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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버트 셀비 주니어는 십대 시절 결핵으로 치료를 받던 중 합병증으로 큰 수술을 받았고, 그 결과 평생 진통제와 헤로인에 의지해야 했다. 직업도 구할 수 없었던 그는 친구의 권유로 소설을 썼다. 그가 경험한 우주의 전부였던 뉴욕 브루클린이 무대였고, 자신이 경험했던 폭력과 주변인들의 삶을 글로 옮겼다. 문법이나 구두점은, 무시했다. 영영 술이 깨지 않는 곳에서 입구도 출구도 없이 헤매는 것 같은 글로, 처음 쓰인 단편 <여왕은 죽었다>로 시작되었으며, 특히 <트랄랄라>라는 단편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이야기들을 발전시킨 것이 바로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1989)다. 한때 영화 좀 본다는 사람이라면 다 보았을, 최소한 포스터는 알고 있을, 아니 음악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던 울리히 에델 감독, 스티븐 랭, 제니퍼 제이슨 리 주연, 마크 노플러 음악의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가 안겨주었던 충격보다 소설쪽
[도서] 아메리칸드림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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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구미코씨가 선물에 답례를 하겠다며 돈가스를 해준 적이 있다. 일본의 가정식 돈가스! 보통 때 같으면 주방에 서는 아다치씨까지 셋이 돈가스를 먹는데, 이럴 수가. 아다치씨가 돈가스 소스를 양배추에 뿌려서 그걸 돈가스에 얹어 같이 먹는 것이다. 저것이야말로 본토의 돈가스 먹는 법인가 생각이 들어 긴장한 기억이 난다. 이런 얘기라면 밤을 샐 수도 있다. 같이 먹자고 시킨 밥요리에 달걀프라이가 나오면? 노른자를 일단 터트려야 하나? 사람 수에 맞게 노른자를 갈라서 먹어야 하나? 먹는 법이라는 게 별거 아닌 듯해도 얼마나 신경을 긁나 말이다. 한양문고에 놀러갔다 <달걀프라이의 노른자 언제 깨?>를 보고 바로 사버린 건, 그 시시콜콜함에 대한 공감이었다.
표지는 따뜻한 공감의 먹방만화같이 생겼는데, 내용은 좀 다른 전개다. 남자주인공이 여자친구 미후유와 처음 맞이하는 아침, 미후유가 준비한 밥을 먹는다. 노른자 반숙 달걀프라이를 보며 남자는 대만족. 그런데 여자친구가 장이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시시콜콜함에 대한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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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스타워즈>에 대한 모든 것
파도 파도 끝이 없는 <스타워즈> 팬들의 마음을 채워줄 알찬 해설서가 나왔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비주얼 딕셔너리>는 제목 그대로 <깨어난 포스>에 관한 사전과도 같은 정보들을 담고 있다. 신규 캐릭터에 대한 분석은 물론 편집, 삭제된 장면들에 대한 해설이 실려 있어 기존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을 이해할 통로 역할을 할 것이다. 특수모형 제작자 존 굿슨은 순전히 이 책을 위해 3개의 특수모형을 제작했다고 하니 팬 된 도리로 마땅히 찾아봐야, 아니 소장해야 할 책이다.
춤추는 초여름
아프로잭, 아비치, 아민 반 뷰렌, 데드 마우스, 액스웰, 마틴 개릭스, 체이스 앤드 스테이터스, 나이트 파티…. 당대 EDM 올스타들이 한 무대에 선다. 그것도 서울에서. 해를 거듭하며 라인업의 밀도를 바짝 올리고 있는 울트라 뮤직 페스티벌(UMF) 코리아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6월10일부터 12일까지 3일
[culture highway] 새로운 <스타워즈>에 대한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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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아래층을 들춰보는 여행
유독 ‘되감기 버튼’이 발달한 사람이 있다. <씨네21>의 이화정 기자는 오래된 것, 낡은 것, 사라진 것을 감식하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사람이다. 그의 여행 리스트에는 항상, 지난 풍경이 함께한다. 여행 에세이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북노마드 펴냄)은 그 사소하고도 집요한 흔적의 기록이다. <북호텔>의 배경이 된 파리의 생 마르탱 운하, <일 포스티노>의 낭만을 간직한 이탈리아 프로치다 섬, <비정성시>의 아픔이 내재된 대만의 지우펀, 도시 전체가 과거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폴란드의 바르샤바 등 필자가 플레이 버튼을 돌려 재생한 세계 곳곳 도시들의 이야기가 직접 찍은 필름 사진과 함께 수록되었다.
식물을 전시합니다
초록빛 신록을 눈에 담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에 ‘식물’을 주제로 한 기획전이 열린다. 서울시립미술관과 금천구가 함께 <SeMA Collection: 식물채집_Botan
[culture highway] 시간의 아래층을 들춰보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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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주문.
매혹적인 말이다. 그 주문은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영어로 “I remember”, 즉 “나는 기억한다”면 충분하다. 화가이자 에세이스트로 60년대 말 활발히 활동했던 조 브레이너드는 기억과 글쓰기에 시동을 거는 주문, “나는 기억한다”를 발견했고, 이 주문은 이후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글쓰기 강습에서 활용되었다. 책 <나는 기억한다>는 두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폴 오스터는 그 영화 중 한편을 제작했으며 “지난 35년 동안 일고여덟번은 읽었지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간단하다. 당신은 이제 빈 문서파일을 하나 열어 “나는 기억한다, ~을”이라고 한 문장씩 적어가면 된다. 나의 기록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역시 이 방법을 발견한 이의 오리지널리티라고 부를 수 있으려나. “나는 기억한다, 우리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배우는 리타 헤이워스였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금발에 햇빛이 너무 눈부시게
[도서] 글쓰기의 주문 <나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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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7일 새벽, 강남역 대로변에 위치한 상가의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23살 여성이 칼에 수차례 찔려 살해당했다. ‘묻지마 범죄’라고 언론에서 보도된 이 사건은, 범인인 30대 남성이 1시간 넘게 여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으며 흉기로 쓴 칼을 전날 준비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라 부르는 게 맞다. 남녀를 불문해 범행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세상 참 좋아졌다고들 한다. (여성혐오가 아니라) 남성혐오를 걱정해야 한다는 목소리, 기가 죽은 남성이나 여성에게 무시당하는 남성을 근심하는 기사들이 매일같이 쏟아진다. 정말 그런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매체는 여성의 해방이 기정사실이고, 여성이 실제보다 더 강하고 유능하며 성적으로 주도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보다 더 대담하고 존경을 받는다고 여성들에게 계속해서 강조한다.”(<배드 걸 굿 걸>) 미디어가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을 통해 대단한 ‘여풍’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것과 달리 현실의 여성은 남성보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진화된’ 성차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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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가족, 영화적 초상
제4회 유럽단편영화제가 5월19일부터 29일까지 아리랑시네센터, KU시네마트랩에서 진행된다. 올해의 주제는 ‘가족’이다. <가족놀이> <아이는 언제나 옳다> <가족의 초상> 등 6개 섹션에서 유럽 30개국, 37개 지방에서 날아온 41편 단편들이 소개된다. 현재 유럽 사회가 직면한 가장 현실적인 가족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작은 마음, 작지 않은 음반
싱어송라이터 오지은과 서영호의 듀오 프로젝트 ‘오지은서영호’가 앨범 《작은 마음》을 내놓았다. 단발적인 프로젝트라고 보기엔 음반의 패키지가 꽤 묵직하다. ‘9와숫자들’의 송재경과 오지은의 대담 등이 모인 책 <작은 마음>, 30명 한정 시크릿 라이브 응모 엽서, 기린과 토끼 스티커가 같이 묶였다. 듀오 유닛으로 만든 앨범이지만 “어긋난 마음, 폭발하지 않은 마음”에 대한 오지은 특유의 노랫말은 더욱 내밀해졌다.
사나이의 로망, <용과 같이 극>
[culture highway] 유럽, 가족, 영화적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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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탐정>(1990)은 하드보일드 소설가 하라 료의 유일한 단편집이다. 이 소설집 역시 첫 소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1988)부터 줄곧 작가가 페르소나로 삼아온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주인공이다. 한때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사와자키는 전 주인의 이름을 고스란히 남긴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는 중년의 탐정이다. 탐정의 전형이라 일컬어지는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와 영 딴판인 그는 하라 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그려져 나름의 존재감을 떨치며 일본을 대표하는 마초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현실의 냉혹하고 비정한 일을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간결한 문체로 묘사하는” 것이 하드보일드의 정체라면 <천사들의 탐정>은 어쩌면 하드보일드와 거리가 먼 여섯(혹은 일곱) 가지 이야기로만 채워졌다 할 만하다. 제목의 ‘천사들’은 저마다 다른 곤경에 처해 있는 10대 아이들을 뜻한다. 엄마를 살리고 싶은 소년, 섹스 중독의 아버
씨네21 추천 도서 <천사들의 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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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 때마다/ 아카시아꽃이 눈처럼 쏟아졌다/ 작은 꽃들이 하얗게/ 잡목으로 찌든 숲에/ 내 발길에 내려앉았다.”(시 <황방산의 달> 중에서) 전주에서 나고 자라 중년이 된 현재까지도 그곳을 떠나지 않은 이병초 시인은 어려서부터 보아온 산에 대한 시 <황방산의 달>로 문단에 나왔다. 데뷔부터 고향의 풍경과 추억을 노래한 그는 시작을 이어오는 와중에도 좀처럼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다만 그 풍경을 둘러싼 말들은 갈수록 다채로워졌다. 추상보다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다듬어진 표준어보다는 꾸밈없는 방언을 추구한 덕에 이병초 시 속의 고향 전주는 세월을 거듭하며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시는 눈으로 훑을 때보다 입으로 읊을 때 보다 선명해졌다.
<살구꽃 피고>(2009) 이후 7년 만에 발표한 세 번째 시집 <까치독사>의 시편을 소리내어 읽어보면 전작과의 차이가 금방 떠오른다. 바로 거센소리와 된소리의 활용이 잦다는 것. 낭
씨네21 추천 도서 <까치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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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 톤 배경에 분방한 손글씨로 적힌 제목,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선 (일러스트레이터 박오롬이 그린) 분명한 표정의 주인공과 그 옆 아담한 구름까지.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2013)가 지난해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오베라는 남자>(2012)를 쓴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또 다른 작품이라는 걸 알아차리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표지뿐만 아니라 그 안을 들여다보면 좀체 다가서기 어려운 만만찮은 성격의 등장인물들, 사건과 갈등의 연속 끝에 이루어지는 가족과 이웃간의 화해, 웃음과 눈물을 자유롭게 오가는 전환 등 닮은 구석이 많다. 다만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데뷔하기 전 작가가 블로그에 연재하기 위해 쓴 <오베라는 남자>에 비해 더 소설 같다. 첫 소설의 어마어마한 성공 이후 본격적인 소설가로 발을 내디딘 후 내놓는 작품이라 작품에 담긴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씨네21 추천 도서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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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설가, 극작가, 배우, 영화감독, 가수, 인권 운동가…. 이토록 수많은 역할을 능히 해낸 사람이 있다.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명에 손꼽히는 마야 안젤루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가 전방위 활동에 걸쳐 펼친 올곧은 주장은 마틴 루터 킹, 버락 오바마, 오프라 윈프리 등 시대를 뒤흔든 인사들에게 거대한 ‘말씀’이 되었다. 빌 클린턴은 1993년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녀의 시 <아침의 맥박>(On the Pulse of Morning)을 낭송한 바 있다.
2014년 5월 세상을 떠난 마야 안젤루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내놓은 작품은 자서전 <엄마, 나 그리고 엄마>(2013)였다. 길었던 삶의 끝을 눈앞에 둔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더듬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어머니 비비언 백스터를 회고했다. 스스로 사진가 같은 기억력을 자랑하던 마야 안젤루는 날 때부터 눈감는 그 순간까지 어머니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리고 그 시간에 자신의 삶을 가만
씨네21 추천 도서 <엄마, 나 그리고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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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소셜 브레인>이 출간된 이래 꾸준히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작가 오카다 다카시. 그는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다 그만두고 의대에 들어가 정신과 의사가 됐다. 독특한 이력의 영향은 그의 저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오카다 다카시의 책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마음의 부침을 듣기 좋은 말로 어루만지는 방향으로 향하지 않고 특정한 징후를 파고들어 이를 의학 이론을 토대 삼아 설명하는 길을 택해왔다. 전문적인 용어가 간간이 등장하지만 글은 술술 읽힌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를 미워한다.” 오카다 다카시의 근작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는 책을 열며 순자의 말을 인용한다. 사람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선천적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셈. 그는 “인간이 인간을 과도한 이물질로 인식하고 심리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증상”이라는 뜻의 조어 ‘인간 알레르기’를 제시하며, 의학적인 접근으로 미움을 탐구한다. 인간 알레르기의 개념으로부터 발을 뗀 <나는
씨네21 추천 도서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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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시선으로 가까운 주변을 바라보는 책 다섯권이 5월 북엔즈에 꽂혔다. 마야 안젤루는 죽음을 앞두고 쓴 자서전으로, 프레드릭 배크만은 발랄하지만 외로운 7살짜리 소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로 가족간에 나누는 화해와 용기를 그린다. 미스터리 탐정물에 천착해온 하라 료는 투박하지만 푸근한 탐정을 내세워 험난한 세상에 자기 식대로 뛰어드는 10대들을 담는다. 오카다 다카시는 인문학과 의학을 경유해 우리가 타인을 미워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를 분석한다. 이병초 시인은 제 고장 전주의 여기저기를 바라보며 2016년의 한국을 생각한다.
미국의 거대한 지성, 마야 안젤루는 6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며 흑인과 여성의 인권을 위해 애썼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바친 <엄마, 나 그리고 엄마>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해 어머니날에 발표한 마지막 책이다. 평생에 걸쳐 나눈 모녀의 정은 마야 안젤루의 파란만장한 생만큼이나 값진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다섯 가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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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바디무비’라는 제목으로 <씨네21>에 1년여간 연재되었던 소설가 김중혁의 에세이가 책으로 묶여나왔다. 책 제목은 <바디무빙>. ‘버디무비’의 패러디에서 시작된 제목이 멀리까지도 갔다. 연재 당시에 만날 수 없었던 그의 그림도 다수 실렸다. 그림일기 형식인 ‘몸의 일기’와 다소 정색하고 신체 부위에 대해 설명하는 ‘믿거나 말거나 인체사전’이 바로 그렇게 추가된 그림과 글이다. ‘귀’에 대한 설명은 “청각과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부위로서 외이, 중이, 내이로 구분할 수 있다”라고 시작해서 “주변을 둘러보면 나이가 많을수록 남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꼰대형 청력상실증 환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환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청력이 약해지면서 말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라고 뻗어간다.
“마흔을 넘기니 몸 여기저기에서 슬슬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선,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이십대 때는 눈에 불을 켜고 책을 읽었지만, 열심히 눈을 써도 혹
[도서] 소설가 김중혁의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