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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금속 표면을 연상시키는 냉혈한적 인상과 굳은 입매, 본심을 파악하기 어려운 깊고 푸른 눈. 페미니즘적 비주류 영화에 가까운 <더 와이프>를 비롯한 <파라다이스 로드>(1997), <앨버트 놉스>(2011)부터 상업영화 <101마리 달마시안>에서 조차 글렌 클로스는 대개 인간, 좁게는 여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비인간적 인격으로 등장해왔다. <더 와이프>는 글렌 클로스의 배우적 페르소나를 활용한 영화다. 세간에선 아무래도 영화가 그녀의 재능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이 중평인 듯하다. 작품에서 그녀는 들끓는 정념을 표정으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대작가의 아내이자 속내가 궁금한 여성 조안 역을 맡았다.
그림자 없는 조명이나 침실과 홀 등의 실내 공간은 마치 고전 스웨덴영화의 차분한 실내극을 연상시킨다. 실버와 민트를 중심으로 한 색조는 노작가와 그의 아내의 백발과 조응하며 부드러운 정조를 만들어낸다. 사실 <더 와이프>
<더 와이프>, 그녀를 응원만 할 수는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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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1일, 규모 9.0의 대지진이 일본 8개현을 강타한 날이다. 동일본대지진으로 2만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재해 직후 피난민 수는 47만명, 그중 8만명은 아직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폐허가 되어버린 땅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지금을 살아가고 있을까. 재일교포 3세 윤미아 감독의 <봄은 온다>는 동일본대지진 이후 6년이 지난 2017년부터 10개월간 재해 지역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무너진 삶을 재건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인간의 고결함과 강인함에 대해 배웠다”고 말하는 윤미아 감독을 만났다.
-재일교포 3세인데 국적이 한국이라고 들었다. 한국은 얼마 만에 방문한 것인가.
=이누이 히로아키 감독의 다큐멘터리 <이예: 최초의 조선통신사>(2013)의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울산은 여러 번 오갔다. 당시 조선통신사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서 울산 MBC와 협업했기에 서울보다 울산을 자주 갔다. (웃음) 한국은 내게 짝사랑하는
<봄은 온다> 윤미아 감독 - 색을 잃은 세상에서 꽃을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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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은 2014년 4월 16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 가족의 이야기다. 아들 수호(윤찬영)의 시간은 그날에 멈춰 있다. 해외 출장 중이었던 아빠 정일(설경구)은 아들을 먼 곳에서 떠나보내야 했고, 엄마 순남(전도연)은 어린 딸 예솔(김보민)과 단둘이서 슬픔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수호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수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수호가 없는 수호의 생일에 모여 각자의 기억을 꺼내놓는다. <생일>은 이종언 감독이 실제 안산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고 아이들의 생일을 치르며 느꼈던 마음을 조심스레 영화에 담은 작품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마음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담고 싶었다는 이종언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편집을 마칠 때까지 유가족들과 소통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그 누구도 이 영화로 상처입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감독의 진심에 감응한 전도연과 설경구가 출연을 결정했고, 영화는 다가오는 4월 3일 개봉한다.
<생일> 이종언 감독 -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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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도 하기 전에 차이기 일쑤지만 연애에 목숨 건 <철벽선생>의 왈가닥 여고생 사마룬과 실사판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 세상과의 이별 과정을 차곡차곡 감내하던 사쿠라를 한 배우가 연기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철벽선생>의 캐스팅 제의가 왔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역할을?”이라며 당황했지만 “도전해보자고 마음먹었다”고. 첫 주연작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가 그해 일본에서 자국 영화 박스오피스 5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흥행했으니, 이제 막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올리고 있는 10대 배우의 가능성에 일본영화계가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분위기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해 낯을 가린다거나 춤과 노래를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돌변하는 그녀는 최근 출연했던 드라마 <벼랑 끝 호텔>에서도 말끝마다 “도전”을 외치는 씩씩한 주방장 하루 역할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2011년 제7회 도호 신데
<철벽선생> 하마베 미나미 - 그녀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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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증권회사에 입사한 평범한 청년이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하지만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변해가는 이야기다.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여의도에 입성한 신입 주식브로커 조일현(류준열)을 중심으로, 일현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작전 설계자 번호표(유지태), 번호표를 오랫동안 쫓아온 금융감독원의 한지철(조우진)이 서로를 이용하고 대립하는 구조다. <돈>이 전제로 하는 것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마음이다. 영화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부자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수수료 0원인 신입사원 일현의 처지를 소상히 보여준다. 겹겹이 쌓아 올린 리얼리티는 일현에 대한 감정이입의 강도를 높이는 장치가 되는데, 이때의 리얼리티는 여의도를 부지런히 뛰어다닌 박누리 감독의 발품 덕에 확보될 수 있었다. 돈에 대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망을 현실적으로 담아낸 <돈>은 <남자가 사랑할 때>(2013), <부당거래>
한국영화 화제작 감독 인터뷰②_ <돈> 박누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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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한공주>(2013)에 쏟아진 호평 이후 이수진 감독은, 지난 5년간 차기작이 가장 기대되는 감독으로 손꼽혀왔다. 전작의 영향으로 그의 다음 영화는, 또 한번 우리 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판이 되리라 미루어 짐작했다. <우상>은 그런 지점에서 이수진 감독이 꺼내든 또 한번의 날카로운 ‘칼’이다. 교통사고, 시체유기라는 범죄 스릴러 장르 속 사건으로 연결된 세 사람. 아들의 죄를 덮으려는 도지사 후보 구명회(한석규), 그 사고로 아들을 잃은 소시민 유중식(설경구), 그리고 그날 사고의 목격자인 중식의 며느리 최련화(천우희)가 각자의 ‘폭주하는 행동’을 전개한다.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에서 상영된 후, 복잡한 전개에 대한 호불호로 의견이 분분한 작품. 전작처럼 ‘청소년 관람불가’가 아닌 15세 관람가지만, <우상>에는 본성을 드러내는 인물들의 행동을 뒷받침할 충격적인 장면들도 적지 않다. 5년 만에 신작 개봉을 앞둔 이수진 감독을 만났다. “
한국영화 화제작 감독 인터뷰①_ <우상> 이수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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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와 ‘아름다움’을 결합할 수 있을까? 부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 같지만 바보처럼 답변의 과정을 일일이 캐묻기로 하자. 두 단어를 함께 거론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정당성은 어떻게 입증될 것이며, 불가능하다면 그 금기는 무엇을 근거로 주장할 수 있을까? 후자의 견해를 따른다면 우리는 상식적이고 단호한 결론에 도달한다. 아우슈비츠의 참극은 반인륜적인 집단 학살로, 인류 역사의 깊은 블랙홀이다. 그곳에서 발생한 것은 “삶과 죽음의 바깥(한나 아렌트)”에 있는 영역이며 침묵조차 버겁게 만드는 육중한 사태다. 수용소의 재앙이 사고와 언어, 표상의 일대 위기를 가져왔다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언급은 전후의 서구 예술 체계가 직면한 문제의식을 집약한다. 이를 ‘아름다움’이라는 공허한 미적 언어와 연관 짓는 것은 비열한 상상이자 포르노그래피적 극화라는 것이다.
평균적인 교양과 의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기는 어렵다. 차마 반론을 제기할 수나
하룬 파로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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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의 37번째 장편영화이자 본인이 직접 배우와 감독을 맡은 23번째 영화 <라스트 미션>이 개봉(3월 14일)했다. 마치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은 제목이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2008년 <그랜 토리노>가 시대를 마감하는 고별사처럼 보인 것에 반해 멕시코 카르텔의 마약 운반책이 된 87살 노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라스트 미션>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세계가 아직 끝날 수 없음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영화가 된 사나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2008년과 2018년의 이스트우드를 비교하며 노쇠한 몸에 새겨진 ‘영화라는 기억’을 더듬어본다.
구부정한 어깨의 각도가 이미 가파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바로 이 초라하게 쭈그러든 노인의 뒷모습이다. 한껏 당긴 활시위처럼 굽은 뒷모습에서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윽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라스트 미션>과 그의 연출, 연기세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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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의 결근으로 그날 체육 시간에는 우리 반과 옆 반의 피구 시합이 벌어졌다. 운동장에 주전자 물을 부어 그은 선 안으로 아이들이 비좁게 섰다. 피구는 공에 맞으면 ‘죽는’ 경기다. 공을 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밀집도가 높은 초반엔 공에 맞은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대부분 나처럼 공을 두려워해 섣불리 잡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평소엔 나도 포식자를 피해 우르르 떼 지어 다니는 작은 물고기같이 도망가다 휩쓸려나갔다. 근데 그날은 웬 운이 따라주었는지 중반이 넘도록 살아남았다.
경기는 우리가 열세였지만 담임 선생님도 안 계신데 질 순 없다는 이상한 승부욕이 아이들 사이에 있었는지 응원의 열기가 거셌다. 여느 때라면 벌써 탈락해 여유롭게 응원이나 하고 있을 내가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덩치가 작아 그나마 공을 운좋게 피하긴 했지만 빠른 공을 잡을 실력도 용기도 없었다.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공은 마치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알 수 없
나를 죽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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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마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머리칼이 불꽃 모양으로 일렁이고 눈은 한쌍의 화이트 홀처럼 빛나고 팔다리는 열기를 뿜어낸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저 슈퍼 파워의 진부한 만화적 묘사로 보였던, 각성한 캡틴 마블(브리 라슨)의 이미지는 놀라운 해방감을 자아낸다. 이 이미지는 “만약 내가 자유로워진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여성 일반의 잠재된 자문에 대한 강력한 외마디소리 답변이기 때문이다. 캐롤 댄버스(브리 라슨)가 캡틴 마블로 도약하는 계기는 외적으로 주어지는 에너지가 아니라 언제나 내면에 품고 있던 뇌관에서 안전핀을 뽑는 결단이다.
03/08
<캡틴 마블>이 전환점을 맞이하기까지 캐롤(브리 라슨)은 이중의 가짜 정체성에 갇혀 있다. ‘남성성이 곧 인간성’이라고 암시하는 교육을 믿고 여성적 파워를 억누르고 있는 동시에, 지구인으로서 정체성을 제거당한 채 크리족의 모범적 전사가 되고자 노력한다. 관객 역시 크리족의 세계관에 따라, 할리우드 상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캡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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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약점을 고백하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애석하게도 나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전설적’ 전작 <해피 아워>(2015)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아사코>를 두고 <해피 아워>와 비교하며 온통 실망과 불만을 쏟아냈던 비평들에 어찌됐든 동의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번역본이 없는) <아사코>의 원작인 시바사키 도모카의 동명 소설을 읽지 못했다. 인터뷰 기사들을 통해 영화가 소설과 몇몇 지점- 예를 들어 동일본대지진 에피소드- 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정확하게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논할 수 없다. 달리 말해 나에게 <아사코>는 어떠한 참조점도 없이 도착한 온전한 영화이다.
감독의 이름마저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 영화를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가 아닐까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의 최근작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극장판>(2017)에 ‘침략자’로 등장한 배우
<아사코>, 성장한 것 같지만 결국은 제자리인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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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벚꽃과 함께 팔짱 낀 커플들이 길거리를 점령하는 계절. 이불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해도 스마트폰 속 소셜 미디어 피드를 통해 어쩔 수 없이 달달한 사진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계절이 와버린 것이다. 연애 세포 0%의 상태라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이들이라면 주목하시길. 없던 연애 세포도 만들어준다는 로맨스 장인 배우들의 달달한 신작을 한자리에 모았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데웠던 이 배우들의 전작 속 활약도 함께 소개한다.
하마베 미나미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그간 숱하게 봐왔던 로맨스 영화 속 시한부 소녀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속 사쿠라(하마베 미나미)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의 사랑 표현 방식만큼이나 개성 있는 캐릭터다. 삶을 너무 사랑하지만 죽음 역시 담담하게 준비하던, 극과 극에 놓인 캐릭터의 상황과 심정을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납득시킨 하마베 미나미의 연기력이 빛났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란 대
연애 세포 0%라면 클릭! 로맨스 장인 배우들이 당신의 연애 세포를 충전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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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는 율(말라 엠데)은 포르투갈에 있는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캠핑카 여행을 준비한다. 정치학을 공부하는 얀(안톤 스파이커) 역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베를린에서 스페인으로 떠날 계획이다. 카풀로 쾰른까지 이동해 비행기를 탈 계획이었던 얀은 카풀하기로 한 사람에게 바람맞고, 우연히 만난 율의 캠핑카에 동승한다. 단둘이 캠핑카에서 장거리 여행을 하게 된 두 사람은 연애, 죽음, 환경 등을 소재로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서로 신상을 모르는 상태로 토론을 이어가던 두 사람. 얀의 무신경함이 율의 상처를 건드리고 율은 감정이 상해 길 한복판에 얀을 내려줘버린다. 그러나 늦은 밤 혼자 캠핑카에 남은 율이 다른 남성으로부터 위협받자 얀이 구해주고, 둘은 다시 여행길에 동행한다.
처음 만난 남녀가 함께 캠핑카를 타고 유럽을 횡단한다. 당연히 둘 사이엔 로맨스의 기운이 싹튼다. 차에서는 다양한 주제로 끊임없는 토론이 이어지고, 차창 밖으로는 독일, 벨기에, 프
<에브리타임 룩 앳 유> 낯선 길 위에서 만난 두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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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2010), <우는 남자>(2014) 등을 연출한 이정범 감독의 신작. 조필호(이선균)는 경찰 신분으로 각종 비리를 저지르는 ‘악질경찰’이다. 뒷돈을 챙기는 건 물론이고 때로는 범죄까지 사주하는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제 한몸 잘 건사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급하게 돈이 필요해진 필호는 전문털이범 기철(정가람)과 공모해 경찰 압수창고를 털려 한다. 그런데 창고에 기철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필호는 기철이 폭발 사고로 사망하기 전 친구 미나(전소니)에게 동영상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미나가 가진 동영상을 찾아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한다. 한편 대기업 태성그룹의 해결사 태주(박해준) 역시 그룹의 비밀이 담긴 기철의 동영상을 찾아나선다.
<악질경찰>은 ’행복한 도시 안산’이라는 문구가 담긴 액자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2015년, 그러니까 세월호 참사 1년 뒤의 안산
<악질경찰> 나쁜 놈 위, 더 나쁜 놈이 지배하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