 탐하는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신데렐라가 되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지연이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이 여자 매력 있다’라고 생
[임수정] 주체적인 신데렐라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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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력 10년이 넘는 친구다. 그래서인지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틀에 갇혀 있지 않고 많이 열려 있었다.”(임수정)
“소녀적 이미지를 간직한 동안미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지만, 실제로는 성숙한 여배우로서의 매력과 아우라를 지녔다. 연기할 땐 집중력이 정말 대단했다.”(유연석)
임수정과 유연석이 <은밀한 유혹>으로 만났다. 유연석은 돈은 많지만 성격은 괴팍한 회장의 젊은 비서 성열로, 임수정은 성열의 ‘은밀한 유혹’에 넘어가 돈 많은 회장의 유산을 상속받는 ‘신데렐라’ 지연으로 변신했다. <은밀한 유혹>은 은밀하고 짜릿하게 서로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캐릭터들의 공방이 흥미로운 영화다. 하지만 실제 두 배우의 인터뷰 현장은 아름다운 신데렐라와 백마 탄 왕자님이 조우한 듯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여배우의 아우라’를 잃지 않은 채 인터뷰 내내 두눈을 반짝이던 임수정과 편한 친구처럼 상대를 배려하던 유연석. 이들의 유혹에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
[임수정, 유연석] 은밀하고 짜릿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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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이 타계했다. 향년 106살. 참 기나긴 여정이셨다. 구로사와 아키라, 오슨 웰스, 한형모, 김기영 감독보다 형님이시니 말 다 했다. 그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기자들은 “독특한 영상미학을 추구했던 최고령 감독”이라고 틀에 박힌 수사들을 퍼다나르지만,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바쁜 우리는 정작 그 ‘독특한 영상미학’이 뭔지 모른다. 기자들도 모른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그를 진정 노장으로 만든 그만의 ‘독특한 영상미학’이란 사실, 연극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의 모든 영화는 한정된 공간에서, 역할을 겨우 연기해내는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받는 연극영화다. 그것은 무대를 숨기지 않는 말들의 영화였고(<언어와 유토피아>), 배역극을 숨기지 않는 영화였다(<신곡>). 심지어 그는 아예 연극을 촬영했다(<식인> <제5제국> <나의 경우>). 고집이 조금 꺾인 후기에도 그는 여
[곡사의 아수라장] 삶은 이미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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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스> Sisters
감독 제이슨 무어 / 출연 티나 페이, 에이미 포엘러, 마야 루돌프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제인(티나 페이)과 모라(에이미 포엘러)의 부모는 본가를 팔기 전 두 자매를 집으로 불러들인다. 제인과 모라는 본가에서의 마지막 파티를 계획하고 고등학교 친구들을 초대한다. TV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와 드라마 <30록>의 작가 폴라 펠이 쓴 이야기를 <피치 퍼펙트>(2012)의 감독 제이슨 무어가 연출한 코미디. 북미에서 12월18일 개봉한다.
[WHAT'S UP] 미국 TV쇼 SNL 크루가 뭉쳤다 <시스터스> Si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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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세상의 멸망 그후
[정훈이 만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세상의 멸망 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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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외딴 도로에 서 있다. 경찰이다. 차를 손보는 중이다. 옅은 하늘색 반팔 티셔츠에는 기름때가 요란하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무릎 바로 아래까지 꽉 찬 가죽 부츠의 주름이 보기 좋게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한다. 차 안에서는 무선통신이 요란하다. 동료들이 폭주 범죄자 나이트라이더를 추격하는 중임을 알리는 경찰 통신이다. 남자가 가죽 재킷을 걸쳐 입고 차에 올라탄다.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백미러를 살짝 흘긴다. 동료들은 전멸했다. 경찰들을 따돌린 나이트라이더의 8기통 엔진이 괴성을 지르며 도로를 가른다. 마침내 남자의 차가 출발한다. 차체에 새겨진 인터셉터라는 글자가 크고 선명하다. 나이트라이더와 길 한가운데서 마주한다. 서로를 향해 질주하는 두대의 차. 충돌의 순간, 나이트라이더가 먼저 핸들을 틀어 아찔하게 피해나간다. 여전히 운전대를 잡고 질주하는 나이트라이더. 그러나 그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이제 다 끝났다며 울부짖는다.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상대의 압도적인 무게감을 감지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삶이란 호락호락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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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계기로 내 인생의 자동차영화들을 추억하는 요즈음이다. 그중 <배니싱 포인트>(1971)는 극도로 단순하다 못해 곧장 승천할 기세의 괴작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자동차 탁송원 코왈스키(배리 뉴먼)는 콜로라도부터 샌프란시스코를 16시간에 주파한다는 미친 목표를 세우고 시속 257km까지 닷지 챌린저의 액셀을 밟는다. 이 자동차영화에는 카체이스도 노상 액션도 없다. 주인공은 장애물과 교통경찰을 무시하고 소실점까지 과속할 뿐이다. 운전 도중 문득, 영원히 달리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이 든 적이 있다면 <배니싱 포인트>는 당신을 위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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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마블이 생각하는 슈퍼히어로의 임무는 첫째도 둘째도 민간인 보호입니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보는 동안 이 슬로건이 도처에서 나부끼는 환각이 보였다. 조스 웨던 감독은 관객의 호흡을 절대적으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영웅 동맹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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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고전 걸작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쓴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에세이집. 제목과 동명의 작품에서 그는 아름다움에 획일화된 기준을 적용해 미추를 가리는 일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실수인지를 설명하고, 그와 같은 이유로 예술 비평 역시도 모든 장르에 획일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관습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주술을 툭 끊어버리는 순간,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얼굴들이 온 사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도서] '브라운 신부' 작가 G. K. 체스터튼의 에세이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