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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음을 정복할 거예요.”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은 자신의 전부였던 어머니가 사망하자 생과 사의 힘을 얻는 데에 일생을 바친다. 빅터는 신화 속 창조주 프로메테우스가 되고자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흙더미에서 인간을 빚듯 사체 더미에서 완전한 신체를 찾아내 피조물(제이컵 엘로디)을 창조하고, 인류에게 지혜를 선사한 프로메테우스처럼 피조물에게 언어를 가르친다. 그러나 빅터는 실험 성공 이후의 생까지 고려하지 못했다. 막연한 공허에 사로잡힌 창조주는 자신의 피조물을 증오하고 질투하다 급기야 그를 제거하려 든다.
본디 메리 셸리가 쓴 원작 소설에도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부제로 붙은 만큼,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프랑켄슈타인>을 분석하는 주요 모티프다. 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는 아키타입으로서의 프로메테우스를 넘어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로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쓴다. 바슐라르가 주창한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의 왕 제우스에 불복종하
[기획]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로 다시 쓰다, <프랑켄슈타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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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멕시코의 한 영화학도가 앨프리드 히치콕의 <새>를 분석하며 아래와 같은 문장을 적었다. “호러영화에 한해서, 현실에 구속되지 않은 예술가는 영화의 형태를 띤 시(詩)로서 세상에 대한 가장 순수한 반영을 창조할 수 있다.” 히치콕을 동경하던 청년의 이름은 오늘날 괴수 호러의 거장이 된 기예르모 델 토로다. 델 토로는 젊은 날 선대 감독을 분석한 자신의 언어를 닮아갔다. 세상과 불화했던 소년은 어린 시절 동화 속 아웃사이더였던 괴물에 스스로를 동일시했고, 지금껏 괴물을 자신의 수호 성인으로 삼았다. 괴물을 잔혹한 현실을 비추는 순결로 표상하며 <악마의 등뼈><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등의 시적 호러를 내놓았다.
무수한 영화제에서 큰 상을 연거푸 받고 멕시코의 좋은 친구들, 알폰소 쿠아론,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와 함께 할리우드에서 ‘스리 아미고’로 활약하는 동안 기예르모 델 토로는
[기획] 아버지라는 이름의 굴레, <프랑켄슈타인> 리뷰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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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 차이와 갈등은 영화로 해소될 수 있을까. 현재 홍콩 사회가 맞닥뜨린 세대 갈등과 가족문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끌어안은 <네 번째 손가락>은 공령정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네 번째 손가락>은 ‘메이킹 웨이브즈: 홍콩영화의 새로운 물결’(이하 홍콩영화제)에 선보이며 많은 관객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올해 씨네큐브에서 개최된 홍콩영화제는 현재 태동 중인 홍콩영화의 맥락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홍콩과 미국에서 자란 공령정 감독은 LA에서 영화 후반작업 실무자로서 경력을 쌓았고, <그레이 아나토미><어글리 베티>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때 잘나가는 스쿼시 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단기 코치 업무를 전전하는 탕숙인(곽부성)은 척추 희귀병이 있는 딸 치(나탈리 쉬)를 오랫동안 외면해왔다. 도저히 좁히기 어려운 이들의 갈등과 충돌은 무엇으로 용해될 수 있을까. 공령정 감독이 축조한 세계가 은유하는 것들을 함
[인터뷰] 영화는 모든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 <네 번째 손가락> 공령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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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26일부터 10월25일까지 한달 동안 서울에서 개최된 ‘홍콩위크’는 홍콩특별행정구 정부 여가문화서비스부의 주최로 홍콩 고유의 문화와 예술의 다양성을 다채롭게 선보였다. 그중 홍콩영화를 통해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메이킹 웨이브즈: 홍콩영화의 새로운 물결’(이하 홍콩영화제)은 영화제 안에서 관객들이 아름다운 도시를 마음껏 탐험하도록 했다. 이번 영화제의 상영작은 총 10편. 그중 두 작품에서 지금 한창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배우가 등장한다. 바로 개막작 <라스트 송 포 유>와 공령정 감독 연출작인 <네 번째 손가락>의 배우 나탈리 쉬다. 영화 속 세계관을 자유롭게 상상하며, 섬세한 디테일을 챙기는 어린 배우를 보면서 홍콩영화의 유려한 가능성도 함께 점칠 수 있었다.
- 올해 홍콩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 10편 중 2편이 나탈리 쉬 배우가 출연한 작품이다. 그중 한 작품은 개막작이기도 하고. 이 지점이 뜻깊게 다가올 것 같다.
너무 영광
[인터뷰] 영화로 걸어 들어가 캐릭터되기, <라스트 송 포 유><네 번째 손가락> 배우 나탈리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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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사북>은 강원도 정선 사북에서 1980년에 일어난 광부들의 항쟁과 이를 은폐하려 국가가 시행한 폭력적인 행태를 취재한 다큐멘터리다. 영화 <김대중><아이언 크로우즈>등 다큐멘터리 작업을 꾸준히 해온 박봉남 감독은 광부와 경찰, 국가 등 어느 한쪽에 서서 사건을 기록하는 대신 “사북 사건을 가장 객관적으로 깊이 있게 기록한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사북 사건에 관한 사료와 증언이 밀도 높게 담긴 <1980 사북>은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경쟁 장편 대상 및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수상과 더불어 제22회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도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 다큐멘터리 촬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사북 사건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었나.
사북 사건이 벌어진 1980년 당시엔 중학교 2학년이었고, 1985년 대학생 시절에 신문에서 사북 사건에 관한 기사를 봤다. 그럼에도 1
[인터뷰]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 <1980 사북> 박봉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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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나진다. 여자 교도관과 수감자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 <만남의 집>은 담담하게 사람의 온기를 전한다. 차정윤 감독은 장편 데뷔작에서 데뷔작이라고 믿기 힘든 사려 깊은 시선과 원숙한 태도로 이들을 관찰한다. <만남의 집>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사연 대신 사람을 전하는 영화다. 과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 상투적인 문구가 얼마나 쉽지 않은 경지인지 쉽게 넘겨짚기 어렵다. 교도관과 수감자라는 이색적인 사연에 끌려가지 않고 그들이 사는 모습, 하는 행동, 처한 상황을 차분히 묘사한 카메라는 관객들에게 기꺼이 만남의 장을 마련한다. 일상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옮기는 비범함의 뒷면에는 작품과 인물을 제한몸처럼 껴안고 고뇌한 창작자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차정윤 감독의 차분한 설명 속에서 인연의 힘을 느낀다.
- 개봉 후 GV를 통해 관객들과 직접 만나니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 여기까지 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터뷰] 만나야 할 것들은 결국 만나진다, <만남의 집> 차정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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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서일까.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커진다.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에도 그랬으니까 나이 탓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런데 이 말 자체에 이미 문제가 있다. 일단 나이가 ‘탓’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걸 갖고도 스스로를 위로할 이유도 없다. 뭔가 방어적이다. 이를테면 나이가 든 ‘덕분’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비로소’ 더 잘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라 ‘자부’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해놓고도 뭔가 ‘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굳이 그런 것에 대해 발끈하며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가는 것 역시 다분히 방어적이라 느껴지기 때문일 테다. 아무래도 근본은 ‘아쉬움’에 있는 것 같다. 아쉬움은 무력감의 표현이고, 무력감이란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좌절에 의한 것이고, 이 경우의 좌절은 아무래도 나이가 너무 ‘어려서’보다는 ‘많아져버려서’에 기인하는 듯하니 말이다. 꽤 유서 깊은 동네의 밥집이자 술집이 장사를 접는 모습을 보며
[정준희의 클로징] 당신의 은퇴를 향해 보내는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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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영재 형주>의 16살 주인공 형주(정다민)를 뽑는 오디션 공고를 봤을 때, 배우 정다민은 마음이 동했다. “형주와 나에게 수학과 스케이트보드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필이 없어 셀피 사진 한장과 보드를 타는 영상을 보냈고, 대면 오디션에서는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정석적인 연기로 합격했다. 극 중 형주는 밴드 보컬이던 죽은 엄마(신기환)에게서 신장질환 유전병을 물려받았다. 생존을 위해서는 신장 공여자 확보가 필수적이지만 아버지 민규(곽민규)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유전자 검사 결과를 받게 된다. 살기 위해, 또 알기 위해 형주는 유력한 친아버지 후보인 세 남자를 찾아 전국을 누빈다. 시나리오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몰랐던 정다민이 현장을 실감한 건 뜻밖에도 뾰루지 때문이었다. “첫 촬영 날, 볼에 큰 뾰루지가 나서 진행할 수가 없었다. 이 많은 사람의 시간에 내가 영향을 준다는 것, 영화는 거대한 공동체 작업이라는 걸 그때 실감했다.” 죽은 엄마
[WHO ARE YOU] 서툴지만 용감하게, <수학영재 형주> 배우 정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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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고양이를 영험한 동물로 꼽지만, 충실한 강아지 인디도 어느 날부턴가 불길한 기운을 느끼기 시작한다. 주인 토드(셰인 젠슨)의 건강 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그의 곁에 의문스러운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피를 토하고 병원에 실려간 토드는 무슨 일인지 퇴원 직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낡은 별장으로 향한다. 외진 숲속에서 자신의 눈에 아른거리는 흉측한 형상으로부터 인디는 토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벤 리언버그의 <굿 보이>는 견생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호러영화다. 이따금 허공을 향해 짖는 반려견의 행동이 마치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서늘함을 포착하는 듯 풀어낸 영화의 발상이 인상적이다. 다만 견생이 마주할 실질적 공포를 묘사하기보단 주인을 위한 충직만으로 반복되는 서사는 과감한 시도에 비해 얄팍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명견 인디의 호연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다.
[리뷰] 영견(靈犬)도 곧 충견(忠犬)이기에 가능했다, <굿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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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정애화)와 아들(윤원준), 치매 노모(변중희)와 LA에 정착한 춘배(김종구)는 어느 날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요양원에서 어머니를 오늘 데리러 가겠다고 하지만 설날 준비로 바빠 얼버무리고 만다. 오랜만에 얼굴을 비친 딸 윤희(이주우)와 사위(손문영)는 약속과 달리 한복을 입고 오지 않고, 아들이 느닷없이 멕시코계 여자 친구를 부르면서 춘배의 심기는 더 불편해진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사라지고 만다. 익숙한 명절 집안을 배경으로 하는 <라리랑>은 보통의 가족이 품고 있는 갈등을 능숙하게 저글링한다. 온 가족이 모인 식탁부터 엄마와 아들이 단둘이 마주한 세탁실까지, 말 한마디가 걷잡을 수 없는 다툼으로 번지는 과정을 위트 있게 연출한 대화 시퀀스들이 인상적이다. 가족은 일심동체여야 한다는 안정적인 결말로 향하지만 배우들의 조화로운 앙상블이 개성을 만든다.
[리뷰] 재료와 균형이 어우러진 한상차림처럼, <라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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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에서 나만 탈출했다.” <1980 사북>은 혼자 살아남았다는 한 남자의 죄책감 서린 목소리로 열린다. 1980년 4월, 저임금 착취와 어용노조의 폐해에 맞선 사북의 광부들이 항쟁을 벌였다. 유혈 사태는 노동자, 경찰, 노조원의 가족까지 폭력의 가담자와 피해자를 뒤섞어놓았다. 계엄군 투입 직전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나, 이후 시위에 참여한 광부들이 체포·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사북항쟁의 트라우마는 짙어졌다. 영화는 시대의 야만을 단순히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존자들의 엇갈리는 증언을 모자이크해 이 혼란을 기록하려 한다. 100여명 이상을 인터뷰하고 방대한 아카이브를 수집해 국가 폭력이 공동체를 와해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오늘날 되풀이된 풍경에도 닿는다. 다중의 진실과 슬픔이 맺힌, 그러나 잊혀진 역사를 들여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곧 <1980 사북>의 윤리다.
[리뷰] 낯선 역사의 내장까지 침투해 기억을 깨우는 카메라, <1980 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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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하객으로 만난 데이빗(콜린 패럴)과 새라(마고 로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동차를 빌려 타고 길을 떠난다. 목적지도 이유도 분명치 않던 그들의 여정은 점차 과거를 향하고, 문을 통과할 때마다 가슴에 묻어둔 장면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슬픔과 후회, 못다 한 말과 놓친 순간들. <애프터 양>과 <파친코>를 만든 코고나다 감독은 회피해온 우리의 감정을 소환해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진다. 음악 또한 지나칠 수 없는 부분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히사이시 조는 자신만의 맑고 절제된 선율로 특별한 여정에 햇살을 드리운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려면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명랑한 언어로 말하는 이 영화는 기억의 여행길에 관객을 초대해 다시 사랑할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한다.
[리뷰] 마음의 결절을 풀어가는 또 한번의 시간여행, <빅 볼드 뷰티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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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니콜 키드먼)는 로봇 자동화 회사의 CEO다. 일상을 통제하는 데 익숙한 그는 지배-복종 역학을 따르는 성적 판타지를 숨겨왔다. 어느 날 출근길, 그는 목줄 풀린 개를 단숨에 진정시키는 사무엘(해리스 디킨슨)에게 이끌린다. 회사에서 두 사람은 대표와 인턴으로 재회한다. 로미를 꿰뚫어보듯 사무엘은 도발적인 제안을 하고, 이들은 밀회를 이어간다. 불륜, 나이 차, 회사 내 위계 등의 요소가 이 관계를 문제적이고 더 자극적으로 만들지만, 로미와 사무엘의 BDSM 역할극 자체는 상호 동의하에 규칙을 조율하며 하는 놀이다. 이때 카메라의 관심은 로미가 느끼는 감각과 심리에 있다. 영화는 대화와 행위의 리듬, 권력의 밀고 당김을 노련하게 조절해 긴장을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도 방향성을 유지하며 로미가 억압된 욕망을 해방하고 삶의 균형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다.
[리뷰] 익숙한 설정에 깔끔하게 녹아든 욕망 탐구, <베이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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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베일리(니키야 애덤스)는 훨훨 날아 떠나고 싶다. 싱글 대디 버그(배리 키오건)와 오빠 헌터(제이슨 부다)와 함께 무단 점거한 집에 살고 있는 베일리 주변은 엉망진창이다. 철없는 아빠는 새 여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린다며 난리법석을 떨고, 이복오빠는 불량한 무리들과 어울리느라 정신이 없다. 친엄마가 가까이 살지만 동생들 돌보기에도 버겁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마을을 떠나 자연 속에서 위안을 얻던 베일리는 어느 날 버드(프란츠 로고프스키)라는 이름의 한 남자를 만난다. <베일리와 버드>는 <붉은 거리>(2006), <피쉬 탱크>(2009), <아메리칸 허니>(2016)로 칸영화제를 휩쓴 앤드리아 아널드 감독의 신작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팔색조 감독이 이번에는 사실주의와 드라마,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술적 리얼리즘을 선보인다. 둥지를 떠나고 싶은 새와 다시 둥지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새가 나란히 날아가는 마술적인 순간, 사랑과 희
[리뷰] 마술적 리얼리즘이 선사하는 자유, <베일리와 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