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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구경하는 진짜 재미란, 파워블로거가 늘어놓는 인생 자랑(쇼핑, 여행, 가족, 인맥)을 보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렇고,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의 기시 마사히코가 그렇다. 2016년 기노쿠니야 인문대상을 수상한 이 책은 사회학자인 저자가 그간 만났던 수많은 온·오프라인 인연들에 대해 적은 글모음이다. 여기에 인터넷 중독이라는 그가 남의 블로그 구경을 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 한없는 구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누구에게도 숨겨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 몇년 전 연인에게 겪은 폭력 경험을 자세하게 쓴 한 30대 후반의 여성,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쓴 글 같은 것. 단편적인 인생의 서사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제목) 같은 책이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일들을 어떻게든 넘기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있다. 심한 무정자증이라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심상하게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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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까지, 언젠가부터 한국 현대사는 우리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작 중요한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로서의 현대사마저 밀쳐두고 있는 건 아닐까?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삼촌·이모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듬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편견을 깨보자. 바로 요즈음 각광받는 역사 읽기의 신조류 ‘한국현대 생활문화사’를 소개한다.
승승장구하는 양념통닭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198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82년 개막한 프로야구, 1984년에 한국에 상륙한 KFC,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만호 아파트 건설 등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주를 지배하는 많은 것들의 기원은 1980년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가장 눈여겨볼 만한 것은 양념통닭이다. 1970년대 말의 심각한 불황이나 1980년대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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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좋아하는 상대가 반경 10m 이내로 다가오면 스마트폰 앱이 울린다.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의 수로만 표시될 뿐, 그 정체가 현재 10m 근방에 있는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천계영의 만화 <좋아하면 울리는>은 이 경천동지할 앱 ‘좋알람’이 출시되던 때에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 김조조와 그녀를 사랑한 두 남자 황선오, 이혜영의 이야기다. 상대의 마음만 알 수 있다면 애태울 일은 없을 줄 알았건만 ‘좋알람’의 출시는 예상치 못한 후폭풍과 연쇄반응을 낳는다. 인기에 연연하는 이들은 단지 숫자에만 집착하고, 앱의 허점을 이용해 마음을 숨기는 저마다의 기술들이 속속 개발되는 한편, 동성애자들의 아우팅 문제도 논란의 중심에 놓인다. 설정은 상상의 산물이되 그로 인한 사건들은 이처럼 일어날 법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좋아하면 울리는>이 독자의 불신을 정지시키고 몰입하게 만드는 저력일 것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이모네 집에 얹혀살며 방과 후엔 이모의 편의점에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좋아하면 울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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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상의 그림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생각하다가 막막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지난해 소설 <선긋기>와 <1교시 언어이해>로 신춘문예 2관왕을 차지하며 등단한 작가 이은희의 말이다. 2관왕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기록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문제의 두 작품이 무척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선긋기>가 화자인 소녀 ‘나’의 일상과 그에 따른 감정 변화 및 성장의 노정을 좇는다면, <1교시 언어이해>는 모의고사 문제를 만드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수험 문제의 지문이 되는 메타 구조를 띤다. 첫 소설집 <1004번의 파르티타>에는 그 판이한 형식의 간극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을 작가의 다른 목소리와 이야기들이 징검다리 마냥 놓여 있다. 사소설적 혐의가 짙었던 <선긋기> 너머에는 남성 화자와 주인공이 등장하는 <10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1004번의 파르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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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월 동안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은 여자. 저자 에머 오툴은 이 요상한 수식어와 함께 유명세를 치렀다. TV 아침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무성한 겨드랑이털과 다리털을 만천하에 공개했던 것. 하루아침에 ‘세상에 이런 일이’식의 토픽감이 되었으나 이것이 편견에 맞서는 그녀의 여러 실험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 실험이란 요컨대 ‘남자는 해도 되는데 여자는 왜 안 돼?’에 관한 내용이었다.
연극학자이자 페미니즘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에머 오툴은 18살 무렵에만 해도 결혼해서 살림하고 애 낳아서 기르는 일 또한 엄연한 여성의 선택이라 주장하며 어느 페미니스트와 논쟁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선택이란 단어가 함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흔히 여성적이라 불리는 것 이외의 선택지를 골랐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의 실험은 그녀가 대학에 진학한 19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핼러윈데이에 남장을 하고 줄곧 남자인 양 행세하는 실험부터, 삭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여자다운 게 어딨어: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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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이름을 함부로 짓는 부모는 어디에나 있다. 핀란드 십대 소녀 루미키도 애꿎은 피해자 중 하나로 이름의 뜻은 스노화이트, 백설공주다. 공주답게 쇼핑, 초콜릿, 거품목욕, 여성 잡지, 매니큐어 등과 친하길 바라는 엄마의 뜻과 달리 루미키는 만화책, 감초사탕, 운동, 채식 카레, 고독을 즐긴다.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참견하지 마라’라는 것이 그녀의 좌우명. 그런 다짐과 무관하게 루미키의 주변에는 희한하게 대형 범죄사건이 끊이지 않고, 눈썰미와 추리력, 남다른 체력과 호신술을 갖춘 덕에 늘 비자발적 오지랖의 주인공이 된다.
<눈처럼 희다>와 <흑단처럼 검다>는 이 흥미로운 소녀 탐정 루미키 안데르손의 데뷔작 <피처럼 붉다>의 후속편으로 ‘스노화이트 삼부작’의 절정과 대미를 이룬다. 전작에서 마약조직의 피 묻은 돈에 손을 댔다 위기에 처한 급우들을 구했던 루미키는 이제 그녀 자신이 중심에 놓이는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2부 <눈처럼 희다>에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눈처럼 희다> <흑단처럼 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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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여성에 의한, 그러나 모두를 위한 이야기들이다. 10월 <씨네21> 북엔즈에 꽂힌 책들은 불가해한 세상과 마주 선 지구상 여성들의 동시대를 담고 있다. 동화 속 공주이기를 거부한 핀란드 소녀는 혈혈단신으로 어른들의 거대한 범죄와 맞서 싸운다. 범죄의 칼 끝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하고 있다. 집안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에게 분노한 아일랜드의 한 여인은 18개월간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는 것으로 젠더 편견에 도전장을 던졌다. 대한민국의 여학생들은 오늘도 마트에서, 편의점에서 일을 해야 생계를 꾸리고 학비를 벌 수 있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그들에게 사랑은 유일한 위로이자 구원이다.
<다이버전트> 시리즈의 비어트리스 프라이어와 <헝거게임> 시리즈의 캣니스 에버딘 등 영어덜트 장르는 이미 주체적이고 당당한 십대 여전사들의 각축장이 된 지 오래다. 핀란드 동화작가 출신인 살라 시무카가 쓴 <눈처럼 희다>와 <
[도서] 지구상 여성들의 동시대를 담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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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까지, 언젠가부터 한국 현대사는 우리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작 중요한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로서의 현대사마저 밀쳐두고 있는 건 아닐까?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삼촌·이모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듬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편견을 깨보자. 바로 요즈음 각광받는 역사 읽기의 신조류 ‘한국현대생활문화사’를 소개한다.
‘위험한 아이들’의 시대
1970년대는 흔히 통기타와 고고춤,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즐긴 낭만적인 청년의 시대로 기억된다. 그러나 당대의 소위 사회 지도층은 청년들을 그리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 언론은 ‘조국 근대화’의 과업을 수행하지 않는 청년 세대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대학생은 ‘퇴폐업소 숲’에서 사치와 낭비풍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여름철 피서지의 10대 남녀들은 “통금시간이 지나면 남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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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배운 것으로 졸업도 하지 못했지만, 이후 대학에 재학한 시간의 3배를 사회생활에 쓰면서 종종, 어쩜 이렇게 대학 때 배운 걸 써먹을 데가 없을까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 문득 프랑스 요리점에서 주문할 때 서버를 놀래킬 수 있는 프랑스어다운 발음을 구사할 수 있다든가, <르몽드>의 트위터 계정을 팔로할 수 있다는 장점이 떠올랐고, 나아가 그 5년을 기점으로 취향의 축이 이동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내 세계를 구성한 소설과 음악의 성분은 영미권의 그것에 러시아의 풍미를 살짝 더한 정도였다. 대학에서의 시간은 주재료(영미권)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적인 어떤 것을 확실하게 착
향시키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몇 작가와 작곡가는 프랑스 사람이고, 그 것은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내가 앞으로 100번 이사를 더 다닌다고 해도 버리지 않을 책과 음반들의 컬렉션 중심을 잡는다. 그중 하나만 예로 들면 발자크다. 작가로서의 발자크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상상 속에서 누리는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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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인 듯 신인 아닌 밴드 크리쳐스
밴드 크리쳐스(KREATURES)를 들어봤는가. 올해 첫 앨범 《SOMEONE》을 발표한 따끈따끈한 신인 록밴드다. 낯선 그룹 이름에 비해 멤버들 면면을 살펴보면 인디신에서 익숙한 이름들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이 앤트 메리, 옐로우 몬스터즈 출신의 베이시스트이자 보컬 한진영, 스트라이커스 출신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 김성환, 실력파 드러머 최윤실이 만나 꾸린 밴드가 크리쳐스다. 실력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밴드 크리쳐스가 10월29일 홍대 웨스트브릿지에서 첫 라이브 공연을 갖는다. 의미 있는 순간을 기념할 록팬들은 홍대로 모여라.
두 형사 이야기 들어볼래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소통과 거짓말>팀이 다시 뭉친다. 배우 김선영이 이끄는 극단 나베에서 9월29일 연극 <두 형사 이야기>의 첫 공연을 올렸다. 연출은 <소통과 거짓말>의 이승원 감독이 맡고 김권후와 장선도 배우로 참여한다.
[culture highway] 신인인 듯 신인 아닌 밴드 크리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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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까지, 언젠가부터 한국 현대사는 우리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작 중요한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로서의 현대사마저 밀쳐두고 있는 건 아닐까?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삼촌·이모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듬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편견을 깨보자. 바로 요즈음 각광받는 역사 읽기의 신조류 ‘한국현대 생활문화사’를 소개한다.
군대 가야 사람 된다?
지난 ‘최고급품 쓰고 꿀꿀이죽 먹던 1950년대로의 여행’에 이어 1960년대를 찾아간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란 피하고 싶은 곳이다. 196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961년 6월9일 병역의무 불이행자 자수 기간을 정했는데, 10일 동안 무려 24만명이 신고할 정도였다. 많은 이들이 피하는 곳이었지만, 한편으로 사람들은 “군대 가야 사람 된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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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답다. 굉장하지 않은가. <장미의 이름> <죄와 벌> <향수> <어머니> <꿈의 해석> <그리스인 조르바> <개미> <소설> <갈레 씨, 홀로 죽다 외> <뉴욕 3부작> <핑거스미스> <야만스러운 탐정>이 수록된 이 전집은, 열린책들을 먹여살린 베스트셀러와 열린책들을 기억하게 만든 작품의 조합이며, 한국에서 사랑받은 소설의 목록이자 한국에서 더 사랑받아야 한다고 (열린책들이 그리고 나 역시) 주장하는 소설의 목록이기도 하다. 12권에서 멈춘 것도 대단하다.
이 목록은 9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닌 내게 취향과 허영의 족보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이름은 지금도 그리움을 담아 입에 올리고, 누군가의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시큰둥한 코웃음을 담아 입에 올린다. 그냥 이 12권의 목록을 보는 순간 그 모든 일이 생각났다. 베스트셀러만 모으지 않아서 단순한 추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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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의 영화인생
올가을,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의 스크린이 윤정희라는 색채로 물든다. 9월22일부터 10월2일까지, 서울 마포구 시네마테크 KOFA에서 데뷔 40주년을 맞은 배우 윤정희 특별전이 열린다. 데뷔작 <청춘극장>을 비롯해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를 대변하는 작품인 <안개> <황혼의 부르스>, 배우 윤정희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시> 등 대표작 스무편이 상영된다. 영화감독 이창동, 최하원이 참여하는 관객과의 대화 행사도 두 차례 마련된다. KOFA에서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든든한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보자.
고궁의 가을밤은 깊어가고
고궁에서 가을밤의 정취를 누려보자. 경복궁과 창경궁이 9월24일부터 10월28일까지 올해 4차 야간 특별관람을 시행한다. 경복궁은 근정전·경회루·수정전·사정전·교태전·강녕전 권역을, 창경궁은 홍화문·명정전·통명전·춘당지·대온실 권역을 개방한다. 오
[culture highway] 윤정희의 영화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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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까지, 언젠가부터 한국 현대사는 우리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작 중요한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로서의 현대사마저 밀쳐두고 있는 건 아닐까?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삼촌•이모 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듬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편견을 깨보자. 바로 요즈음 각광받는 역사 읽기의 신조류 ‘한국현대 생활문화사’를 소개한다.
1958년, 9개월 동안 100억원 밀수품 적발
처음으로 찾아갈 시대는 1950년대이다. 1950년대라고 하면 아마도 전쟁 후의 피폐한 삶을 떠올리겠지만 그때 사람들도 오늘날의 우리처럼 욕망과 열망을 품고 살아갔다. 1950년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지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미제 물건이 넘쳐났던 시기로 기억되기도 한다. 흔히 ‘양품’(洋品)이라고 지칭되던 외제 물건들이 한국에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5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