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는 게 시간뿐인 백수 거울(경수진)은 오지랖까지 넓다. 조카와 함께 동네를 돌며 갖은 민원을 처리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이다. 그런 누나가 탐탁지 않은 동생 두온(이지훈)이 참다못해 출가를 요청하고 거울은 등 떠밀리듯 독립하게 된다. 급히 입주한 낡은 백세아파트에서의 첫날 밤. 새벽 4시부터 울리는 굉음에 고통받던 거울은 직접 층간소음의 원인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이루다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백수아파트>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층간소음 이슈를 소재 삼은 코믹한 추적극이다. 공권력이 개입하긴 어렵고 거주민의 삶엔 치명적인 소음 문제를 해결할 구원자로 오지랖 넓은 백수 거울이 등장한다. 호방하고 먼치킨 같은 ‘홍 반장’식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한 배우 경수진의 연기 변신이 돋보인다. 주민들이 합심해 사건을 해결하는 소시민적인 수사 과정을 통해 각박한 세태 속에 폄하되던 이웃사촌간의 따스한 연대의 감각을 되살리게 만드는 소박하고 낙천적인 이야기다.
[리뷰] 각박한 소음도 덮겠다는 낙천주의자의 우직한 선의, <백수아파트>
-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식당을 물려받은 혜경(문예원). 가업에 집중하느라 바쁜 와중에 자신의 엽기 동영상이 SNS에 유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상을 게시한 현우(박상남)는 사과의 의미로 요식업에 문외한인 혜경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시장 조사 겸 맛집 탐방을 하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귀여운 연하남의 직진에 혜경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만택 감독의 첫 로맨틱코미디영화인 <로망스>는 두 주연의 케미스트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반복되는 만화적 연출이 다소 과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아기자기하고 말랑말랑한 극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다만 배우의 미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전개는 자칫 작품 전체를 멋진 데이트 브이로그 영상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만한 소재들을 장난스럽게 소비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리뷰] 극의 개연성이 배우의 미모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로망스>
-
니시카타(다카하시 후미야)는 본인이 다녔던 중학교에서 체육 교사를 하고 있다. 어느 날 10년 전 프랑스로 갔다가 귀국한 중학교 동창 타카기(나가노 메이)가 그가 근무하는 중학교에서 3주 동안 교생 실습을 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중학생 때처럼 타카기의 장난기는 여전하고 니시카타는 그 장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둘 사이에는 오래전 짝사랑했던 마음이 움튼다.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은 야마모토 소이치로의 전설적 러브 코미디 원작 만화를 드라마화한 동명 드라마의 극장판이다. 영화는 드라마의 10년 후를 배경으로 한다. 일본 청춘멜로로 보이는 외양과 달리 고백 직전 썸의 감정선을 현실적으로 그린다. 이는 〈사랑이 뭘까> <그날들> 같은 영화로 사랑의 심연을 파헤쳐온 감독 이마이즈미 리키야 덕분이다. 에릭 로메르의 영향을 체화한 그는 러브 코미디의 발랄함을 쇼도시마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롱숏으로 중화한다.
[리뷰] 심장이 도큥도큥! 러브 코미디와 로메르의 이상한 만남으로 그려진 리얼한 썸 타기,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
<준스톤 이어원>은 이준석 의원이 논란으로 국민의힘 초대 대표에서 축출되고 개혁신당을 창당한 이후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2024년 4월10일 총선에서 당선되기까지 1년여의 시간을 담았다. <시인 할매>로 제10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이종은 감독의 신작이다. <준스톤 이어원>은 정치인 팬덤을 겨냥한 다큐멘터리의 한계를 답습한다. 우선 영화를 보기 전에 이준석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를 둘러싼 논란이나 외부의 평가를 최소화해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객관성을 포기한다. 대신 꾀죄죄한 머리를 한 이준석에게 렌즈를 들이밀어 인간 이준석을 조명한다. 특히 이준석을 호감형 인물로 그리려 교육 봉사 단체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에서 보낸 시간을 길게 담는다. 정작 그가 개혁신당을 창당할 때 겪어야만 했던 고초와 이를 이겨내는 과정이 잘 그려지지 않아서 당선의 의의와 쾌감은 잘 전달되지 않는다.
[리뷰] 어느 쪽이든 정치인 팬덤 다큐의 종말을 바라게 된다, <준스톤 이어원>
-
-
교황이 사망했다. 석연치 않은 그의 죽음을 뒤로한 채 추기경들은 차기 교황 선출을 위한 선거 ‘콘클라베’를 빠르게 추진한다. 이 콘클라베는 추기경 단장 로렌스(레이프 파인스)가 이끌며 콘클라베에 참석하기 위해 선거권을 갖고 있는 추기경들이 전세계에서 소집된다. 이들은 득표가 과반수를 넘은 후보가 선출될 때까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투표를 진행한다. 추기경들도 은연중 파가 나뉘어져 있다. 벨리니(스탠리 투치)는 로렌스를 비룻한 진보주의 진영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반대편엔 보수주의자 대표로 나선 테데스코(세르조 카스텔리토)가 있다. 그러나 과반수 표를 얻어낸 건 나이지리아 출신의 아데예미(루시언 음사마티)였다. 첫 흑인 교황이 선출될 찰나, 로렌스가 아데예미의 과거 추문을 확인하고 선거 결과를 무효 처리한다. 이후 투표가 반복되며 후보군이 추려지고 오직 교황만이 정체를 알고 있던 ‘인 펙토레’ 추기경 베니테스(카를로스 디에스)가 의외의 키를 쥔 인물로 급부상한다.
<서부 전
[리뷰] 무결한 자는 없나니. 완력 다툼의 결과가 의외의 통쾌함을 안긴다, <콘클라베>
-
좀비 사태를 정면 돌파하는 의협심 강한 피자 배달부(<워킹데드>)는 마음 앞선 환경운동가(<옥자>)가 되고, 의미심장한 말로 미스터리한 아우라를 펼치던 청년(<버닝>)은 두발로 디딘 땅이 무르게만 느껴지는 이민자의 외로운 얼굴(<미나리>)이 된다. 오랜 시간 누적된 분노 끝에 선 한국계 미국인 대니(<성난 사람들(비프)>)는 또 어떤 삶으로 이어질까. 스티븐 연의 선한 얼굴은 마치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듯 작품 속에 생동하는 인물의 모습으로 반듯하게 변모한다. <옥자> 이후 봉준호 감독과의 두 번째 작업을 마친 스티븐 연은 능글맞고 장난스러운 박자로 <미키 17>의 티모를 이룬다. 철저히 자기밖에 모르는 욕심 많은 파일럿은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다각적 투쟁과 성장을 자극하는 동시에 자기만의 자유를 꿈꾼다. 여러 형태의 삶을 거쳐온 스티븐 연을 직접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결코 복제될 수 없는 고유한
[커버] 끝까지 놓지 않은 마지막 퍼즐 조각, <미키 17> 스티븐 연
-
2월28일 개봉한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이 만든 네 번째 SF영화다. 이중 <괴물> <설국열차>에 이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공개된 <옥자>는 뛰어난 시네아스트의 과학적 상상력과 생태학 담론이 만나 탄생한 독창적인 공상과학영화였다. 개봉 당시 스트리밍 플랫폼의 부상과 시네마의 정의를 논하는 거시적 이슈에 밀려 작품 자체에 대한 논의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점을 고려할 때 재고할 가치가 충만하다.
<옥자>의 주인공은 글로벌 기업 미란다사의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슈퍼 돼지 중 강원도 산골로 보내진 ‘옥자’ 그리고 그의 가족인 소녀 미자(안서현)다. 시대가 바뀌고 미란다사의 새로운 CEO가 된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턴)는 아버지와 같은 노동·자연 착취적 방식으로는 더이상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대신 농화학 기업을 축산·식품 회사로 탈바꿈하며 환경, 생명, 제작공정의 효율성까지 고려하는 축산업계의 혁명을 일으키겠다
[임수연의 이과감성] 봉준호식 생태주의
-
오랜 시간 동안 영화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는 대상의 관계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성영화 시절의 미국영화는 드넓은 평원과 사막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개척 신화를 그렸다. 비슷한 시기 독일 영화감독들은 대자연 앞에서 초라하게 서 있는 인간의 모습에서 모종의 불안을 감지했고, 소비에트 영화감독들은 만물의 생사를 관장하는 자연을 예찬했다. 이후에 등장한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자연은 인류에 멸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위협적인 대상으로 묘사되었다. 영화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대체로 자연은 인간의 운명으로 다루어졌다. 인간은 자연을 멀리서 바라보았고, 자연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저 멀리 어딘가에 배경처럼 우뚝 서 있었다.
이제 영화 속 세계에서 자연의 존재 양식은 유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디지털 시각효과 기술은 자연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묘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 결과 자연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예측 불가능한 자연현상을 그리는 세계 디지털 시각효과를 활용한 세계-만들기(2편)
-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영화를 향한 반응은 대체로 저널리즘 윤리를 끌고 들어온다. <9월 5일: 위험한 특종>(이하 <9월 5일>)은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현대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맥락 역시 중요한 영화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미디어 환경을 대입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ABC사 스포츠 중계팀은 저널리스트보다 콘텐츠 크리에이터와 더 닮았다. 이들은 연출자라는 이름으로 사건을 서사로 치부하며 드라마화한다. 사실을 엄정하게 전달하는 뉴스 브로드캐스팅 대신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현장을 카메라로 생중계한다는 내용은 현대의 포노 사피엔스를 다룬 이야기라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또 <9월 5일>은 현대 스릴러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디지털 신인류의 재현 양상의 한계를 환기한다. 그러니 이 영화가 저널리즘 윤리로 귀결되는 결론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전세계 최초의 테러 생중계라는 오명의 역사는 곧 현대 장르영화에서 무분별하게 반복되는 포노 사피엔스와 그 재
[비평] 생중계의 역사, 포노 사피엔스의 역사, <9월 5일: 위험한 특종>
-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늘 어둡고 지저분한 밑바닥에서 사회의 폭력을 모조리 받아내는 인물이 나온다. 이들은 사슬처럼 물고 물리는 폭력 구조의 맨 하부에서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고통받기 일쑤다. 가령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탈락한 채로 지하실에 숨어드는 남자(<기생충>(2019))와 거대한 열차의 부품이 되어버린 아이(<설국열차>(2013)), 간편하고 맛 좋은 식품이 되기 위해 보금자리를 떠나는 돼지(<옥자>(2017))는 본질적으로 같다. 최근 개봉한 <미키 17>에서는 미키 17(로버트 패틴슨)이 이런 위치에 있다. 죽을 만큼 위험한 곳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이 임무인 남자. 그는 인류 발전에 필요한 위험을 홀로 감당한다.
이런 인물을 마주할 때 여태 나를 압도한 건 폭력의 잔혹함이었다. 그래서 정작 그 인물을 눈여겨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들 사이를 관통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 그것이 최근 들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
[비평] 비극의 작동 방식, <미키 17>
-
미남의 국정원 요원이 고등학생으로 위장하여 학교에 잠입한다는 설정. 수사물에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적 단골 소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익숙한 재미와 비밀을 들킬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심리전을 보장한다. 게다가 이제 막 브라운관으로 복귀한 서강준의 등장이라. 느슨해진 드라마 시장을 기강 잡으러 왔다는 가벼운 농담은 그의 수려한 외모와 함께 입증된 명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언더커버 하이스쿨>은 고정된 엔터테인먼트나 배우의 이미지에 의존하길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도난당한 국보급 문화재 반가사유상을 되찾는 도중 치명적으로 훼손시킨 정해성(서강준)은 그에 대한 처벌로 위장 잠입을 명령받는다. 미션은 간단하다. 사라진 고종 황제의 금괴를 찾는 것. 그렇게 정해성이 찾은 곳이 바로 병문고등학교다. 대한민국 최고 명문 사립고이자 금괴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곳. 정치·경제·의료 등 각 분야의 엘리트가 탄생하고 견고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곳.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언더커버
[이자연의 TVIEW] 언더커버 하이스쿨
-
<모두의 리그: 이기거나 지거나>
디즈니+ / 8부작/ 연출 캐리 홉슨, 마이클 예이츠 / 목소리 출연 윌 포테이, 조시 톰슨, 밀런 레이, 로사 살라자르 / 공개 2월19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서로 다르게 남아 있는 기억의 거리를 좁혀본 사람만이 비로소 어른이 된다
같은 일을 함께하고도 ‘나’와 ‘너’의 기억은 왜 다르게 남을까. 2025년 픽사의 첫 오리지널 시리즈 <모두의 리그: 이기거나 지거나>(이하 <모두의 리그>)는 소프트볼 챔피언십 경기 일주일 전, 중학교 팀 ‘피클스’ 선수들과 그들의 가족, 주변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8가지 에피소드를 담았다. 매화 각기 다른 주인공이 공통된 사건을 두고 각자의 시선에서 다르게 저장된 기억의 조각을 맞춰나간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팀 내 최약체인 타자 로리가 소프트볼 코치인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로리의 경기에 참여했던 심판 프랭
[OTT 리뷰] <모두의 리그: 이기거나 지거나>
-
출연진의 명단을 읽는 것만으로 체내 사랑스러움 지수가 상승하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라트비아에서 온 애니메이션 <플로우>의 출연진을 소개한다. 고양이, 골든 리트리버, 카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세상. 고양이는 홀로 살던 집이 홍수로 파괴되자 배 한척에 몸을 싣는다. 이 배에 수많은 동물들이 승선하고, 고양이와 동물들은 자연의 경이와 생존의 잔혹성을 동시에 경험하며 긴 항해를 떠난다. <플로우>의 동물들에겐 사람이 붙였을 법한 이름이 없고 이들은 사람의 언어를 발화하지 않는다. <플로우> 제작진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의 소리를 인간 성우가 아닌 실제 동물로부터 가져와 입혔다. 언어가 없는 세상을 채우는 건 음악과 그림이다. 특히 작품의 애니메이팅이 무료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인 블렌더로 만들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애니메이션상과 국제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coming soon] 플로우
-
시리즈 <선의의 경쟁>
현재 방영 중이라 매 순간 시청자의 마음으로 본방 사수하고 있다! 앞으로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지 매회 상상이 안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채화여고 학생들의 경쟁과 그 속에서 슬기와 제이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끝까지 지켜봐주시기 바란다.
영화 <소년시절의 너>
극장에서 벌써 10번은 넘게 n차 관람한 작품이다. 재개봉할 때마다 챙겨서 보러 가는, 정말 두고두고 소장하고 싶은 작품. 아직 관람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극장에서 보는 걸 추천한다!
소설 <적의 화장법>
1년에 한번 정도, 마음이 끌리는 책을 찾으러 보수동 책방 골목으로 여정을 떠나곤 한다. 지난해에 책방에서 사들고 온 3권 중 <적의 화장법>을 요즘 읽고 있다. 제목도 생소한 이 책은 <선의의 경쟁>과는 또 다른 심리전이 펼쳐지는 내용이라 더욱 재미있게 보고 있다.
예능 <콩 심은 데 콩 나고 밥 먹으면 밥심 난다>
[LIST] 정수빈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