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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탄생의 순간부터 예정된 운명이다. 윤재호 감독의 다큐멘터리 <숨>은 이 만고불변의 순간을 탐구하기 위해 서로 다른 세 사람의 이야기를 교차한다. 고인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장례지도사 유재철, 고독사와 범죄 현장을 정리하는 유품정리사 김새별, 고령의 몸을 이끌고 파지를 줍는 문인산씨가 그 주인공이다. 수많은 시신을 염했던 장례지도사는 직접 손으로 느낀 감각을 고백한다. 쓸쓸한 고독사의 현장을 청소하는 유품정리사는 고인이 남긴 삶의 흔적을 반추한다. 한편 육신의 쇠락을 체감하는 노인은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그려본다. 영화는 죽음의 세 가지 시제를 경험하는 세 사람의 인터뷰를 교차하며 사멸의 시간을 가늠하려 한다. 그러나 영화 구조가 죽음에 무력한 생자(生子)의 역설처럼 피상적인 현상을 나열하는 데 그쳐 아쉬움을 남긴다.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상영작이다.
[리뷰] 죽음 앞에 무지한 생자는 슬피 표면을 훑게 된다,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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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조선의 군대마저 해산시키며 침략을 본격화한다. 지식인들은 일제의 폭정에 맞서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립하지만, 항거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뜻을 모으는 데 실패한다. 망국의 기로에 선 정도(최민우)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중국 길림에 자급자족 공동체 ‘호조’를 건설한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프로젝트는 정도가 믿고 의지하던 안창호(장정식)의 체포 소식으로 난항을 겪는다. <호조>는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해석 손정도의 삶을 되돌아보는 뮤지컬 사극이다. 장정식과 최민우 등 뮤지컬 무대에서 활약해온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분장과 자연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촬영 방식은 비장한 서사에 걸맞은 몰입감을 끌어내지 못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을 조명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빈약한 전개가 장점을 가리며 아쉬움을 남긴다.
[리뷰] 상투도 없는 곱슬머리에 갓을 씌운다 한들, <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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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에 거점을 둔 대규모 갱단의 두목인 델 몬테는 유능한 변호사 리타(조이 살다나)를 고용해 한 가지 의뢰를 한다. 다름 아닌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수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라는 것이다. 능력에 비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리타는 고민 끝에 의뢰를 수락하고, 델 몬테는 에밀리아 페레즈(카를라 소피아 가스콘)라는 새 이름으로 여성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델 몬테는 부인 제시(설리나 고메즈)와 아이들까지 뒤로한 채 유럽으로 건너가 이전의 삶을 지우려 한다. 하지만 델 몬테 시절에 저질렀던 과오와 기억들이 에밀리아 페레즈, 그리고 그를 도왔던 리타를 자꾸만 붙잡는다. 결국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또 다른 삶의 문을 열기에 이른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자크 오디아르가 만든 뮤지컬영화다. 비정하고 진중한 서사의 배경에 충돌하며 엇박자로 등장하는 춤과 노래의 역동성이 흥미로운 조화를 일으킨다. 영화의 전반적인 판을 빠르게 짠 뒤 본격적인 드라마타이즈로 유장하게 들어서
[리뷰] 시원시원하게 노래하기 위해 구석으로 남겨지는 것들, <에밀리아 페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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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유대인인 사라(아리엘라 글레이저)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한쪽 다리를 쓸 수 없어 늘 놀림의 대상이었던 소년 줄리안(올랜도 슈워드)은 사라가 숨어 지낼 헛간을 내주고, 비비언(질리언 앤더슨)을 비롯한 줄리안의 가족은 어려운 처지에도 사라를 물심양면으로 돌본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라는 학교에 다녀온 줄리안으로부터 수학 등 교과를 배우며 세상 소식을 듣는다. 사라는 자신의 특기인 미술을 통해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줄리안 앞에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차별받던 소년과 소녀가 전쟁 속에서 그려내는 우정과 사랑 이야기. <화이트 버드>는 로그라인 그대로 동화적인 이야기 전개와 장면 묘사를 택하는 따뜻한 가족영화다. 이를테면 영화는 전체주의에 준동하는 청년의 최후나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집단학살 등을 적시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 속의 반복되는 대사처럼 “다정함의 큰 용기”가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어루만졌고 이 경험이 한 여성의 삶
[리뷰] 소년과 소녀, 다정함으로 상대와 세상의 상흔을 쓰다듬다, <화이트 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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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강사 영은(곽선영)에게 가장 큰 불안감을 안기는 존재는 뜻밖에도 7살 딸 소현(기소유)이다. 친구를 위험에 빠뜨리다가도 금세 착한 아이 흉내를 내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건지 희열을 느끼는 건지 알 수 없는 딸을 영은은 어떻게든 품으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다치는 사람까지 생기자 영은은 소현을 강하게 훈육하지만 결과는 참혹하다. 20년 뒤 특수청소업체에서 일하는 민(권유리)이 요즘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은 신입 해영(이설)이다.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랑둥이 해영에게서 미심쩍은 무언가를 발견한 민은 그의 정체를 캐기 시작한다. 모녀 중심의 과거 1부와 또래 여성 중심의 현재 2부로 구성된 <침범>은 공포영화처럼 보인다. 1부에서 공포의 존재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다. 소현은 죽은 반려동물 앞에서 울긴커녕 새로운 동물로 대체하면 그만이라는 듯 평온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한 첫 모습에서부터 감지된 섬뜩함은 엄마의 시점으로 진행되면서 갈수록 더 선명해진다. 친구의 손을
[리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남긴 뚝심, <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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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예비 영화인들이 모인 어느 행사장에서 봉준호 감독은 감독으로서 느끼는 극한의 공포에 대해 설명한다. “공포의 근원은 집착이다. 집착이 있기 때문에 공포가 생기는 거다. (집착이) 해소되지 않을까봐. 다들 머릿속에 맴도는 어떤 장면이 있을 거다. 그걸 찍기 위한 핑계로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다. 찍어서 그 화면을 소유하고 싶은 거지.” <미키 17>을 보면서 내내 떠올랐던 건 질문은 그가 이번에는 ‘어디에 집착하고 무엇을 소유하고 싶었을까’ 였다. 왜냐하면 주관적 판단에 <미키 17>은 봉준호의 전작들과 비교해서 지나치게 매끈하고 1차원적인 영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장의 신작이 으레 그렇듯이) <미키 17>은 ‘봉준호’ 세 글자에 축적된 위상 덕분에 과잉 해석되거나 과소평가받을 운명을 타고났다. 과소(혹은 부정적)평가를 모아보면 그의 전작들에 비해 대체로 ‘쉽고 친절하며 단순하다’는
왜 미키17은 뒤늦게 악몽을 꿔야 했을까 - 봉준호의 순한 맛에 깃든 섬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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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미래 배경의 SF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시대를 어디로 잡느냐다. 이건 교향곡 첫 악장의 조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이야기 속 사람들이 어느 구역에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정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 7>은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여러 행성에 정착한 먼 미래 를 배경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소설을 각색해 영화 <미키 17>을 만들면서 봉준호는 시대 배경을 21세기 중엽으로 잡는다.
지금 여기와 모든 면에서 가까운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이치에 맞는 건 원작이다. 지금 당장 초광속 비행과 인공중력의 생성이 가능한 우주선을 만들 수 있는 이론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2050년대까지 수백명의 사람들을 싣고 다른 항성계로 갈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드는 건 그냥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류가 미래에 우주식민지를 건설한 2019년이 배경인 <블레이드 러너> 같은 선례가 있지
왜 그 설정들은 원작과 달라져야 했나 - SF적 상상력의 다른 가능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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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에는 파시스트를 표방한 인물이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가 외국 자본과 결합한 작품을 만들 때면 등장하는 인물 유형인 까닭이다. 그게 미키(로버트 패틴슨)가 아님은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는 터, <설국열차>의 메이슨(틸다 스윈턴)과 <옥자>의 루시(틸다 스윈턴)를 잇는 인물은 케네스(마크 러펄로)와 일파(토니 콜레트)다. 그들 부부는 과장된 연기로 부산한 톤을 만들어내며 스윈턴이 선점했던 캐릭터를 양분해 자기화한다. 봉준호의 파시스트적 인물은 공포감을 안기는 대신 희화화되어 있다. <위대한 독재자>(1940)에서 채플린이 연기한 인물을 더 우스꽝스럽게 만든 식인데, 배우들도 덩달아 떠들썩한 인물을 만드는 데 전력하기를 즐긴다. 특히 입 주변의 변형을 통한 안면 근육의 뒤틀림은 그들의 추잡한 인상을 부풀린다.
썩은 지도자의 심장을 찔러 피를 흘리려
왜 미키 17이 살고, 미키 18이 죽어야 하는가 - 혁명에 대해 말하지만 혁명적이지는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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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이 개봉한 지 일주일쯤 지난 지금, <미키 17>을 두고 세명의 비평가가 세개의 질문을 던졌다. 듀나 평론가는 SF 장르의 관점에서 <미키 17>이 택한 갖가지 설정의 이유를 고민했고, 이용철 평론가는 영화의 결말이 혁명이란 주제를 어떻게 다뤘는지 살폈으며, 송경원 편집장은 <미키 17>이 보여주는 사회·정치적 문화의 의미를 훑었다. 기실 혁명, SF, 정치란 키워드는 봉준호 감독이 데뷔작부터 꾸준히 보여준 고유의 스타일과 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기생충> 이후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거장 반열에 오른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궤적을 어떻게 <미키 17>에 흘려놓았는지, 이것이 작금의 사회에서 어떤 함의를 파생하는지, 과연 봉준호란 이름의 방향은 어디로 나아가는지를 세개의 질문을 통해 한번에 엿볼 수 있는 셈이다. 봉준호
[기획] 혁명, SF, 정치의 교차점에서 - <미키 17>에 던지는 세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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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고양이였을까. “내가 어릴 적에 짙은 회색 고양이를 키운 적 있다. 주변으로부터 고양이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많이 듣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강아지파에 가깝다. (웃음) 고양이들은 낯선 것을 경계하는 타고난 불안이 눈에 띈다. 그래서 표정과 몸동작이 두드러지는데 고양이의 그런 보디랭귀지를 영화적 언어로 활용해보고 싶었다. 애니메이터로서는 무척 어려운 작업이었다. 고양이들이 특정 규칙이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무엇보다 현실적인 몸동작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면 고양이 집사님들한테 바로 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다만 이들의 모습을 굳이 과장하고 싶지 않았다. 동물들의 현실적인 동작에도 농담, 슬픔, 분노가 있다.”
대홍수와 동물들. 애니메이션 장르에서 두 키워드가 만날 때 보통은 협심해가는 ‘동물 친구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플로우>에는 인간처럼 두발로 걷거나, 옷을 입거나, 말을 하는 동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
고양이의 작은 움직임마저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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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의지가 큰 것은 희망일까 불행일까. <플로우>는 절멸의 시대로 시작된다. 계단, 원형무대, 거울, 집 등 인류 문명의 흔적으로 가득하지만 어디에서도 인간을 찾아볼 수 없는 지구. 갑작스러운 대홍수와 함께 검은 고양이는 하릴없이 물살에 휩쓸리고 만다. 몸을 숨길 곳을 급히 찾았을 때에는 느긋한 돛단배 한척만이 그를 받아줄 뿐이다. 그곳에서 고양이는 골든 리트리버, 카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를 만난다. <플로우>는 귀여운 옷을 입고 두발로 서서 인간의 언어를 내뱉는 여느 애니메이션과 포맷이 사뭇 다르다. 현실 속 동물들 모습 그대로, 인간의 시선과 간섭을 최소화하여 이름도 대사도 없이 영화 속 상황에 존재하고 흘러간다. 그렇게 습성도 성향도 제각기 다른 이들은 생존욕구라는 본능에 기대어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사실 대홍수가 아니더라도 예상치 못한 집단생활은 고양이에게 다소 난처한 재난이나 다름없다. 경계선이라곤 모르는 골든 리트리버는 부담스럽기만
작은 고양이를 보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 소리도, 대사도 없이 <플로우>는 생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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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회 골든글로브 장편애니메이션상 수상, 제48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장편영화 심사위원상 수상, 제9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애니메이션상 수상 등등. 상패가 작품에 담긴 모든 시간과 공력을 증명주는 것은 아니지만, 장편애니메이션 사이에서 <플로우>가 가히 기록적인 성과를 쌓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라트비아 최초의 아카데미 수상작으로 거듭나면서 리가 광장 한가운데에는 고양이 동상이 세워지고, 이 소식을 전파하는 뉴스 앵커들은 고양이 티셔츠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사뭇 귀여운 풍경이 펼쳐질 수 있었던 건 다소 모순적이게도 끝까지 생을 포기하지 않은 동물들의 애처로운 모험담 덕분이다. 어느덧 인간이 사라진 지구, 갑작스러운 대홍수 앞에서 검은 고양이는 작은 돛단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골든 리트리버, 카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를 만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성향을 지녔지만 단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향해 조금씩 거리를 좁혀나간다. &
[커버] 이것은 어쩌면 생애 가장 길고 아름다운 모험,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수상작 <플로우>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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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시를 보고 왔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꼽자면 단연 장파 작가의 <여성/형상: Mama 연작>이다. 붉은색의 살덩어리에 눈이 최소한 3개 이상인 괴물을 그린 그림이다. 다리에 엉덩이와 가슴만 달린 형상의 작은 드로잉도 눈에 띈다. 작가 이름을 검색해보니 다른 작품들도 괴물 천지다. 대개 붉은색이고 가슴과 눈, 이빨, 생식기 등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 낯익은 느낌은 뭐지? 바로 <서브스턴스>의 ‘몬스트로 엘리자수’다! 수(마거릿 퀄리)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의 욕망이 탄생시킨 괴물 말이다. 영화 마지막에 하늘색 드레스에 몸을 구겨넣은 채 가면을 쓰고 기어코 무대 위로 올라가 관객들에게 피를 뿜어대던 그 미끈미끈한 괴물과 장파 작가의 작품들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수와 엘리자베스의 살벌한 난투극을 지켜보면서도 둘이 서로 화해하거나 타협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던 내 앞에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떡하니
[임소연의 클로징] 같은 괴물, 다른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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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라 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
실리콘밸리의 유명 투자자는 2025년 1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진실과 화해의 시간’(A time for truth and reconciliation)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하는 이 투자자의 칼럼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진실로 주장하는 논지 전개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음모론을 따르는 칼럼이 대체로 그렇듯 이 칼럼 역시 (민주당이) 의도적으로 감추어왔던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 칼럼은 계시와 종말을 뜻하는 아포칼립스라는 낱말과 함께 음모론의 수사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가령 이렇다. 2016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처음 당선되었을 때 버락 오바마는 직원들에게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승리가 “종말이 아니다”라고 했었다. 하지만 2025년 트럼프의 승리는 아포칼립스, 곧 (진실이 밝혀지는) ‘계시’의 시간이 될 것이다. 2025년 음모론을 신봉하는 적지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2025년의 아포칼립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