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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랑>의 도입부. 빨간 망토의 소녀는 폭탄이 든 가방을 테러리스트에게 전달한 다음 지하의 컴컴한 수로로 돌아온다. 그녀 앞엔 서너명의, 그녀보다 어린 아이들이 음료 팩을 빨아먹으며 서 있다. 얘들도 폭탄 가방을 들고 들락거렸을까. 소녀는 질문할 틈도 없이 하얀 음료 팩과 두 번째 폭탄 가방을 받아든다. 그리고 얼마 후, 특기대의 임중경(강동원)과 맞닥트린다. 그만 있었다면 소녀의 행동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방에서 검은 옷의 짐승 같은 존재들이 압박하자 그녀는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한다. 중경은 잠을 못 이룬다. 소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인랑>에서 소녀들은 수난의 시대를 산다. 특기대는 앞서 잘못된 정보 아래 출동한 현장에서 10여명의 소녀를 쏘아 죽였다. 중경은 소녀들의 피가 자기 몸 위로 흐르는 기분을 느낀다. 소녀보다 몇살 더 많은 여주인공이라고 해서 하나도 나을 건 없다. 구미경(한예리)이 이윤희(한효주)를 마
오해받은 <인랑>을 옹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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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이 이룬 성취는 무수히 회자되고 있으며 대체로 수긍이 가는 바이지만, 나는 영화의 단 한 장면이 목에 걸려 이 작품에 온전한 찬사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장면은 그냥 넘기기에는 끝내 미심쩍게 느껴지기에 영화의 여기저기를 경유한 뒤에 다시 한번 바라보고자 한다. 쇼타(조 가이리)가 마트에서 양파를 훔치고 달아나다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던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우선은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부터 소개하며 글을 시작하여야 할 것 같다.
뛰어내린 것은 왜 하필 쇼타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에서 가족의 세계가 죽음을 품는 것은 흔한 일이나 <어느 가족>의 특별한 점은 죽음이 이 가족을 유지시키는 동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츠에 할머니(기키 기린)가 남편의 죽음과 변심의 대가로 받는 돈으로 살아가며, 그녀의 죽음은 다시 한번 (그녀가 남긴 돈으로써) 가족의 생존을 연장시킨다. 그 죽음에는 단순히 육신의 죽음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단절도 포함된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의 세계에서 어떤 죽음을 고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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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민족주의적 혐오주의자들에 대항해 일본 시민들이 카운터스라는 단체를 조직한다. 카운터스 안에는 여러 부대가 있는데, 그중 거친 남자들의 조직인 오토코구미는 혐오주의자들을 혼내주기 위해 무력도 불사하는 소수정예 부대다. 오토코구미의 대장은 전직 야쿠자였던 다카하시. <카운터스>는 매력적인 캐릭터 다카하시를 중심으로 카운터스가 극우단체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와 맞서 싸워 혐오표현금지법 제정까지 이끌어내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권투부 학생들의 짠내 나는 성장담 <울보 권투부>(2014)에 이어 또 한번 재일 조선인의 차별받는 현실에 주목한 이일하 감독은 <카운터스>에선 성실한 관찰자이자 운동가로서 일본 내부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는다. 이일하 감독은 200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과 오사카예술대학에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했다. 오사카예술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의 스승은 <천황군대는 진
<카운터스> 이일하 감독 - 카메라와 인물 그 사이의 화학작용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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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 하지만 <목격자>는 범인의 행적을 추적하는 스릴러영화가 아니다. 범인은 시작부터 노출되며, 범인과 추적자의 대결구도는 희박하다. 오히려 영화는 그 시각, 범인의 얼굴을 본, 그로 인해 범인에게 신분이 노출된 목격자의 공포에 찬 심리를 좇아가는 특이한 스릴러다. ‘신고하면 보호해줄 수 있어?’라고 반문하는 영화 속 평범한 소시민 상훈(이성민)의 외침처럼, 사회의 안전망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의 도덕적 선택만을 강요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캐릭터가 아니라 그 질문이 우리에게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긴장과 쾌감보다는 씁쓸한 충격이 더 크게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날의 분위기>(2015) 이후 두 번째 작품으로 돌아온 조규장 감독을 만났다.
-살인을 목격하는 상훈을 비롯해 아파트 주민들의 대처까지 영화가 보여주는 상황이 리얼하다. 실제 유사한 사례가 있었나.
=시작은 내 꿈 이야기였다. 혼자 아파트에 살고 있는
<목격자> 조규장 감독 -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가정법이 공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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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렉> 시리즈가 비상에 걸렸다. 8월10일(현지시간) <엠파이어>는 “<스타트렉 4>(가제)에 출연이 예정됐던 크리스 파인, 크리스 헴스워스가 출연료 문제로 하차를 논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제작사 파라마운트는 <스타트렉> 시리즈는 <스타워즈> 시리즈,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 영화들처럼 큰 규모의 예산이 들어가는 영화가 아니라 주장했고, 두 배우와 임금 협상이 결렬된 듯하다”고 전했다.
실제 최근 제작된 <스타워즈> 시리즈의 영화들, MCU 영화들이 대부분 2억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간 반면, <스타트렉> 시리즈는 모두 2억 달러 이하의 제작비로 제작됐다. 또한 3편인 <스타트렉 비욘드>는 흥행 면에서도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크리스 헴스워스는 1편인 <스타트렉 더 비기닝>에서 주인공 제임스 커크(크리스 파인)의 아버지, 조지 커크로 잠깐 출연한 바 있다.
크리스 파인 X 크리스 헴스워스 <스타트렉 4> 하차 논의 중, 제작 적신호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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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와 어울리기보다 혼자서 책을 끼고 도서관을 향하는 게 편한 대학 신입생 델마는 오슬로의 구름 낀 하늘처럼 무채색의 표정을 곧잘 짓고 있다. 노르웨이의 어느 길에서 어깨를 스친다 해도 특별한 인상으로 각인될 것 같지 않은 수수한 얼굴과 정갈한 옷차림. 델마는 그렇게 순수의 상태로 관객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내 평범해 보였던 델마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하얀색 도화지는 어둡고 강렬한 색들로 채워진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델마>의 델마를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배우”로 캐스팅하고 싶었던 이유도 델마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짐작하지 못하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에일리 하보는 오슬로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했고, 재즈밴드 싱어로도 활동했으며, 영화 <닥터 프록터스 버블 인더 배스텁> <더 웨이브> 등에 출연한 적 있는 신인배우다. “영화의 두 주인공 델마와 아냐를 캐스팅하기 위해 거의 천명에 가까운 사람을 만났다. 에일리 하
<델마> 에일리 하보 - 수수함에서 강렬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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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씨네21>은 “타임라인으로 정리해본 <군함도>” 기사(1118호)를 통해 <군함도>를 둘러싼 여러 논쟁의 확산 과정을 살펴본 바가 있다. 지난 7월 25일 개봉한 <인랑> 역시 <군함도>와 구체적인 이유는 다르지만 구설의 확산과 흥행 성적의 상관관계가 존재했다. 심지어 그 속도가 유례없이 빨랐다는 점에서 <인랑>은 개봉 직전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사건을 반추해볼 만하다. 주연배우 논란부터 출연배우의 인스타그램 글까지, <인랑>을 둘러싼 잡음을 정리해보았다.
6월 20일_정우성과 난민 이슈
<인랑> 개봉을 앞두고 배우 정우성이 세계 난민의 날을 맞이해 장문의 글을 올렸다. 방글라데시 쿠투팔롱 난민촌 사진 그리고 제주 예멘 난민신청자 관련 유엔난민기구의 입장문과 함께 난민에 대한 이해와 연대로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달라고 촉구한 것이다.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친선대사 정우성은 그동안 난민
<인랑> 개봉 전후 영화를 둘러싼 사건들의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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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급’이라는 유령이 영화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2017년 개봉한 김수현 주연의 영화 <리얼>은 <씨네21>에서 대체로 1~2점의 전문가 별점을 받으며 완성도 면에서 비판을 받았고, 최종 관객수 47만명(손익분기점 300만명)의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이 영화는 올초 1월 31일 개봉한 <염력>과 지난 7월 26일 개봉한 <인랑>의 개봉 당시 다시 화제가 됐다. <리얼>과 비슷하게 엉망이라는 의미를 담은 ‘<리얼>급’이라는 표현은 개봉 직전에 커뮤니티나 매체에 올라온 특정 리뷰에서 파생됐다. <염력>을 사전 시사회에서 감상한 한 네티즌은 “<리얼> 폭주 신에서 보았던 관객의 실소를 경험했다”는 감상을 남겼는데, 이 글이 인터넷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면서 <염력>은 개봉도 하기 전에 <리얼>의 비교 대상이 됐다. 개봉날 아침부터 “태어나서 본 영화(<리얼&g
<인랑>에 무슨 일이… <리얼>급? 과연 이래도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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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2005)에 등장했던 501 군단의 정체는 영화에서는 다스 베이더와 함께 포스의 균형을 어지럽히는 다크 사이드 무리 중 하나로 묘사되지만 현실에서는 선행을 도맡아 베푸는 자선 코스튬 단체다. 즉, ‘501 군단’은 “나쁜 놈들이 행하는 선행”을 슬로건으로 삼고 <스타워즈> 캐릭터의 코스튬을 제작해 만들어 입은 다음 자선활동을 벌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다. 그러니까 오른손이 하는 선행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을 넘어 대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끔 스톰트루퍼 헬맷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선행을 베푸는 희한한 풍경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2015년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 개봉에 맞춰 한국 지부가 결성된 501 군단은 한국 지부장 이윤찬씨의 설명에 따르면 “전세계 61개국 정도에 지부가 마련되어 있는 조직으로, 20여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단체”다. 2015년경에 해외 <스타워즈> 시리
[코믹콘 탐방기②] 코스튬 자선단체 ‘501 군단’ & ‘레벨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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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역사를 전공하던 학생에서 영화감독이 됐던 그렉 팍은 다시 코믹스 작가로 전업한 뒤 지난 10여년간 마블과 DC 코믹스를 오가며 굵직한 작품과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우주 행성으로 날아가 글래디에이터로 활약하던 헐크와 한국계 미국인 슈퍼히어로 아마데우스 조가 바로 그가 탄생시킨 인기 캐릭터다. 수많은 차별과 편견을 딛고 일어서 성공한 그가 코믹스 작가로서 자신이 생각하는 21세기의 슈퍼히어로에 대해 애정을 담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얼마 만에 한국을 찾은 것인가.
=14년 전에 연출작 <로봇 이야기>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출품됐을 때 <씨네21>과 인터뷰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 코믹스 관련 일로 참여하게 되어 더 기쁘다.
-지난 14년 동안 영화감독에서 코믹스 작가로 전업해 <헐크: 플래닛 헐크> 등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당시 새로운 작가를 찾던 마블의 에이전트가 영화 <로봇 이야기>를
[코믹콘 탐방기①] 한국계 슈퍼히어로 ‘아마데우스 조’의 아버지 그렉 팍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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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놀이터다.” 배우 에즈라 밀러는 코믹콘 행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8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간 서울 코엑스 전시장 A홀에서 ‘코믹콘 서울 2018’이 열렸다. 올해로 2회를 맞이하는 이번 행사에 관람객 4만8천여명이 행사장을 다녀갔다. 만화와 영화, 게임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곳. 배우 에즈라 밀러와 마이클 루커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곳. 그런데 전세계 대중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코믹콘은 과연 한국 땅에 무사히 상륙한 걸까. 기대 반 의심 반의 심정으로 이 안전한 놀이터가 하루빨리 터를 잡아나가길 바라 마지않는 기자의 염원을 담은 탐방기를 전한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서울 하늘의 구름이 마치 신카이 마코토 영화 속 장면과 닮은꼴이 되어 있었던 지난 8월 3일, 코엑스 전시장 A홀 주변의 화장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각종 캐릭터 코스튬으로 갈아입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도쿄 구울>의 카네키가 문 앞에서 상의를 탈의
2회째 한국에서 열리는 '코믹콘 서울 2018' 탐방기 ① ~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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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에 감독님의 꿈을 펼쳐놓으셨더라. (웃음) 제작 난이도가 높아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럼에도 시나리오에 힘이 있어서 누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싶었다.” (국수란 프로듀서) “흑금성 사건을 영화로 만든다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제작하기가) 두려웠고, 또 한편으로는 무모해 보였지만 이런 시나리오를 쓴 윤종빈 감독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박일현 미술감독) “한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영화인으로서 이런 작품에 동참하는 게 의미가 있고, 영화를 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최찬민 촬영감독) “애니콜 광고를 봤던 세대로서 소재가 흥미로웠다. 북한을 구현하는 작업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채경화 의상감독) 제작진의 말처럼 <공작>은 1990년대를 그린 시대극이고, 한국·중국·북한 세 공간을 담아내야 했으며, 무엇보다 흑금성 사건이 가진 실화의 무게가 무거웠던 까닭에 제작진 누구에게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경험과 열정 덕분에 베일에 가
<공작> 제작기 - 진짜 북한보다 진짜같이, 실화를 극화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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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인간들은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과거의 망령들로부터 의상과 전투구호, 언어를 빌려와 새로운 장면을 연출한다고 했다. 이 주장은 2016년 탄핵 때 한국군 엘리트들이 채택한 대응 방식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계엄 대비 계획에 따르면 일부 군 엘리트들은 과거 쿠데타를 참조하여 시민사회를 무력화하는 레퍼토리들을 구체화하고 현대화했다. 이를테면 통금에 인터넷 검열이 추가됐다.
마르크스는 세계사적 사건은 한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했지만 내게 이번 기무사 사태는 전혀 희극적이지 않다. 비밀문서는 과거의 망령들이 언제든 되살아나 “민주주의는 이제 그만”이라고 명령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 또 다른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당시 사측이 작성한 비밀문서에는 경찰·검찰·노동부 등 정부 부처와 공조를 통해 파업을 강경진압하고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전략이
비밀문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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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좀비 채널 개국 기념으로 원테이크 원컷의 라이브영화가 기획된다. 높은 리스크를 고려해 애드리브가 금지되지만 방송 당일의 온갖 돌발 사건은, 이 좀비 호러를 희대의 임기응변 향연으로 만든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프레임에 보이는 것과 그것이 보이기까지 프레임 밖에서 이루어지는 고역에 관한 애잔한 코미디다. 중년 배우는 알코올 문제가 있고 아이돌 출신 배우는 이미지 유지에 급급하고 촬영감독은 허리가 아프다. 수전증과 설사도 엄습한다. 그러나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를 소동극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숏이 지속되도록 지탱하는 스탭과 배우들의 아슬아슬한 발버둥이다. 물론 최고의 곡예사는 두겹의 영화를 각본, 편집까지 겸해 연출한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이다. 정말이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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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사회의 기본 단위라고 우리는 배운다. 그러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하나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렇게 가족이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