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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하지 않은 역할의 유해진. 익숙한 그림은 아니다. <타짜-신의 손>(2014),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미쓰GO>(2012) 등 그가 출연한 몇 작품만 열거해봐도 그의 등장에는 ‘유머’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따라붙는다. 그런 그가 <극비수사>에서 도사 김중산으로 등장한다고 했을 땐, ‘유해진다운’ 코믹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모락모락 피어났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유해진은 그 기대를 비켜서서 웃음기를 싹 거둬들였다. 유해진 특유의 경쾌한 입말의 재미도 지그시 눌렀다. 대신 그 어느 때보다 성실하고 진중한 도사 김중산이 돼 공길용 형사와 짝을 이뤄 유괴 아동을 찾아 나선다.
그의 근작 중 보기 드문 진지한 캐릭터라 준비하는 유해진의 마음이 어땠을지부터 궁금했다. “코믹이든 아니든, 어떤 배역을 맡든지 늘 고민은 똑같다. ‘과연 이게 괜찮을까?’ 무슨 역을 맡든 언제나 두려움은 있다. 다만 김중산 선생님은 실
[유해진] 중용(中庸)의 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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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역의 김윤석. 낯설지 않은 그림이다. <추격자>(2008)에서 출장 안마소를 운영하는 전직 경찰 엄중호나 시골에서 껄렁거리다 급작스레 탈주범을 잡으러 달려가는 <거북이 달린다>(2009)의 조필성 형사가 단박에 떠오른다. 선 굵은 형사로 스크린 위에 자신의 인상을 뚝뚝 찍어내 보이던 김윤석이다. 그런 그가 <극비수사>에서 다시 한번 형사가 된다고 했을 땐, 그조차 어떤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던 것 같다. “솔직히 조심스러웠다. 내가 수사물이나 수사물에 기대 있는 영화를 몇번 해봤지 않나. 그때랑 비슷한 역할이면 너무 익숙한 그림이다. 스릴러에 수사물을 결합하는 장르적 시도라든지, 이상한 반전을 집어넣는 식의 (익숙한) 드라마에서 배우가 소비되는 걸 경계하고 있었다.” 관객에게 뻔히 읽히는 수는 일부러 멀찍이 두고자 한 그가 <극비수사>의 공길용 형사가 되기로 결심한 데는 어떤 확신이 있었던 걸까. “음식에 비유하자면 <극비수사>
[김윤석] 인간미 철철 흐르는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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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진아, 너랑 이렇게 둘이 사진 찍는 거 처음인 것 같은데? 허허.” “그러게요, 형. 허허.” 카메라 앞에 선 김윤석과 유해진이 쑥스러운 듯 스윽 웃어 보인다. 소란스럽기보다는 조용하게, 수다스럽기보다는 묵직하게 말을 잇는 두 남자. 그런 이들이 이번에는 형사와 도사가 돼 제대로 말을 섞었다. 1978년 부산에서 벌어진 실제 유괴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곽경택 감독의 신작 <극비수사>(개봉 6월18일)에서 김윤석과 유해진은 각각 공길용 형사와 김중산 도사라는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 사람들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괴된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극비리에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끝까지 가보는 형사와 도사의 이야기다. 자극적인 수사물보다는 코끝이 찡해지는 가족극에 방점을 찍은 작품이기도 하다. 연기로 쉼 없이 자신을 단련해온 개성 강한 두 배우가 진중한 드라마 안에서 과연 어떤 화학작용을 만들어냈을까. 섣부른 짐작보다는 색다른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김윤석과 유해
[김윤석, 유해진] 소신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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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진 세버그와 프랑스와의 인연은 운명인 것 같다. 가장 유명한 인연은 장 뤽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1960)에서 주인공이 된 사실이다. 미국 배우로서 프랑스에서 시작된 누벨바그의 주역이 되면서, 새로운 영화미학을 전세계로 알리는 전령이 됐다. 진 세버그가 파리의 거리에서 신문을 팔기 위해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칠 때, 그것은 새 미학의 도래를 알리는 선언적인 제스처였다. 소년 같은 짧은 금발에, 도시적인 감각, 그리고 자유로운 분위기는 세버그의 개성이자 새로운 영화의 대중적인 매력으로 각인됐다.
운명 같은 프랑스와의 인연
진 세버그의 영화 데뷔는 마치 여왕의 대관식 같았다. 데뷔작은 오토 프레민저 감독의 <성인 잔>(1957)이다. 프랑스의 영웅인 잔 다르크의 전기영화인데, 당시 할리우드의 거물이었던 프레민저 감독이 신인 오디션을 통해 주역을 발탁했다. 이것은 비비안 리가 선택됐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한창호의 오! 마돈나] 정치 부조리의 희생양, 누벨바그의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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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이디 인 더 밴> The Lady in the Van
감독 니콜라스 하이트너 / 출연 매기 스미스, 알렉스 제닝스, 프랜시스 데 라 투어
앨런 베넷(알렉스 제닝스)의 집 진입로에 주차한 밴에 홈리스인 매리 셰퍼드(매기 스미스)가 산다. 그녀는 그곳에서 15년 동안 살며 동네 사람들과 정을 쌓는다. 영국 극작가 앨런 베넷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그는 이를 이미 1999년 연극으로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연극에 참여했던 배우 매기 스미스와 감독 니콜라스 하이트너가 영화 버전에서도 각자의 역할을 다시 맡았다.
[WHAT'S UP] 영국 극작가 앨런 베넷의 실화 <더 레이디 인 더 밴> The Lady in the V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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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스파이> 전 스파이가 아닙니다
[정훈이 만화] <스파이> 전 스파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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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약자를 알아본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최연소이자 유일한 싱글 여자로 가평에 끌려갔던 그 밤, 꼬마들은 열명이 넘는 어른 중에서 누가 가장 약한지를 대번에 눈치채고는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왔다. “이모, 우리랑 놀아요.” 누가 네 이모라는 거니, 그건 그렇고, 너 이름이 뭐니. 부모들이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는 동안 나는 통성명도 하지 않은 생면부지 꼬마 무리를 거느리고 두 시간 동안 배드민턴을 쳤다. “이모, 왜 이렇게 못 쳐요, 깔깔깔.” 그래, 나 배드민턴으로 체육 실기 시험 봐서 C 맞은 사람이다! 그래서 20년 넘게 라켓을 꺾었는데 너네 때문에 이러고 있다! 야외에 나온 꼬마들이 흥분해 좀처럼 잠들지 않았던 그날 밤은 매우 길었다.
내가 전전한 다양한 직업과 아르바이트 중에서 절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나만 고르라면 단연코 애 보기다. (돈 받고 한 일도 아니고 일하던 가게 주인 아줌마가 가끔 떠맡겼다.) 뽀로로가 없던 암흑의 1990년대, 세평 가게에 갇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태엽 장치 여섯살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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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 포터> 세계에서 사물을 날아오르게 하는 주문이 “윙가르디움 레비오사”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와 <투모로우랜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성 캐릭터가 키를 잡은 영화들이 약진하는 초여름이다. 멜리사 매카시 주연의 <스파이>는 XL 사이즈 중년 여성들이 현실에서 마주치는 흔한 편견들을 첩보 모험 서사 안에서 신나게 격퇴한다. 폴 페이그 감독은 농담을 통해서도 현실의 성차별 패턴을 예리하게 짚는다. 수잔(멜리사 매카시)이 현장 스파이로 나서기 두려운 마음을 친구에게 고백하는 대사가 한 예다. “엄마의 충고가 항상 머릿속에 울려. 수잔, 절대 튀지 마라. 승리는 양보해라. 도시락에 그런 메모를 넣어줬어.” 여자는 똑똑함보다 한 발짝 물러서서 조력자로 남는 ‘지혜’를 발휘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체념. 낯설지 않다.
05/18
내년 오스카에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윙가르디움 퓨리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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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는 사람들은 두 부류가 있다. 독서가와 장서가다. 독서가는 책을 읽기 위해 산다. 장서가는 책을 수집하기 위해 산다. 그렇다면 만화책을 사는 사람들은? 독서가와 장서가의 기준으로 나누기가 애매해 보인다. 웹툰을 보고 단행본으로 출간된 만화책까지 사는 사람들은 독서가일까 장서가일까.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오타쿠와 비(非)오타쿠의 구분이다. 오타쿠는 독서가 겸 장서가다. 국내에서 팔리는 만화책의 대부분은 아마도 오타쿠들이 구입한 것일 테다. 그런데 오타쿠가 아닌 사람들이 더 많이 구입한 만화책도 있다. 윤태호의 <미생>이 그랬다.
네이버에서 2013년부터 연재되고 있는 만화가 최규석의 <송곳> 단행본 1∼3권이 출간됐다. 지금도 네이버에서 몇번의 클릭만 하는 수고를 들이면 무료로 볼 수 있지만 이 책을 구입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아마도 당신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 즉 노동자이거나 노동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도서] 노동자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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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개인적인 선택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행위다. 2013년 김조광수와 김승환 커플이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발표했을 때 그들의 결혼은 합법적인 동성혼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중요한 이벤트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 <마이 페어 웨딩>은 심각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그저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동성커플도 결혼 준비에 지지고 볶는 건 똑같다는 걸 알려줄 뿐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이 당연한 문구가 상식이 되는 세상을 위해 지금도 멈추지 않고 투쟁 중인 두 사람을 만났다.
-드디어 개봉이다. 식상해도 이 질문을 먼저 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의 결혼을 영화로 남기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무엇인가.
=김승환_미국의 게이운동가 하비 밀크에 대해서도 영화로 제작됐지만 실제 그의 모습에 대해선 거친 영상 몇개가 있을 뿐이다. 하비 밀크의 운동이 강조된 것에 비해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어떤 고민을 껴안고 살았는지에 대한 살아 있는
[flash on] 결혼, 센 예방주사를 맞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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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즐기는 음악축제, 제8회 FILM LIVE: KT&G 상상마당 음악영화제가 6월5일(금)부터 14일(일)까지 10일간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열린다. 영화제는 뮤직페스티벌에서 출연가수들의 목록을 몇 차례 나눠 공개하듯 상영작 라인업을 조금씩 추가로 발표하며 기대감을 높여왔다. 하나의 음반처럼 세심하게 구성된 6개 섹션, 21편의 음악영화가 상영된다. 포스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번 영화제의 얼굴은 힙합이다. 오프닝 트랙인 소노 시온의 <도쿄 트라이브> 역시 힙합 음악이 영화 안팎에서 극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다. 머지않은 미래, 몇개의 조직이 적절히 자신의 구역을 지키며 생활하던 도쿄 트라이브에서 정체불명의 무리가 경계를 침범하면서 벌어지는 혼란을 그린다. 도쿄 트라이브의 구성원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끊임없이 흐르는 힙합 음악과 개성이 도드라지는 가운데에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캐릭터들이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 인터뷰, 영
[영화제] 여름밤의 드럼 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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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 ‘울림’, ‘어울림’을 슬로건으로, 반딧불의 고장 무주에서 열리는 ‘무주산골영화제’가 올해로 3회를 맞이한다. 6월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23개국 53편의 영화가 소개될 이번 영화제는 ‘영화 소풍길’이라는 영화제 컨셉에 걸맞게 바쁜 일상에서 미처 만나지 못했던 의미 있는 영화들을 자연과 함께, 그리고 아름다운 계절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쉼표 같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무엇보다 개막작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필름 아카이브에 잠들어 있던 영화들(<청춘의 십자로>(1회), <이국정원>(2회))을 깨워내 현대적 사운드와 공연을 결합함으로써 영화 관람의 새로운 의미를 찾고자 했던 무주산골영화제 개막작 ‘전통’에 따라 올해에는 ‘찰리 채플린’이 초대된다. ‘어느 여름밤의 꿈, 찰리 채플린’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될 이번 개막 상영에서는 채플린의 무성영화 <유한계급>(1921)을 중심으로, 스크린과 무대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이제껏 우리가 만나왔던
[영화제] 자연 속 영화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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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 브라이든과 스티브 쿠건은 또 한번 잡지의 청탁을 받고 이탈리아 도시들과 그곳의 레스토랑, 낭만파 시인 바이런과 셸리의 흔적을 취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두 사람은 자신의 커리어, 영화와 음악, 인생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며 6일간 이탈리아 곳곳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진다.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의 TV시트콤 <더 트립>(2010) 영화판의 후속편이다. 롭과 스티브가 <옵서버>의 청탁으로 특정한 지역들을 여행하며 유유자적 식도락을 즐긴다는 골격은 비슷하다. <더 트립>이 영국 북부를 여행하며 시인 워즈워스와 콜리지를 떠올렸다면, <트립 투 이탈리아>는 북부 피에몬테부터 남부 나폴리까지 거치면서 바이런과 셸리를 기억한다. 풍부한 대사와 다큐멘터리적 터치에 능한 감독의 장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포맷이다. 영화가 거두절미하고 시작하고 나면, 러닝타임 동안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두 사람의 (성대모사를 통한) 대화와 이탈리아
오감자극 6일간의 이탈리아 여행기 <트립 투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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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생쥐들의 마을. 레오폴트 장로는 호야와 토리 중 달의 골짜기에서 빛의 용을 잡아오는 이에게 지도자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한다. 늘 티격태격하는 호야와 토리. 둘은 믿음직한 친구와 함께 목적지로 향하지만 외딴곳으로 떨어지고 만다. 낯선 마을의 지도자가 명령하는 대로 땀 흘려 일하는 호야, 토리, 친구들은 점차 협동의 가치를 배워 나간다.
<호야와 토리: 드래곤 숲의 비밀>은 3D가 주가 되는 어린이애니메이션 개봉작의 추세와 달리 2D의 질감이 뚜렷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방향도 요즘의 유행과 다르다. 빛의 용을 찾기 위한 모험보다는 함께 포도를 따고, 대나무를 베고, 돌을 나르는 등 영화의 테마인 협동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들이 눈에 띈다.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어요.” 위기에 놓인 친구를 절대 지나치지 않을 만큼 정이 넘치지만 덤벙대는 성격에 실수가 잦은 호야와 용감하고 명석하지만 자기중심적인 토리의 캐릭터 구도 역시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의 중요성
2D의 질감이 뚜렷한 애니메이션 <호야와 토리: 드래곤 숲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