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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더이상 로맨스를 추구하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더이상 운명적인 짝을 만나 연애하다 결혼에 골인하여 평생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살아가는 꿈을 꾸지 않게 됐다.’(270쪽)
<로맨스라는 환상-사랑과 모험의 서사>는 일단 로맨스가 불가능한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논의를 출발시킨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TV드라마 안에서조차 로맨스를 기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에 로맨스가 환상의 영역으로 분리된다. 하지만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영화 <귀여운 여인>류의 로맨스나 운명적 사랑의 자리를 ‘친밀성’이 대체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러니까 길 가다 우연히 교통사고처럼 마주치는 운명적 사랑을 사람들은 ‘비현실적’이라 믿지 않고, 대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 로맨스가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지했다시피 운명적 사랑이 인기가 없다고 해서 로맨스 장르 자체가 힘을 잃은 것은 아니다. 특히
씨네21 추천 도서 - <로맨스라는 환상 - 사랑과 모험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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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어요?” 직장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했을 때 대답은 모두 달랐다. “아니, 절대.” “당연하지. 안 그런 사람도 있나?” 그렇지만 회사 때문에 울어본 적 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회사라는 말에는 직장이 속한 건물 안, 내가 일하고 있는 근무시간대, 거기서 만난 사람 등등이 포함되어 있다. 취직의 관문을 넘어서 삶의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직장이다. 프리랜서가 아니라면 거기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고 같이 일하며 관계를 배우기도, 불합리한 권력에 분통을 터트리기도, 월급이 입금되었다는 문자에 잠시 숨을 고르기도 한다.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 한국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것은, 이렇게나 무수한 직장인의 하루하루를 채집해 모두가 겪을 법한 일로 묶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2019년 첫 출간 후 10만부 판매 기념으로 출간된 이번 소설집은 이것을 읽고 힘을 얻었던 선배가 후배에게 ‘너도 한번 읽어봐’라며 새
씨네21 추천 도서 - <일의 기쁨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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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도 다 신의 뜻으로 일어난 것이고, 그것을 이겨낸 너의 삶에는 이전과는 다른 깨우침이 남고 내면은 깊어질 것이다, 류의 교훈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기왕이면 불행을 겪지 않고 상처도 없이 살아간다면 인생이 더 쾌적하고 행복하지 않겠는가. 불행을 겪어야만 얻어지는 깨우침이라면, 그냥 모르고 살아도 좋을 것 같다. ‘영혼의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의 생각은 다르다. <연금술사>와 <순례자> 등을 읽은 파울로 코엘료의 팬이라면 그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 내면의 수련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다섯번째 산>은 코엘료가 산티아고 순례 여행 이후 얻은 깨달음으로 쓴 작품으로 1998년 한국에 소개된 바 있다. 문학동네에서 새로 출간된 이 소설은 포르투갈어 원전을 번역해 구판의 오류를 바로잡고 문장을 세련되게 다듬었다. <다섯번째 산>은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 엘리야의 이야기를 코엘료가 가지를 덧붙여 창작한 소설이다. 엘리야는 예언자의 역할을 하다
씨네21 추천 도서 - <다섯번째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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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을 극장에서 보고 각본집을 산 독자라면, 각본집 표지에 실린 ‘산해경’ 속 문장부터 놓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동쪽으로 이백오십 리를 가면 기름산이 있는데… 이 산의 봉우리는 깊이 감추어져,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다.” 기름산에 산다는 구더기가 떨어져 죽으면 터진 머리에서 황금색 파리 떼가 날아오른다니, 기름 바른 듯 미끄럽다는 비금봉에서 떨어져 죽은 기도수와 그 눈의 시점에서 잡은 묘한 화면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이어 각본집 표지를 넘기면, 서래의 집 벽지였던 붉고 푸른 산이 인쇄된 검푸른 종이가 나온다. 영화 속 화려한 벽지와 정갈한 부엌 소품이 놓인 장면이 다시 환기된다.
독자로서 각본집을 읽으며 관객으로서 영화를 본 기억을 떠올리는 체험은 풍요롭다. 경찰서에서 서래가 해준을 향해 미소를 보낸 순간, 각본집에는 ‘해준, 잠시 눈이 부시다’라고 쓰여 있다. 이어 둘이 스시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착착 정리하는 장면은, ‘둘은 손
씨네21 추천 도서 - <헤어질 결심 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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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근무하던 형사 핀은 몇달 전 벌어진 살인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고향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로 그곳으로 파견을 간다. 고향은 스코틀랜드 북서쪽 섬들을 지칭하는 헤브리디스 제도에서도 가장 북쪽에 자리한 루이스섬의 마을 크로보스트. 그곳 낡은 보트 창고에서 시신 한구가 발견되었는데, 죽은 사람은 핀이 유년 시절 알고 지낸 사이다.
18년 전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던 핀은, 강풍에 차가운 파도가 해변을 때리고 구름이 어둠을 몰고 다니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바다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많은 것을 앗아가기도 했다”라는 핀의 표현처럼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어선 전복으로 변을 당한 사람 등 거친 자연 속 사고가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핀은 쓴맛 가득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학교 입학 전까지 게일어 말고 영어를 배우지 못해 창피했던 기억,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양아치 녀석들에게 맞을 뻔했던 사건, 한 소녀를 두고 단짝 친구와 경쟁하던 일
씨네21 추천 도서 - <블랙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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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하우스_피터 메이 지음
헤어질 결심 각본_정서경, 박찬욱 지음
다섯번째 산_파울로 코엘료 지음
일의 기쁨과 슬픔_장류진 지음
로맨스라는 환상 - 사랑과 모험의 서사_이정옥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8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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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쓴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노후에 접어들며 ‘싱글의 노후’ 시리즈를 펴낸 바 있다. <싱글, 행복하면 그만이다> <여자가 말하는 남자 혼자 사는 법>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으로 일본에서는 누적 판매 부수 130만부를 달성했다. “그러나 아직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본의 노인 인구 구분법에 따르면 65살 이상이 전기 고령자, 75살 이상이 후기 고령자인데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건강하게 살다 가장 편안하게 죽는 법>은 후기 고령자가 되기 3년 전에 쓴 책이다. 세대간의 가구 분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아, 부모 세대가 배우자와 사별한 뒤에도 자녀와 합가하기보다는 혼자 사는 비중이 늘고 있다. 고령자와 관련한 풍부한 데이터가 존재하는 일본의 사례를 바탕으로, 고령자의 생활 만족도를 말한다. 노인의 경우 1인 가정의 만족도가 가장 높고 2인 가정의 만족도가 가장 낮은데, 미디어에서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건강하게 살다 가장 편안하게 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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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행동을 관찰하여 속내를 읽는 ‘동작학’ 전문가 캐트린 댄스 시리즈가 네 번째 이야기 <고독한 강>으로 돌아왔다. 시작부터 댄스는 위기를 맞이하는데, 갱단의 총기 수송 소탕 작전을 진행하다가 용의자를 놓쳤다는 이유로 민사부로 강등되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화재 사건을 맡게 된다.
책에는 장르물 독자라면 익숙할 장치들이 여럿 등장한다. 능력 있으나 억울하게 자리 배치를 받은 수사관, 부서간의 알력 다툼, 알고 보니 단순한 화재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살인을 노린 사건. 이런 익숙함을 흥미로움으로 바꾸는 것은 제프리 디버가 선보이는 현실적이고 꼼꼼한 관찰과 묘사다. ‘고독한 강’ 솔리튜드크리크가 흐르는 지역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지는 가운데 큰 사건이 터지자 바로 현장으로 달려오는 유력 정치인의 모습이며, 범인으로 지목된 용의자를 보고 분노하여 돌을 던지고 심지어 수사관을 공격하는 군중의 모습도 그렇다. 특히 이 통제 불가능한 아수라장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씨네21 추천도서 - <고독한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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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차 회사원 대한은 권고사직을 받고 퇴직금 5천만원을 든 채 자영업의 세계에 뛰어든다. ‘스터디 카페를 열기로 한 건 꽤나 멍청한 생각이었다’라는 첫장의 솔직한 제목이 보여주듯 한달 매출 2천만원이라는 대한의 꿈은 그의 계산과 달리 그리 시원하게 펼쳐지지 않는다. 권리금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관리비가 얼마나 들지도 예상치 못했으며 부가가치세 계산도 미리 해보지 않았다. 부동산과 덜컥 계약한 뒤 인테리어 업체에 뒤통수를 맞아가며 급히 스터디 카페를 준비한 대한.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후에 펼쳐진다. 2020년 여름, 광복절 광화문 집회 이후 코로나 확진자가 폭증하면서 정부에서는 집합금지 명령을 내린다. 이어 방역 당국이 방역 체계를 1.5단계로 두는지 2.5단계로 두는지에 따라 스터디 카페의 영업시간과 가능 인원이 달라지는 운명에 처한다.
코로나 대유행 시절은 거의 모든 사람이 기억할 것이고, 그 비극이 남긴 상처와 흉터가 업종별로 다르며 가장 큰 피해를 본 분야 가운데 하나가
씨네21 추천도서 - <안녕하세요, 자영업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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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여기저기서 돈을 조금씩 빌린 후 사라진다.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에게 몇십만원부터, 백만원, 2백만원씩 빌려 잠적한 민재는 전 여자 친구 미선에게만 가끔 안부를 남긴다. 돌려받으면 좋겠지만, 못 받는다고 하여 당장 생활이 어려워질 정도는 아닌 애매한 금액들. 이것은 특별한 사건일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일까. 특별함과 평범함의 경계에는 심판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 아닌지 싶은 생각도 든다. 흔히 볼 수 있지만 특별하기도 한 민재는 <소설 보다: 여름 2022>에 수록된 소설 <포기>에 나오는 인물이다. 민재는 소설 속에서 정식으로 등장하지 않고 주인공 미선과 호두의 대화를 통해 그려진다. 미선의 전 남자 친구인 민재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호두는 또 어떤가. 큰아버지가 죽은 엄마의 보험금을 채가서는 주식 투자로 반절이나 날려버리고 돌려주지 않는다. 이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사연이지만 내가 당했다고 생각하면 분통이
씨네21 추천도서 - <소설 보다: 여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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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왜 소파를 등받이로 사용할까? 모임의 끝은 왜 항상 노래방일까? 국회의원들은 왜 고함을 칠까? 매혹적인 목차를 보면 궁금해서라도 해당 페이지 먼저 펼치고 싶다. 해외에 체류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의 책에는 백이면 백 외국의 사례와 한국을 비교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럴 경우 한쪽을 긍정적으로, 다른 한쪽은 그에 비해 뒤처지는 것처럼 묘사하곤 한다. 정치나 철학, 사회, 역사, 인문서는 서양에 유학했던 전문가가 한국이 그에 비해 선진적이지 못한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건축가의 서적 중에는 한옥이 현대식 건축물과는 달리 공동체를 신뢰하고 자연을 존경하는 선조들의 지혜를 드러낸다 설명하기도 한다. 한국과 파리를 오가며 거주했던 임우진 건축가의 <보이지 않는 도시>에도 해외와 한국의 도시 체제와 구조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신호등, 횡단보도의 위치, 극장과 묘지에 이르기까지 사진과 함께 ‘공간’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을 소개하는데 그 어디에도 비교급은 사
씨네21 추천도서 - <보이지 않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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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주민현은 ‘골목’이라는 시어를 이렇게 정의했다. “사람과 사람이, 꿈과 꿈이 돌고 도는 구멍.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올 수는 없는 문. 열리기는 하지만 닫을 수는 없는 문; 인생.” 그가 쓴 시 <어두운 골목>은 익선동의 작은 골목을 걷는 ‘우리’의 이야기로 운을 뗀다. 그리고, “(…) 서로 다른 영화를 보면서/ 같은 영화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어떤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 휴일이란 아직/ 책의 남은 페이지들과도 같아// 우린 다투어도 좋을/ 여든일곱가지의 이유를 갖고 있지만/ 지금은 돌아가 낮잠을 자기로 한다”.
2019년 문학3 웹페이지에서 선보였던 시 연재 ‘시작하는 사전’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연재 당시 첫 시집을 내지 않은 신인 시인 24명이 신작시 두편과 함께 각 시의 키워드가 된 단어를 꼽고 그 단어를 그만의 시각으로 재정의했다. 시만큼이나, 시어를 정의한 짧은 글도 눈길을 끈다. 노국희의 ‘창문’은 이런 뜻이다. “종종 나를
씨네21 추천도서 - <시작하는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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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사전_문학3 엮음
보이지 않는 도시_임우진 지음
소설 보다: 여름 2022_김지연, 이미상, 함윤이 지음
안녕하세요, 자영업자입니다_이인애 지음
고독한 강_제프리 디버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7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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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일곱 조각>은 일곱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연작소설집이고 모두 같은 이름을 가진 여성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소설마다 조금씩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 동일 인물이 맞는지 헷갈린다. 은하, 민주, 성지, 세 여성의 이야기는 다음 소설마다 새로 시작되면서 혼동을 주고 그것이 이 소설집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앞 장이 성지의 이야기로 끝났다면, 다음 장은 친구 민주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주인공들이 평행 우주 속에서 다른 삶을 살면서, 새로운 페이즈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삶을 살아도 내 주변의 환경과 ‘나’는 크게 다르지 않은지라 저마다 한계와 좌절은 존재한다. 은하, 민주, 성지가 아무리 다른 선택을 해봤자 한국 사회에 사는 30대 후반의 여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에서 양성애자인 민주는 혼자 제주도에서 칵테일 바를 운영하다가 또 다음 소설 속에선 쌍둥이를 키우며 직장에 다니기도 한다. 그 어느 쪽의 민주라고 해서 완벽하게 행복하진 않다.
은모든 작
씨네21 추천도서 - <우주의 일곱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