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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간호사 노리코는 소아과 병동에서 근무한다. 그녀의 친구 유코는 산부인과 병동. 유코는 어느 날 노리코에게 ‘특별병동’에 대해 들려준다. 유명인이 낙태하려고 몰래 입원하는 곳, 그리고 기형아를 밴 임부들이 전국에서 모여드는 곳. <폐쇄병동>의 작가 하하키기 호세이가 1993년에 쓴 <장기농장>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음습한 분위기가 소설 초반의 산뜻한 출발을 조금씩 침범하며 오싹한 분위기를 낳는다. 새 직장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이 있는가 하면, 이내 전에 실습을 나갔던 병원에서 만났던 환자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TV다큐에서 종종 다루는 사건과 닮아 있다. 노리코가 일하는 소아병동의 환자가 낯이 익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입원했는데, 아무리 투약을 해도 차도가 없다. 아이의 엄마는 한시도 아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노리코는 다른 병원에서 만난 일을 언급하는데 아이 엄마는 그 사
[도서] 그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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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습성이다.” 이 명제에 동의한다면 다음 문장 역시 당신의 마음을 끌 것이다. “진정한 혁명적 순간은 사랑과도 같다.” 공기는 답답하지만 어느 때보다 더 숨을 잘 쉴 수 있게 되는 순간,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는 순간에 생겨나는 균열. <사랑의 급진성>은 사랑, 연대, 혁명에 대한 사유를 담았다. 그것들이 어떻게 닮았는지, 사랑과 비슷해 보이는 사회적 형태의 감정들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저자 스레츠코 호르바트는 크로아티아의 철학자이자 활동가다. 책 속에는 글짓기에 대한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마오쩌둥은, 혁명은 만찬도 글짓기도 그림 그리기도 아니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뒤엎어버리는 반란과 폭력이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의 말을, 호르바트는 바꿔쓰자고 권유한다. “혁명은 하룻밤의 정사도, 가벼운 연애도 아니다. 그런 일들보다 쉬운 건 없다. 만일 당신이 혁명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면, 당신은 격정적인 정사를 치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체의 사랑, 레닌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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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은하철도 999> 발표 40주년을 기념해 마쓰모토 레이지의 만화 세계를 조망하는 기념전이 열린다. 작가가 직접 그린 <은하철도 999>의 오리지널 삽화(원화), 애니메이션용 셀화, 작품 제작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스케치화 드로잉 작품들을 전시한다. 뿐만 아니라 <캡틴 하록> <우주전함 야마토> <천년여왕> <에메랄다스> 등 그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전시기간 중 마쓰모토 레이지가 내한해 라이브 페인팅, 팬사인회 등의 행사를 통해 팬들과 만나는 시간도 마련된다. 작품 속 다양한 캐릭터를 모형화한 피겨, 작품집, 작가의 산업미술 사진까지 전시하니, 작가의 팬이자 일본 만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놓칠 수 없는 시간이다. 행사는 3월18일부터 5월1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빙하 위의 피아니스트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루도비코 에이
[culture highway]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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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작품=하루키 랜드에는 다방 분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주택가 한적한 곳에 위치한, 누구나 마음 편하게 들를 수 있는 작은 다방. 거기에는 다방 주인과 손님이 ‘기분 좋다’고 느낄 만한 인테리어 소품이 놓여 있습니다.” “주인장과 같은 세대=베이비 붐 세대 비평가들은 다방에 붙어살며 게임기를 가지고 이리저리 놀아보다가, 곧 다방의 게임 속에 ‘1970년’, ‘전공투’, ‘상실’, ‘소외’, ‘자폐’, ‘다른 세계’, ‘죽음과 재생’ 같은 그들이 좋아하는 단어가 숨겨져 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이토 미나코의 <문단 아이돌론> 중 1부, ‘문학 거품의 풍경’ 첫 번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설명 중 일부다. 일본 문단에 아이돌이랄 존재가 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적절한 시작점이 어디 있겠는가. <노르웨이의 숲>(1987)은 발간 1년 만에 350만부가 팔렸다. 그의 신작은 여전히 화제의 중심에 있어, 신작 <기사단장 죽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하루키가 읽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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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로 만나는 <캐롤>
<캐롤>의 팬들이여, 결집하라. 소장가치 높은 <캐롤>의 굿즈들과 함께 한정판 블루레이 패키지가 출시된다. 플레인아카이브에서 출시되는 이번 <캐롤> 블루레이 한정판은 굿즈 구성품에 따라 풀슬립, 스퀘어 슬리브, 디럭스 박스 세트 총 3종으로 구성된다. <씨네21> 김혜리 기자의 음성해설과 감독, 배우, 제작진 등 15인의 인터뷰, 배우와 제작진의 영화 비하인드 스토리, 촬영현장 스케치, 관객과의 대화 영상이 공통적으로 수록된 한편, 각 패키지의 사양에 따라 에세이북과 포스터, 엽서, 미니영화카드, 포토북, 각본집 등이 풍성하게 제공된다. 2월23일 오후 4시부터 프리오더 시작.
정훈이가 말한다!
<씨네21>에 실리는 <정훈이 만화>. <야매공화국 10년사>는 영화에 대한 농담 섞인 상상만큼이나 시사를 풍자하는 통렬함으로도 인기 높은 그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culture highway] 블루레이로 만나는 <캐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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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칼럼니스트 에마는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매일을 난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 첫째 아들 제이컵 때문이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특정 주제에 대한 집착, 결벽과 강박을 동반한다. 제이컵의 일상에서 규칙은 필수이며 일상의 변수는 언제든 발작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에마와 아이들에겐 다섯 가지 규칙이 있다. 어지른 것은 직접 치울 것, 거짓말하지 않을 것, 하루 두번 이를 닦을 것, 학교에 지각하지 말 것, 형제를 돌볼 것. 한편 형 제이컵 때문에 둘째 테오는 항상 에마의 관심 밖에 있다. 테오에겐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집을 몰래 돌아다니며 안락함을 느끼는 괴이한 습성이 생긴다. 어느 날, 어김없이 이웃집에 들어간 테오는 샤워 중인 여자를 발견한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테오는 그가 제이컵의 사회성 교육을 돕는 대학원생 제스란 걸 알게 된다. 테오는 재빨리 집을 뛰쳐 나온다. 그날 제스는 행방불명이 된다. 며칠 후엔 제이컵의 퀼트 이불에 둘러싸인 채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거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거짓말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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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음원으로 음악을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시대다. 플레이리스트는 시시각각 변하고 큐레이팅 시스템의 힘을 빌려 취향에 맞는 곡을 빠르고 편하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음악의 수명은 짧아졌고, 향유하는 음악의 폭은 더욱 좁아졌으며, 음악에 개인의 내밀하고 특별한 사연이 담길 기회는 줄어들었다. 뮤지션 김정범의 <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는 장르와 국적의 경계를 허물고 100여곡의 명곡을 소개하며, 인생의 한 대목을 상기시키는 음악, 그 본연의 힘을 되새긴다. 이 책은 읽는 행위만으론 부족하다. 이어폰과 스마트폰을 곁에 두고 꼭지마다 등장하는 앨범을 검색해서 따라 들으며 눈과 귀로 고루 즐길 때 책의 참맛이 살아난다. 마치 라디오에서 운 좋게 좋은 곡들을 발견할 때 느끼는 희열이 이 책에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어진다.
저자 김정범은 ‘푸디토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재즈 뮤지션이자 영화 <멋진 하루> <러브 토크> <롤러코스터&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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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지은 이의 바람을 담아낸다. <혼자를 기르는 법>의 주인공, ‘이시다’의 이름에는 “훌륭한 분이시다”, “귀한 몸이시다”라는 표현처럼 남들에게 대접받고 살라는 아버지의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성을 떼고 보면 그의 이름은 부하 혹은 아랫사람을 뜻하는 속어에 불과하다. 예상대로 그는 ‘시다씨’로 불린다. 귀한 뜻을 타고 태어나 누군가의 부하 직원으로, 사회의 부품으로 살아가는 인생. 주인공 이시다뿐 아니라 일인분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모든 ‘혼자’들의 몫이다.
<혼자를 기르는 법>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만화가인 김정연이 2015년 말부터 연재한 웹툰 중 200여 가지 에피소드를 모은 책이다. 이시다와 햄스터 쥐윤발이 동거하는 자취방 한칸이 만화의 주된 무대다. 치열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작가가 마주한 통찰의 순간들을 관통하는 것은 관조의 태도다.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우며 살다가 나중에 썩지 않는 방부제 미라가 되는 것을 걱정하고 중장비보다 더 긴 노동시간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혼자를 기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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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북엔즈에 꽂힌 신간 도서들은 일반적인 장르 도서와 차별화된 구성이 돋보인다. 세권의 도서는 각각 만화, 에세이, 소설로 글의 종류도 다르고 자취 생활, 세계 각지의 음반들, 자폐아 가정의 생활과 살인사건 등 글의 소재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세권 모두 독자가 스토리를 따라가고 메시지를 읽어내는 데 최선의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만화가 김정연의 <혼자를 기르는 법>은 회사 생활을 위해 상경한 디자이너 이시다가 생활의 동반자 햄스터, 친구들과 함께 꾸려나가는 일상을 그린다. 페이지별로 같은 크기의 세컷이 세로로 배치되는데 좌우로 시선이 분산될 일 없이 물 흐르듯 읽어나갈 수 있다. 에피소드 하나당 여섯컷에서 아홉컷으로 편당 호흡이 짧다는 것도 이 만화의 특색이다. 생활 곳곳에서 건져올린 작가의 통찰과 뛰어난 유머 감각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에 더 없이 적합한 구성이다. 5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양에도 앉은자리에서 바로 읽어낼 수 있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 참신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책 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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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없이는 우리도 없다. <평양의 영어 선생님>의 원제는 그렇다. 부제도 있다. 북한 고위층 아들들과 보낸 아주 특별한 북한 체류기. 저자 수키 김은 재미동포 소설가로, 2003년 첫 장편소설 <통역사>로 펜 헤밍웨이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통역사>도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꼭 말해보고 싶은 작품이지만, <평양의 영어 선생님>을 먼저 떠올린 이유는 역시 김정남의 피살 뉴스 때문이다. 이럴 때면 내가 사는 곳이 휴전국가였지, 분단국가였지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 모든 뉴스의 중심 화제가 바뀌었다. 정확히는 김정남이 아니라 그 아들 김한솔 때문에 <평양의 영어 선생님>을 다시 생각했다. 김한솔은 지금 마카오에서 중국의 보호하에 있다고 하는데, 그전에는 파리정치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2013년 장성택 처형 이후 그를 포함한 북한 출신 유학생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파리정치대학에 다닌다고? 공부를 잘하는 모양이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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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트먼 X 폴 토머스 앤더슨=?
그야말로 ‘빅 매치’다. 1970년대 미국영화를 대표하는 연출자이자 할리우드의 영원한 반골 감독인 고 로버트 알트먼. 그런 그의 적자로 평가받으면서도 자기만의 확고한 영화세계를 구축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대표작 14편을 만날 수 있는 상영회가 상암동 시네마테크 KOFA에서 2월14일부터 28일까지 열린다. <고스포드 파크>와 <내쉬빌>, <펀치 드렁크 러브>와 <매그놀리아> 등을 상영한다.
봄과 함께, 노라 존스
노라 존스가 올봄 내한한다. 올해로 3회를 맞이한 2017 뮤즈 인 시티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오르는 것. 노라 존스는 2002년 앨범 《Come Away With Me》로 데뷔해 2003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신인상 등 8개 부문을 휩쓸며 ‘그래미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에 등극했다. 이번 무대에서 노라 존스는 지난해 발표한 신곡들은 물론 명곡들도
[culture highway] 로버트 알트먼 X 폴 토머스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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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우뚝한 건물의 그림자, 위아래로 길쭉한 창문 앞의 속옷만 걸친 여자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처음 봤던 때가 떠오른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보고 싶었고 실물로 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Nighthawks> 같은 그림으로 말하면 과장을 좀 보태 이 그림에 홀리지 않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소설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말에 따르면, “미국적 고독의 낭만적인 이미지 가운데 가장 통렬하고 쉬지 않고 복제되는 작품”. 올리비아 랭이 에세이 <외로운 도시>의 두 번째 장에서 휘트니 미술관의 이 그림을 설명하는 가이드 말을 옮길 때만 해도 나는 이 그림의 푸르고 희고 검은 무표정한 어둠을 떠올리고 있었다. 직접 봤을 때의 그림이 나에게 보여주던 빛을 떠올리며. 랭은 고독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이 외로워질수록 사회가 흘러가는 물길을 따라가는 숙련도가 점점 낮아진다.” 혼자일 때 보살핌이 결여되어서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인가, 혼자라는 감정 자체가 스트레스를 안기는 것인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창작의 재료 혹은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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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땅에 피워올린 여성 영화인들의 꿈
2월 한달간 한국 여성 영화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KMDb VOD 기획전이 열린다. 제목은 ‘으라차차! 우리가 나가신다! 척박한 땅에 핀 작은 풀 한 포기, 여성 영화인 기획전’. 상영작은 총 7편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 박남옥에 이은 두 번째 여성감독 홍은원의 <여판사>, 최은희 감독의 <민며느리>와 <공주님의 짝사랑>, 의상감독 이해윤이 참여한 <단종애사>, 편집기사 김영희가 참여한 <영>, 한국 최초의 여성 제작사 전옥숙이 기획한 <휴일>이다. 이번 기획전은 지난해 열렸던 ‘도전! 나도 프로그래머’ 공모전에서 2위에 입상한 류동길씨가 기획했다. 그는 KMDb 홈페이지에 “앞으로 더 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활약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보이지 않는 장벽과 맞서 싸운 선배 여성 영화인들의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한다”는 기획의도를 밝혔다.
화폭
[culture highway] 척박한 땅에 피워올린 여성 영화인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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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는 것이 단순히 돈이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개인의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두꺼운 코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가난을 경험해본 적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운좋게도 고도성장기에 돈이 오가는 길목에서 일할 기회를 잡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현재 가난은 계층이동 불가능성이라는 특징을 지니는데, 추락은 가능하되 상승은 불가능한 종류의 이동 불가능함이라, 자수성가도 과거의 푸른 꿈으로 끝났다.
돈이 없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선택지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이상적인 선택지가 머릿속에서 사라진다는 뜻이다. 자주 이사해야 한다는 뜻이며, 인간관계 역시 수시로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최현숙이 가난한 70대 남자 노인 둘을 인터뷰한 <할배의 탄생>을 보면 인터뷰이 중 한 사람인 김용술씨는 양복점 테일러, 섹스 비디오방 주인, 채소 장사 등 일자리를 따라 전국을 떠돌며 여자들과 잠깐씩의 관계를 맺었고, 지금도 그렇게 지낸다.
린다 티라도의 는 미국에서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그 자리에 서야 보이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