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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렉스 데 라 이글레시아는 1991년에 단편영화 <칵테일 살인마>를 만든 뒤 <액션 무탕트>(1993)의 각본을 들고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찾았다. 각본에 흥미를 느낀 알모도바르는 장편으로 확장하라고 조언했고 ‘엘 데세오’사를 세워 제작을 지원했다. 성공을 거둔 데 라 이글레시아는 <야수의 날>(1995)의 각본을 써 다시 알모도바르에게 갔다. 알모도바르는 ‘악마’가 등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지원을 거절했다. 한때 나란히 악동으로 취급받았으나 두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른 취향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990년대 스페인은 거칠게 말해 1990년대 한국과 유사하다. 스페인 역사학자들은 스페인이 1990년대를 지나면서 프랑코 독재정권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한다. 스페인의 20세기 중반을 지배했던 프랑코 정권은 1970년대 중반에 막을 내렸지만, 수십년에 걸친 암흑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10여년이 더 필요했던 거다
공동체의 파괴를 그리는 <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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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든 해외든 대중음악 최후의 전성기는 1990년대였다. 수많은 걸작들이 발표되었으며, 이 걸작들이 거의 대부분 ‘엄청나게’ 팔린 마지막 호시절이란 의미다. 그 걸작의 목록 중에 바로 이 앨범,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를 최정상에 올려놓는 건 이제 일종의 상식 비슷한 게 되어버렸다.
얼마 전 몇몇 평론가와의 만남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OK Computer》 이후로 한정해서 이것보다 더 끝내주는 음반, 솔직히 있다고 생각해?” 그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고, 이 앨범에 대한 나의 뜨거운 사랑을 확인받은 것 같아 행복했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마니아와 비평가들은 적어도 지난 20년간 이 음반보다 영향력 있는 작품은 없었다는 데 동의한다. 이 앨범의 진가를 알기 위해선 멀리 갈 필요도 없다. 70년대의 더브(dub)와 디제이 섀도(DJ Shadow)의 작법을 끌어들인 <Airbag>, 라디오헤드판 <Bohemian Rhapsody>라 할
[마감인간의 music] 라디오헤드 《OK Computer: OKNOTOK 1997 2017》, 오래된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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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21번째 장편영화 <그 후>는 바람을 피운 출판사 사장 봉완(권해효)이 이를 눈치챈 아내(조윤희)와 내연녀 창숙(김새벽) 사이에서 겪는 진퇴양난을 그린다. 그런데 정작 봉완의 아내로부터 오해를 사서 맞고, 봉완에게 회유당하고, 창숙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는 건 그날 막 출근한 아름(김민희)이다. 비록 봉변을 당하지만 아름은 영화 속 여타의 인물과 달리 자신에게 당당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비롯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봉완의 가식을 꾸짖을 줄 아는 여성이자 관찰자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에서 제목을 빌려온 영화는 아름과 만나면서 봉완의 민낯이 드러나는 하루 동안의 코믹한 해프닝 사이로, 봉완을 사로잡고 있는 창숙과의 만남이라는 과거, 그리고 이 소동과 관계가 끝난 후의 어느 하루의 시제가 뒤섞이는 영화다. 흑백의 카메라는 그 어느 때보다 인물들 가까이 클로즈업되며, 그렇게 붙어선 카메라 사이로 공간을 꽉 채우는 것은
<그 후> 홍상수 감독, "믿음과 마음,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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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롱거> Stronger
감독 데이비드 고든 그린 / 출연 제이크 질렌홀, 타티아나 마슬라니
2013년 4월 15일. 미국 사회에 큰 상처를 남긴 보스턴 마라톤 테러가 발생한 날이다. 결승전 근처에서 터진 폭탄으로 3명이 숨지고 26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스트롱거>는 이 사건으로 인해 두 다리를 잃은 생존자이면서, 용의자 검거에 결정적 증언을 제공한 실제 시민 제프 바우먼(제이크 질렌홀)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영화는 그의 눈을 통해 끔찍했던 그날의 실상을 그리는 데서 나아가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희망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정신력을 그린다. 제프 바우먼이 쓴 동명 원작을 존 폴로노가 각색했다. 9월 22일 북미 개봉예정.
[WHAT'S UP] <스트롱거>,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희망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정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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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름은 내게 언제나 서늘한 기억이다. 개인 홈페이지에 쓴 잡글 덕에 ‘<디 워> 사태’ 한복판에 끌려갔고 곧장 매국노로 단죄되었다. 충무로로부터 배척당한 코미디언이라는 피해자 서사에 빙의된 대중의 분노는 졸지에 일개 무명감독인 나를 충무로 대표 주류라고 몰아세웠다. 어쩌면 그때부터 민감해졌나 보다. 왜 대중은 피해자 서사에 열광할까. 반면 정작 다른 약자들 서사에는 왜 그토록 둔감해졌을까.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질문은 아직 유효한 것 같다.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어떤 종류이든 사회의 시선을 끌려면 스타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자유주의하에서 대중이 앞다투어 ‘피해자 되기’에 골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누가 더 피해자인지를 경쟁적으로 전시하는 인정투쟁의 세계.
누군가는 이것이 형식적 민주주의가 가져온 ‘평등’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형식적으론 평등하지만, 실제로는 불평등이 격화되면서 모든 권위와 전문가 집단에 대한 불신
우리는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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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영 감독은 <들꽃>(2014), <스틸 플라워>(2015), <재꽃>(2016)으로 이어지는 ‘꽃 3부작’을 통해 우리가 손잡아주지 못한 소녀(들)의 이야기를 해왔다. 집 나온 세 소녀의 위태로운 걸음을 따라 밟았던 카메라(<들꽃>)는 이어서 매정한 세상에 맨몸으로 부딪히는 홈리스 소녀를 들여다보았고(<스틸 플라워>), 다시 시골에 정착한 소녀가 자신을 닮은 소녀를 보살피는 과정(<재꽃>)을 따라간다. <재꽃>은 아빠를 찾으러 시골 마을에 도착한 11살 해별(장해금)과 해별의 친구이자 보호자가 되어주는 하담(정하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다. 앞선 두 작품과 비교해 <재꽃>은 밝다. 희망적으로 3부작의 마침표를 찍고 싶었냐고 묻자 박석영 감독은 “이상한 대답이란 걸 알지만 하담이에게 친구가 생긴 게 좋다”는 말을 들려줬다. <재꽃>에 이르러 하담은 비로소 햇볕 아래서 웃는다.
<재꽃> 박석영 감독 - 나를 위로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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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누아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7월 6일부터 23일까지 ‘다크 시티: 필름누아르 특별전’을 연다. 폭력과 부패가 만연한 암흑 세계를 그린 13편의 작품들이 관객과 만난다. 빌리 와일더의 <이중 배상>(1944), <선셋 대로>(1950), 미국 B급영화의 제왕으로 불리는 에드거 G. 울머의 <우회>(1945), 마이클 커티스의 <밀드레드 피어스>(1945),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키스 미 데들리>(1955) 등이 포함됐다. 찰스 비더 감독의 <길다>(1946)의 상영후에는 한창호 영화평론가와 함께하는 시네토크도 준비돼 있다. 상영과 시네토크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cinematheque.seoul.kr)에서 확인 가능하다.
독립예술가의 베이스캠프
제20회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하 프린지)이 7월 19일부터 22일까지 월드컵경기장 일대에서 열린다. 1998년 대학로 ‘독립예술제’에서 출발한 프린지
[culture highway] <쇼미더머니> 시즌6, 6월 30일 첫방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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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안서현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7살 유치원생이자 어엿한 아역배우였던 안서현은 의젓한 눈빛, 차분한 태도로 인터뷰에 임했다. 동행한 부모에게 의지하려 하거나 귀여운 미소를 무기 삼아 어른의 마음을 홀리려 하지도 않았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에서 훈(이정재)과 해라(서우)의 6살 난 딸 나미를 연기했을 때도 안서현은 아이답지 않은 서늘한 눈빛과 분위기를 보여준 바 있다. 이후 <드림하이>(2011), <미안해, 고마워>(2011), <신의 한 수>(2014) 등 영화와 드라마에 꾸준히 출연한 안서현은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만나 연기 경험을 확장한다. 슈퍼돼지 옥자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는 굳센 태도로 옥자를 향한 사랑을 지켜낸다. 감정 연기와 액션을 듬직하게 소화해낸 14살 소녀는 <옥자>에서 함께 연기한 틸다 스윈튼, 제이크 질렌홀, 폴 다노와 나란히 제7
[메모리] 안서현, 연기하며 성장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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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보니 그의 이름을 안 지 꼭 30년이다. 그때 나는 어렸다.
얼굴을 본 건 오랜 시간이 흐르기 전이었다. 그때도 나는 어렸지만, 성인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그를 거리에서 보았다. 처음 사진기를 들이댄 건 길어야 20년 짧다면 15년 전이리라.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의 인상은 편치 않았다. 사진기를 둘러멘 자들이 잠시 앞을 가릴라치면 “야, 이놈들아!”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불편했다. 나를 지칭한 나무람이 아니라 해도 모욕감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사진기를 든 양아치거나 훼방꾼인가. 나 자신이 싫었다. 동시에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됐다.
3년 전, 해고됐다 복직한 노동자 김수억이 다시 받은 첫 월급을 털어 ‘스승의 날’을 마련하고 싶다 말하고, 함께하자는 손들이 웅성댈 때 사진쟁이들에게 요청이 날아왔다. 그에 관한 사진영상을 만들어 달라는 거였다. 기꺼이 도왔지만 그가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날 밤, 주름진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날 밤 노동
[노순택의 사진의 털] 나는 백기완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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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인 클레어(테레사 팔머)는 베를린을 여행하다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남자 앤디(막스 리멜트)다. 그날 하루 앤디와 짧은 만남을 가진 클레어는 그를 잊지 못해 먼저 앤디를 찾아간다. 두 사람은 앤디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앤디가 여행객만을 노리는 상습적인 감금범이란 사실이 밝혀지며, 영화는 급격히 노선을 바꾼다. 기댈 곳 없는 여행객에게 베를린은 한낱 외딴 섬일 뿐, 영화는 음침한 스릴러로 질주한다. 클레어는 앤디의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고 탈출을 노린다. 그러나 클레어의 시도는 앤디의 분노를 자극할 뿐이다. 공포스러운 동거를 끝내기 위한 클레어의 처절한 노력이, 무심한 표정으로 학대를 일삼는 앤디와 대조되며 긴장감을 형성한다.
<베를린 신드롬>이란 영화의 제목은 명백히 ‘스톡홀름 신드롬’ (인질이 범인에게 동화되는 심리 현상)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으로 배경이 바뀌었을 뿐, 가해자에게 기묘한 끌림을
[리뷰] <베를린 신드롬>, 가해자에게 기묘한 끌림을 느끼는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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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기 위해 꼭 뉴욕에 갈 필요는 없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쉬 러브즈 미>의 공연 실황을 담은 영상이 극장가를 찾아온다. 실제 무대가 주는 여운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그 아쉬움은 뉴욕까지 날아가는 비용을 아끼는 대가라고 해두자. 오히려 여러 각도에서 무대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영화만의 장점. 각 대목의 포인트를 가장 잘 살리는 구도로 촬영돼 한 앵글에서만 무대를 봐야 하는 공연보다 시야가 넓다. 무대의 전경부터 배우들의 세심한 표정까지 눈에 담을 수 있는 알짜배기 선물세트.
<쉬 러브즈 미>는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마라첵 향수점’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바람둥이 코달리(개빈 크릴)와 그의 연인 리터(제인 크라코스키), 얼굴만 맞대면 싸우기 일쑤인 아멜리아(로라 베난티)와 조지(재커리 리바이) 등 개성 있는 캐릭터를 통해 좁은 공간에서도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이들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두 사람은 아멜리아와 조지다
[리뷰] <쉬 러브즈 미>, 무대예술만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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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소녀 해별(장해금)은 아버지 명호(박명훈)를 찾아 시골 마을에 도착한다. 블루베리 농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가던 하담(정하담)은 제 덩치만한 캐리어를 들고 서 있는 해별을 만나 사정을 듣고 명호네 집에 데려다준다. 그러나 명호는 해별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의심하곤 친자 확인이 될 때까지 하담이 머무는 곳에 해별을 맡긴다. 하담은 철기(김태희)와 그 엄마(정은경)의 집 방 한칸에 세들어 산다. 해별의 등장은 어른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된 명호는 청산하지 못한 술과 감당하지 못할 부성에 휘청이고, 결혼을 앞두고 목돈이 필요한 철기와 진경(박현영)은 명호가 약속한 돈을 주기 힘들어 보이자 모종의 사기를 친다. 어쩌다 해별의 보호자가 된 하담의 마음도 출렁인다. 해별이 저처럼 버림받아 홀로 될까 걱정돼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 혼돈을 불러온다.
<재꽃>은 <들꽃>(2014), <스틸 플라워>(2015)에 이
[리뷰] <재꽃>, 박석영 감독의 ‘꽃 3부작’ 마지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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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신지(이타오 이쓰지)의 삶은 정지 상태다. 아내는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그의 영화는 몇년째 답보상태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될 정도로 유명한 감독이었던 그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자신도 인정하지 못할 삼류영화를 제작 중이다. 그런데 주연배우 안리가 상대배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촬영을 거부하면서 제작이 중단될 위기다. 설상가상으로 신지는 안리와 실랑이를 벌이다 그녀를 추행한다.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일명 ‘로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프로젝트의 가장 핵심적인 규칙은 10분에 한번 정사 장면이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의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은 이 규칙을 ‘10분에 한번씩 다른 여자와의 정사’로 실현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섹스 신을 나열하면 이렇다. 이웃집 여자를 보면서 하는 시각적 상호 자위형 섹스, 오랜 친구이자 동료와의 익숙한 섹스, 제자와의 섹스, 영화를 퇴짜놓은 배
[리뷰]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 애잔한 짐노페디의 선율을 따라 흐르는 관능적인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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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영(김수현)은 거대 카지노 시에스타를 운영하는 야심만만한 사업가다. 범죄 조직 보스 조원근(성동일)이 그의 앞에 나타나 카지노 사업권을 요구한다. 장태영은 곤혹스러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카지노에 자금을 투자해줄만한 투자자들을 찾아나선다. 한편, 신경정신과 박사 최진기(이성민)는 장태영의 해리성정체장애를 치료하고 있다. 진료를 받을 때마다 장태영은 욱하는 성격을 참지 못하고, 최진기는 장태영에게 완치를 약속한다. 어느 날 정체불명의 투자자(김수현)가 나타나 자금 문제를 해결해주는 동시에 조원근도 처리해주겠다고 제안한다. 투자자는 이름도, 외모도 장태영과 똑같다.
<리얼>은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 같다. 이야기의 얼개를 요약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서사 전개는 출구 없는 미로 같다. 장태영의 분열된 자아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까닭에 서사는 김수현의 연기에 힘겹게 기대어갈 수밖에 없다. 분장의 도움을 받고 목소리에 기름칠을 한 채 온몸을 내던져도 김수현은 물에 빠진 연
[리뷰] <리얼>, "나와 똑같이 생긴 놈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