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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어느 식당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갑자기 벌어진다. 손님 중 한명이 가게 문을 나서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사태를 확인하기 위해 가게 밖으로 나간 다른 사람도 즉시 목숨을 잃는다. 더 무서운 건 경찰도 오지 않고, 뉴스는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으며, 시내의 사람들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핸드폰 신호도 잡히지 않는 이곳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가게 안에 남은 8명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호러와 스릴러 장르에서 많은 경력을 쌓은 스페인의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감독의 신작 <더 바>는 극단적인 설정이 시작부터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은 외부와의 통신도 끊긴 채 가게에 무작정 갇혀 있어야 하며, 가게 안에서는 상식을 벗어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해 긴장을 더욱 증폭시킨다. 관객으로서는 당연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할 수밖에 없으며, 감독도 이를 동력 삼아 거
커피를 주문하시겠습니까? ‘죽음’이 서빙되었습니다 <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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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상의 바다 아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춘(계관림)은 이곳에서 막 성년식을 치른 호기심 많은 소녀다. 성인이 되었다는 통과의례로 이들에게는 딱 한번 인간세계로 나갈 자유가 주어진다. 붉은 고래로 변신한 춘은 인간세계를 여행하다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 소년 곤(허위주)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한다. 춘은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의 혼을 관리하는 영혼 관리자와 모종의 거래를 한다.
<나의 붉은 고래>에서 ‘붉은 고래’는 인간의 혼을 담는 일종의 생명체다. 춘 역시 붉은 고래로 변신해 여행을 했고, 죽은 곤의 영혼 역시 고래가 되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춘은 ‘곤의 영혼이 마을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라는 마을 공동체의 ‘터부’를 거스르고, 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는 용감하고 진취적인 소녀다. <나의 붉은 고래>는 윤회사상과 삼신할멈, 세계의 또 다른 문 같은 삶과 죽음에 관한 동양적 사고관
인간 세상의 바다 아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나의 붉은 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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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주는 임신 6개월차를 말한다. 유명 스탠드업 코미디언 아스트리드(줄리아 옌체)는 출산을 석달 앞두고 아이가 염색체 이상으로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93년 이래, 낙태가 합법화된 독일 사회. 판단은 전적으로 아스트리드와 남편, 즉 아이 부모의 몫이 된다. 영화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아스트리드가 이후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히면서 고통스러워하며 겪는 심경의 변화를, 근접 거리에서 면밀하게 관찰해나간다.
치료는 불가능하지만, 문제가 있는 아이를 미리 알 정도의 의학은 발달한 세상. 고민이 깊어지는 것도, 판단이 아이의 의지가 아닌 ‘부모에게 떨어진 과제’로 남기 때문이다. 출산 문제로 감정이 격앙된 아스트리드가 무대에 서는 장면이 있다. 꽉 들어찬 객석의 얼굴들은 이미 웃을 준비를 하고 있다. 시선의 중심에 선 아스트리드는 그들을 웃겨줄 책무가 있다. 이렇게 영화는 시종 유명 코미디언으로서의 삶과 개인의 불행을 짊어진 한 여성을 비추며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출산을 석달 앞두고 아이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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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다음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방 안을 뛰어다닌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생긴 방에서 기이한 행동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그녀의 이름은 쿄코(도미테 아미). 그녀의 말에 따르면 쿄코는 어린 나이에 일찍 성공한 예술가로 그림과 소설 모두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그런 그녀가 여성 아티스트로서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갑갑함을 토로하던 중이다. 그런데 쿄코 주변의 상황이 갈수록 기괴해진다. 아침 일찍 한 잡지사의 인터뷰 스케줄을 안내하러 온 매니저 노리코(쓰쓰이 마리코)를 쿄코가 발가벗겨 괴롭히더니, 마침 잡지사의 취재 일행이 쿄코의 집에 들이닥쳐서는 둘에게 뜨거운 포즈와 성적 관계를 강요한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영화 속 영화 촬영현장의 한 장면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정체 모를 액자식 구성의 미로 속으로 빠져든다. <안티포르노>는 소노 시온 감독이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예술’이
이 땅의 모든 여자들은 ‘자유로운 척’ 할 뿐이야! <안티포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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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블랙홀>(감독 해럴드 래미스, 1993), <소스 코드>(감독 덩컨 존스, 2011), <엣지 오브 투모로우>(감독 더그 라이먼, 2014) 같은 영화들은 잘 알려진 타임루프물이다. 주인공 한명이 특정 시간을 반복하는 이 영화들과 달리 <하루>는 주인공 두 남자(혹은 그 이상)가 같은 시간을 반복 경험하는 설정이다.
준영(김명민)은 분쟁 지역에서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다. 귀국하자마자 딸 은정(조은형)의 생일 약속 장소로 향한다. 은정은 남들처럼 자신을 챙겨주지 않는 아빠 준영에게 섭섭하고 불만이 많다. 딸을 만나기로 한 사거리에서 준영은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 것을 목격한다. 충격은 잠시뿐이다. 눈을 떠보니 그는 딸의 사고 두 시간 전으로 돌아가 있다. 딸의 사고를 막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결과는 똑같고, 사고 두 시간 전으로 다시 돌아간다. 딸의 죽음을 수차례 반복하던 중, 같은 사고 때문에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자신처
살려야 한다! 하루를 바꿔서라도!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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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지역에 위치한 분쟁 국가에서 주로 활동하는 용병 닉(톰 크루즈)은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해당 국가의 보물을 몰래 훔쳐 암시장에 판매하는 도굴꾼 행세도 하며 산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고고학자 제니(애나벨 윌리스)가 갖고 있던 보물 지도를 훔친 닉은 이후 엄청난 유적을 발견한다. 그것은 고대 이집트에서 악마에게 몸을 팔아 반란을 저지르다가 추방당한 아마네트(소피아 부텔라) 공주의 무덤. 제니와 닉은 합심해서 아마네트 공주의 관을 본국으로 송환한다. 그런데 비행기에 관을 싣고 가던 중 영국 상공에서 알 수 없는 까마귀 떼의 공격을 받아 불시착하고 만다.
도저히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비행기 추락 현장에서 멀쩡하게 살아난 닉은 자신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아마네트 공주와 연결되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천년 동안 갇혀 있던 아마네트 공주가 닉을 제물 삼아 부활하려 하자, 미지의 괴물을 상대로 싸우며 인류를 지키고 있던 비밀 조직 프로디지움의 수장 지킬 박사(러셀
신들과 괴물들의 세상, 절대적 존재가 깨어난다! <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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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나홍진 / 출연 곽도원, 황정민, 구니무라 준, 천우희 / 제작연도 2016년
내 인생 영화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한참 고민했다. <쇼생크 탈출> <포세이돈 어드벤처> <올드보이> <비포 미드나잇> 등 머릿속을 스치는 수많은 영화가 있었지만, 인생에 다시 없을 혹은 인생을 바꿔놓은 영화라고 할 만한 작품은 역시 하나뿐. 바로 <곡성>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경이로웠고, 관객과 놀이하듯 대담하게 미끼를 던지고 현혹하는 감독의 연출도 더할 나위 없이 새로웠지만 <곡성>이 나의 인생 영화인 이유는 따로 있다.
<곡성>이 개봉할 무렵 회사 같은 팀에 좋아하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회사에서는 밥도 자주 같이 먹고 회식도 종종 하는 좋은 동료 사이였지만 사적으로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혹여 그런 말을 건넸다가 어색해질까 무서워 만나자고 청하기는커녕 커피 한잔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느 날 둘이
[내 인생의 영화] 권해봄의 <곡성> 최고의 로맨스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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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서클>은 이른바 ‘투명사회’를 직격 비판하려는 야심 큰 영화다. 극중 공룡IT기업 ‘더 서클’은 페이스북과 유사한 ‘트루유’ 애플리케이션을 근간으로, 만인이 자발적으로 사생활을 공유함으로써 완벽히 개방되고 연결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니즘을 성공적으로 판다. CEO 에이몬(톰 행크스)이 뽑아낸 슬로건 “비밀은 거짓말이다”가 특히 의미심장하다. “남이 보지 않을 때 인간은 악하고 약한 면을 드러내게 되므로 완전한 사생활 공유야말로 진보”라는 논리에, 젊은 엘리트 사원들이 갈채로 동조하는 광경은 모골이 송연하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들은 세계 최대 기업에 입사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쾌감, 여가와 노동이 하나된 쿨한 기업 문화에 도취돼 있다. 흥미로운 설정을 충분히 전개하지 못한 각본이 아쉽다.
06/01
20대 말 어느 날 유학 중 영국 하원의 토론을 중계하는 텔레비전을 무심코 틀어놓고 과제를 하던 나는, 불현듯 내 눈앞의 그림이 뭔가 잘못돼 있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노 맨스 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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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서 그래.” 내내 마음에 걸리던 것이 이 한마디 대사에 녹아내렸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은 허점이 많은 영화다. 인물들에게 최소한의 동기를 부여는 하고 있지만 동의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렇다고 치고, 빠르게 넘어가는 쪽에 가깝다. 재호(설경구)는 왜 현수(임시완)에게 그토록 관대한가,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상황 속에서 현수를 버티게 하는 건 무엇인가. 병갑(김희원)은 재호를 좋아했던 걸까, 두려워했던 걸까. 중반 이후 병갑은 재호에게 묻는다. 현수를 어떻게 자기 편으로 만들었냐고. “착해서 그래. 우리 같은 것들이랑은 달라.” 이 대사야말로 <불한당>의 모든 구멍들을 갖다붙여 메울 수 있는 변명이자 장르의 우회로다. 현수는 착해서 범죄자임에도 재호가 보여준 인간미에 반하고, 착해서 어머니의 장례를 도와준 재호를 믿고, 착해서 조직보다는 정을 따른다. 재호는 자신을 믿어주는 현수의 착함에 반하고 상황을 믿지 사
[스페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과 <악녀>의 순진한 허세가 기꺼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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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끝난 후 지난 몇달간 보지 못했던 한국영화들을 몰아보았다. 대다수 영화들이 재미가 없었다. 한국의 상업영화들은 여전히 감독보다는 스탭과 배우들이 만드는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흐름이 극장 흥행으로 검증되는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순제작비 평균 60억원 이상인 상업영화들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는 걸 투자 관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이 나같은 평자들에게만 지루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내 주변의 보통 관객도 한국영화가 이제 별 볼일 없다고 말하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최근 개봉한 세편의 한국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노무현입니다> <대립군>에 대해 써보려 한다. 이 영화들은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들인데도 현실의 불의한 질서에 거역하고 공격적인 메시지를 화면에 심어놓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스페셜] 현실의 불의한 질서를 거역하려 애쓴 <대립군><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노무현입니다>의 아쉬운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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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블록버스터 시즌을 앞두고 숨고르기에 들어갔다고들 한다. 하지만 5, 6월에 개봉한 한국영화들의 면면에서 미묘한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다. 이것이 단편적인 경향에 그칠지 향후 흐름의 단초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대립군> <노무현입니다> <악녀>를 중심으로 지금의 독특한 흐름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김영진 영화평론가와 송경원 기자의 글을 싣는다. 여기 2017년 상반기 한국영화의 어떤 풍경을 전한다.
[스페셜] 김영진 평론가와 송경원 기자가 최근 한국영화의 서로 다른 경향을 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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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영화팬이 아닌 당신이라면 폴 버호벤은 여전히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그가 2000년대 들어 연출한 작품이라고는 지난 2000년의 <할로우맨>과 <블랙북>(2006)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네덜란드 감독의 흥망성쇠는 <엘르>의 개봉을 앞두고 충분히 탐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버호벤의 작품세계를 세 가지 흐름으로 정리해보았다.
네덜란드에서 스타 연출자로 활동하다 (1969~83)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폴 버호벤은 그러나 그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20대 초반부터 네덜란드영화아카데미 수업을 들으며 감독으로서의 꿈을 키워나갔기 때문이다. 자국 TV 프로그램의 연출자로 경력을 쌓던 버호벤은 1974년 로맨스영화 <사랑을 위한 죽음>으로 주목받게 된다. 히피 성향의 조각가(룻거 하우어)와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난 소녀의 관능적인 사랑 이야기를 조명한 이 영화는 버호벤에게 1974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
[스페셜]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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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고 끝없이 불편하다.”(<가디언>) “쾌락의 광폭한 양면성을 보여주는 데 두려움이 없는 작품.”(<슬랜트 매거진>) 네덜란드 감독 폴 버호벤의 신작 <엘르>가 6월 15일 개봉한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처음 공개된 뒤, 전세계 평단에 충격과 놀라움을 선사한 이 작품은 금기와 욕망을 원천으로 하는 폴 버호벤의 영화 세계에서도 강렬한 족적을 남길 영화가 틀림없다. 전작 <블랙북> 이후 10년 만에 폴 버호벤이 복귀작으로 선택한 영화 <엘르>를 소개한다. 분명한 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이 영화에서 보게 되리라는 점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엘르>가 상영되기 전까지, 폴 버호벤은 거의 잊힌 이름이었다. 그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로보캅>(1987)과 <토탈 리콜>(1990), <원초적 본능>
[스페셜] 폴 버호벤과 이자벨 위페르의 눈부신 협연 <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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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년간 박찬욱, 박찬경 감독의 ‘파킹찬스’(PARKing CHANce) 작품들은 영상 예술 창작에서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점점 더 의미가 없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예술가로서 앞장서서 영화 창작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결과물을 내놓았고, 극영화에서 거의 다루지 않은 무속신앙 같은 소재를 선택하기도 했다. 함께 협업해온 곳도 통신사에서 잡지사,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서울시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단편영화에서 뮤직비디오까지 다양한 형태로 탄생했고, 이들을 볼 수 있는 플랫폼 역시 극장이 아닌 곳으로 뻗어나갔다. 파킹찬스가 <격세지감>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봤다.
<파란만장> (2010)
역사적으로 기술 발전은 예비 창작자들에게 진입장벽을 파격적으로 낮춰주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720P HD급 고화질 영상을 찍고 바로 편집까지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보급화되면서,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취지로 스마
[스페셜] 파킹찬스의 작품들 짚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