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존 치버의 일기와 서간집이 출간되었다. 작가의 사후에 아들 벤저민 치버가 엮은 이 책에는, 아들로서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동성애 애인들과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편지들을 발견했을 때의 놀람과 그 편지들마저 이 서간집에 포함시킨 경위가 실려 있다. 존 치버 단편소설의 묘미를 아는 이들에게 이 편지 모음은, 소설과 그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았나보다 생각하게 만들곤 한다. 힘 있는 단문들의 나열이 끌어올리는 몰입도는 편지에서도 그대로니까. “날씨가 흐려요. 눈이 올 것 같네요. 존 업다이크는 아프리카에 갔어요. 내 결혼생활은 바닥을 치고 있고요. 난 아침식사로 보드카를 마셔요. 스케이트도 타는데 그러고 있으면 절대적인 망각을 발견합니다.” “나는 내 뮤즈도 기다리고요. 나는 늘 사랑을 하는 쪽이었으므로- 사랑받는 쪽이 되어 본 적은 없이- 인생의 많은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왔어요. 기차를, 배를, 발자국 소리를, 초인종 소리를, 편지를, 전화를, 눈을, 비를, 천둥을, 기타 등등
[도서] 존 치버의 일기와 서간집
-
‘人見知り’라는 일본어 표현이 있다. ‘히토미시리’라고 읽는데, 그 뜻은 ‘낯가림’이다. 일본에는 ‘낯가림이 심하다’라는 컨셉으로 쇼 프로그램 기획을 하고 책도 쓴 개그맨이 하나 있는데 그가 바로 오도리 와카바야시다. 와카바야시는 일본 예능 프로그램 <아메토크>에서 ‘낯가림이 심한 개그맨’ 특집을 기획한 적이 있는데, 그 자신이 낯가림이 너무 심한데도 개그맨이라는 직업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데서 생기는 우여곡절이 이보다 더 웃길 수 없었다(낯선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무엇이든 글씨를 읽는다- 예컨대 음료수 캔에 쓰인 성분표시- 는 말은, 역시 낯가림으로 고생하는 나에게 공감의 폭소를 불러일으켰다).
일본에서는 개그맨의 활동 범위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마타요시 나오키는 소설 <불꽃>을 써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해 100만부 판매를 돌파했고(요즘 일본 서점에서는 마타요시가 추천한 소설들에 특별 코멘트가 붙어 광고된다), 영화감독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여기 나 혼자만은 아니구나’
-
아마 <씨네21>의 진득한 독자들은 그레이엄 무어의 이름에서 대번에 컴퓨터공학의 토대를 마련한 수학자 앨런 튜링의 실화를 그린 <이미테이션 게임>의 각본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자잘한 스탭 명단까지 꿰는 이들이 아니라면,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맑은 눈으로 불우했던 과거를 고백하며 “이상해도 괜찮아요, 달라도 괜찮아요”(Stay weird, Stay different)라고 근사한 수상소감을 전했던 한 남자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나리오작가로서 세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이지만, 그의 커리어는 2010년 소설 <셜로키언>에서 출발했다. 아주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두고 “영화 같다”고 상찬하는 입버릇은, 그레이엄 무어의 다재다능한 행보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셜록 홈스와 앨런 튜링을 연기했다는 점 외에도, <셜로키언>과 <이미테이션 게임>은 서로 닮은 구석들이 여럿 있다. 우선 두 작품 모두
씨네21 추천 도서 <셜로키언>
-
“개인의 불안에 침잠하는 게 아니라 세계의 불안과 마주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불안은 소설 속에서 어떤 인물도 무너뜨리지 못하며 또한 어떤 사건도 파국으로 이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은 지루하면서도 때론 희극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한국 문단의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가 최정화의 데뷔작 <팜비치>에 대한 평. 2012년 겨울과 2015년 봄 사이에 발표했던 단편들이 묶인 첫 소설집 <지극히 내성적인>은 앞선 분석이 멀리까지 내다본 혜안이었음을 드러내는 증표다. 불안은 10개의 이야기를 통해 변주되며 한껏 뚜렷해졌고, 이는 고스란히 이제 막 단행본을 손에 쥔 소설가의 명백한 인장이 됐다. 그녀를 불안을 조용히 따라가는 소설가라고 부르고 싶다.
최정화 소설 속 불안은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에 인다. 가정부 면접을 보러온 여자가 안주인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망상은 커지고(<구두>), 잘 나기만 했던 남편이 틀니를 하게 되자 그를 무시하게 되고(<틀니&g
씨네21 추천 도서 <지극히 내성적인>
-
-
마음을 다독이는 에세이군은 베스트셀러 동네의 꾸준한 터줏대감 노릇을 해왔다. 단번의 독서처럼 되도록 간편한 방법으로 삶의 지혜를 얻고 싶은 희망 때문일 것이다. 법륜 스님은 그 가운데에서 유독 많은 사랑을 받아온 한국 대중의 대표적 멘토다. 그의 에세이는 그간 숱하게 책으로 만났던 종교 인사들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이른바 ‘즉문즉설’(卽問卽說)을 통해 전하는 간단하고 시원시원한 가르침은 연애와 결혼생활, 보육, 청춘 등 특정한 키워드를 경유해, 길을 더듬는 대중에게 상세한 안내가 됐다. 그저 예쁘고 평화로운 말로 채우는 법을 구태여 우회한 법륜은 경전을 자기 식으로 풀어낸 <금강경 강의>, 당대의 한국을 진단하고 미래를 내다본 <쟁점을 파하다> 같은 저서를 발표하며 뿌리인 종교와 터전인 현실 사회를 붙드는 균형도 잊지 않았다.
법륜의 신간 <법륜 스님의 행복>(이하 <행복>)은 단도직입적이다. 1988년 <실천적 불교사상>
씨네21 추천 도서 <법륜 스님의 행복>
-
“사는 게 내 마음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불가피하게 엮인 잡다한 관계들에 치이고 치이다 거꾸러진 채로 중얼거리곤 한다. 기댈 곳 없이 홀로 살아가는 척박함이 무엇인지, 타인과의 갈등을 딛고 마침내 깨닫게 되는 만족이 얼마나 값진지 알면서도, 닳아진 생의 의지를 목격할 때마다 우린 이런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리고 다시 어쩔 도리 없이 관계 안으로 투신해,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희망을 따라가는 게 내일의 일이다.
<씨네21>의 2월 북엔즈에서는 서로 다른 타인들이 경험하는 관계의 면면을 그린 책들을 모았다. <법륜 스님의 행복> <지극히 내성적인> <셜로키언>. 일상을 사는 각박함보다는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작동하는 새로운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책들이다.
<법륜 스님의 행복>은 법륜 스님이 지금껏 발표한 책들의 에센스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법륜 스님은 자신과의 갈등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더 나아가 세상
사이에서
-
<사슴>의 처음
최근 고전의 초판본을 그대로 살린 책들이 베스트셀러의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발간한 출판사 소와다리가 이번엔 백석의 <사슴> 초판 복각판을 내놓는다. 1936년 당시 100부만 제작돼 그 모습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던 전설적인 시집 <사슴>을 애초의 그 모습 그대로 소장할 수 있게 됐다. 부지런한 독자들에게 부록으로 나무펜과 펜촉을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초판본 <사슴>은 사전예약만으로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섰다. 예약을 서두르자.
문소리를 무대에서 만나다
김영하의 장편소설 <빛의 제국>이 무대에 오른다. 서울로 남파된 스파이가 모든 걸 정리하고 평양으로 귀환하라는 지령을 받은 후 벌어지는 24시간을 그린 <빛의 제국>은 한반도의 역사와 개인의 문제를 서늘하게 써내려간 소설이다. 지난해 객석점유율 95%를 기록
[culture highway] 응답하라, 누벨바그
-
블루레이로 보는 <이미테이션 게임>
플레인 아카이브에서 <이미테이션 게임> 넘버링 한정판 블루레이를 출시한다. <이미테이션 게임>(감독 모튼 틸덤)은 제2차대전에서 암호를 푼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디자인에 따라 렌티큘러 풀슬립 케이스 A, 반투명 PET 풀슬립 케이스 B 등 두 버전으로 출시된다. 버전 상관없이 소책자, 캐릭터 엽서 세트, 트레이딩 카드가 한정판 특전으로 제공된다. A, B버전 각각 2천장, 1500장 한정판이라고 하니 서두르자. 현재 플레인 아카이브 홈페이지에서 프리오더를 접수 중이다.
한국을 사랑한 팝스타
한국은 해외 뮤지션의 라이브를 만나기엔 불모지에 속하지만, 한국을 찾았던 몇몇 스타들은 팬들의 열띤 호응에 반해 재차 내한해 특별한 에피소드를 남기곤 한다. 미카는 그 가운데서도 유독 한국을 사랑하는 가수다. 첫 내한부터 순식간에 티켓이 매진된 데 이어 팬들로부터 노래 <We Are G
[culture highway] 당신은 어디로?
-
2015년은 그 어느 해보다도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전세계적으로, 특히 한국에서 많이 들린 해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단어를 주홍글씨 취급하는 시선은 만연해서, 여성인권에 대해 말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당신은 왜 자신을 여성으로만 봅니까? 왜 그냥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이 질문을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런 멍청한 질문이 한국 밖에서도! 페미니스트란 말이 굳이 필요하냐고, 그냥 인권옹호자라고 하면 안 되느냐고?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왜 당신 자신을 노동자로만 보느냐고 묻지 않는다. 흑인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왜 자신을 피부색으로만 판단하느냐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운동에는 꼭 저런 말이 붙는다. 여성운동 말고도 세상에는 신경써야 할 가난, 불평등, 전쟁이 너무 많다고. 세계 인구의 52%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젠더 때문에 공통적으로 겪는 불평등(한국의 남녀 임금 불평등은 OECD 중
[도서] 오늘날의 페미니즘
-
글쓰는 일을 업으로 하게 된다면 가능한 한 일찍 겪어보면 좋은 것이 ‘(제대로 된) 엄격한 교정’이다. 오탈자 잡기는 기본이고, 습관적으로 반복해 적는 군더더기 표현들을 지운 뒤, 어색한 표현이나 문장 호응을 맞게 수정하고 나면 글이 다이어트라도 한 양 확 줄어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도 신의 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교정지를 들고 그 선배에게 가서 “굳이 왜 이렇게 고쳐야 합니까?”라고 따졌다. 설명을 들으며 이유를 납득했고, 이후로는 그 선배가 고치는 부분을 눈여겨봤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를 읽으며 그때 생각이 났다.
원고 교정에 대한 필자들의 원성(혹은 원한)을 모아 책으로 만든다면 지구 세 바퀴 반을 돌 정도로 많다. 최근 책을 낸 사람을 만나 물어보라. 그들의 불만을 요약하면 이렇다. “꼭 이렇게까지 고쳐야 해?”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았다면 그냥 고치지 말고 그대로 두고 싶다는 말이다. 서투른 교정자들이 문장의 뜻을 바꿔버리는 실수를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꼭 이렇게까지 고쳐야 해?”
-
유통기한 만년의 사랑을 소유하라
주성치 주연의 <서유기: 월광보합> <서유기2: 선리기연> 연작 두편을 묶은 블루레이 한정판 세트가 출시됐다. 부가영상으로는 예고편과 인터뷰, <씨네21> 주성철 편집장과 임필성 감독이 참여한 코멘터리를 비롯해서 소책자와 포토카드, 포스터 등이 동봉된다. 렌티큘러와 풀슬립 버전 두 가지로 출시되며 현재 온라인에서 예약 판매 중이니 주성치의 명대사를 중얼거리며 구매 버튼을 눌러보자.
별을 찍은 남자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사진가 허브리츠의 전시 <Herb Ritts WORK: 할리우드의 별들>이 2월6일부터 5월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다. 친구 리처드 기어의 사진 하나로 당대 최고의 패션지를 장식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20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업한 오리지널 프린트 100여점이 전시된다. 할리우드, 누드, 패션 세 파트로 구성된 사진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도 감각을 떨쳤던 그
[culture highway] 백남준을 기억하며
-
“코니 윌리스가 실은 두명이라서 한명은 ‘웃기는 이야기’를 쓰고, 다른 한명은 ‘슬픈 이야기’를 쓴다.” SF소설상을 받은 중•단편집인 <화재감시원>에 코니 윌리스 자신이 인용한 자신에 대한 루머다. 사랑스럽고도 유머러스한 <리알토에서>와 우스운데 무섭기도 한 <나일강의 죽음>, 폐허 앞에서 머릿속에 울리는 말러 교향곡 9번을 듣는 듯한 <화재감시원>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할리우드, 리알토 호텔. 양자역학에 대한 학회에 참석한 주인공이 모델/배우/호텔직원에게 “예약했다”고 몇번이고 반복해 말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예약은 했는데 예약이 되지 않았단다. 분위기를 봐서는 이 호텔을 찾는 학회 참석자 모두가 이 호텔 아니면 저 호텔에서 퇴짜를 맞는 불확정성 아수라에 빠져 있다. 그리고 시종일관 주인공을 보는 사람마다 ‘데이비드’에 대해 묻는다. 그녀는 그를 피하는 중이고, 주변에서는 둘이 한 세트인 줄 안다. 그는 그녀와 “격렬함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코니 윌리스를 둘러싼 모험
-
그리 신선하게 다가오는 제목은 아니다. 음악에 관한 책이 보통 해당 장르의 걸출한 결과물을 소개하는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은 ‘찾아서’에 방점이 찍힌다. <로큰롤의 유산을 찾아서>는 감상과 자료 조사를 통한 결과물보다는 다리품을 팔아 미국 전역을 돌아다녀 로큰롤의 흔적을 두눈으로 목격한 기행문에 가깝다. 많은 부분을 먼 과거에 대해 서술하고 있지만 책의 구성이 시간순이 아닌 지역순으로 배치된 점 또한 기행문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 저 옛날 블루스가 태동하던 시절까지 시간을 돌려 이제 막 100년에 육박하는 대중음악의 흔적을 구석구석 훑는다. 책을 잠깐 훑어봐도 뮤지션의 모습과 앨범 커버보다 지도, 건물, 팻말, 동상, 묘비 등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듣고 싶은 충동 보다 떠나고 싶은 충동이 앞서는 책이다. <대중가요 LP 가이드북> <폴 매카트니-비틀즈 이후, 홀로 써내려간 신화> 등 독보적인
씨네21 추천 도서 <로큰롤의 유산을 찾아서>
-
2015년 2월, 한 칼럼니스트가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글을 발표했다. 반발은 거셌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한 세간의 반응이 확 변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가 남성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하고 운을 떼던 과거의 풍토가 무색하게도, 버젓이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못 박고 한국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온갖 부조리들을 끄집어냈다. 같은 해 4월, 때마침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한국어판이 도착했다.
저자 리베카 솔닛은 역사를 거슬러 걷기의 면면을 살핀 <걷기의 역사>(2001), 지난 100년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한 대형 재난을 들여다본 <이 폐허를 응시하라>(2009)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건실한 저술들을 발표해왔다. 현지에서 2014년에 내놓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작가가 그간 여러 저서에서 꾸준히 드러냈던 페미니
씨네21 추천 도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