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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른이 되었는지, 돌이켜보면 부모를 제3자처럼 바라보기 시작한 때 같다. 엄마라는 여자, 아빠라는 남자의 성격을 남에게 묘사할 때야 비로소 분리가 된 것 같았다. 특히나 어머니의 삶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희생, 인고로 해석됐다. 아버지가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다면 희생하는 어머니의 골짜기는 더 깊어진다. <아버지가 되어주오>의 딸은 아버지의 과거를 조목조목 따져 물으며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사과하”라고 비난한다. 아버지는 가해자였고 한쪽(어머니와 자식들)은 피해자 집단이라고 생각해서다. 행적을 보면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엄마를 대변해 따진 것을 기특해할 줄 알았으나 엄마는 딸에게 되묻는다. “넌 네 엄마 인생이, 그렇게 정리되면 좋겠니?”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엄마는 덧붙인다. “네 말대로라면 내 인생 참… 슬프지 않겠니?”
스물두살에 아이를 낳고, 아홉살 많은 남자에게 발목 잡혀 평생을 참고 산 어머니, 딸이 써내려간 엄마의 인생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인생을 어
씨네21 추천도서 - <반에 반의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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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모두 무언가 하나씩 결여된 인간들이다. 특수한 재능이 있되 타인의 감정을 읽지 못하거나, 우주 원리와 칼 세이건에 대해서는 줄줄 외면서도 자기 감정에 대해서는 한줄도 설명하지 못하는 식이다. 그 어려운 물리 현상이나 공식은 빠삭하게 알지만 가장 친밀한 관계에 대해선 이해하지 못해서 줄곧 “널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되뇌기도 한다. 전부 일인칭 시점 소설들이기에 독자는 화자가 설명하고 바라보는 대로 소설 속 세상을 따라가고 이내 주인공이 나사가 하나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읽는 사람은 인물의 결핍을 간파하지만 주인공만은 끝까지 퀘스트를 달성하지 못하고 “GAME OVER” 문구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일인칭 소설이며 단문인 소설의 특성상 정보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음에도 독자는 화자보다 전지적 위치에 존재한다. 이는 작가가 매우 유기적으로 논리적 구조를 쌓아올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잔혹한 현실 세계에서 승자가 되기에는 모자란 인물들. 소설 속에서 그들
씨네21 추천도서 - <외계 문학 걸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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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간 소음에 특히 예민한 석원은 꼭대기층에 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아래 14층에 살게 된다. 어느 날 위층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온 후 밤마다 콩콩대는 소리가 들린다. 오후까지는 아무 소리도 나질 않다가 잠을 청하려 눕기만 하면 귀신같이 들려오는 불쾌한 소음. 참다못해 항의하러 위층에 올라가지만 그 집 문에는 이러한 경고문이 쓰여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리지 말 것. 절대.’ 초인종을 누르기라도 했다가는 무슨 사달이 생길지, 이후로 어떤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지 흥미진진하지만. ‘어길 시 법적 조치’ 운운하는 경고문이 붙어 있는 문 앞에서 석원은 돌아선다. 관리소에 문의했지만 돌아오는 대답도 희한하다. “어쩝니까. 절대로 연락하지 말라고 하는데. 연락하면 큰일 난다고 하는데요.”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위층과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시작될 것 같지만, 예민하고 소심한 우리의 주인공 덕분에 더욱 황당한 사건들이 펼쳐진다.
<순간을 믿
씨네21 추천도서 - <순간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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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믿어요_이석원 지음
외계 문학 걸작선_이갑수 지음
반에 반의 반_천운영 지음
도둑맞은 자전거_우밍이 지음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_이길보라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3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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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이 고갈되고 생존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사랑은 위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사치와 낭비에 불과하다.” 냉혹해 보이는 진단의 이면에는,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문제는 그 사랑의 정의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는 데 있겠지만.
이두온의 장편소설 <러브 몬스터>는 인구 증가 정책에 힘을 쏟는 지방 소도시에서 미혼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이내 그 자리의 참석이 거부된 데 대한 분노에 사로잡힌 누군가가 만남이 주선되는 광장의 천막을 덮친다. 그리고 일대는 정전이 되는데, 그중에는 수영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이빙을 하는 순간 정전을 경험한 허인회의 상황에서부터 <러브 몬스터>는 숨가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허인회는 죽을 뻔했다가 수영 강사 조우경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이 사건의 진실은 소설 후반부에서 제법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허인회의 남편 오진홍은 오랫동안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불륜 상대인 염보라가
씨네21 추천도서 - <러브 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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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지만 그렇게 환자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구성원이 조용히 희생하고, 때로는 죽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밑바닥에서>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암병원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로 7년간 근무했고 2020년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대구의 코로나19 중환자실로 파견되어 근무한 김수련 간호사의 경험담을 담은 책이다. 최근 몇년간 간호사들이 직접 병원 근무 경험을 기록한 에세이가 자주 나왔는데, 희망을 품은 책이든 냉정한 시선을 보이는 책이든 공통점이 있다면 병원 간호사, 특히 신규 간호사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운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중환자실은 언제든 갑자기 혈뇨가 나오거나 인공호흡기 서킷이 분리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고 상황이 다급히 돌아가는 와중에 전화벨이 울릴 수 있다. 시간에 맞춰 투약, 체위 변경, 구강 간호 같은 일 말고도 물품 개수를 확인하고 전산 입력을 하고 보호자와 레지던트에게 전화를 거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보고서를 제
씨네21 추천도서 - <밑바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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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기 계발서 열풍을 불러온 작가로 손꼽히는 이가 고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장이다. 회사에 고용된 사람이 아니라 1인 기업을 운영하는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한다는 제안은 ‘자기 브랜딩’ 같은 말들이 당연한 지금에야 익숙한 이야기지만 21세기 초반에는 IMF 이후 달라진 직장 풍속과 어우러져 큰 영향을 미쳤다. 구 소장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작업하던 원고 ‘마음편지’는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긴 문장들로 저자가 질문을 던지면 독자가 보내온 답으로 구성할 계획이었다. 2013년에 세상을 떠난 저자를 대신해 ‘콘텐츠랩 심재’ 홍승완 대표가 원고를 보완하고 그에 대한 답까지 채워 책을 완성했다. 여느 자기 계발서가 그렇듯, 이 책 또한 나 자신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다룬다. 그 과정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 있어야 가장 어울릴 사람인지 따져보며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평생 신념과 열정에 충실했던 버트런드 러셀의 사상을 음미하며 잊고 있던 내면의 열정을 짚어보자고 한다. 운명처
씨네21 추천도서 - <마음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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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거나 가족을 파탄으로 이끌고 간 사람의 이야기, 한 다리만 건너면 흔하게 들을 수 있다. 누구네 아버지가, 혹은 할머니가 그랬다는 풍문을 전해 들을 때마다 우리는 “아니, 멀쩡한 사람이 도대체 왜? 가족들은 안 말리고 뭐했대?”라고 순진한 의문을 품게 된다. 사이비 종교에 포섭되는 사람은 사회적 관계가 취약하거나 정보에 무지하고 무언가에 쉽게 중독되는 심약한 종류의 인간일 거라고 짐작하기 쉽다.
한국계 미국 작가 권오경의 <인센디어리스>는 광신적 종교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의 심연을 파고드는 매혹적인 소설이다. ‘인센디어리스’는 방화, 선동적이라는 의미. 소설은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인물과 그의 연인, 그리고 종교 집단 교주의 내면을 묘사하며 인간에게 종교란 어떤 의미이며 우리가 거기서 얻고자 하는 진리란 무엇인지 모색한다. 한국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피비에게 어머니, 그리고 피아노는 인생의 전부였다. 딸이 주체적으로 살길 바라던 피비
씨네21 추천도서 - <인센디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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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이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중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화차>나 <모방범>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 사회파 작가라고,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시리즈(<기타기타 사건부> <외딴집> 등)를 좋아한다면 옛날이야기 전문가로 기억할지도. <용은 잠들다>나 <브레이브 스토리> 등에서는 판타지 미스터리를 선보이기도 했던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에는 과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현상과 SF적인 요소들이 간혹 엿보인다. SF 앤솔러지 잡지에 연재 제안을 받은 작가가 “그동안의 ‘어쩐지 SF’가 아니라 ‘제대로 SF’인 작품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힌 것은 이전 소설에 묻어났던 ‘어쩐지 SF’적인 요소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다. 10년간 발표한 SF 소설을 단행본으로 묶은 신간 <안녕의 의식>에는 총 8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노인이 된 작가
씨네21 추천도서 - <안녕의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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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의 의식_미야베 미유키 지음
인센디어리스_권오경 지음
마음편지_구본형, 홍승완 지음
밑바닥에서_김수련 지음
러브 몬스터_이두온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2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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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가 재생할 수 있는 속도보다 1.7배 빠른 속도로 지구의 자원을 소모하고 있다. 만일 모두가 일반적인 미국인처럼 소비한다면 1.7배는 5배가 될 것이다. 그건 마치 매년 연봉을 전부 써버린 다음, 자녀에게 물려주려 했던 저축액에서 연봉의 절반 이상을 꺼내 다 써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J. B. 매키넌의 <디컨슈머: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온다>가 극단적인 사고실험을 시작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쇼핑을 멈춰야 하지만 멈추지 못하는 소비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이 쇼핑을 멈추는 날’을 가상으로 보도하는 글을 쓰는 것이다. 매키넌은 현 상황을 짚어가는 작업부터 시작하며 미지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세계적으로 지속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에콰도르의 소비자 생활방식을 탐사하고(이 책에 따르면 만일 모든 인구가 현재 한국인처럼 사는 한국 행성이 있다면 4개 이상의 지구가 필요하지만 에콰도르 행성에서 산다면 딱 지구 한개면 충분하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일요일 쇼핑
씨네21 추천도서 - <디컨슈머: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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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여자들이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둔 부정한 기운”을 가진 여자들이 마녀의 집을 찾아 온갖 하소연을 쏟아내고 해결책을 구한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 육신의 고통과 불면증, 꿈에 나타난 죽은 식구나 친척, 산 사람들과 티격태격한 일, 아니면 돈-거의 대부분은 돈 문제”에 대하여. 마녀에게는 제대로 돌보는 법이 없는 딸이 하나 있었고, 마녀가 죽은 뒤 딸은 어머니의 지위- 마녀- 를 물려받아 어머니가 해온 역할을 이어가던 어느 날 살해된다. 멕시코에서 위험한 지역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베라크루스주의 한 마을에서 마녀가 살해당한 사건을 다루는 소설인 <태풍의 계절>은 어둡고 슬프며, 마지막 순간까지 몰입하게 만든다. 총 8장으로 이루어진 <태풍의 계절>에서 사건의 진실을 파편적으로 알고 있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여러 이유로 자기 자신만 돌보기도 지독하게 벅찬, 혹은 약물에 절어 있어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이 인물들 대신
씨네21 추천도서 - <태풍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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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전용 소극장 무대 한가운데서 시체가 발견된다. 공무원으로 일하며 연극 활동을 병행하던 젊고 잘생긴 남자가 피해자다. 유서가 발견됐으며 피해자가 죽음을 암시하는 전화 통화를 한 기록이 남아 수사 방향은 자살로 향한다. 한편 사건 보고서를 읽던 오 형사는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고, 피해자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2022·제16회>의 수상작 <그날, 무대 위에서>는 형사과장이 시체가 발견된 연극 무대를 자세히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객석을 비추는 빛과 주검 위로 쏟아지는 푸른색과 보라색 빛, 피해자의 차림새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유품들, 소극장에서 연극 무대로 향하는 계단과 동료 연극인들의 발걸음까지 선연하게 그려지는 묘사는 읽는 이가 마치 그 무대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올해로 16회를 맞이한 한국추리문학상은 그해 발표된 단편 추리소설 중 한편에 ‘황금펜상’을 수여해왔다. 2022년 수상작품집은
씨네21 추천도서 -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2022·제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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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기사 읽기를 즐긴다. <씨네21>에도 다양한 기획의 대담 기사가 실리는데 보통의 인터뷰와 대담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나의 점으로 대화가 모이지 않고 목적 없이 넘실대는 말의 틈새에서 저마다의 진의를 파악하는 재미? <뒤라스X고다르 대화>는 장뤽 고다르,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작품 세계를 구축한 후 성사된 만남에서의 대화를 글로 엮어낸 것이다. 1997년, 1980년, 그리고 1987년 세번에 걸쳐 진행된 뒤라스와 고다르의 대화는 서로의 작품 세계를 염탐하듯 시작한다. 뒤라스와 고다르 모두 연출자이기에 각자의 최신작에 대한 소회로 문을 연 대화는 점차 물감이 강물에 퍼지듯 마구잡이로 확대된다. 이미지와 텍스트에 대한 견해 차이를 거쳐 영화와 텔레비전, 당시 활동 중이던 다른 예술가들의 근작에 대한 소회, 문화와 대중에 대한 견해, 영화 이미지 재현의 방식,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등 대화는 파편처럼 이리저리 튄다. 가식적인 존중과 배려보다는 대담하고 솔직하게 드
씨네21 추천도서 - <뒤라스×고다르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