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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은 시인이다. 그런데 그의 방대한 저서 목록을 보면 그를 시인으로만 불러도 될지 망설여진다. 원재훈은 1988년 시인으로 문단에 나와 시집, 소설, 동화, 수필, 인물론, 번역, 영화 이야기까지 내놓으며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해왔다. 그렇게 그는 근 30년간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였고, 세상이 아직 모르는 알토란 같은 정보를 전했다. 올해 초에 나온 <상처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는 그가 지금껏 사랑해온 책 28권을 소개하는 에세이다. 시대를 넘나드는 고전과 문학을 벗하며 사는 이들이 조용히 마음에 품어온 책이 즐비하게 엮였다.
‘원재훈의 독서고백’이라는 부제는 그가 문인들을 만나 얻은 행복관을 묶은 <나는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를 떠올리게 한다. 단행본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칼럼까지 부지런히 소화하는 그에게 더없이 걸맞은 제목이다. <상처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는 원재훈 에세이 특유의 상냥한 말투와
씨네21 추천 도서 <상처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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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소설가 엘리너 캐턴의 <루미너리스>의 실물을 마주했을 때 묘하게 권위적이란 인상을 받았다. 1, 2권 합쳐 12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는 물론, “47년 맨부커상 역사상 최연소 수상 작가의 천재적 작품!”이라는 문구로 채워진 널찍한 띠지 또한 어딘가 고전의 풍모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외관에 대한 느낌은 시작에 불과하다. 책을 읽어내려갈수록 드러나는 28살 작가의 야심은 묵직한 장정을 비집고 나올 만큼 거대하다. 외곽으로 몰린 사내 무디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금광을 찾아온다. 그리고 같은 목적으로 그곳을 찾은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 어떤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엘리너 캐턴은 소설을 이루는 12명의 인물 누구 하나 헛되이 다루지 않으면서도 서사의 밀도를 단단하게 붙든다. 그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촘촘히 엮어나가면서 별자리의 체계를 경유한다. 열두 남자는 각각 황도 12궁을 대표해 그에 맞는 성격과 특징을 부여받아, 해당 별자리가 등장하는 때에
씨네21 추천 도서 <루미너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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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가을 <파인즈>로 한국에 첫선을 보인 <웨이워드 파인즈> 3부작이 최근 마지막 권 <라스트타운>으로 시리즈를 완결했다. 지난해 7월 2권 <웨이워드>가 발매되고 3권이 나오기까지 불과 7개월의 간격이 있었지만, 상황은 그 시간보다 더 뚜렷하게 바뀌었다. M. 나이트 샤말란이 총제작(과 파일럿 연출)을 맡고 맷 딜런이 주인공 에단 버크를 연기한 드라마 <웨이워드 파인즈>가 기대를 웃도는 인기를 얻었고, 소설 3부작 역시 드라마와 장르소설 팬들의 성원으로 발간 당시보다 훨씬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
사라진 동료를 찾던 중 정신을 잃고 낯선 마을에 도착한 에단 버크가 마을을 휘감고 있는 수상한 기운을 추적해나간 시리즈는 <라스트타운>에서 그동안 꽁꽁 감춰놓았던 어마어마한 비밀을 죄다 풀어놓는다. 3부가 신을 거스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구약전서의 욥기 구절을 인용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점은, 이 대장정
씨네21 추천 도서 <라스트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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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막힌 상황에 놓인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일정 이상의 흥미를 선사한다. 극단을 종용하는 선택지를 쥐고 있는 이들은 끔찍한 패배의 주인공이 되거나 숭고한 결정을 내리는 용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3월 북엔즈는 숭고함과 끔찍함의 현장으로 독자를 초대하는 책들을 모았다.
드라마 <웨이워드 파인즈>는 지난해 미국 전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 중 하나다. 독재사회와 디스토피아를 중심으로 무수한 장르들의 조합이 구현된 지옥도는 작가 블레이크 크라우치의 무시무시한 필력이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결과물이다. 외딴 마을에 떨어져 자신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미친 과학자의 어둠에 기꺼이 반기를 드는 한 남자의 무용담은 말초적인 재미와 함께 다음 세상에 대한 참혹한 비전을 동시에 보여준다.
엘리너 캐턴은 <루미너리스>에서 곤궁함을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탐욕으로 뒤덮인 금광에 뛰어든 사내 ‘무디’를 그린다. 그로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점점 몸집을 불리며 비슷한 처지의 열
선택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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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다시 부르기
“그의 노래에 감염된 나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시인 안도현은 말했다. 김광석의 흔적이나마 되짚어 쓸쓸한 마음을 달래보자. 김광석 20주기 추모 전시회 <김광석을 보다展: 만나다, 듣다, 그리다>가 4월1일부터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선 김광석의 자필 악보, 직접 쓴 일기와 메모, 그가 사용했던 악기와 즐겨 들은 앨범 등 300여점에 달하는 유품이 공개되며 김광석의 육성을 편집해 만든 오디오 가이드도 마련된다. 당연히 음악도 함께한다. 김광석을 존경하는 현업 뮤지션들이 헌정의 의미로 김광석의 노래를 다시 부를 예정. 8개 전시관마다 테마를 다르게 해 뮤지션 김광석, 가장 김광석, 사람 김광석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알찬 기획이다.
언더그라운드 북마켓
언제부터인가 독립 출판물을 만들고, 읽고, 공유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해방촌을 기반으로 운영 중인 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이 주최하는 3회째 언더그라운드 북마켓은 이런 흐름의
[culture highway]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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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11일. 바다에서 고작 4km 떨어진 일본의 한 작은 마을. 오카와 소학교에는 학생 78명이 있었는데 4명 빼고 모두 사망했다.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덮칠 때까지 50여분. 학생들은 계속 교정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산으로 피신하자는 아이도 있었지만 선생님에게 제지당했다. 학교는 건물을 옮겨 다시 수업을 시작했지만 옛 학교 건물은 그대로 있다. 대지진 이후 유족들이 처음 모인 기자회견장에, 죽은 아이들이 왔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은 자들의 웅성임>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영영 잊을 수 없을 죽은 자들의 기척을 다룬다. 도호쿠 지방의 여러 재난지역에서는 유령을 보았다는 택시 기사들의 목격담이 많다. 해안가를 달리는데 사람을 들이받았다, 그런데 아무도 없더라. 손님을 태웠는데 아무도 없더라. 출처를 물으면 그저 전해들은 이야기로 도시전설에 가까워 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택시 기사들은 자신이나 가까운 이가 쓰나미로 누군가를 잃은 사연을 넘
[도서] 죽음 그 이후에 대한 일본인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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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수필가인 데이비드 실즈는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서 나이든 아버지를 바라보는 중년 남성의 관점에서 노화와 죽음을 적었다. 의사인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수많은 침상 곁에 서본 경험을 바탕으로 노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실감나게 썼다. 생물학자인 조너선 실버타운은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을 통해, 다소 인간이라는 생물의 죽음과 늙음을 묘파했다.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은 문학과 생물학을 결합해 노화를 다룬다. 흥미로운 인용구로 독자의 긴장을 뺀 뒤 진지한 연구 결과로 끌고 간다. 기대수명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현재 추세가 지속된다는 가정하에 2000년 이후 부자 나라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100살까지 살 수 있으리라고 한다. 장수촌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는 다소 놀랍다. “아주 늙으면 노화가 멈춘다.” “110~119세인 미국 초백세인의 40퍼센트가 혼자서 살 수 있거나 최소한의 도움만 필요할 만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문학+생물학으로 본 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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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과의 첫 조우
화가 변월룡은 한국 미술사에서 흔적조차 없는 이름이었다.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미술계에서 활동했던 그는 북한 미술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작가다. 변월룡의 작품 세계를 처음으로 한국에서 소개하는 대규모 회고전 <변월룡(ПенВарлен) 1916~1990>이 5월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다.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는 작가를 재조명하는 프로그램 <백년의 신화: 한국근대미술 거장전>의 첫 순서다. 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근대사의 흔적이라 일컬어도 무방할 200여 작품과 70여점의 자료가 전시된다.
서울, 디자인, 10년의 역사
서울에 자생적이고 독특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가 하나둘 생겨난 지 어느덧 10년. 스튜디오의 규모는 작아도 디자인에 대한 그들 각자의 취향과 개성, 디자인에 대한 지향만큼은 확실하다. 일민미술관의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전은 이들 그래픽 디자인
[culture highway] 변월룡과의 첫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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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사용되는 초등학교 6학년용 사회과 국정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가 빠진다. ‘성 노예’라는 단어도 빠지고, 사진도 들어가지 않는다. 2014년 제작한 실험본에는 위안부 사진자료와 함께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었다”는 사진 설명이 있었다. 초등학생 교육에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라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변화라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생과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던 소녀들이 위안부로 끌려갔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려볼 때, 이런 결정이 역사를 제대로 교육하겠다는 행동인지 의심스럽다. 이전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았던 표현이라는 해명이 있었지만,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피해자도 피해 사실도 아니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만 든다.
이런 소식이 전해진 지난주, 일본 저널리스트 가와타 후미코의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를 읽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꾸준한 저작 활동을 해왔던 저자는 식민지 전쟁 시대를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재일 할머니들, 식민지 전쟁 시대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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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한가운데에 서다
라슬로 네메시 감독의 <사울의 아들> 개봉을 맞아 CGV압구정과 CGV여의도에서 NOON VR체험 행사를 진행한다. 35mm 필름 제작, 주인공의 시점숏, 4:3화면비율 등 파격적인 형식으로 홀로코스트 현장을 생생하게 구현한 이 작품이 VR기술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 두려움 반 흥분 반이다. 3월4일부터 NOON VR 전용 앱을 통해 VR 시네마 포맷의 <사울의 아들> 예고편을 감상할 수도 있다.
추억에서 현재로
시작은 ‘토토가’였다. 지난해 이맘때 <무한도전>의 ‘토토가’를 통해 90년대 화려한 인기를 누렸던 터보가 다시 뭉쳤고, 보컬 김종국과 각기 다른 시기 활동했던 래퍼 김정남과 마이키가 모여 3인조가 됐다. 반응은 뜨거웠다. 15년 만에 발표한 앨범 《Again》은 음원사이트를 휩쓸었다. 오는 3월부터는 데뷔 20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투어 콘서트를 연다. 90년대 가요계를 수놓았던 터보의 히트곡
[culture highway] 아우슈비츠 수용소 한가운데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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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과는 다르다! 건담과는!
건담 게임이 아니다. 건프라 게임이다. 건프라 마니아들의 지갑을 털기 위해, 올 것이 왔다. 건담 브레이커 시리즈 최식작 <건담 브레이커3>가 3월3일 PS4, PS Vita 버전으로 발매된다. 건프라의 특징을 살려 경쾌한 배틀을 맛볼 수 있는 이번 <건담 브레이커3>에는 SD건담도 참전이 확정되어 좀더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배틀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이번 발매는 일본 발매일과 동일한 일정이며 2월19일부터 예약판매를 시작한다. 초회동봉특전으로 현재 방영 중인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의 ‘HG 건담 발바토스(제4형태)’의 파츠와 무기 데이터 일식을 얻을 수도 있으니, 팬이라면 꼭 득템하자!
뮤지컬로 만나는 윤동주
윤동주의 시가 가무극으로 재탄생한다.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는 비극의 시대에 자유와 독립을 꿈꾼 청년 윤동주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의 시를 노래와 춤으로 풀어낸다.
[culture highway] 건담과는 다르다! 건담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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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존 치버의 일기와 서간집이 출간되었다. 작가의 사후에 아들 벤저민 치버가 엮은 이 책에는, 아들로서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동성애 애인들과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편지들을 발견했을 때의 놀람과 그 편지들마저 이 서간집에 포함시킨 경위가 실려 있다. 존 치버 단편소설의 묘미를 아는 이들에게 이 편지 모음은, 소설과 그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았나보다 생각하게 만들곤 한다. 힘 있는 단문들의 나열이 끌어올리는 몰입도는 편지에서도 그대로니까. “날씨가 흐려요. 눈이 올 것 같네요. 존 업다이크는 아프리카에 갔어요. 내 결혼생활은 바닥을 치고 있고요. 난 아침식사로 보드카를 마셔요. 스케이트도 타는데 그러고 있으면 절대적인 망각을 발견합니다.” “나는 내 뮤즈도 기다리고요. 나는 늘 사랑을 하는 쪽이었으므로- 사랑받는 쪽이 되어 본 적은 없이- 인생의 많은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왔어요. 기차를, 배를, 발자국 소리를, 초인종 소리를, 편지를, 전화를, 눈을, 비를, 천둥을, 기타 등등
[도서] 존 치버의 일기와 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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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見知り’라는 일본어 표현이 있다. ‘히토미시리’라고 읽는데, 그 뜻은 ‘낯가림’이다. 일본에는 ‘낯가림이 심하다’라는 컨셉으로 쇼 프로그램 기획을 하고 책도 쓴 개그맨이 하나 있는데 그가 바로 오도리 와카바야시다. 와카바야시는 일본 예능 프로그램 <아메토크>에서 ‘낯가림이 심한 개그맨’ 특집을 기획한 적이 있는데, 그 자신이 낯가림이 너무 심한데도 개그맨이라는 직업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데서 생기는 우여곡절이 이보다 더 웃길 수 없었다(낯선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무엇이든 글씨를 읽는다- 예컨대 음료수 캔에 쓰인 성분표시- 는 말은, 역시 낯가림으로 고생하는 나에게 공감의 폭소를 불러일으켰다).
일본에서는 개그맨의 활동 범위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마타요시 나오키는 소설 <불꽃>을 써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해 100만부 판매를 돌파했고(요즘 일본 서점에서는 마타요시가 추천한 소설들에 특별 코멘트가 붙어 광고된다), 영화감독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여기 나 혼자만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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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씨네21>의 진득한 독자들은 그레이엄 무어의 이름에서 대번에 컴퓨터공학의 토대를 마련한 수학자 앨런 튜링의 실화를 그린 <이미테이션 게임>의 각본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자잘한 스탭 명단까지 꿰는 이들이 아니라면,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맑은 눈으로 불우했던 과거를 고백하며 “이상해도 괜찮아요, 달라도 괜찮아요”(Stay weird, Stay different)라고 근사한 수상소감을 전했던 한 남자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나리오작가로서 세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이지만, 그의 커리어는 2010년 소설 <셜로키언>에서 출발했다. 아주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두고 “영화 같다”고 상찬하는 입버릇은, 그레이엄 무어의 다재다능한 행보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셜록 홈스와 앨런 튜링을 연기했다는 점 외에도, <셜로키언>과 <이미테이션 게임>은 서로 닮은 구석들이 여럿 있다. 우선 두 작품 모두
씨네21 추천 도서 <셜로키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