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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의 결정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작 <겟 아웃>의 프롤로그에서 납치의 배경음악으로 <도망가 토끼야, 도망가>(Run Rabbit Run)를 사용한 조던 필은 <어스>에 무수한 살아 있는 토끼와 토끼 인형, 토끼 프린트를 등장시켜 본인의 토끼 공포증을 널리 알렸다. <어스>의 모든 요소가 그렇듯 영화 속 토끼의 의미는 하나가 아니다. 토끼는 인간 복제 음모 초기에 실험으로 희생된 동물이며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후 지하에 방치된 복제인간들의 은유이자 유일한 식량이다. 어린 애들레이드(매디슨 커리)가 미지의 지하세계와 조우하는 경험은, 토끼의 인도로 출발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여정에 빗댈 만하다.<도니 다코>(2001)와 <월레스 & 그로밋: 거대토끼의 저주>(2005)를 잇는 스크린의 불길한 토끼다.
04/05
조던 필을 단박에 중요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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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보려 한다. 첫 번째, 왜 레드는 거미에 비유되는가? 두 번째, 도플갱어가 나오는 통로는 왜 놀이공원의 내부에 있는가? 세 번째, 레드의 끝없는 무용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이 질문들에 따라서 <어스>를 보는 관점은 세개 혹은 그 이상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왜 레드는 거미에 비유되는가
왜 레드는 거미에 비유되는가? 어린 애들레이드가 들어간 놀이공원 거울 방에서 거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거울 방 내부에서는 거미 여인이 등장하는 신화가 흘러나온다. 거미 여인이 등장하는 이 신화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다룬 레슬리 마몬 실코의 장편소설 <의식>에도 등장한다. 거미 여인 치치나코가 대상을 상상함으로써 대상을 현존하게 만든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신화다. 거미 여인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이며, 그렇기에 거미 여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상징이며, 거미에 비유되는 레드 또한 원주민에 대한 상징이라 볼 수 있
<어스>를 다시 보게 하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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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스타워즈> 셀러브레이션 라이브에서 <스타워즈 에피소드 9>(이하 <스타워즈 9>)의 티저 영상이 공개됐다. 예고편과 함께 공개된 부제는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The Rise of Skywalker), ‘스카이워커의 비상’으로 정해졌다.
<스타워즈>의 아홉 번째 에피소드인 이 영화는 레이(데이지 리들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스타워즈>의 속편 3부작 중 최종편에 해당한다. 죽은 루크 스카이워커(마크 해밀)의 내레이션이 실린 티저 예고편은 ‘THE SAGA COMES TO AN END’(영웅전설의 끝이 온다)라는 문구를 삽입해 스카이워커 사가의 종료를 알리며 시리즈 42년 역사의 전환점을 암시하고 있다.
<스타워즈 9>은 루크 스카이워커, 레이를 포함해 포(오스카 아이작), 핀(존 보예가) 등의 주인공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특히 오리지널 <스타워즈>
<스타워즈 에피소드 9> 티저 예고편에서 부제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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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갑작스레 사망한다. 정확한 사유를 따져 물을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지만 실은 어이없는 우연의 일치가 얽혀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권력집단인 위원회가 소집되는데 모두가 스탈린의 죽음 이후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대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스탈린이 자신의 장기 집권을 위해 반대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웬만한 실력자들은 모두 몰아냈기 때문이다. 어떤 전문가도 없는 상황에서 차기 권력을 누리고 싶어 하는 정치가와 군인, 경찰 지도자들이 모여 소련의 침몰을 막으려 고군분투한다. <스탈린이 죽었다!>는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을 둘러싸고 혼란스러웠던 당시 소련의 정치적 공황 상태를 풍자와 유머를 곁들여 조소한다. 무능력한 권력가들의 어이없는 실수와 결정 때문에 한 국가의 정책이나 인민의 안위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웃긴 한편 슬픈 감정을 자아낸다. 이 영화는 올 초 러시아 문화부로부터 상영 금지 조치를
<스탈린이 죽었다!> 권력을 향한 치열한 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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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피나투보 화산지대의 작은 마을. 숲이 파괴돼 터전을 잃은 원주민들은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채 건강을 위협받고 있다. 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의료 선교팀에 환자들이 자주 찾는 이름이 있다. 바로 ‘닥터박’. 1996년부터 이 지역을 정기적으로 방문한 외과의사이자 선교사인 박누가 선생을 부르는 말이다. 그가 얼마 전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랜 기간 그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거나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아픈 데 없어요?” 박누가 선교사는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길 위에 방치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묻는다. 그로서는 ‘안녕하세요’보다 훨씬 간편한 인사법이다. 1989년에 봉사활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꾸준히 필리핀 곳곳을 누비며 의료 활동을 펼쳐온 박누가 스토리는 종교적 색채와 관계없이 한 사람의 티 없는 소명과 끈기에 감복하게 만든다. 기독교적 메시지가 강하게 녹아 있지만, 영화의 감정을 이끄는 동력은 매사 의연하고 소탈한 그의 인
<아픈 만큼 사랑한다> “아픈 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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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도가 아니라 인지도가 3%였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하기 이전,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국민경선을 치러야 하는 상황을 이야기하던 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이 한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이해 제작된 영화 <노무현과 바보들>은 정치인 노무현이 쌓아올린 행적보다는 그를 둘러싸고 인지도 없는 변호사 출신의 한 국회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당선까지 하도록 후원한 ‘바보들’의 행적에 주목한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생겨난 당시 인터넷 카페 커뮤니티 활동부터 온라인 아이디로만 기억되던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위해 하나둘 모여든다. 영화는 서로 얼굴도 모르고 직업도 제각각이었던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경선과 대선을 차례로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 영상으로 보여주고, 현재 노사모 회원들에게 지난 20여년의 소회를 묻는다.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육성 중 과거 본인 스스로를, 연결되어 있는 산맥이 없는 “
<노무현과 바보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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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75년, 태양이 적색거성으로 변함에 따라 태양계 전체에 급격히 이상현상이 일어난다. 지구에는 빙하기가 찾아오고 살아남은 인류는 지하에 숨어들어 생존한다. 곧 태양이 폭발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인류는 지구 한쪽 면에 에너지 추진체를 달아 태양계를 탈출하는 ‘유랑지구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어려움을 뚫고 외우주로 출발한 지구는 17년의 항해 끝에 목성의 궤도를 지나는 도중 목성의 중력권으로 끌려들어가 충돌의 위기를 맞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최정예팀이 출동한다. 한편 우주정거장에서 지구를 인도하던 류페이창(오경)은 유랑지구 계획에 숨겨진 이면을 감지하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SF소설계의 권위 있는 상인 휴고상을 수상한 중국의 SF 작가 류츠신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유랑지구>는 중국의 우주굴기를 드러낸 야심작이다. <아마겟돈>(1998) 등 우주재난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익숙한 전개에 할리우드영화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CG, 특
<유랑지구> 태양계를 탈출하는 ‘유랑지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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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시작된 뷰티플 마인드 오케스트라는 장애인, 비장애인 친구들이 서로의 차이와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함께 연주하고 있다. 카메라는 악기 포지션별로 인물을 차례로 조명하며 가장 일상적인 예술인 음악이 어떻게 관계를 진화시키고 이 네트워크를 성장시키는지 보여준다. 클래식기타를 치는 심환은 상대에 따라 자신의 애칭을 달리하는데 이것이 그만의 개성이자 매력이다. 시각장애와 지체장애를 안고 있는 허지연은 자기 키보다 큰 더블베이스를 켜는데, 월등한 기억력으로 빠른 습득력을 자랑한다. 희귀망막질환을 가진 최연소 단원 김건호는 어려서부터 큰 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피아노에 특출한 재능이 있다. 서울예고 졸업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 입학한 첼로 영재 김민주, 작곡에 재능이 있지만 청각장애를 가진 탓에 절대음감을 요구하는 한국 입시와 맞지 않는 고민을 가진 이한의 이야기 등도 소개된다. 오케스트라 활동은 이들에게 개인적 도약과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다름에서 비롯된 개인 고유의 가치를
<뷰티플 마인드> 서로의 차이와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함께 연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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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전라도 외딴섬에 사는 기강(손호준)은 좁아터진 마을이 답답하기만 하다. 친구들과 함께 농작물을 훔치다 체포된 기강이 의리를 지킨답시고 죄를 혼자 뒤집어쓰자 동네 어른들은 “크게 될 놈”이라고 추켜세운다. 젊은 혈기에 허세만 부리는 아들이 사고를 치면 수습은 어머니 순옥(김해숙)의 몫이다. 홀로 식당을 운영하며 남매를 키운 순옥은 무뚝뚝해 보여도 자식 사랑만큼은 지극하다. 하지만 철없는 자식들이 어머니의 진심을 알 리 없다. 성공을 좇아 섬을 떠난 기강은 서울에서 범죄 세계에 발을 들이고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형수가 되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로 기강이 자포자기하는 사이 순옥은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이 수감된 교도소를 찾는다.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가 주인공인 영화는 신파로 흐르기 쉽다. 기획 당시 제목이 <엄니>였던 <크게 될 놈>은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익숙한 서사에 기교를 더하지 않았다. 대신 배우의 연
<크게 될 놈> 세상에서 가장 멀고도 가까운 엄니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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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7일 23시59분. 병원에 실려온 은조(이청아)는 함께 병원으로 이송된 남자 호민(홍종현)의 사망 선고를 듣는다. 은조가 흐릿하게 정신이 들자마자 시간은 하루 전 과거로 돌아간다. 이날 은조는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자살하기 위해 길을 떠난 참이다. 앞서 은조는 어린 딸을 잃었다. 딸을 죽인 건 치매 노인. 그 노인의 아들이 호민이다. 딸을 잃고 슬픔에 빠져 죽음을 택했던 은조는 자신이 거꾸로 가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딸을 되살릴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딸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나온 시간을 반복해서 살아가는 은조는 결국 자신이 아이를 임신한 당시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 시간여행을 멈추기 위한 열쇠를 호민이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눈떠보니 어제’라는 설정은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다시, 봄>에서 은조도 잃어버린 딸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이다. 이 영화가 조금 더 특
<다시, 봄> 시간은 하루 전 과거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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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기억하지?” 테마파크에 놀러 갔다가 갱단의 총격으로 남편과 딸을 잃은 가정주부 라일리 노스(제니퍼 가너)의 복수극은 이 한마디로 시작된다. 뇌에 총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깨어난 라일리는 당시 공격을 가한 조직원들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상태. 비겁한 경찰과 부패한 사법부가 라일리를 방치하는 사이, 그녀는 가족의 사망 5주기가 다가올 때까지 숨죽이며 처절한 단련을 거친다.
사건 발생 5년 이후로 점프하는 <아이 엠 마더>의 서사는 제니퍼 가너의 극적인 재등장을 알리면서 가장 재미있는 구간을 만들어낸다. 근육질로 몸을 바꾼 제니퍼 가너는 가격하고 들이받는 강한 타격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배우가 작정하고 덤벼든 모양새다. ‘아이 엠 마더’라는 다소 낯 뜨거운 한국어 제목 또한 일면 영화의 상징적인 정체성을 가리키고 있다. 똑같은 공식을 지닌 액션 복수극에서 늘 피해자의 자리에 있던 여성(아내)이 이번엔 행위의 주체자로 나섰다는 점은 환영받아 마땅하다. 이 지
<아이 엠 마더> 남편과 딸을 잃은 가정주부의 복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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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루이스(제이슨 클라크)는 가족과 함께 보스턴을 떠나 메인주의 한적한 마을로 이사 간다. 두 아이와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내 레이첼(에이미 세이메츠)과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다. 딸 엘리(주테 로랑스)는 이사한 집 뒷산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이웃집 할아버지 주드(존 리스고)는 엘리에게 죽은 애완동물을 묻는 곳이라고 알려준다. 어느 날 엘리가 아끼던 고양이 처치가 집 앞 도로에서 죽은 채 발견되고, 루이스는 주드의 청으로 처치를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묻는다. 다음날 처치는 산 채로 루이스 가족 앞에 나타나지만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 있을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 채 말이다. 스티븐 킹의 자전적 소설 <애완동물 공동묘지>를 각색한 <공포의 묘지>는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
<공포의 묘지> 죽었던 딸이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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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우(강예원)는 야근이 많은 워킹맘이다. 야근할 때마다 자신의 자리에 와서 치근덕거리는 최 실장(주석태)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고 공포스럽다. 그 때문에 도망치듯 회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고, 그때마다 마주치는 경비원 준호(이학주)에게 따뜻한 말을 전한다. CCTV를 통해 회사의 거의 모든 곳을 한눈에 꿰뚫고 있는 준호는 성실해 보이는 경비원이다. 어느 날 영우는 야근을 마치고 주차장에 내려왔다가 원인 모를 사고를 당한 뒤 납치당한다.
<왓칭>은 영우가 누구에게 납치되었는지 머리싸움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영우가 맨몸으로 지하 주차장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숨가쁘게 보여준다. 예측하기 어렵지 않은 서사 전개 방식인데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납치범 때문이다. 웃는 얼굴로 극악무도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납치범의 모습은 공포스러운 동시에 실소를 자아낸다. 영화는 경비원 사무실, 셔터, 자동차 등 다양한 장치를 가지고 지하 주차장이라는 폐
<왓칭> 회사 주차장에서 납치 당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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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회의 풍경과 러시아인들의 심상을 진중하고 예리한 필치로 조명해온 작가 감독, 안드레이 즈뱌긴체프의 신작. <러브리스>는 이혼을 앞둔 젊은 부부, 제냐(마리아나 스피바크)와 보리스(알렉세이 로진)의 갈등에서 시작된다. 각자의 연인과 함께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두 사람에게 12살짜리 아들 알로샤(마트베이 노비코프)는 장애물일 뿐이다. 부모가 자식의 양육을 맡지 않으려 심하게 말다툼하던 날 밤, 아이는 욕실에서 부모 사이에 오가는 말을 듣고 숨죽여 오열한다. 그리고 아이가 사라진다. 며칠째 아이가 실종된 줄도 모른 채 각자의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부부는 뒤늦게 알로샤를 찾아나선다. 하지만 알로샤의 행방은 묘연하다.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는 사랑 없는 사회의 비정한 풍경을 응시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만 충실한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등장인물들이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건네는 “사랑한다”라는 말은 이 영화에서 감정 표현의 수단으로
<러브리스> 사랑 없는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