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미 지음 / 창비 펴냄
최은미는 장편소설 <마주>의 ‘작가의 말’에 이렇게 쓴다. “언제부턴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거나 새 인물을 구상할 때면 그의 2020년을 먼저 생각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2020년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무슨 일이라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국경이 봉쇄되고, 집합 시설이 문을 닫아야 했으며, 사람이 사람에게서 거리를 둬야 한다고 캠페인을 하던 팬데믹이 바로 2020년이잖아. 일어나면 오늘의 확진자 수부터 확인했던, 바이러스가 일상 그 자체였던 시기를 왜 이토록 빨리 잊었나. 서로를 배제하고, 감염자의 동선을 뉴스로 세세히 보고받으며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는 민폐인을 낙인 찍기 바빴던, 공동체가 나서서 타인을 지옥처럼 여기라 강요했던 때. <마주>의 나리는 이런 사람이다. 바쁜 부모를 대신해 ‘만조 아줌마’의 돌봄을 받았던 어린 시절을 지금도 가끔 떠올리는 30대 기혼 여성, 은채의 엄마이고, 남편 오종수의 아내, 캔들공방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여자여자’한 순한 외모로 어릴 때부터 귀엽다는 말을 듣고 자랐으며 왜인지 여자 집단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코로나19는 나리의 캔들공방 운영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절친하게 지내던 수미 때문에 곤욕까지 치른다. 서로가 필요해 가까이 지냈던 나리와 수미는 특수한 사건을 겪고는 가면이 찢어진 듯 그간 서로를 미심쩍어하고 불편해했던 감정을 드러낸다. 이제야 제대로 상대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최은미는 언제나 그랬듯 정교하고 섬세하게 인물의 심리와 그거 처한 상황을 그려낸다. 얇은 펜으로 힘주어 그린 드로잉처럼 선명하고 정교하다. 앞서 일상을 지배했던 팬데믹을 왜 우리가 다 잊었을까 물었다. 감염 후유증에 시달리고 가족을 잃은 사람이 많음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산다. 아마도 일상의 기억이 흩어져서일 게다. 우리가 그때 어떻게 고립됐는지, 얼마나 절박하게 상대와 마주보길 원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아서다. <마주>에는 그때의 기억이 내 것처럼 담겨 있다. 여전히 타인은 지옥이고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좋은 소설은 지옥을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그 안에서 사람이 구원이기도 함을 증명한다.
86쪽
나는 감각을 죽이고 사는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살다 보니 죽었지만 다시 살릴 엄두를 못 내는 것들. 다시 살릴 의욕도 기력도 없는 것들. 언젠가부터 접어두고 사는 것들. 잊고 사는 것들. ‘생기’라고 말해지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