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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56분, ‘우리’는 마리와 에리 두 자매를 지켜본다. 마리는 패밀리 레스트랑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다. 트롬본을 든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언니 에리를 들먹이며 대화를 잇다가 휴대폰 번호를 남기고 떠난다. 어두운 방 안에는 에리가 잠들어 있다. 두달 동안 긴 잠에 빠져 있는 그녀의 방에는 얼굴 없는 남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다. 마리에게 큰 덩치의 가오루가 찾아오고, 그녀의 청을 따라 호텔 알파빌로 향한다. 그곳에서 마리는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언니를 생각한다. 에리가 잠에서 깨면 그 남자는 자리에 없다. 새벽 6시52분, 마리는 집에 돌아와 에리와 함께 잠을 청한다. ‘우리’는 마리와 에리를 지나 아침의 새 햇살을 지켜본다.
“보이는 것은 도시의 모습이다”로 첫 문장을 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프터 다크>는 ‘우리’가 각자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중요한 소설이다. ‘나’라는 화자를 고집해온 그가 1인칭 복수인 ‘우리’를 화자로 내세워 소설에
씨네21 추천 도서 <애프터 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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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앞둔 9월, <씨네21> 북엔즈에 야심찬 책 셋이 꽂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프터 다크>,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8>,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이 바로 그것. 세 작가는 이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나름의 방법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을, 오랜 인기를 자랑하는 연작의 기틀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사 속 진실을 허물고 더 나은 다음을 궁리했다. 하루키와 정병설은 이미 그다음을 목격하고 있고, 이제 막 따끈따끈한 결과물을 내놓은 유홍준은 한창 독자들의 반응을 살필 것이다.
하루키의 인물은 대개 ‘나’였다. ‘내가’ 미도리를 사랑했고, ‘내가’ 사에키와 미친 듯이 몸을 섞었다. 하지만 <애프터 다크>의 화자는 ‘우리’다. 1인칭 복수인 ‘우리’는 소설 전체에 자리해 인물들을 바라보지만, 한순간도 이야기에 개입하지 않는다. 낯선 형식 때문일까, <해변의 카프카>(2002)와 <1Q84>(2009)
변화를 꾀한 사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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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을 알현하라!
당대 최고의 극연출가 로버트 윌슨의 두 걸작 <셰익스피어 소네트>와 <해변의 아인슈타인>이 10월에 한국에서 처음 상연된다. 브레히트가 세운 베를린 앙상블이 2009년 발간 400주년을 맞아 제작한 <셰익스피어 소네트>는 154편의 소네트 중 25편을 루퍼스 웨인라이트가 만든 음악 위에 얹어 무대화한 작품이다. 필립 글래스가 작곡한 동명의 오페라를 강렬한 이미지들을 병치해서 연출한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1976년 초연 이래 현재까지도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연극으로 회자되고 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일환으로 10월15일부터 3일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연례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광주아시아예술극장 극장1에서 10월22일부터 나흘 동안 무대에 오른다.
뮤지션들의 에세이
언니네 이발관의 이석원이 <보통의 존재> 이후 6년
[culture highway] 거장을 알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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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개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고독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1926년 저작 <종교란 무엇인가>는 종교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요소로서의 고독에 대해 언급하며, 합리적 종교관을 펼쳐 보인다. 인간 내면의 근본 정서와 냉철한 이성간의 화해의 산물로서의 종교에 대하여.
[도서] 정서와 이성간 화해의 산물로서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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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서스펜스의 대가 마거릿 밀러의 대표작. 친구와 단둘이 멕시코로 휴가를 떠난 에이미는 친구와 크게 다투고 만다. 다음날 새벽, 친구의 시체가 발견되고 에이미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에이미의 실종을 계기로 완벽해 보였던 가정 속에 숨어있던 불안과 갈등이 서서히 드러난다. 가정 스릴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도서] 심리 서스펜스의 대가 마거릿 밀러의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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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이후 근 30년 만에 선보인 스티븐 킹의 세 번째 중편소설집. 브람 스토커상 베스트 작품집상을 수상했다. 수록된 단편 <행복한 결혼 생활>은 영화 <굿 메리지>로, <빅 드라이버>는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닐 게이먼의 말을 빌리면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중편집이 될 책. 스티븐 킹 스스로도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독하다”는 세계로의 초대.
[도서] 스티븐 킹의 세 번째 중편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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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의 무용(無用)에 낙담할 때마다 꺼내보는 이름들이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비평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을, 정전에 가까운 비평가다. 하지만 정작 하스미 시게히코 스스로는 자신을 영화학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때마다 푸념처럼 반복되는 영화비평의 몰락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 것인지 하스미 시게히코에게 묻는다면, 그는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이다. “영화는 흥분의 대상이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스미 시게히코는 중학생 시절 르네 클레르의 <침묵은 금>을 보다가 안면마비를 일으켜 병원 신세를 질 정도로 영화를 사랑했다. 자신의 압도적인 영화체험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그의 비평은 영화에 최대한 밀착해 글을 읽는 이마저 빨아들인다. 그렇게 빚어낸 (여러 의미에서) 숨 막히는 문장들은 오직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영화에 부치는 연애편지다. 순수하게 영화에 대한 경탄에서 출발한다면 영화비평의 희열이 마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도서] 영화에 부치는 연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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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악기로 듣는 바흐
원전악기로 바흐와 비발디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하프시코드 연주자 안드레아 마르콘이 설립한 원전악기 전문 연주단체인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가 오랜 음악적 파트너인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노 카르미뇰라와 함께 10월31일(토)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 공연을 갖는다. 바흐와 비발디의 곡은 물론, 제미니아니의 <라 폴리아>까지 바로크 음악의 진수를 선보인다. 문의 SAC Ticket 02-580-1300, 인터파크티켓 1544-1555.
세상을 물들인 ‘로로스’의 도재명, 첫 솔로 싱글
2015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상을 수상한 ‘로로스’의 보컬 도재명이 자신의 첫 번째 솔로 싱글 《미완의 곡》을 발표했다. 이번 싱글을 시작으로 매달 새로운 싱글을 하나씩 발표해 내년 봄쯤에는 정규 앨범으로 묶어낼 예정이다.
프리마돈나의 피날레
발레리나 강수진이 지난 30년간 몸담았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마지막으로 <오네긴>
[culture highway] 자라섬 가득한 재즈의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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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녀가 함께 잠들었는데 아침이 되자 한 소녀가 사라졌다. 사무실에 괴한이 난입했는데 찾던 사람이 없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공격, 그 자리에서 한 여자가 사망했다.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아 키우며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 있던 여자가 남편을 도끼로 살해했다. <케임브리지 살인사건>은 해묵은 세 가지 사건을 수사하게 된 사립탐정 잭슨 브로디가 주인공이다. 실종된 소녀는 누가 데려갔을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사무실에 난입한 괴한은 누구인가?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갑자기 남편 살해범이 된 여자의 진실은 무엇일까?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의 작가 케이트 앳킨슨은 오래된 세 가지 사건을 탐정에게 던져주고는 그들의 과거를 파헤치기보다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 와중에 잭슨은 수사를 위해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자주 유혹당하고, 전 아내가 데려가버린 딸과 조금이라도 더 오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미네트 월터스의
[도서] 사건 안에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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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기분 나쁘게 만드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요괴전문가 교고쿠 나쓰히코의 <있어 없어?>는 그림책이다. 그의 ‘교고쿠도’ 시리즈를 한권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이 그리는 그림책이라니 안 봐도 알 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 시리즈의 충실한 독자인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위를(위의 무엇을?) 보고 있는 표지만으로도 일년치 오싹함은 다 느꼈다. 나카다 히데오의 공포영화 <여우령>에 등장하는 끝이 어두컴컴한 나무 계단을 보며 느낀 의미불명의 공포감 같은 것이다. 거기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이 좋지 않다. 그런데 그 맛에 읽는다. 한 소년이 할머니 댁에 살게 되었다. 낡고 오래된 집이다. 나무로 지었고 바닥은 마루와 다다미다. 천장은 높고 기둥은 굵다. 높은 대들보 위 어둠이 신경쓰인 소년은 위를 자꾸 올려다보았다. “창문 옆에 화가 난 아저씨의 얼굴이 보였다. 엄청 무서운 얼굴이었다. 눈을 떼지 않고 계속 나를 봤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공포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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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썩한 묵음
하드록 밴드 앵클어택의 EP 《The Silent Syllable》가 발매됐다. 셀프타이틀 EP 이후 6년 만에, 밤섬해적단과의 스플릿 앨범 이후 4년 만에 발표되는 밴드의 새 앨범이다. 조각가 김인배, 아티스트 그룹 좋겠다 프로젝트와 함께 준비하고, 이달 아라리오 뮤지엄 제주에서 열리는 전시 <묵음>과 연계해 제작됐다. 음반의 모든 곡은 앵클어택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문래동의 작업실 ‘스튜디오 5423’에서 라이브로 녹음됐다. ‘묵음’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박력 있는 소리들이 가득 담겨 있다.
코리안 하드밥
진킴 하드밥 퀸텟의 데뷔작 《The Jazzunit》은 한국 재즈계에서 드물게 하드밥을 정면에 내건 앨범이다. 아트 블레이키 앤드 더 재즈 메신저스의 클래식 <Circus>의 커버를 제외하곤, 밴드의 리더이자 트럼페터 진킴이 작곡, 편곡한 곡들로 채워졌다. 스윙과 블루스 그리고 즉흥연주까지, 재즈가 가장 재즈적인 순간의 정취가 고
[culture highway] <공동경비구역 JSA> 블루레이 3종 한정판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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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쓰레기’라고 부른다. 예뻐서 샀는데 막상 집에 두고 보니 짐만 되는 것들 말이다. 누구나 집에 이런 물건 한 트럭분은 있으리라. <씨네21> 이화정 기자의 집에는 이런 물건이 열 트럭분은 있다. 여느 집과 차이가 있다면, 어찌나 그 수가 많고 서로 조화롭게 놓여 있는지 예쁜 물건들의 정글 같달까. 여행지에서 싼값에 독특하고 사연 있는 빈티지를 사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은 감식안 뛰어난 친구의 쇼핑 가이드다. 이 책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빈티지 그릇 상점’편에 적힌 것처럼, “체력과 구매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단 체력. 성냥개비처럼 마른 이화정 기자는 ‘시장’, ‘쇼핑센터’라 불리는 곳에 발을 들이면 슈퍼히어로로 거듭난다. 창고로 직행할 위기에 처한 작고 예쁜 물건들을 모두 구입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남는 것은 의지의 문제.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 갔을 때 내가 기겁한 것은 유리
[도서] 컬렉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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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잡지가 정말 잘 팔리던 때가 있었다. 특히 일본의 만화판이 그랬는데, 일본의 만화출판사 직원과 어쩌다 이야기할 일이 있으면 이만저만 놀라운 게 아니다. 만화잡지가 150만부를 찍던 시절 이야기다. 일본만화판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은 인쇄매체의 황혼기다. 한국 영화잡지판을 비롯해 문화잡지계가 좋았던 시절이 있었고, 인상적인 사진이 실린 표지들로 말이 필요 없는 메시지를 전세계에 전달하던 미국 잡지의 호시절이 있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본 전•현직 잡지계 종사자들이 눈물을 훔쳤던 건 그런 이유에서다. 으레 잡지 한두권쯤 정기적으로 챙겨보던 때는, 지났다. 만화 <중쇄를 찍자!>에도 그런 풍경이 나온다. 1년 매출 예상계획표를 제출해야 하는 만화잡지 편집장은 이런 생각을 한다. “이상하네~ 내가 말단이던 시절의 편집장은, 대충 어림잡아서 A4 용지에 손으로 적당히 써서 냈는데… 누구보다 늦게 출근해서 누구보다 빨리 퇴근하고! 해뜰 때까지 술이나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초보 편집자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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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꿈
일민미술관이 10월25일까지 조덕현 작가의 개인전 <꿈>을 개최한다. 흑백 사진을 화폭에 재현해 한 가족의 역사를 되살리고, 가상의 역사를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조덕현 작가의 작업 전반이 소개된다. 전시는 3층짜리 공간을 활용해 동명이인의 배우 고 조덕현의 삶을 추적한 신작 <꿈의 정원>, 작가의 지난 발자취를 돌이켜보는 <님의 정원>, 작곡가 고 윤이상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공간 <음의 정원>으로 구성했다.
조금 더 사소하고, 조금 더 부드러운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가 출간됐다. 2011년 <니시닛폰신문>에 연재한 글과 다른 곳에 기고한 감독의 글들을 모았다. 감독은 말한다. “멈춰 서서 발밑을 파내려가기 전의 조금 더 사소하고, 조금 더 부드러운 것. 물밑 바닥에 조용히 침전된 것을 작품이라 부른다면, 아직 그 이전의, 물속을 천천히 유영하는 흙 알갱
[culture highway] 망자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