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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서>는 다비드 메나셰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다. 과작이 그의 뜻은 아니었다. 책을 내놓는 것 역시 그가 그렸던 미래가 아니었다. 그는 평생을 ‘선생님’으로 살았다. 마이애미의 고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2006년 돌연 뇌종양 말기 선고를 받았지만 교단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때에도 학생들 곁에 남았던 선생은 두눈이 멀고 몸 왼쪽이 움직이지 않고 나서야 학교를 떠났다. 물론 그의 걸음은 죽음을 천천히 기다리는 병실로 향하지 않았다. 다비드 메나셰는 옛 제자들을 찾아 떠나, 101일 동안 31개 도시를 거쳐 75명의 제자를 만났다. 그 여행에서 그는 자신이 교사로서 힘주어 말했던 가치들이 아이들의 삶에 어떻게 남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다비드 메나셰의 여행기에서는 고행을 읽을 수 없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진행한 강행군이지만 작가는 육체의 고통을 토로할 새 없이 그것이 삶의 치열한 흔적임을 확인하며 방문을 이어나갔다. <삶의 끝에서>
씨네21 추천 도서 <삶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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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청부업자 올라브. 마약 거래, 포주, 은행강도 어느 것도 적성에 맞지 않은 탓에 킬러가 된 그는 주변에 마음 붙일 만한 사람 하나 없지만, 그럭저럭 제 삶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보스 호프만은 올라브에게 자신의 젊은 부인 코리나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코리나를 감시하던 올라브는 그녀가 어떤 남자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남자를 죽이고 코리나를 구해낸다.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커버 속 시퍼런 권총의 이미지가 표상하듯, <블러드 온 스노우>는 요 네스뵈가 쓴 펄프 픽션이다. 범죄소설의 클리셰가 여기저기 산재된 가운데, 윗선의 명령에 등 돌린 채 금지된 사랑에 뛰어든 한 남자의 뜨거운 로맨스가 시치미 뚝 떼고 펼쳐진다. 하지만 민망함에 책을 덮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 없다. 평소 벽돌책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요 네스뵈 책들 분량의 반절도 되지 않는 <블러드 온 스노우>는 한껏 간결해진 페이지만큼이
씨네21 추천 도서 <블러드 온 스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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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이 그 안의 내용은 물론 표지의 이미지와 재질, 두께가 서로 제각각이듯, 이야기 하나하나가 책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저마다 다르다. 소설 <블러드 온 스노우>, 에세이 <삶의 끝에서>, 그림책 <위니를 찾아서>, 4월 북엔즈에 놓인 다른 장르의 세책 역시 마찬가지다.
1997년부터 거의 매해 500페이지 이상의 새 책을 발표해온 노르웨이의 이야기꾼 요 네스뵈는, 차기작 속 주인공의 대표작으로 설정했던 소설 <블러드 온 스노우>를 비행기 안에서 써내려가 12시간 만에 완성해냈다. 평생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던 교사 다비드 메나셰는 병마와 싸워가며 교편을 지키다 망가진 몸을 이끌고 4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옛 제자들을 만나고 자기 삶을 돌아본 이야기는 <삶의 끝에서>라는 에세이로 남았다. <위니를 찾아서>의 작가 린지 매틱은 아들 콜에게 들려줄 이야기로, 가족의 역사를
책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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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일렉트로니카
영화 팬들에게는 ‘<오블리비언>의 스코어를 만든 이’라는 소개가 더 빠를까? 프랑스 일렉트로닉팝밴드 M83이 5월24일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첫 내한공연을 갖는다. 이제 막 발표된 따끈따끈한 일곱 번째 앨범 《Junk》를 즐기며 찬찬히 콘서트를 기다리기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찾는 셈. 바다뱀자리의 은하에서 따온 M83이라는 이름처럼 포근한 계절의 밤하늘이 떠오르는 소리들 아래 몸을 흔들기에 더없이 좋은 밤이 될 것이다.
이중섭은 죽었다
서울미술관이 화가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중섭은 죽었다展>을 열었다. 전시는 화가의 연대기를 역순으로 되짚는 구성이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화가의 묘에서 출발해 창작활동에 몰두했던 통영 시절을 거쳐 홀로 분투하며 개인전을 준비하던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시절까지로 이어진다. 구획된 공간들을 따라가다보면, 생전 쓸쓸하고 고독했던 화가의 초상과 마주하게 된다. 3월에 시작한 전시는 5월29일
[culture highway] 봄밤의 일렉트로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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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와 감기, 진짜 상관이 있을까? 털을 깎으면 더 굵고 뻣뻣한 털이 난다는 게 사실일까? 우리는 왜 욕을 할까? 왜 우리는 간지럼을 탈까? <기발한 과학책>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쓰인 데다 그림도 많은 과학교양서다. 하지만 질문만큼은 성인 독자들 역시 품고 있던 것들이다. 과학을 다룬 인기 유튜브 채널 ‘AsapSCIENCE’를 만든 미첼 모피트와 그레그 브라운이 쓴 책이다. ‘입냄새의 과학’이라는 장을 잠시 설명하면, 입냄새의 원리와 그 해결방법을 논한다. “이것은 박테리아가 우리 장에서 음식물을 분해할 때 방출하는 것과 같은 물질입니다. 그 기체는 결국 방귀로 나오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고약한 입냄새를 풍길 때 실은 입으로 방귀를 뀌는 것과 마찬가지랍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커피(특히 단것을 함께 먹으면)는 박테리아의 증식을 돕는다. 그리고 결론은? 이를 닦을 때 혀도 같이 닦기, 치실 사용하기, 정기적으로 치과 찾기다. 욕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도서] 끝까지 읽게 되는 쉽고 재미있는 책 <기발한 과학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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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성적을 내고서, 훌륭한 기량을 가진 축구선수가 별안간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할 때가 있다. 감독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플레이 스타일을 선수에게 고집할 때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반대로 선수에게 맞는 전술을 구사하는 감독도 있다.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 트리’ 포메이션(4-3-2-1)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그런 성향 덕분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4명의 수비수, 3명의 미드필드, 2명의 공격형 미드필드, 1명의 스트라이커를 세운 모양이 크리스마스 트리와 똑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AC밀란 감독 부임 두 번째 시즌(2002~3) 개막을 앞두고 안첼로티는 히바우두, 후이 코스타, 세도르프, 피를로 등 세계 최고 미드필드 네명 중 한명도 벤치에 앉혀두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운 축구를 하는 게 먼저”였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시 세계 축구계에서 생소했던 이 포메이션은 시즌 내내 반짝거리며 AC밀란을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려놓았다. <카를로 안첼로티-카
[도서] 우승 청부사의 아름다운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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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화려한 외출
봄의 마지막은 언제나 서울재즈페스티벌과 함께한다. 올해로 10회째를 맞은 ‘2016 서울재즈페스티벌’이 5월28, 29일 이틀간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에서 열린다. 펫 메스니, 마크 론슨, 커린 베일리 레이, 루퍼스 웨인라이트, 램지 루이스, 제이슨 데룰로 등 이름만 들어도 환호할 해외 뮤지션은 물론 빈지노, 혁오, 에릭남, 디어클라우드, 페퍼톤스 등 국내 뮤지션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공연 전날인 27일 오후 6시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에서 로열 나이트 아웃 전야제가 열리니 그것도 놓치지 마시길~!
가만히 위로하는 음악
<Not Going Anywhere>의 다사함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좋은 소식. 케렌 앤의 신보 《You’ re Gonna Get Love》가 찾아왔다. 타이틀곡인 <Where Did You Go?>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곡. 뮤직비디오에서 그리움을 춤으로 표현하는 케렌 앤을 볼 수 있다. &l
[culture highway] 봄날의 화려한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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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그림책이 꽤 눈에 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고 안자이 미즈마루가 그린 <후와후와>, 장노아의 <Missing Animals: 세계 초고층 빌딩과 사라지는 동물들>도 좋았는데,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의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도 예쁘고 재미있는 그림책이다.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이라는 부제처럼, 번역하기 어려운 외국어 표현들을 묶어놓았다. 외국어를 소개했지만 모두 영어로 표기했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즉, 당신은 이 책을 통해 어떤 단어의 발음은 유추할 수 있지만 그 단어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예컨대 한국어도 여기 소개되는데 그 단어는 ‘nunchi’다.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이의 기분을 잘 알아채는 미묘한 기술” 말이다. 번역이 안 되는 단어들은 저마다 해당 언어가 쓰이는 문화의 특징적인 부분을 잘 담고 있다. 핀란드어 중 ‘poronkusema’라고 읽히는 단어는 “순록 한
[도서] 성인을 위한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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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시대다. 평론가의 분석이나 전문가의 조언은 이제 필요할 때 입맛에 맞는 의견을 구하는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각자의 기준과 취향이 중요해진 요즘, 절대적인 기준에 입각해 엄선한 이른바 정전(正典)은 화석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결과 진정 다채로운 영화를 주체적으로 즐기고 있는가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정전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건 하나로 재단된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는 의심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진정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졌을까. 취향을 빙자한 산업의 논리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끼어든 건 아닌지 의문이다. 더 끔찍한 건 비판적 사고와 독해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제대로 읽고 말하는 법을 익힐 기회는 점점 줄어들어 간다.
기실 정전의 가치는 올바름(正)이 아니다. 그보다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추구하려는 태도, 말하자면 방향성이 소중하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오독의 가능성을 경계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오독
[도서] 제대로 읽고 제대로 말하기 위한 어떤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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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음악제전으로 뛰어드시라!
봄타는 그대를 위해, 밴드 ‘9와 숫자들’이 준비했다. 제2회 봄꽃음악제전! 4월2일 학동엠팟홀에서 열리는 이번 축제는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계속된다.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9와 숫자들, 이규호, 재주소년, 몬구, 생각의 여름, 로큰롤라디오, 푸르내, 권나무, 크랜필드, 실리카겔, 차가운체리. 공연 외에도 사인회, 즉석 버스킹 이벤트도 준비 중이다. 무엇보다 이날 ‘9와 숫자들’은 매점지기, 카페지기, 이벤트지기까지 자청한 상태. 관객이여, 인터파크에서 예매하고 제전에 뛰어드시라.
그녀가 돌아왔다
그웬 스테파니의 세 번째 솔로 앨범 《This Is What the Truth Feels Like》가 나왔다. 보컬의 컬러에 잘 어울리는 곡들을 만날 수 있으며, 일단 <Misery>부터 <Make Me Like You> 까지 이미 싱글로 귀에 익은 트랙들이 그웬 스테파니다움을 보여준다. 스탠더드 에디션과 디럭스 에디션이 동
[culture highway] 봄꽃음악제전으로 뛰어드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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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 프리드리히 헤벨이 그랬듯이 나는 ‘산다는 것은 지지자(혹은 참여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는 말을 믿는다. 세상에 시민만 존재할 수는 없다. 도시에는 이방인도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시민일 수밖에 없으며, 무언가를 지지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무관심은 무기력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함일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 “성적인 관심사는 이탈리아인들의 모든 유형의 서사-서정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럴 경우 작품이 독창적인 구성이나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비록 그 결론이 항상 동일한 것- 사랑, 열정, 불륜- 임에도 심리적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냈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산문선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에는 냉전이 끝나고 사회주의도 끝난 지금 읽기에 시차가 느껴지는 글과 여전히 동시대성을 느끼게 되는 글이 모두 실려 있
[도서] 안토니오 그람시 산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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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의 <옆집의 영희 씨>는 ‘창비청소년문학’ 일흔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것은 청소년‘도’읽을 수 있다는 뜻일 뿐, 청소년‘용’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옆집의 영희 씨>에서는 SF 판타지 단편들을 만날 수 있다. 정소연은 익숙함에서 출발해 아주 먼 곳까지, 능숙하게 항해할 줄 안다.
표제작 <옆집의 영희 씨>는 좋은 집을 싸게 임대하려는 집주인의 감언이설로 시작한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천사 같은 집주인이라니, 오오, 이래서 SF인가? 아니다. 그 집에는 현실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옆집에 그런 게 있어서 그렇지….” 옆집에 외계인이 있다. 그를 감시하는 양복 입은 남자들도 있다. 그런데 갈색 두꺼비 같은 그와 마주친 날, 당황해서 차라도 마시고 오라고 인사치레로 말을 건넨 바람에 정말 그가 수정의 집으로 들어온다. 2주에 한번꼴로 이웃과의 티타임을 갖게 된 수정은 그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그의 이름은 이영희. 그의 별에서 쓰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알아보기, 발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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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으로 돌아온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가 개봉 13년 만에 연극으로 재탄생한다. 연출가 이지나와 제작사 PAGE1의 2년여간의 노력으로 탄생한 연극으로,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영상과 조명의 활용을 극대화해 병구와 강만식 두 주인공의 심리게임에 중점을 뒀다는 제작사쪽 설명이다. 병구 역으로 샤이니의 키가 연극 무대에 첫 도전하며, 이율과 정원영이 더블 캐스팅됐다. 강만식 역으로는 지현준, 강필석, 김도빈이 캐스팅됐으며 배우 육현육은 10개 이상의 역할을 맡아 멀티맨으로 활약할 예정이다. 4월9일부터 5월29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된다.
DC 코믹스 공식 인증 미리 보기 세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영문 제목에 왜 VS가 아니라 V가 쓰였는지 궁금하면 <씨네21> 1046호 기획 기사를 읽으면 된다. 하지만 영화의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혹은 원작을 어떻게 각색했을지
[culture highway] 연극으로 돌아온 <지구를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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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를 만든다는 것>의 목차는 가십이 떠다니는 분장실에서 던질 만한 질문들로 만들어진 것 같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꼭 필요한 존재인가? 스타일- ‘사랑’ 다음으로 가장 많이 오용된 단어. 배우- 배우가 부끄러움을 탄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프로덕션 디자인과 의상- 페이 더너웨이는 정말 열여섯 군데에서 같은 치마를 입고 있는가? 그중 ‘배우’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배우에 대한 선입견은 일단 제쳐두자. 멍청하고, 바보 같고, 버릇없고, 개런티가 지나치게 높고, 성적으로 문란하며, 자기중심적이고, 신경질적 등등….” 아, 루멧 감독님, 누구한테 맺히셨나요? 하지만 농담같이 시작된 이 챕터는 루멧의 배우론(<밤으로의 긴 여로> <12인의 성난 사람들> <네트워크>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같은 영화들에서의 배우 연기를 떠올려보라)을 근사하게 펼쳐 보인다. “삶을 훌륭하게 모방할 줄 아는 배우가 많다
[도서] 시드니 루멧 감독의 배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