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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메이카의 거장 말런 제임스의 범죄소설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대작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1976년부터 1991년까지 15년 동안 자메이카, 미국, 영국 세 국가를 배경으로 삼는다. 등장인물만 75명이다. 총 5부로 구성된 소설의 중심엔 1976년 12월3일, ‘밥 말리 암살 미수 사건’이 있다. 1부에선 사건 하루 전날을 배경으로 갱단의 주모자들은 물론 사건과 무관했던 사람들이 암살 기도에 연루되는 과정을 그린다. 2부는 사건 당일, 갱단의 소년들이 마약에 찌든 채 암살을 시도하지만 결국 미수에 그치는 현장을 담는다. 사건 후에도 자메이카 내 갱들의 다툼은 끝나지 않는다.
총 13명의 화자가 일곱건의 살인과 연루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자메이카 게토를 주름잡던 갱단의 보스, 행동대장, 소년대원들을 비롯해 우연한 동침으로 밥 말리의 아이를 갖게 된 여인, 밥 말리를 취재하는 <롤링스톤> 기자, 자메이카가 쿠바처럼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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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주제로 한 많은 책들은 ‘감정을 사용하는 법’을 말한다. 하나같이 우울, 분노, 열등감 같은 부정적 감정도 잘 닦으면 생산의 유용한 연료가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림책 <그까짓 사람, 그래도 사람>은 감정을 도구화하는 책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감정의 쓰임새를 궁리하는 대신 눈여겨보지 않던 세세한 감정의 모양새를 포착하고, 감정 자체의 변화 양상을 가만히 지켜본다.
설토라는 이름의 샛노란 토끼 캐릭터는 인간의 감정을 상징한다(작가 이름인 ‘설레다’와 ‘토끼’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어떤 페이지에선 설토의 팔다리가 잘려 있고, 또 어떤 페이지에선 설토가 한껏 몸을 움츠리고 있다. 구덩이에 빠져 허덕이기도 하고, 두팔을 치켜들며 만세를 외치기도 한다. 언어로 풀어내기 힘든 감정들은 역동적인 몸짓과 표정의 설토를 통해 형상화된다. ‘숨기고 싶지만 공감 받고 싶은 상처투성이 마음 일기’라는 부제처럼 <그까짓 사람, 그래도 사람>의 힘은 공감에서 나온다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그까짓 사람, 그래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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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소설가 델핀은 막막한 상황에서 자주 아이처럼 처신해버리는, 키만 큰 어른이다. 그런 그에게 분신 같은 친구가 생긴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L은 겉모습은 다르지만 취향이나 본성은 델핀 자신과 꼭 닮은 인물. 델핀은 자신보다 어른스런 L의 지지와 보호에 점차 길들여진다. L은 델핀의 모든 선택을 지지하지만, 차기작만큼은 생각이 다르다. 픽션을 쓰고 싶어 하는 델핀과 달리 L은 델핀이 실화, 그것도 자신의 경험담에 기반한 소설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L은 단호함을 넘어서 숨겼던 광기를 드러낸다. 글쓰기가 두려워진 델핀은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고, L은 델핀의 역할을 서슴없이 대신한다.
매혹, 우울, 배신. 3부로 나뉜 책의 구성이 암시하듯, 델핀과 L은 실패한 관계의 경로를 따른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실패로 단언하기엔 지나치게 생산적이다. 델핀의 관점에서 L은 적과 동지, 어느 쪽으로 단정 짓기 쉽지 않다. 이런 모호함으로 L이란 캐릭터의 존재감이 부각된다. <실화를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실화를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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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 입던 시절이 좋을 때야.” 교사들이 버릇처럼 하던 말들을 되풀이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학창 시절에서 멀어질수록, 발 딛고 있는 현실이 녹록지 않을수록 학창 시절은 미화된다. 하지만 그 시절의 일기장을 한번만 뒤적여도 이야기는 달라진다. 친구를 사귀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학기 초, ‘수능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라가던 고3 시절. 활자와 함께 먼지 쌓인 감정들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아홉명의 소설가가 자신의 학창 시절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쓴 <다행히 졸업>은 그런 일기장 같은 소설집이다.
필진들은 세대가 다르다. 2015년의 고등학생들을 취재해 쓴 장강명 작가를 제외하면 모든 소설이 작가 저마다 통과한 학창 시절을 토대로 삼는다. 소설에는 여러 소년소녀의 얼굴이 담겨 있다. 우다영의 <얼굴 없는 딸들>에는 폭력과 살인이 공존하는 불우한 세계를 살아가는 고등학생들이, 정세랑의 <육교 위의 하트>와 전혜진의 <비겁의 발견>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다행히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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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든 영화든 실화의 힘은 강력하다. ‘이야기가 실화에 기반’하면 독자들은 작품의 개연성에 가질 의구심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사건을 자신과 더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프랑스 작가 델핀 드 비강은 허구와는 달리 ‘현실에는 의지와 고유한 역동성, 더 큰 창조성이 있다’고 말한다. 1080호 북엔즈에 꽂힌 네권의 책은 모두 실화, 그중에서도 작가 개인의 경험과 맞닿은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다. <다행히 졸업>은 아홉명의 작가가 자신의 학창 시절 기억을 가지고 쓴 소설 모음이다. 델핀 드 비강의 <실화를 바탕으로>는 문학에서 실화와 허구의 의미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자신의 분신 같은 인물로 삼고 작품 자체를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놓는다. <그까짓 사람, 그래도 사람>에서 그림 작가 설레다는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감정들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고, 말론 제임스의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1976년
[도서] 씨네21 추천도서 - 실화를 바탕으로 한 픽션 세권과 그램책 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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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일까, 과대평가된 감독일까
세계영화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감독 중 한명인 자비에 돌란의 특별전이 열린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11월2일부터 20일까지, 올해 개봉영화 중 주목할 만한 작품들과 함께 자비에 돌란의 전작을 상영하는 ‘가을날의 재회+자비에 돌란 특별전’을 연다. 11월11일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단지 세상의 끝> 상영을 시작으로 13일까지 자비에 돌란 감독의 장편 6편을 전작 상영한다. 11월11일 오후 2시에는 ‘한국에서 자비에 돌란의 수용’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날 오후 7시에는 ‘자비에 돌란 현상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특별 행사도 열린다.
반 고흐가 안내하는 황홀경
반 고흐의 작품들을 환상적인 미디어 아트로 만난다. 12월31일까지 동대문 apM CUEX홀에서 <태양의 화가, 반 고흐-빛, 색채 그리고 영혼>전이 열린다. 130여점의 작품이 전시되며, 캔버스 위에 LED 조명을 비춰 영상을 표현하는 미디어 파사드
[culture highway] 천재일까, 과대평가된 감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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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나 러스를 비롯한 여성 SF 작가들의 단편을 모은 <혁명하는 여자들>은 SF이기 때문에 가능할 상상력으로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런데 무엇이든 시도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여성이라 받는 제약을 어떻게 할 것인지부터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에 맞부딪힌다. 이 단편집에는 2인칭으로 쓰인 소설들이 있다. “너는” 혹은 “당신은”이라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읽는 독자에게 던지는 강력한 암시다. 당신이 이 상황에 (구겨)넣어져 있고 거기서 도망가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여자주인공이 2인칭으로 칭해진다는 데는 또 한 가지 뜻이 있을 것이다. 여자는 ‘나’로 정체성을 찾고 확고하게 만들어가기보다 ‘너’로 규정지어진 틀 안에서 행동하도록 교육받는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너’의 틀 안에 있기를 요구받는다. 스스로의 외모를 평가하는 기준은 밖에서 온다. 말이나 행동의 규범 역시 그렇다.
이 책에 실린 2인칭 소설들은 다른 소설들에 비해 유난히 서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SF와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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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전성기, 한국영화를 돌아보다
동국대학교가 개교 110주년을 기념해서 충무로 영화포럼을 마련했다. 11월9일과 10일 이틀간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한국 고전영화 대표작을 엄선해 상영할 예정이다. <오발탄>(1961), <한네의 승천>(1977), <은마는 돌아오지 않는다>(1991) 등 1960~90년대까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의 상영과 함께 신진 비평가들의 시네토크도 마련되어 있다. 유지나 평론가가 진행하는 토크콘서트와 학술세미나도 진행되니 한국영화의 흐름과 발자취를 확인하고 싶다면 주저 말고 충무로를 찾아보시라.
쓸 만한 인간, 박정민
배우 박정민이 4년째 <톱클래스>에 연재한 칼럼 ‘언희’를 모아 에세이집 <쓸 만한 인간>을 엮었다. 유머와 재치, 신랄하고 통렬한 자아비판과 현실비판, 술술 읽히는 스토리텔링 등 가벼움과 묵직함을 겸비한 이야기들의 모둠이다. 책을 쓴 자신을 포함한, 확 눈에 띄지는 않으나 한
[culture highway] 충무로의 전성기, 한국영화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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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뱅 쇼메’라는 매직아워
감각적, 환상적, 예술적, 혁명적. 이 모든 수사를 실뱅 쇼메의 애니메이션 앞에 붙여도 좋겠다.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벨빌의 세 쌍둥이>의 국내 개봉을 맞아 KT&G 상상마당 시네마가 특별전을 준비했다. 상영작은 <벨빌의 세 쌍둥이> <일루셔니스트>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으로 10월27일부터 11월9일까지 홍대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상영한다. 실뱅 쇼메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서둘러 예매하시라.
경계를 넘어 즐기는 영화 축제
장애를 넘어 영화를 볼 수 있는 배리어프리 버전 영화들을 함께 감상하자. 제6회 서울배리어프리영화제가 개최된다. 개막작은 안재훈, 한혜진 감독의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이다. <소중한 날의 꿈> 배리어프리 버전엔 영화제의 홍보대사 배우 김정은이 화면 해설에 참여했다. 그외에도 배우 배수지가 화면 해설을 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
[culture highway] ‘실뱅 쇼메’라는 매직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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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후보 두 사람-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의 토론이 끝날 때마다(지금까지 두번 있었다) 영어를 사용하는 트위터 유저들은 “진짜 승자는 초속 17㎞로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보이저호다”라는 관전평을 잇따라 내놓았다. 우주탐사선 보이저 1, 2호는 1977년 8월20일과 9월5일 각각 우주로 발사되었고, 목성에서 천왕성에 이르는 외행성계를 조사한 뒤 천천히 태양계를 벗어나 지구가 우주에 보내는 사절이 되었다. 사절! 두 보이저호에는 금박을 씌운 축음기용 구리 레코드판(골든 레코드)이 하나씩 부착되었는데 그 레코드판에 무엇을 실을지 결정하기 위해 <코스모스>를 쓴 칼 세이건과 그의 동료들이 협의를 시작했다. 칼 세이건의 유려한 글솜씨는 우주 시대를 눈앞에 둔 흥분으로 유난히 반짝이는 느낌이고, 외계인에게 지구를 알려줄 수 있는 이미지와 소리를 고르는 작업을 담은 <지구의 속삭임>은 그 옛날의 두근거림을 고스란히 안고 (1977년에서 보면) 미래인인
[도서] 소통을 시도하는 방식의 진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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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구경하는 진짜 재미란, 파워블로거가 늘어놓는 인생 자랑(쇼핑, 여행, 가족, 인맥)을 보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렇고,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의 기시 마사히코가 그렇다. 2016년 기노쿠니야 인문대상을 수상한 이 책은 사회학자인 저자가 그간 만났던 수많은 온·오프라인 인연들에 대해 적은 글모음이다. 여기에 인터넷 중독이라는 그가 남의 블로그 구경을 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 한없는 구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누구에게도 숨겨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 몇년 전 연인에게 겪은 폭력 경험을 자세하게 쓴 한 30대 후반의 여성,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쓴 글 같은 것. 단편적인 인생의 서사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제목) 같은 책이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일들을 어떻게든 넘기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있다. 심한 무정자증이라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심상하게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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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까지, 언젠가부터 한국 현대사는 우리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작 중요한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로서의 현대사마저 밀쳐두고 있는 건 아닐까?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삼촌·이모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듬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편견을 깨보자. 바로 요즈음 각광받는 역사 읽기의 신조류 ‘한국현대 생활문화사’를 소개한다.
승승장구하는 양념통닭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198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82년 개막한 프로야구, 1984년에 한국에 상륙한 KFC,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만호 아파트 건설 등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주를 지배하는 많은 것들의 기원은 1980년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가장 눈여겨볼 만한 것은 양념통닭이다. 1970년대 말의 심각한 불황이나 1980년대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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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좋아하는 상대가 반경 10m 이내로 다가오면 스마트폰 앱이 울린다.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의 수로만 표시될 뿐, 그 정체가 현재 10m 근방에 있는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천계영의 만화 <좋아하면 울리는>은 이 경천동지할 앱 ‘좋알람’이 출시되던 때에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 김조조와 그녀를 사랑한 두 남자 황선오, 이혜영의 이야기다. 상대의 마음만 알 수 있다면 애태울 일은 없을 줄 알았건만 ‘좋알람’의 출시는 예상치 못한 후폭풍과 연쇄반응을 낳는다. 인기에 연연하는 이들은 단지 숫자에만 집착하고, 앱의 허점을 이용해 마음을 숨기는 저마다의 기술들이 속속 개발되는 한편, 동성애자들의 아우팅 문제도 논란의 중심에 놓인다. 설정은 상상의 산물이되 그로 인한 사건들은 이처럼 일어날 법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좋아하면 울리는>이 독자의 불신을 정지시키고 몰입하게 만드는 저력일 것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이모네 집에 얹혀살며 방과 후엔 이모의 편의점에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좋아하면 울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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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상의 그림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생각하다가 막막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지난해 소설 <선긋기>와 <1교시 언어이해>로 신춘문예 2관왕을 차지하며 등단한 작가 이은희의 말이다. 2관왕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기록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문제의 두 작품이 무척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선긋기>가 화자인 소녀 ‘나’의 일상과 그에 따른 감정 변화 및 성장의 노정을 좇는다면, <1교시 언어이해>는 모의고사 문제를 만드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수험 문제의 지문이 되는 메타 구조를 띤다. 첫 소설집 <1004번의 파르티타>에는 그 판이한 형식의 간극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을 작가의 다른 목소리와 이야기들이 징검다리 마냥 놓여 있다. 사소설적 혐의가 짙었던 <선긋기> 너머에는 남성 화자와 주인공이 등장하는 <10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1004번의 파르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