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년대 중반, 신촌 로터리 중앙에는 시계탑이 있었고 지금보다는 버스 정류장이 많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꼭 한두개의 신문 가판대가 있었는데 새마을운동 깃발의 색깔과 똑같은 초록색의 가판대에는 신문뿐만이 아니라 울긋불긋한 색깔의 만화책과 각종 성인 주간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고우영의 성인극화 <수호지>가 인기를 끌자, 가판대 위에는 성인극화란 딱지를 단 얇은 만화책들이 앞다투어 진열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의 어느 날, 나의 눈길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선데이서울>의 표지였다. 미스 롯데 서미경이 등이 훤히 드러난 붉은 드레스를 입고 고개를 돌린 뒷모습의 표지였다. 사고 싶었지만 어른들이 보는 책이란 생각에 감히 <선데이서울>을 살 수 없었고, 그나마 만화책은 어른들이 보는 것이라도 덜 죄스러워 옆에 있던 성인극화 <여간첩 마타하리>를 사서 보았다. 만홧가게에서 어린이 만화를 보던 내가 성인극화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사악한 악당의 시대
-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제대로 열릴 수 있을까? 부산국제영화제를 둘러싼 부산시와 영화제, 영화계의 갈등이 최악의 국면을 맞았다. 사태를 극단으로 몰고 간 쪽은 부산시다. 영화제측이 “영화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위촉한 68명의 신규 자문위원을 부산시가 인정하지 않고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하며 법적 대응을 시작한 것이다.
부산시의 “노골적인 간섭”에 부산국제영화제 지키기 범 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가 입장을 발표했다. 21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긴급 기자회견에서 비대위는 “부산시가 영화제의 자율성을 계속 부정한다면 영화인들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참가를 전면 거부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한국영화계가 부산영화제 사태와 관련해 부산시에 최후통첩을 전달한 것이다.
비대위는 부산시에 다음 세 가지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1.서병수 부산시장의 조직위원장 사태를 즉각 실행하고, 부산국제영화제의 자율성, 독립성을 보장하는 정관 개정에
부산국제영화제 갈등 최고조, 영화계 보이콧 불사
-
“언제나 똑같은 책을 써온 것 같다.” 프랑스의 대문호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들은 스스로의 술회처럼 닮은 구석이 많다. 대부분 일인칭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주인공의 폐쇄적인 성격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톤이 어두컴컴하다. 또한 주인공은 말수가 적고 자기에 대해 특별한 희망이 없으며, 타인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법이 없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도 별다를 바 없어, 그들의 관계는 늘 피상적이다. 모디아노의 근작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에 등장하는 다라간 역시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필요한 것만 전달하는 건조한 문체를 밟아나가다보면 제목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는 차라리 반어처럼 느껴진다. 나이든 작가 다라간이 수첩을 찾아준 이에게서 자기 과거를 더듬어나가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희미하게 새긴 이야기는 마치 추리소설처럼 진행된다. 하지만 “불확실하고 몽환적인 과거”를 다루는 마당에 박진감 같은 게 끼어들 틈은 없다. 그저 다라간이 과거에서 더 오래된 과거로 옮겨가며 어
씨네21 추천 도서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
새천년을 자축했던 샴페인의 거품이 채 마르지도 않았을 때, 시대와 동떨어진 듯한 책 하나가 한국 사회에 도착했다. 이름부터 낯선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인천 만석동 빈민촌 아이들의 생활을 그렸다.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시대착오라는 일각의 비판이 무색하게도, 책은 현재까지 2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한국 아동문학의 대표작이 됐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보다 특별했던 건, 책 속의 절절한 이야기가 작가 김중미의 상상이나 취재가 아닌 십수년간 만석동 아이들 곁에서 생활하며 경험한 바를 토대로 쓰여졌다는 점이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이후 16년. 시간은 훌쩍 지났지만 김중미는 여전히 아이들과 함께다. 스물넷에 만석동 괭이부리말에 들어와 공동체를 만든 지 올해로 30주년이 됐다. 에세이 <꽃은 많을수록 좋다>는 1987년 기찻길옆아가방에서 이듬해 공부방으로, 그리고 2001년 강화도에서 농촌 생활을 시작해 강화와 만석동을 오가며 기
씨네21 추천 도서 <꽃은 많을수록 좋다>
-
-
원재훈은 시인이다. 그런데 그의 방대한 저서 목록을 보면 그를 시인으로만 불러도 될지 망설여진다. 원재훈은 1988년 시인으로 문단에 나와 시집, 소설, 동화, 수필, 인물론, 번역, 영화 이야기까지 내놓으며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해왔다. 그렇게 그는 근 30년간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였고, 세상이 아직 모르는 알토란 같은 정보를 전했다. 올해 초에 나온 <상처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는 그가 지금껏 사랑해온 책 28권을 소개하는 에세이다. 시대를 넘나드는 고전과 문학을 벗하며 사는 이들이 조용히 마음에 품어온 책이 즐비하게 엮였다.
‘원재훈의 독서고백’이라는 부제는 그가 문인들을 만나 얻은 행복관을 묶은 <나는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를 떠올리게 한다. 단행본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칼럼까지 부지런히 소화하는 그에게 더없이 걸맞은 제목이다. <상처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는 원재훈 에세이 특유의 상냥한 말투와
씨네21 추천 도서 <상처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
-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소설가 엘리너 캐턴의 <루미너리스>의 실물을 마주했을 때 묘하게 권위적이란 인상을 받았다. 1, 2권 합쳐 12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는 물론, “47년 맨부커상 역사상 최연소 수상 작가의 천재적 작품!”이라는 문구로 채워진 널찍한 띠지 또한 어딘가 고전의 풍모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외관에 대한 느낌은 시작에 불과하다. 책을 읽어내려갈수록 드러나는 28살 작가의 야심은 묵직한 장정을 비집고 나올 만큼 거대하다. 외곽으로 몰린 사내 무디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금광을 찾아온다. 그리고 같은 목적으로 그곳을 찾은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 어떤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엘리너 캐턴은 소설을 이루는 12명의 인물 누구 하나 헛되이 다루지 않으면서도 서사의 밀도를 단단하게 붙든다. 그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촘촘히 엮어나가면서 별자리의 체계를 경유한다. 열두 남자는 각각 황도 12궁을 대표해 그에 맞는 성격과 특징을 부여받아, 해당 별자리가 등장하는 때에
씨네21 추천 도서 <루미너리스>
-
2014년 가을 <파인즈>로 한국에 첫선을 보인 <웨이워드 파인즈> 3부작이 최근 마지막 권 <라스트타운>으로 시리즈를 완결했다. 지난해 7월 2권 <웨이워드>가 발매되고 3권이 나오기까지 불과 7개월의 간격이 있었지만, 상황은 그 시간보다 더 뚜렷하게 바뀌었다. M. 나이트 샤말란이 총제작(과 파일럿 연출)을 맡고 맷 딜런이 주인공 에단 버크를 연기한 드라마 <웨이워드 파인즈>가 기대를 웃도는 인기를 얻었고, 소설 3부작 역시 드라마와 장르소설 팬들의 성원으로 발간 당시보다 훨씬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
사라진 동료를 찾던 중 정신을 잃고 낯선 마을에 도착한 에단 버크가 마을을 휘감고 있는 수상한 기운을 추적해나간 시리즈는 <라스트타운>에서 그동안 꽁꽁 감춰놓았던 어마어마한 비밀을 죄다 풀어놓는다. 3부가 신을 거스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구약전서의 욥기 구절을 인용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점은, 이 대장정
씨네21 추천 도서 <라스트타운>
-
가로막힌 상황에 놓인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일정 이상의 흥미를 선사한다. 극단을 종용하는 선택지를 쥐고 있는 이들은 끔찍한 패배의 주인공이 되거나 숭고한 결정을 내리는 용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3월 북엔즈는 숭고함과 끔찍함의 현장으로 독자를 초대하는 책들을 모았다.
드라마 <웨이워드 파인즈>는 지난해 미국 전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 중 하나다. 독재사회와 디스토피아를 중심으로 무수한 장르들의 조합이 구현된 지옥도는 작가 블레이크 크라우치의 무시무시한 필력이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결과물이다. 외딴 마을에 떨어져 자신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미친 과학자의 어둠에 기꺼이 반기를 드는 한 남자의 무용담은 말초적인 재미와 함께 다음 세상에 대한 참혹한 비전을 동시에 보여준다.
엘리너 캐턴은 <루미너리스>에서 곤궁함을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탐욕으로 뒤덮인 금광에 뛰어든 사내 ‘무디’를 그린다. 그로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점점 몸집을 불리며 비슷한 처지의 열
선택지 앞에서
-
영화
<동주>(2016)
<암살>(2015)
<깡철이>(2013)
<미스터 고>(2013)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2012)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2012)
<코리아>(2012)
<마이웨이>(2011)
<식객: 김치전쟁>(2010)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
일본 총리, 일본 대사, 일본 관리, 일본 장교, 일본 해설자, 일본 야쿠자, 일본 야구 구단주…. ‘일본인 전문 배우’라는 영역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배우 김인우는 일본인 전문 배우로 8년을 보냈다. 일본어가 제1언어인 데다 한국어 소통도 가능하고 연기력까지 갖춘 배우로서, 의도치 않게 ‘틈새시장’의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캐릭터 독식의 비결은 언어가 아닌 연기. 국어를 잘한다고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닌 것처럼 당연한 이치다. <깡철이>에서 살벌한 기운을 풀풀 날렸던 야쿠자 아키토
인생의 고비마다 영화가 있었다
-
크리스 테리오는 불협화음을 하나로 모으는 지휘자다. 서로 다른 톤과 캐릭터를 어떻게 쳐내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절묘한 균형점을 잡아나가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인다. 코미디, 액션, 스릴러를 자유자재 넘나드는 안정감도 큰 강점이다.
영화
<저스티스 리그 파트2>(2019)
<저스티스 리그 파트1>(2017)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2016)
<아르고>(2012)
<하이츠>(2005) 연출•각본
<북 오브 킹>(단편, 2002) 연출•각본
담배를 벗 삼아 밤새 타자기와 씨름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다. 확고한 작품 세계가 있어 스튜디오와 매번 다투고 자신의 원고를 지켜낸다. 물론 그런 작가도 있을 수 있다. 다만 메이저 스튜디오와 함께하는 시나리오작가는 아니다. <아르고>로 제85회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크리스 테리오는 시나리오작가를 정교한 기능공에 자주 비
코미디, 액션, 스릴러를 자유롭게
-
드루 고다드는 플롯의 해체와 조립에 탁월한 재주를 보인다. 장면의 디테일한 묘사보다도 전체적으로 리듬감 있는 플롯 진행을 선호한다. 진정 ‘재밌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센스도 갖췄다. 그의 어떤 작품이든, 관객이 영화를 체감하는 시간을 본래의 러닝타임보다 훨씬 짧게 느낀다는 건 틀림없이 그 영화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영화
<로보포칼립스>(프리 프로덕션 중)
<마션>(2015)
<월드워Z>(2013)
<캐빈 인 더 우즈>(2012) 연출•각본
<클로버필드>(2008)
TV시리즈
<데어데블>(2015~16)
<로스트>(2005~8)
<앨리어스>(2005~6)
<엔절>(2003~4)
<뱀파이어 해결사>(2002~3)
<마션>의 마크 와트니는 가히 지난해 최고의 긍정 아이콘이라고 할 만한 캐릭터다. 물론 원작자 앤디 위어가 만들어낸 인물이지만, 영화 시나리오를
공포도 SF도 명쾌하고 유쾌하게
-
평소 트위터를 즐겨하는 등 뭐든지 생각나면 글로 옮긴다. 즐겨 입는 형형색색의 옷차림만큼이나 다양한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것 같은데 그걸 버텨낼 연출자를 찾는 게 관건. 그런데 최근 데뷔작을 내놓았다. 자급자족의 열정이 보인다.
영화
<브라이트>(미정)
<파워레인저>(2017)
<미스터 라이트>(2016)
<미 힘 허>(2016) 연출•각본
<빅터 프랑켄슈타인>(2015)
<아메리칸 울트라>(2015)
<크로니클>(2012)
TV시리즈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 사무소>(2016)
<피어 잇셀프>(2009)
<마스터즈 오브 호러>(2005)
뮤직비디오
아리아나 그란데 <원 라스트 타임>(2015)
“구름 위를 날아다니면서 풋볼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비행기를 타고 가던 이십대 청년 조시 트랭크와 맥스 랜디스가 창밖을 내다보며 별뜻 없이 상상의 나래를
할리우드의 미친 공상가
-
도발적인 마이웨이의 끝은 어디인가. <엑스 마키나>까지 보고 나니 ‘대니 보일과의 협업은 연출의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어 보인다. 다만 마이웨이를 걷는 만큼 대중성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편. 원작이 있는 영화보다 원작 없이 만든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훨씬 흥미롭다. 엔딩에 이르러 담담하게 내지르는 한방이 회심의 무기.
영화
<절멸>(Annihilation, 2017) 연출•각본
<엑스 마키나>(2015) 연출•각본
<저지 드레드>(2012)
<네버 렛 미 고>(2010)
<선샤인>(2007)
<테저렉>(2003)
<28일후…>(2002)
<비치>(2000)
TV시리즈
<배트맨: 블랙 앤드 화이트>(2009)
게임
<인슬레이브드: 오디세이 투 더 웨스트>(2010)
작가는 스스로 태어나는 존재일까, 환경에 의해 키워지는 존재
과학으로 미래를 상상하기
-
조시 싱어는 탐사, 자료조사의 스페셜리스트다. 캐릭터의 심정을 함부로 상상하지 않고 주변 정황을 최대한 꼼꼼히 조사하고 묘사한다. 절정의 한순간에 매달리지 않고 전체적인 균형과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긴장감을 중요시하는 작가다. 건조해 보이지만 핵심을 놓치지 않는 대사의 맛이 발군!
영화
<스포트라이트>(2015)
<제5계급>(2013)
TV시리즈
<프린지>(2009~11)
<라이 투 미>(2009)
<로 앤 오더: 성범죄전담반>(2007~8)
<레인즈>(2007)
<웨스트윙>(2003~6)
명실공히 올해의 승자다. 미국작가조합, 영국아카데미, 크리틱스 초이스, LA비평가협회, 그리고 올해 아카데미까지, 2016년 거의 모든 각본상을 휩쓴 <스포트라이트>는 탄탄한 각본의 출발점이 여느 영화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특히 제88회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두 부문에서 수상했다는 사실은 영화의 핵
극사실주의의 신흥 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