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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예고란 없다. 그것은 대개 길이를 가진 시간이라기보다 단번의 찰나다. 정의감 넘치는 과학자의 경고 따위는 현실에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우주전쟁>(2005)은 이 같은 재난의 속성을 침략자에 빗댄 적확한 활유(活喩)였다. 밑도 끝도 없이 닥쳐와 누군가의 세계를 순식간에 소멸시키고 사라지는 것이 재난의 실체다.
그런데 어떤 찰나는, 인간의 부적절한 대응과 만나 영원으로 늘어나는 경우가 있다.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지만 당연하고도 마땅한 조치들이 이뤄지지 않을 때 그렇다. 구조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바뀌어가는 시간, 혹은 뭍에서 발을 구르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해 무력해지는 가족들의 시간… 원작이 된 책 <어 타임 투 다이>(A time to die)의 제목이 말하고 있듯, <쿠르스크>는 무고한 인간이 마주친 찰나와 영원의 상대성에 대한 기록이다.
러시아 전략 핵잠수함 쿠르스크호는 2000
실제했던 재난을 관통해 <쿠르스크>가 도달한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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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은 다큐멘터리 <보라>(2011)와 <파산의 기술>(2006)을 만든 이강현 감독의 첫 번째 극영화다. 고등학교 행정실 직원인 기선(박종환)을 중심으로, 기선의 학교에 다니는 축구부 학생 진수(윤종석), 기선의 옛 여자친구이자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와 식당을 새롭게 운영하려는 혜진(김새벽) 그리고 택배 일을 하는 현수(백수장)의 이야기가 자유롭게 엮인다. 산업재해에서 출발해 다양한 직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얼굴과 사회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아갔던 전작 <보라>처럼 <얼굴들>은 자유롭게 이야기를 확장하고 그러면서 시스템 속에 점처럼 존재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문법과 관습을 거부하며 자기만의 영화를 찍고 있는 이강현 감독을 만났다.
-프로덕션 노트에 “직전 작업에 대한 반동으로 다음 작업을 이어갔다”고 썼다. 전작인 다큐멘터리 <보라>를 끝낸 뒤 어떤 영화적 질문들이 생겨났고, 어떻게 <얼굴들>
<얼굴들> 이강현 감독 - ‘영화적’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적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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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권유로 별 뜻 없이 시작한 다도. 노리코(구로키 하루)는 그렇게 발을 들인 다도 교실에 무려 24년간 다녔다. <일일시호일>은 노리코의 수업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아주 독특한 흐름의 영화다. 그사이 노리코의 인생에도 취업, 고민, 가족과의 이별 등 많은 사건들이 지나가지만, 다도 교실은 외부의 세계에서 보호하듯, 그녀를 위로하고 다독여준다. “다도 교실 안에 작은 우주가 있다면, 그 안은 어떤 모양일까 들여다보고 싶었다”는 오모리 다쓰시 감독. 노리코는 다도를 몸에 익히고, 마침내 자연의 변화를 감지한다. 이 영화의 깨달음은 단순히 ‘차 한잔의 여유’에 머물지 않는, 귀담아 새겨들어야 할 인생의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그 의도가 적중했다. <일일시호일>은 일본에서 지난해 12월 개봉해 100만 관객을 모을 정도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다도 교실의 다케다 선생으로 분해 존재감 있는 연기를 선보인 기키 기린의 유작이라는 점에서도 이 영화의 방법론이 관객에
<일일시호일> 오모리 다쓰시 감독 - 찬찬히 들여다보기, 삶도 영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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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험이 처음이었다.” <그대 이름은 장미>에서 젊은 장미 역할을 맡은 하연수는 신인배우라고 부르기에는 데뷔 연차도, 참여한 TV 드라마 작품 수도 많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데뷔작 <연애의 온도> 이후 두 번째로 출연한 작품이다. 2016년에 작업했지만 여러 사정상 개봉이 밀려 3년 만에 관객과 만난 셈이라 홍보 스케줄도 처음이라고. 사실상 신인배우 하연수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인 동시에 배우에게는 뒤늦게 다시 데뷔하는 기분을 안겨줄 듯 하다. 출연 당시에만 하더라도 절실한 마음에 그저 “감사한 기회였다”는 그녀는 어느덧 연기와 연기 사이, 배우를 빼도 인간 유연수(본명)가 오롯이 남도록 일과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 고민하는 30살 배우가 됐다.
-<연애의 온도> 이후 두 번째 출연작으로 2016년에 작업했지만 이제야 개봉했다.
=얼마 전에 가족 시사회를 열었는데 엄청 떨렸다. (웃음) 다들 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전해
<그대 이름은 장미> 하연수 - 빛나는 처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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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웍스의 인기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3>가 1월 30일 국내 개봉한다. 용과 인간의 우정과 성장을 유려한 비주얼과 감동적인 스토리로 풀어낸 이 작품은 지난 2010년 1편을 공개한 이래 전세계적으로 흥행수익 11억2천만달러를 기록하며 글로벌한 사랑을 받았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드래곤 길들이기3>는 1월 3일 호주에서 개봉한 뒤 해외 평단으로부터 뜨거운 호평을 받고 있다. “애니메이션계의 <보이후드>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드래곤 길들이기3>는 지금까지 시리즈가 거쳐온 시간에 대한 감정적 여진을 남긴다”는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의 평대로, 이번 작품이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적인 마무리를 선보인다는 반응이 많다. 시리즈에 뜨거운 안녕을 고하기 전 알아두면 좋을 몇 가지 사실들을 키워드로 정리해 소개한다.
01. 사라진 용들
“어렸을 때는 드래곤들이 많았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드래곤 길들이기3> 재밌게 보는 다섯 가지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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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과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것 중 무엇이 더 괴로울까. 제 살 깎아먹는 고백부터 하고 시작해야겠다. 지난해 12월 극장가에 출사표를 던진 한국영화 3편 <마약왕> <스윙키즈> <PMC: 더 벙커>를 이제야 봤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상업영화, 특히 규모 있는 영화를 보는 게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노동처럼 느껴졌기에 애써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호기심이 생긴 건 슬프지만 세편의 영화가 모두 흥행에 실패한 탓이다. <마약왕> 186만명, <스윙키즈> 145만명, <PMC: 더 벙커> 166만명(2019년 1월 17일 기준)의 관객을 동원하며 제작비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뒀다. 관객 반응도 하나같이 아쉬움의 토로였다.
적당히 현실인 척, 편리해서 더 나쁜 한국영화의 몇 가지 습관
만약 여느 때처럼 어떤 작품이 적당히 관객을 모으고 시즌의 승자로 기록됐다거
다양한 방식으로 기대를 배신하는 <마약왕> <스윙키즈> <PMC: 더 벙커>, 그 참을 수 없는 피로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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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전학 첫날의 일이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반 아이들은 통과의례처럼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봤고, 그 질문 중 하나는 100m 달리기 기록이었다. 당시 그 학교에서 달리기 시합이 한창 유행인 모양이었다. 나는 당시 이제 막 과체중으로 진입 중이라 작고 통통한 체격이었지만, 100m 달리기는 14초대, 그 전 학교에서 여자 중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록을 말해주자 갑자기 호의적이던 아이들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진짜야. 항상 계주 주자로 나갔다고. 그럼 증명해봐. 내일 종례 후 시합이다. 그렇게 전학 온 첫주 내내 나는 이틀에 한번꼴로 운동장을 뛰었다. 세 번째 경기에는 구경꾼들이 확연하게 늘었다. 그때부터는 더이상 전학생인 내 실력을 검증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어느새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 중 달리기 최강자를 결정하는 분위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달리기는 항상 좋아했으니까, 이걸로 새로운 학교에 적응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달리기 시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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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의 노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검거된 소년 자인의 나이를 치아로 추정하는 광경으로 시작한다. 12살로 짐작되는 소년은 또래보다 체구가 작다. 반면 20대처럼 행동하고 40대의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인은 욕을 들으면 곧장 욕으로 맞받아치고 연명하기 위해 좀도둑질을 망설이지 않는다. 조그만 소년은 크고 힘센 어른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항상 눈을 위로 치뜨고 있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좀더 거친 영혼을 가졌다면 이런 모습일까? 베이루트 거리에서 캐스팅된 비전문 배우 자인 알 라피아는 나아가 할리우드 청춘스타 같은 카리스마로 관객을 당황스럽게 한다. 게다가 <가버나움>에서 미성년 배우의 놀라운 연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자인이 돌보게 되는, 걸음마도 못 뗀 아기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는 사상 최연소 명배우로 손색이 없다.
01/04
코언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는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모털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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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은 제목 ‘그린 북’(흑인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북)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를 다룰 것이란 걸 충분히 예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연출은 <덤 앤 더머>(1994)를 비롯해서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1998)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2001) 등 특유의 코미디영화 연출로 잘 알려진 피터 패럴리 감독이다. 그동안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주제와 스타일을 고려하면 이번 영화 <그린 북>은 그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주제의 작품이다. 하지만 막상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상반된 성격(바른생활의 교양과 우아함을 갖춘 완벽한 천재 피아니스트/원칙보다 반칙이 우선인 주먹만 믿고 살아온 다혈질 운전기사)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익히 보아온 전형적인 인물 설정으로 대략적인 이야기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린 북>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백인 운전기사 토니
인물 설정은 전형적인 <그린 북>, 낯섦은 어디에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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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한번에서 그치지 않는다. 알파벳 모양의 칼자국이 잔인하게 새겨진 채 발견되는 시체들. 연쇄살인범은 현장에 다음 범행에 대한 힌트를 남기고, 게임을 걸듯 두명의 형사를 지목한다. 살인범의 지목을 받은 퇴직한 형사 아처(알 파치노)와 현직 형사 루이니(칼 어번)는 다음 살인을 막기 위해 범인의 흔적을 추적한다. 취재차 루이니를 만나러 갔다가 살인 현장을 함께 목격하게 된 현직 기자 크리스티(브리타니 스노)도 추적에 가세한다. 범인을 쫓는 과정에서 아처와 루이니는 자신들이 겪은 과거의 사건과 연쇄살인 사건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피해자가 늘어날수록 점점 채워져 가는 행맨 게임의 알파벳. 과연 세 사람은 살인 사건을 막고, 범인을 체포할 수 있을까.
영화 <행맨>은 많은 이들이 한번쯤은 들어보거나 해보았을 알파벳 게임인 ‘행맨 게임’을 모티브로 한다. 이를 ‘연쇄살인’이라는 소재와 결합한다는 지점에서 흥미롭다. 다만 이러한 소재를 풀어
<행맨> 반드시 다음 살인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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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리스트>는 2015년 치열한 경쟁 끝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 결승에 진출한 ‘파이널리스트’ 12인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특히 차별화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만의 독특한 결승전 진행 룰(rule)을 최초로 담아낸 다큐멘터리라는 점이 흥미롭다. 결승 진출이 확정된 후 12인의 ‘파이널리스트’는 벨기에 워털루의 퀸 엘리자베스 채플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8일 동안 경연을 준비한다. 결승무대에서는 지정곡과 자유곡 각 1곡씩 연주하게 된다. 지정곡은 오직 해당 연도의 결승전만을 위해 작곡된 곡으로 합숙이 시작되는 첫날 최초로 전달받는다. 모든 전자기기를 반납하고, 외부와의 접촉이 일절 금지된 공간에서 ‘파이널리스트’들의 고독한 싸움은 계속된다.
채플에서의 합숙 과정, 새로운 곡을 해석하고 연습하며 겪는 고충, 바이올린에 대한 애정, 우승을 향한 열망, 콩쿠르 이후 바이올리
<파이널리스트> 세계 3대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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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창간호>는 백승환 감독의 기획과 총괄 제작 지휘 아래 4명의 감독이 각각 따로 제작한 5편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영화다. 이야기나 배우가 연결되는 구조의 영화는 아니다. 백승환 감독이 연출한 <대리 드라이버>와 <삼선의원>은 각각 대리운전사와 국회의원을 소재로 다룬다. 어렵게 하루 벌어 살아가는 대리운전사인 줄 알았지만 학교 선배이자 영향력 있는 인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차 주인이 오히려 대리운전사를 모시고 다니는 촌극이 발생한다. <삼선의원>은 연극적인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실험극으로 4선과 당대표라는 중요한 일을 앞둔 국회의원이 첫사랑 타령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꼬여간다. 이영진, 백수장 두 배우가 한집에서 썸타다가 헤어지지 못해 끙끙 앓는 커플을 연기하는 <양가성의 법칙>은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던 여자가 진심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결국 엄마라는 따뜻한 결말로 나아가고, 느닷없이 10억원을 줄 테니 이혼에 합의
<창간호> 5편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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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소설가를 꿈꾸는 언니 베스(에밀리아 존스)와 그러한 언니를 못마땅해하는 베라(테일러 힉슨)는 새롭게 이사한 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에게 습격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는다. 이후 성인이 된 베스(크리스털 리드)는 집을 떠나 공포 소설가로 성공을 거두지만 베라(아나스타샤 필립스)는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사건이 벌어진 집에서 살아간다. 어느 날 베라로부터 이상한 전화를 받은 베스는 베라와 어머니를 찾아 집으로 향하고, 도망치려 했던 과거의 기억을 다시 마주하면서 혼란을 느낀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며 혼란스럽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가운데 자신의 공포와 대면하지 못하고 환상의 세계로 회피하려고 하는 베스의 변화와 성장을 그려내는 공포영화. H. P. 러브크래프트를 의미심장하게 인용하며 시작하지만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를 다룬 그의 소설과는 달리 점핑 스케어드와 폭력 묘사 같은 직접적인 자극과 충격을 통해 공포를 이끌어낸다. 이야기가 긴장감 있
<베스와 베라>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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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부부 피터(팀 로스)와 해리(우마 서먼)는 이리나(매기 큐) 대신 마약 거래에 나가 돈을 받아오지만 그 돈을 모두 도박과 술, 마약으로 날려버린다. 잔혹한 범죄자인 이리나의 보복을 피하고자 둘은 LA로 도주하고, 이리나에게 갚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그동안 알아왔던 여러 인물들과 접촉한다. 돈을 복구할 방법을 고민하던 그들은 피터의 전처인 재키(앨리스 이브)의 반지가 엄청난 가치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훔치기로 한다.
시놉시스만 봤을 때는 정교한 계획과 실행을 중심에 둔 케이퍼 무비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화는 긴장감 넘치는 범죄의 순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알코올과 도박에 중독된 부부 사기꾼을 중심으로 코미디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큰 줄기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간다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애정을 독특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피터와 해리의 관계, 그들이 만나게 되는 이상한 인물들, 무계획적인 범죄 시도와 실패를 통해 만들어지는 코믹한 상황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전
<크리미널 게임: 보석 사기단> “목숨을 건 한탕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