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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월 동안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은 여자. 저자 에머 오툴은 이 요상한 수식어와 함께 유명세를 치렀다. TV 아침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무성한 겨드랑이털과 다리털을 만천하에 공개했던 것. 하루아침에 ‘세상에 이런 일이’식의 토픽감이 되었으나 이것이 편견에 맞서는 그녀의 여러 실험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 실험이란 요컨대 ‘남자는 해도 되는데 여자는 왜 안 돼?’에 관한 내용이었다.
연극학자이자 페미니즘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에머 오툴은 18살 무렵에만 해도 결혼해서 살림하고 애 낳아서 기르는 일 또한 엄연한 여성의 선택이라 주장하며 어느 페미니스트와 논쟁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선택이란 단어가 함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흔히 여성적이라 불리는 것 이외의 선택지를 골랐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의 실험은 그녀가 대학에 진학한 19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핼러윈데이에 남장을 하고 줄곧 남자인 양 행세하는 실험부터, 삭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여자다운 게 어딨어: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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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이름을 함부로 짓는 부모는 어디에나 있다. 핀란드 십대 소녀 루미키도 애꿎은 피해자 중 하나로 이름의 뜻은 스노화이트, 백설공주다. 공주답게 쇼핑, 초콜릿, 거품목욕, 여성 잡지, 매니큐어 등과 친하길 바라는 엄마의 뜻과 달리 루미키는 만화책, 감초사탕, 운동, 채식 카레, 고독을 즐긴다.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참견하지 마라’라는 것이 그녀의 좌우명. 그런 다짐과 무관하게 루미키의 주변에는 희한하게 대형 범죄사건이 끊이지 않고, 눈썰미와 추리력, 남다른 체력과 호신술을 갖춘 덕에 늘 비자발적 오지랖의 주인공이 된다.
<눈처럼 희다>와 <흑단처럼 검다>는 이 흥미로운 소녀 탐정 루미키 안데르손의 데뷔작 <피처럼 붉다>의 후속편으로 ‘스노화이트 삼부작’의 절정과 대미를 이룬다. 전작에서 마약조직의 피 묻은 돈에 손을 댔다 위기에 처한 급우들을 구했던 루미키는 이제 그녀 자신이 중심에 놓이는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2부 <눈처럼 희다>에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눈처럼 희다> <흑단처럼 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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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여성에 의한, 그러나 모두를 위한 이야기들이다. 10월 <씨네21> 북엔즈에 꽂힌 책들은 불가해한 세상과 마주 선 지구상 여성들의 동시대를 담고 있다. 동화 속 공주이기를 거부한 핀란드 소녀는 혈혈단신으로 어른들의 거대한 범죄와 맞서 싸운다. 범죄의 칼 끝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하고 있다. 집안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에게 분노한 아일랜드의 한 여인은 18개월간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는 것으로 젠더 편견에 도전장을 던졌다. 대한민국의 여학생들은 오늘도 마트에서, 편의점에서 일을 해야 생계를 꾸리고 학비를 벌 수 있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그들에게 사랑은 유일한 위로이자 구원이다.
<다이버전트> 시리즈의 비어트리스 프라이어와 <헝거게임> 시리즈의 캣니스 에버딘 등 영어덜트 장르는 이미 주체적이고 당당한 십대 여전사들의 각축장이 된 지 오래다. 핀란드 동화작가 출신인 살라 시무카가 쓴 <눈처럼 희다>와 <
[도서] 지구상 여성들의 동시대를 담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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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까지, 언젠가부터 한국 현대사는 우리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작 중요한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로서의 현대사마저 밀쳐두고 있는 건 아닐까?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삼촌·이모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듬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편견을 깨보자. 바로 요즈음 각광받는 역사 읽기의 신조류 ‘한국현대생활문화사’를 소개한다.
‘위험한 아이들’의 시대
1970년대는 흔히 통기타와 고고춤,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즐긴 낭만적인 청년의 시대로 기억된다. 그러나 당대의 소위 사회 지도층은 청년들을 그리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 언론은 ‘조국 근대화’의 과업을 수행하지 않는 청년 세대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대학생은 ‘퇴폐업소 숲’에서 사치와 낭비풍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여름철 피서지의 10대 남녀들은 “통금시간이 지나면 남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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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배운 것으로 졸업도 하지 못했지만, 이후 대학에 재학한 시간의 3배를 사회생활에 쓰면서 종종, 어쩜 이렇게 대학 때 배운 걸 써먹을 데가 없을까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 문득 프랑스 요리점에서 주문할 때 서버를 놀래킬 수 있는 프랑스어다운 발음을 구사할 수 있다든가, <르몽드>의 트위터 계정을 팔로할 수 있다는 장점이 떠올랐고, 나아가 그 5년을 기점으로 취향의 축이 이동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내 세계를 구성한 소설과 음악의 성분은 영미권의 그것에 러시아의 풍미를 살짝 더한 정도였다. 대학에서의 시간은 주재료(영미권)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적인 어떤 것을 확실하게 착
향시키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몇 작가와 작곡가는 프랑스 사람이고, 그 것은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내가 앞으로 100번 이사를 더 다닌다고 해도 버리지 않을 책과 음반들의 컬렉션 중심을 잡는다. 그중 하나만 예로 들면 발자크다. 작가로서의 발자크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상상 속에서 누리는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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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인 듯 신인 아닌 밴드 크리쳐스
밴드 크리쳐스(KREATURES)를 들어봤는가. 올해 첫 앨범 《SOMEONE》을 발표한 따끈따끈한 신인 록밴드다. 낯선 그룹 이름에 비해 멤버들 면면을 살펴보면 인디신에서 익숙한 이름들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이 앤트 메리, 옐로우 몬스터즈 출신의 베이시스트이자 보컬 한진영, 스트라이커스 출신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 김성환, 실력파 드러머 최윤실이 만나 꾸린 밴드가 크리쳐스다. 실력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밴드 크리쳐스가 10월29일 홍대 웨스트브릿지에서 첫 라이브 공연을 갖는다. 의미 있는 순간을 기념할 록팬들은 홍대로 모여라.
두 형사 이야기 들어볼래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소통과 거짓말>팀이 다시 뭉친다. 배우 김선영이 이끄는 극단 나베에서 9월29일 연극 <두 형사 이야기>의 첫 공연을 올렸다. 연출은 <소통과 거짓말>의 이승원 감독이 맡고 김권후와 장선도 배우로 참여한다.
[culture highway] 신인인 듯 신인 아닌 밴드 크리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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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까지, 언젠가부터 한국 현대사는 우리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작 중요한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로서의 현대사마저 밀쳐두고 있는 건 아닐까?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삼촌·이모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듬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편견을 깨보자. 바로 요즈음 각광받는 역사 읽기의 신조류 ‘한국현대 생활문화사’를 소개한다.
군대 가야 사람 된다?
지난 ‘최고급품 쓰고 꿀꿀이죽 먹던 1950년대로의 여행’에 이어 1960년대를 찾아간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란 피하고 싶은 곳이다. 196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961년 6월9일 병역의무 불이행자 자수 기간을 정했는데, 10일 동안 무려 24만명이 신고할 정도였다. 많은 이들이 피하는 곳이었지만, 한편으로 사람들은 “군대 가야 사람 된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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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답다. 굉장하지 않은가. <장미의 이름> <죄와 벌> <향수> <어머니> <꿈의 해석> <그리스인 조르바> <개미> <소설> <갈레 씨, 홀로 죽다 외> <뉴욕 3부작> <핑거스미스> <야만스러운 탐정>이 수록된 이 전집은, 열린책들을 먹여살린 베스트셀러와 열린책들을 기억하게 만든 작품의 조합이며, 한국에서 사랑받은 소설의 목록이자 한국에서 더 사랑받아야 한다고 (열린책들이 그리고 나 역시) 주장하는 소설의 목록이기도 하다. 12권에서 멈춘 것도 대단하다.
이 목록은 9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닌 내게 취향과 허영의 족보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이름은 지금도 그리움을 담아 입에 올리고, 누군가의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시큰둥한 코웃음을 담아 입에 올린다. 그냥 이 12권의 목록을 보는 순간 그 모든 일이 생각났다. 베스트셀러만 모으지 않아서 단순한 추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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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의 영화인생
올가을,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의 스크린이 윤정희라는 색채로 물든다. 9월22일부터 10월2일까지, 서울 마포구 시네마테크 KOFA에서 데뷔 40주년을 맞은 배우 윤정희 특별전이 열린다. 데뷔작 <청춘극장>을 비롯해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를 대변하는 작품인 <안개> <황혼의 부르스>, 배우 윤정희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시> 등 대표작 스무편이 상영된다. 영화감독 이창동, 최하원이 참여하는 관객과의 대화 행사도 두 차례 마련된다. KOFA에서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든든한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보자.
고궁의 가을밤은 깊어가고
고궁에서 가을밤의 정취를 누려보자. 경복궁과 창경궁이 9월24일부터 10월28일까지 올해 4차 야간 특별관람을 시행한다. 경복궁은 근정전·경회루·수정전·사정전·교태전·강녕전 권역을, 창경궁은 홍화문·명정전·통명전·춘당지·대온실 권역을 개방한다. 오
[culture highway] 윤정희의 영화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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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까지, 언젠가부터 한국 현대사는 우리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작 중요한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로서의 현대사마저 밀쳐두고 있는 건 아닐까?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삼촌•이모 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듬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편견을 깨보자. 바로 요즈음 각광받는 역사 읽기의 신조류 ‘한국현대 생활문화사’를 소개한다.
1958년, 9개월 동안 100억원 밀수품 적발
처음으로 찾아갈 시대는 1950년대이다. 1950년대라고 하면 아마도 전쟁 후의 피폐한 삶을 떠올리겠지만 그때 사람들도 오늘날의 우리처럼 욕망과 열망을 품고 살아갔다. 1950년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지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미제 물건이 넘쳐났던 시기로 기억되기도 한다. 흔히 ‘양품’(洋品)이라고 지칭되던 외제 물건들이 한국에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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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한달 전기요금은 500엔입니다.” 부부와 아이 둘이 사는 도쿄 교외의 집,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다. <궁극의 미니멀라이프>를 쓴 아즈마 가나코가 많이 듣는 말은 그래서 당연하게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세탁기 없이 대야로, 청소기 없이 빗자루로, 냉장고 없이 저장식품으로 전기 없는 생활을 꾸려간다고 한다. 돈 대신 노동력을 쓰기로 결심한 생활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노동력을 제공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저 모든 가전제품이 있다 해도, 가전제품 혼자 일을 하지는 않으니 그 경우에도 노동력은 필요하다. 빨래를 색깔이나 옷감 등으로 구분해 몇번이고 세탁기를 돌리고 털어 말린 뒤 개는 과정을 떠올려보라.
<궁극의 미니멀라이프>는 그런 이유로, 미니멀리즘에 대한 책이자 가사노동에 대한 책이 된다. 이런 식이다. 아즈마 가나코의 집에는 전구 3개가 전부다. 거실과 부엌, 목욕탕에 한개씩 있다. 부엌의 조명은 거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친환경 살림의 연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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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nch Spirit!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잔다라 페스타 2016>에서 프랑스의 인디밴드 여섯팀의 무대가 열린다. 마르세유 출신의 3인조 밴드 차이니스 맨은 록, 솔, 펑크, 일렉트로닉 장르를 아우르며 턴테이블 스킬을 선보일 예정이다. 밴드 컬러스 인더 스트리트, 3인조 콜트 실버스는 강렬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자랑한다. 통렬한 사회비판으로 유명한 더 디지 브레인스, 듀엣 코코모의 70년대풍 사운드도 놓치기 아쉽다. 여기에 밴드 텔레페릭의 록 사운드도 귀를 자극한다. 10월2일 밤 10시 홍대 무브홀에서 진행되는 이번 공연의 자세한 소식은 www.facebook.com/zandarifesta에서 확인 가능하다.
대륙의 북디자인을 만나다
중국 북디자인계의 스승처럼 여겨지는 1세대 디자이너 뤼징런의 북디자인 전시가 열린다. <전승과 창조-뤼징런의 북디자인과 10명의 제자展>이다. 뤼징런이 지금까지 40년간 작업해온 도서 표지, 삽화
[culture highway] French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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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몇몇의 얼굴로 기억된다. 백수린의 두 번째 소설집 <참담한 빛>에는 그 얼굴들을 자꾸만 돌이켜보는 인물들이 나온다. <짝사랑>의 주인공 ‘나’는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선배와의 만남을 앞두고 원피스를 장만하기 위해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하는 내내 ‘나’는 머릿속으로 J선배와의 기억들을 곱씹는다. “여전히 기특하구나. 술집의 소음은 물 밖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고, 선배의 그 말 한마디가 또렷이 귓가에 울렸다. 나는 정말 기특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뿌듯한 기분이었다. 열심히 해라. 나는 정말 무엇이든 열심히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스트로베리 필드>의 ‘준’은 유학 시절 추억이 녹아 있는 런던 곳곳을 여행하며 ‘주드’의 고백을 되새긴다. “주드를 향해 품었던 감정, 나를 매일같이 달뜨게 하고, 숨 쉴 수 없게 하고, 비참하게 하던 감정 역시 가뭇없이 사라져 나의 일상은 바람 빠진 색색의 고무공처럼 초라해졌다. 나 혼자만 남아서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참담한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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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 상류층에서는 캐비닛을 가꾸는 취미가 유행이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캐비닛을 그보다 더 정교한 미니어처 조각들로 채우는 일은 귀족과 부자들이 교양과 재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거상들이 늘어나면서 사치와 투기 풍조가 만연했다. 캐비닛에는 개개인의 생활 감각이나 인생관이 담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세계를 갖고 싶어 했던 정복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영국 출신의 작가 제시 버튼은 휴가차 방문한 네덜란드의 한 박물관에서 ‘미니어처 하우스’라는 전시품을 보고 작품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후 4년에 걸친 자료조사와 집필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자리한 깊숙한 욕망을 건드리는 데뷔작 <미니어처리스트>를 완성했다.
시골 출신의 소녀 넬라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거상 요하네스와 결혼한다. 남편이 대개 부재하는 대저택에는 그녀 말고도 시누이 마린, 하인 오토와 코넬리아가 함께한다. 그들은 은밀하고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미니어처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