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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남산한옥마을에는 타임캡슐 광장이라는 게 있다. 서울이 수도로 정해진 지 600년을 기념해 1994년, 보신각종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는데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600점의 물품이 담겨 있고, 2394년 11월29일에 개봉예정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 목록을 보고 있자면, 벌써 낯설어진 삐삐가 있는가 하면… 학교 시험지와, 무려 정력팬티도 들어 있다. 1994년의 사람들은 그 시대를 보여주는 물건으로 정력팬티를 생각했던 걸까. 리스트에서 정력팬티를 발견하고 얼이 빠졌던 기억을 되살린 것은 설치미술가이자 사진작가인 소피 칼의 <시린 아픔>, 그리고 이번에 아라리오뮤지엄에서 엮은 <실연의 박물관> 두권의 책이다. 소설가 백영옥은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실연의 기념품(차마 버리지 못한 채 가지고 있는 옛 연인의 물건들)을 교환하는 모임에 대해 쓴 적이 있었다. 소피 칼의 <시린 아픔>은 이별 극복기를 사진으로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헤어짐을 기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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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파주보존센터 건립을 기념해 특별전을 개최한다. ‘영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부제로 개최되는 이번 특별전에서는 <전함 포템킨> <네 멋대로 해라> <시민 케인> 등 영화사의 걸작과 우수 복원작 42편을 무료 상영한다. <오발탄>의 디지털 복원판도 최초 공개될 예정이다. 5월20일부터 6월17일까지 상암동 시네마테크 KOFA에서 관람할 수 있다. 자세한 상영일정은 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뮤지컬의 고전 <노트르담 드 파리>
1998년 프랑스에서 초연한 이후 현재까지도 그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뮤지컬계의 고전, <노트르담 드 파리>가 다시 한번 한국 관객과 만난다. 오리지널 크리에이터들이 참여하는 건 물론이고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해온 세트로 무대를 꾸밀 예정. 캐스팅도 화려하다. 홍광호, 케이윌, 윤공주, 전나영, 마이클 리,
[culture highway] ‘영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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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옷깃을 스치는 것도 전생에 억만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인간이 많다 보면 인연이 아니어도 옷깃을 스치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저자 데이비드 핸드는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 수학과 명예교수 겸 선임연구원으로 2008년부터 왕립통계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유럽에서 수익률이 가장 높은 알고리즘 매매 헤지펀드 중 하나인 윈턴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고문이기도 하다고 소개되어 있다. 자연의 통계법칙에 대해 다루는 이 책은, 미신과 종교, 예언부터 우연을 설명하는 여러 법칙에 대해 알기 쉽게 안내한다. 각종 징크스에 시달리는 스포츠 팬이나, 우연이 필연이라고 믿고 불행의 사이클에 빠져든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보시길. 숫자공포증이 있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만한 내용이 많다. 예언에 대해 다루는 초반부는 특히 재미있다. “우리 눈에 띄지만 어떤 원인도 없고 단지 우연인 패턴은 보통 미신의 기반을 이룬다. 미신
[도서] 우연을 설명하는 여러 법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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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르디올라, 결국 하인케스 그늘 못 벗어났다.’ 지난 5월4일,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4강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이 결승 진출에 실패하자 한 스포츠 매체의 기사에 달린 헤드라인이다. 재임 기간인 3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한 펩 과르디올라 뮌헨 감독을 두고 전임 감독인 유프 하인케스와 비교하며 비꼰 것이다. 임기 내내 구단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까닭에 과르디올라로선 어떤 비판을 받더라도 할 말은 없겠지만, 이런 식의 비교는 옳지 않다. 축구란 강팀이 언제라도 질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닌가. 어쨌거나 과르디올라는 크라위프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축구 철학을 바이에른 뮌헨에 접목시켜 독일축구와 전세계 축구계에 새로운 축구 바람을 일으켰다. 기자로서 취재원을 아주 가까이서 따라다니며 취재할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과르디올라 컨피덴셜>은 축구 기자라면 누구나 배 아파할 책이다. 스페인 축구 기자인 마르티 페라르나우가
[도서] 새로운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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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와 닉을 책으로 만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의 영화적 순간을 모은 아트북이 국내 정식 출간됐다. 토끼 경찰관 주디 홉스, 여우 사기꾼 닉 와일드, 나무늘보 플래시 등 주인공들이 그려진 영화 속 멋진 장면과 동물 도시 주토피아의 곳곳을 담은 컨셉아트가 담겨 있다. 제작진의 설명이 추가된 도시 탄생 비하인드도 엿볼 수 있다.
망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총체적인 예술 협업 프로젝트 <망상지구>전을 기획했다. 현실과 망상의 경계에 놓인 동시대 상황에 대한 은유를 담은 작품들이다. 뮤지션 장영규, 달파란의 사운드 작업, 미디어 작업을 해온 김세진, 박용석의 영상, 사진영상작가 윤석무와 디제잉 분야에서 활약해온 정태효 작가의 실험을 한자리에서 만난다. 총 4개 존(zone)으로 구성된 전시는 4월27일부터 7월17일까지 열린다.
노장의 영화론
시드니 루멧 감독이 지난 40여년 동안 수많은 영화인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느낀 회
[culture highway] 주디와 닉을 책으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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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을 줄 알게 된 이래로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밤새 책을 읽게 만든 셜록 홈스 시리즈, 용돈으로 한권씩 사모으던 해문의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 그리고 (지금 와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두뇌 계발에 좋다던 미스터리 퀴즈 모음집, 성교육 교재를 대신했던 시드니 셸던의 반전 멜로 미스터리 서스펜스 소설(드라마로 치면 막장 드라마였다)들까지. 그러다 잡지 말미 일종의 게시판 코너에 글을 싣게 되었는데, 추리소설을 바꿔 보고 예쁜 엽서를 교환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아저씨들과 바꿔 본 소설들은 충격과 공포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은 식이며, 대체로 엇비슷했다. 남자주인공은 아내 혹은 딸을 강간살해로 잃은 뒤 복수하기 위해 원수의 아내 혹은 딸을 강간살해한다….
추리소설이라는 대분류 안에는 무수한 세부 장르가 있다. 그리고 현대 스릴러물에 가까울수록, 범인의 잔인함과 영리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탐정이나 형사 주변의 여자들이 수난을 겪는 일이 많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l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왜 탐정 주변의 여자들은 고통받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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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
향후 블리자드를 먹여살릴 기대작 <오버워치>가 5월24일, 드디어 출시된다. 블리자드가 처음 시도하는 미래형 FPS <오버워치>는 영웅 캐릭터별로 개성 넘치는 전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신개념 FPS다. 발매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5월5일부터 9일까지 오픈베타 테스트가 진행되니 관심 있는 사람은 미리 체험해봐도 좋을 것이다. 자막 및 성우 음성까지 완전 한글화를 거친 <오버워치>는 온라인 게임치고 드물게 패키지로 발매되며 일반판은 4만5천원, 소장판은 6만9천원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얼마나 풍성할지 기대해보자.
‘찰리 푸스’를 아시나요?
미국의 젊은 싱어송라이터 찰리 푸스가 8월18일 오후 8시 예스24 라이브홀에서 첫 내한공연을 갖는다. 그는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의 주제곡 <See You Again>을 불러 빌보드 싱글 차트 12주 연속 1위에 오른 놀라운 신예다. 이 곡은 불의의 사고
[culture highway]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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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편집매장 체인 빔스 직원 130명의 집과 옷장, 책장, 가방 속 애장품을 소개한 책.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의 직원들이 자기 스타일을 살린 주거환경을 만든다는 것을, 사진으로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하게는 주거환경이 다양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창문 밖 풍경을 인테리어 컨셉으로 쓸 수 있는 집. 더불어, 이 책에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들이 오간다. 라이프스타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테마는? 휴일을 보내는 가장 좋아하는 방법은? 인테리어에 특별한 규칙이 있다면? 집에서 좋아하는 장소는? 좋아하는 인테리어 브랜드와 가게는? 좋아하는 패션 스타일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집에 반영된다. 그리고 읽다보면, 한국 주거문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수가, 가진 돈의 액수뿐인 것은 아닐까 싶어지는 것이다. 글보다는 압도적으로 사진을 위한 책이지만 글에도 눈이 가는 것은 그래서. 집은 휴식하는 장소이자 여가의 장소다. 집을 꾸미기 전에 휴식의 방법과 여가의 방법을 생각
[도서] 일본 빔스 직원들의 집과 옷장, 책장, 가방 속 애장품을 소개한 책 <당신의 집을 편집해드립니다: Beams at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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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말들은 넘쳐나지만 귀기울일 만한 설명은 희귀한 시절이다. 소위 영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미장센, 몽타주, 스토리텔링 등등 여러 전문용어들을 쉬이 꺼내 쓴다. 하지만 정작 그 의미를 설명해보라고 하면 제대로 한줄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적어도 사전적인 의미라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두루뭉술한 개념들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요즘이다. 이유를 꼽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당장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에 소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공부를 위한 기초서적들이 꽤 나온 적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영화를 뭘 ‘공부’씩이냐 하냐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기초를 다룬 책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에서는 아직도 데이비드 보드웰의 <필름 아트>를 붙잡고 있는 형편이니 오죽할까. 그 책은 물론 훌륭한 정전 중 하나지만 지금 시대의 영화를 새롭게 이야기하는 기초서적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사실이다. 아모르문디에서 발간되는 영
[도서] 지금 시대의 영화를 새롭게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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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서의 사진
한국-프랑스 상호 교류의 해와 롤랑 바르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립미술관이 사진전 <보이지 않는 가족>을 개최했다. 프랑스 국립조형예술센터와 프락 아키텐의 소장품 200여점이 전시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워커 에반스, 다이앤 아버스, 제프 쿤스, 신디 셔먼, 볼프강 틸먼스 등 현대사진의 총아라 부를 만한 이들의 작품들이 걸린다. 5월29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과 일우스페이스.
산뜻한 음악과 함께 봄나들이
잔잔한 봄 음악 페스티벌 <뷰티풀 민트 라이프>(이하 <뷰민라>)가 5월14일과 15일 이틀간 올림픽공원에서 열린다. 라인업은 봄을 만끽하기에 제격이다. 메인 스테이지인 민트 브리즈 스테이지에선 데이브레이크, 제이래빗, 노리플라이, 글렌체크, 이지형, 스탠딩 에그, 로이킴 등이 공연하고 브로콜리너마저와 10cm가 양일 마지막 공연을 장식한다. 러빙 포레스트 가든 스테이지에선 김사월, 랄라스윗, 옥상달빛, 페
[culture highway] 예술로서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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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만 구현할 수 있는 세계를 내심 기다리기 때문일까. 그림책 하면 흔히 상상 너머의 환상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겠거니 생각하게 된다. 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릴 만큼 저명한 권위를 자랑하는 칼데콧에서 대상을 차지한 <위니를 찾아서>는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작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곰 ‘곰돌이 푸’의 원형을 만날 수 있는 이 책은, ‘만화 속 캐릭터’보다는 ‘실존’에 더 무거운 의미를 두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펼친다.
수의사였던 해리 콜번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고향 위니펙을 떠난다, 그는 기차역에서 사냥꾼에게 잡혀 있는 새끼 곰을 데려와 고향 이름을 딴 이름을 붙여준다. 위니는 부대의 마스코트로서 군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지만, 해리는 결국 위니를 런던 동물원에 맡긴다. 여기까지는 사랑스럽되 그리 특별하게 와닿진 않는 이야기. 하지만 저자 린지 매틱은 더 나아가 곰을 좋아하는 아이 크리스토퍼 로빈이 위니를 만나는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위니가 곰돌이 푸로
씨네21 추천 도서 <위니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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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서>는 다비드 메나셰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다. 과작이 그의 뜻은 아니었다. 책을 내놓는 것 역시 그가 그렸던 미래가 아니었다. 그는 평생을 ‘선생님’으로 살았다. 마이애미의 고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2006년 돌연 뇌종양 말기 선고를 받았지만 교단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때에도 학생들 곁에 남았던 선생은 두눈이 멀고 몸 왼쪽이 움직이지 않고 나서야 학교를 떠났다. 물론 그의 걸음은 죽음을 천천히 기다리는 병실로 향하지 않았다. 다비드 메나셰는 옛 제자들을 찾아 떠나, 101일 동안 31개 도시를 거쳐 75명의 제자를 만났다. 그 여행에서 그는 자신이 교사로서 힘주어 말했던 가치들이 아이들의 삶에 어떻게 남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다비드 메나셰의 여행기에서는 고행을 읽을 수 없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진행한 강행군이지만 작가는 육체의 고통을 토로할 새 없이 그것이 삶의 치열한 흔적임을 확인하며 방문을 이어나갔다. <삶의 끝에서>
씨네21 추천 도서 <삶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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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청부업자 올라브. 마약 거래, 포주, 은행강도 어느 것도 적성에 맞지 않은 탓에 킬러가 된 그는 주변에 마음 붙일 만한 사람 하나 없지만, 그럭저럭 제 삶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보스 호프만은 올라브에게 자신의 젊은 부인 코리나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코리나를 감시하던 올라브는 그녀가 어떤 남자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남자를 죽이고 코리나를 구해낸다.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커버 속 시퍼런 권총의 이미지가 표상하듯, <블러드 온 스노우>는 요 네스뵈가 쓴 펄프 픽션이다. 범죄소설의 클리셰가 여기저기 산재된 가운데, 윗선의 명령에 등 돌린 채 금지된 사랑에 뛰어든 한 남자의 뜨거운 로맨스가 시치미 뚝 떼고 펼쳐진다. 하지만 민망함에 책을 덮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 없다. 평소 벽돌책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요 네스뵈 책들 분량의 반절도 되지 않는 <블러드 온 스노우>는 한껏 간결해진 페이지만큼이
씨네21 추천 도서 <블러드 온 스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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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이 그 안의 내용은 물론 표지의 이미지와 재질, 두께가 서로 제각각이듯, 이야기 하나하나가 책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저마다 다르다. 소설 <블러드 온 스노우>, 에세이 <삶의 끝에서>, 그림책 <위니를 찾아서>, 4월 북엔즈에 놓인 다른 장르의 세책 역시 마찬가지다.
1997년부터 거의 매해 500페이지 이상의 새 책을 발표해온 노르웨이의 이야기꾼 요 네스뵈는, 차기작 속 주인공의 대표작으로 설정했던 소설 <블러드 온 스노우>를 비행기 안에서 써내려가 12시간 만에 완성해냈다. 평생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던 교사 다비드 메나셰는 병마와 싸워가며 교편을 지키다 망가진 몸을 이끌고 4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옛 제자들을 만나고 자기 삶을 돌아본 이야기는 <삶의 끝에서>라는 에세이로 남았다. <위니를 찾아서>의 작가 린지 매틱은 아들 콜에게 들려줄 이야기로, 가족의 역사를
책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