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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변에 있는 어느 호텔. 시인 영환(기주봉)은 왠지 자신이 곧 죽을 것 같은 생각에 미리 영정 사진도 찍고, 아들 경수(권해효)와 병수(유준상)를 호텔로 부른다. 하지만 부자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쉽게 만나지 못한다. 동거하던 남자에게 배신당한 상희(김민희)는 친한 선배 연주(송선미)를 부른다. 헤어진 남자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 잠깐 침대 위에서 잠이 든 사이 밖에는 눈이 수북하게 쌓였다. 호텔 앞에서 잠시 밖으로 나온 상희와 연주를 마주친 영환은 그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후 죽음을 가장 노골적으로 다룬 홍상수 감독의 영화다. 경수와 병수, 상희와 연주가 서 있는 좌표는 이 테마에 진입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다. 상희와 연주가 호텔 커피가 너무 맛이 없다며 밖에서 테이크아웃해온 커피를 마시고 바깥 풍경에 감탄하는 사이, 경수와 병수는 별생각 없이 호텔 안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며 눈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영
<강변호텔> 한강 변에 있는 어느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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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비슷한 업적을 이루고도 여성 위인은 남성 위인에 비해 훨씬 덜 인정받고 덜 알려질까? 1993년 임명돼 현재까지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 새삼 떠오른 생각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는 1933년 생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겪은 굴곡진 세월을 비추면서, 젊은 시절부터 변함없이 미국의 불합리에 ‘반대 의견’을 제시한 궤적을 차분하고 힘 있게 담아낸다. 미투 시대에 시의적절하게 등장한 성차별 투쟁의 기록이자 활력 넘치는 페미니스트 다큐멘터리다.
긴즈버그는 1950년에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는데, 남자들의 자리를 쓸데없이 빼앗은 여자로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교수들은 문답식 수업에서 여학생에게 질문조차 하지 않았고,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할 때도 로펌은 그녀보다 성적이 낮은 남학생을 스카우트했다. 영화는 긴즈버그가 여성을 위축시키는 환경에 결코 굴하지 않고, 평생의 동반자인 남편 마티 긴즈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 평등을 위해 싸운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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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으로 많은 상을 받은 감독이 감수해야 하는 운명이 있는데, 바로 두 번째 작품이 그간의 호평에 걸맞은지 검증하려는 무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종차별 문제를 독창적인 호러 문법으로 풀어낸 <겟 아웃>(2017)은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을 포함해 전세계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147개의 상을 휩쓸었고, 배우 겸 감독 조던 필은 할리우드의 가장 유망한 신인으로 떠올랐다. 차기작으로 좀더 큰 프로젝트를 선택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블랙클랜스맨>(2018)의 연출을 선배 스파이크 리에게 양보했고 어느 슈퍼히어로영화 연출을 제안받았으나 고사했다. 그리고 조던 필이 2년만에 다시 블룸하우스 프로덕션과 협업한 호러물로 돌아왔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어스>는 <겟 아웃>의 성취를 복제하지 않으면서 소포모어 징크스를 보란 듯이 깨는 수작이다. 감독의 시야는 더 넓어졌고, 전작의 쟁점까지 포괄하는 논의를 품는다.
1986년 미국 샌타
[블랙시네마 ④] 조던 필 감독의 <어스>, <겟 아웃>에서 달라진 것과 달라지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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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변화에 맞춰 블랙시네마도 전진한다. 1980년대부터 2019년까지 블랙시네마를 대표할 만한 영화 20편을 소개한다. ‘검은 것은 아름답다’고 소리 높여 외치던 시대에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가 즐겨 보고 있는 시대로, 꾸준히 영역을 확장 중인 블랙시네마의 다양한 면면을 확인해보자.
<컬러 퍼플> The Color Purple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 출연 우피 골드버그, 대니 글로버, 마거릿 에이버리, 아돌프 캐서, 오프라 윈프리 / 제작연도 1985년
“1980년대까지 내 영화들은 대부분 현실도피적이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그때 나는 <컬러 퍼플>을 연출했습니다. 이 한편의 영화에는 깊은 고통과 더욱 깊은 진실들이 가득합니다. (중략) 영화를 만드는 동안 나는 이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016년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인간성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자신의 경험을 펼쳐놓았다. 미국 작가
[블랙시네마 ③] 1980년대부터 2019년까지, 블랙시네마를 대표하는 영화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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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도 조던 필의 <어스>를 필두로 블랙시네마의 르네상스를 이어갈 다양한 흑인영화가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국내 개봉을 촉구하며 2019년 이후 공개될 다양한 블랙무비 라인업을 소개한다. 가장 기대되는 영화는 마이클 B. 조던의 신작 <저스트 머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1992년을 배경으로 백인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펄프회사 노동자 월터 맥밀런의 재판 과정을 다룬다. 모든 증거가 맥밀런을 지목하는 상황에서 법정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인권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은 이 사건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생각에 맥밀런의 변호를 맡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흑인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편견으로 어떤 부당한 상황에 직면하는지를 다룰 예정인 <저스트 머시>는 2013년의 문제작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영화다. 마이클 B. 조던이 브라이언 스티븐슨을, 제이미 폭스가 월터 맥밀런을 연기한다
[블랙시네마 ②] 개봉 예정 기대작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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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블랙시네마의 르네상스다.” 2018년 3월, <겟 아웃>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직후 조던 필 감독이 남긴 말이다. 그는 이날의 수상으로 미국 아카데미 역사상 각본상을 수상한 첫 아프리칸 아메리칸 영화인이 됐다. 조던 필의 말대로 지난 2018년은 블랙시네마의 찬란한 부흥을 알리는 기념비적 해였다. 마블이 제작한 첫 번째 흑인 솔로 슈퍼히어로영화 <블랙팬서>는 북미를 넘어 세계적으로 흥행 수익 13억달러를 기록하며 마블 솔로 슈퍼히어로영화 역대 흥행 수익 1위에 올랐고, 블랙시네마의 아이콘 스파이크 리의 귀환을 알린 <블랙클랜스맨>은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시간의 주름>을 연출한 에바 두버네이는 이 영화로 1억달러 이상의 제작비를 투입한 블록버스터를 연출한 최초의 흑인 여성감독이라는 역사를 썼다. 이뿐 아니다. 다양성을 연구하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싱크탱크 집단 아넨버그 인클루전
[블랙시네마 ①] 조던 필의 <어스>를 계기로 본 할리우드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영화인들의 활약과 지금까지의 활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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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시네마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다. 100여년 넘는 시간 동안 흑인들의 삶과 문화를 스크린에 투영해 온 블랙시네마가 최근 몇년 사이 미국영화의 지형도를 드라마틱하게 바꿔놓고 있다. <블랙팬서>의 라이언 쿠글러, <문라이트>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의 배리 젠킨스, <셀마> <시간의 주름>의 에바 두버네이, <겟 아웃> <어스>의 조던 필 등 최근의 미국영화에 인상적인 족적을 남기고 있는 새로운 세대의 흑인감독들은 글로벌 흥행과 비평적 찬사를 동시에 거머쥔, 블랙시네마의 역사에 있어 유례없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의 선전은 과거 블랙시네마의 부흥을 주도했던 흑인 감독들의 경우와 어떻게 다르며, 지금의 블랙시네마 르네상스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블랙시네마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는 글과 더불어 블랙시네마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20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개봉을 앞둔
조던 필 감독의 <어스> 개봉으로 돌아보는 할리우드 블랙시네마의 역사와 주요 작품 20선 ① ~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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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계 독일 감독 파티 아킨의 신작 <황금장갑>이 2월 말 개봉했다. 이 작품은 올 베를린국제영화제(이하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네편의 독일영화 중 하나로 영화제 시작 전부터 화제였다.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잘 만든 문제작이라는 것이 <황금장갑>에 대한 전반적인 평이다. 이 영화는 용감한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여성 감독의 영화들이 두드러졌던 이번 베를린영화제의 기조와 대척점에 자리하는데, 그건 이 작품이 여성 인권을 잔혹하게 유린하는 시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황금장갑>은 1970년대 독일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범 프리츠 홍카의 일대기 중 알코올과 섹스에 취해 살인을 저지르던 시기를 치밀하게 그린 스릴러영화다. 영화는 철저히 주인공의 시각에서 그려졌다. 이 작품은 피해자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로테스크하지만 유머가 살아 있다. 끔찍한 고어영화를 방불케 하는, 더럽고 좁은 다락방에서 행해지는 주인
[베를린] 연쇄살인마 그린 영화 <황금장갑> 독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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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 출연 이우라 아라타, 오다 에리카 / 제작연도 1998년
내 인생에서 단 한편의 영화를 고른다면 무엇일까. 나는 세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사람처럼 고민하고 있었다. 수없는 제목들, 이야기들, 선택들, 이름들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동시에 그 영화를 보던 당시의 내가 소환되어 그 시절이 갖는 의미들을 내 앞에서 떠들었다. 고민은 영화 자체의 의미, 영화를 보는 시간의 의미에 이어 영화를 만드는 의미까지 이어졌다.
<원더풀 라이프>는 천국으로 가기 전 공간, 림보의 이야기다. 림보의 직원들은 도착한 망자들에게 지난 삶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은 한순간의 기억을 묻고, 그들을 위해 그 순간을 재연해준다. 한편의 영화를 고르려 삶 전체를 탈탈 털며 돌아보는 내 모습이 딱 영화 속 인물들이었다. 두꺼운 일기를 뒤적이며 삶의 한순간을 찾듯 영화를 떠올리다 끝내 이 영화를 골랐다. 이 선택은 그동안 나를 위로하고, 때로 다그치며 함께해준 모든 영화와 삶의 순
[내 인생의 영화] 김의석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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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김해일(김남길)은 믿음 없는 신자는 성당에 나오지 말고 ‘<TV 동물농장> 보시라’라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유능함과 정치력으로 권력에 줄을 댄 검사 박경선(이하늬)은 ‘가즈아!’ 같은 대사를 차지게 뱉는다. 허세뿐인 형사 구대영(김성균)은 야구 배트에 머리를 맞아 ‘갓 쓴 사람’을 만나도 남보다 두개골이 두껍다고 자랑한다. SBS <열혈사제>는 경망스러운 재담을 주고받는 말 많은 코미디다.
해일은 구담시 교구의 손님신부로 머무는 중에 구청장과 특수부 부장검사, 경찰서장, 국회의원이 연루된 지역 카르텔과 마주한다. 과거 국정원 대테러 요원이었던 그는 ‘성령을 깡으로 받았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두려움이 없다. 경찰서와 구청을 수없이 드나들어도 해일의 활약은 곧 가로막힌다. 바티칸의 교황에게 편지를 쓰고, 교황이 친서를 보내 대통령까지 주목하는 사건이 되었어도 카르텔 분쇄는 지난하다. 그 답답함을 견디게 하는 것이 코미디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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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IEW] <열혈사제>, 두렵지만 옳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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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칭>
제작 스토리공감 / 감독 김성기 / 출연 강예원, 이학주 / 배급 리틀빅픽처스 / 개봉 4월
때때로 일상적인 공간이 방심하기 쉽고, 그래서 더욱 공포스러울 때가 있다. 영우(강예원)는 늦은 시간 회사 지하 주차장을 이용할 때마다 그 시간까지 일하는 경비원 준호(이학주)에게 따뜻한 말을 건넨다. 어느 날 영우가 야근을 마치고 주차장에 내려왔다가 원인 모를 사고를 당한 뒤 누군가에게 납치당한다. 그는 자신을 조여오는 누군가의 감시를 피해 필사적으로 탈출하려고 한다. “일상적인 공간인 지하 주차장이 가지고 있는 공포감에 집중했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설치한 CCTV가 역으로 범죄자의 눈이 된다면 굉장히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으로 쓰게 된 이야기”라는 김성기 감독의 말대로, <왓칭>은 범인이 CCTV를 통해 영우를 지켜보는 설정이 긴장감을 극대화할 것으로 보인다. 전작 <날, 보러와요>(2015)에서 영문도 모른 채 정신병원에 강제로 감금된
[Coming Soon] <왓칭>, 회사 주차장에서 납치 당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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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이 나오는 영화라면 믿고 볼 수 있지, 그래도 헛돈을 쓰진 않았지, 그런 믿음을 주는 배우이고 싶고 사람이고 싶다.” 이런 의지 때문일까.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을 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개봉 영화만 치면 2016년 개봉한 <남과 여> 이후 3년 넘게 영화에서 전도연을 볼 수 없었다. “누가 물어보더라. 혹시 일 그만두셨느냐고. (웃음) 마음은 빨리 다음 작품을 하고 싶은데 선택할 때는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다. ‘이만하면 됐지’ 하고 타협하기 싫었던 것 같다.” <생일> 역시 “생각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출연을 결정한 작품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생일>에서 전도연은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엄마 순남을 연기한다. 순남이 짊어진 감당하기 힘든 슬픔은 전도연을 통해 스크린에 고스란히 맺힌다.
-<생일> 출연 제의를 받고 처음엔 거절한 것으로 안다.
=다가가기 힘든 큰 슬픔 때문에 엄두
<생일> 전도연 - 함께해서 감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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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는 올해 <우상> <생일> <퍼펙트 맨> 등 최소 세편의 영화로 관객을 만난다. <우상>에 이어 <생일>까지, 하루 간격으로 <씨네21> 표지를 찍게 된 그는 이날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킹메이커: 선거판의 여우> 의상 가봉을 하러 갔다.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인 설경구는 <우상> 촬영 당시 이준동 대표로부터 <생일> 시나리오를 받았다. 빠듯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월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생일>을 놓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우상> 촬영 분량이 남아 있을 때 <생일> 시나리오를 읽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강력 사건의 피해자가 된 아이의 아버지를 연기했던 <소원>(2013)과 겹치는 작품인데, 어떻게 다가왔나.
=<소원>의 동훈이 사건 당시 곁에 있었던 당사자라면, <생일>의 정일은
<생일> 설경구 - ‘힐링’은 <생일>의 금기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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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은 2014년 4월 16일 아들 수호를 잃은 가족의 이야기다. 설경구가 아들의 죽음을 곁에서 지키지 못하는 아빠 정일을, 전도연이 아들을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는 엄마 순남을 연기한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를 연기한다는 건, 게다가 여전히 진행 중인 국가적 참사의 당사자를 연기한다는 건 배우들에게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슬픔을 감당할 용기 그리고 진심을 전할 용기. 바쁜 일정에도 <생일>을 외면할 수 없었던 설경구와 고심 끝에 부담감과 두려움을 마주하기로 한 전도연은 결과적으로 왜 설경구와 전도연이어야 했는지를 증명하는 연기로 <생일>을 빛낸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0) 이후 18년 만에 <생일>에서 재회한 설경구와 전도연을 만났다.
<생일> 설경구·전도연 - 사랑하는 네가 태어난 그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