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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필자 소개에 어떤 말이 있으면 솔깃한가? 이름있는 대학의 교수나 이름있는 회사의 임원과 같은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놀랍게도 소개에 뭐라고 되어 있건 그 위의 작가 사진에 주목하는 이미지파도 있다. 자기 계발의 시대에는 돈 많은 저자가 인기있다. 큰돈을 번 것으로 유명한 사람일수록 노하우를 전파할 자격을 인정받는다. 여튼 높은 자리 숫자건 거대한 이름이건, 저자의 존엄을 보장하는 수식어가 필자 소개를 장식한다. 자, 그럼 이 사람을 보라. 표지의 저자 이름 위에 이렇게 쓰여 있다. ‘최고의 HB 연필 깎기 장인.’ <연필 깎기의 정석>을 쓴 데이비드 리스다.
설마할 독자들이 많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말이다. <연필 깎기의 정석>은 혼을 담아 100%의 연필을 깎아내는 법에 대한 책이다. 집과 회사에서 연필을 깎아 쓰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은, 요실금으로 시달리는 어머니를 위한 케겔운동법처럼 꼭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혼을 담아 깎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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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의 세 번째 장편소설. 다국적 전자 회사의 오너가 된 남자 동석이 무더운 초여름의 어느 날 텔레토비 인형을 손에 든 소녀와 만난다. PC방과 사우나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열일곱살 소녀와 세상의 가장 좋은 코스를 골라 밟은 초고층빌딩의 남자가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에 빠진다. 마지막 장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이야기. <슬프고 유쾌한 텔레토비 소녀>는 도시인의 불안과 악몽을 그려온 강영숙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놓쳐서는 안될 책이다.
[도서]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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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부터 삼십여년간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일한 저자가 직접 겪은 삼성과 중앙일보에 관한 이야기이다. 삼성상용차 및 삼성자동차 설립 과정과 삼성의 노사문제 등에 얽힌 비화들이 재미있다. 현직에 있을 때 자의든 타의든 정론직필을 외면하고 삼성의 해결사로 반생을 보낸 데 대한 회한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CJ와 삼성의 관계라든가 엘리베이터걸에 관한 루머를 비롯해 그 어떤 가십잡지보다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많다.
[도서] 가십잡지보다 재미있는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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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권 규슈편에서는 일본이 고대문화를 이룩하는 데 한반도 도래인이 전해준 문명의 영향,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 터를 잡고 눈부신 자기 문화를 만들어낸 감동적인 이야기를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답사한다. 2권 아스카/나라편에서는 아스카와 나라 지역에 위치한 주요한 옛 절을 답사하면서 한반도와 일본 문화의 친연성과 영향 관계, 그리고 자생적으로 꽃피운 일본 문화의 미학을 돌아본다.
[도서] 한반도와 일본 문화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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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철을 맞아 여행에 관한 책들이 다수 출간되고 있다. 그중 읽을 만한 몇권을 소개한다. 김얀의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은 <비포 선라이즈>의 청소년 관람불가 버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섹스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저자답게, 13개국 여행지와 13명의 남자들 이야기를 담았다. 연애가 아닌 섹스에 살짝 방점이 찍혔다는 게 특이점.
장 피에르 나디르, 도미니크 외드가 쓴 <여행정신>은 여행에 관련된 개념설명서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하고 비슷한 책을 찾는다면 이 책이 괜찮을 것 같다. 공동지갑 항목에서는 여럿이 함께 간 여행에서의 비용문제가 다루어지고, 현대의 여행자들이 지구 반대편에서조차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들곤 하는 인터넷카페에 대한 언급도 있다. 세네카의 유명한 격언 중 하나인 “여행에 네 자신을 데리고 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꿔야 하는 것은 기후가 아니라 바로 영혼이다”도 등장한다. 어
[도서] 슈트케이스에 넣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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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또 들어도 다시 한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벼랑 위의 포뇨>까지 스튜디오 지브리의 명곡들을 총망라한 앨범이 나왔다. 19편에 이르는 작품 주제가와 인기 삽입곡을 추려 모은 이번 앨범 ≪스튜디오 지브리의 노래≫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정식 발매되는 가창곡 모음 앨범으로 7월15일 발매와 동시에 음원 서비스로도 제공된다. 미공개 음원을 포함해 26곡이 수록된 2장의 CD 패키지는 일본 오리지널 영화 포스터가 게재된 44페이지 부클릿과 기간 한정 특전 스티커로 구성되어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팬이라면 절대 놓치지 마시길!
할아버지 할머니도 춤을 춰요
지하철도 클럽으로 바꾸어놓는 그루브. 업비트의 곡으로 가득한 로빈 시크의 신보 ≪Blurred Lines≫에서 가장 먼저 사랑에 빠질 곡은 타이틀곡인 <Blurred Lines>. 1970년대가 되돌아오는 듯한 디스코 그루브는 몇번을 반복해 들어도 신선함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여름날의 팝이란
[culture highway] 듣고 또 들어도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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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살의 남자아이가 있다. 이름은 카메론 콜리. 그에게는 한살 더 먹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앤디라는 친구가 있다. 둘은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함께 붙어 다닐 만큼 친하지만, 카메론에게는 어려서 앤디가 얼어붙은 호수에 빠졌을 때 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달아난 어두운 기억이 있다.
어느 날 두 아이는 숲에 놀러가서 여자 얘기를 한다. 한살 더 먹은 앤디는 발기된 성기를 꺼내서 자랑삼아 보여주고 카메론은 경탄스럽게 만져보다가 그만 사정을 시키고 만다. 시시덕거리며 뛰어가던 아이들은 험상궂은 남자에게 뒷덜미를 잡힌다. 무슨 짓을 했느냐고 추궁하는 남자 앞에서 아이들은 겁에 질리고, 남자는 앤디를 넘어뜨리고 성폭행을 한다. 울면서 도망가던 카메론은, 그러나 이번에는 용기를 내서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돌아온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남자가 정신을 잃자 밑에서 빠져나온 앤디는 나뭇가지를 받아서 다시금 여러 차례 머리통을 내리갈긴다. 남자가 죽자 카메론은 경찰에 신고하자고 하지만 결
[금태섭의 서재에서 잠들다] 2인칭을 사용하는 살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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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면 문맥 속에서 한참을 더듬다 얻어걸리는 것 말고 개념어에 대한 자신있는 정의가 없었구나 깨닫게 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인문학 유행의 시대에, 기초체력을 다지는 기분으로 읽어보면 좋을 책. 사디즘과 마조히즘, 윤리와 도덕의 차이,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기표와 기의…. 같은 책과 사유를 만나고도 잡초로 인식할 것인가 꽃밭으로 인식할 것인가는 바로 이런 개념어에 대한 정립이 잘되어 있는가와 연관된다.
[도서] 개념어에 대한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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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시인), 송호창(국회의원), 박찬일(요리사), 반이정(미술평론가) 등. 각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행보를 보여온 이 시대 명사 7인의 에세이 모음집. 필자마다 7편씩 총 49편의 에세이를 실었다. 각자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일상과 나이듦 등 여러 화제를 오가며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서 좋다. 어쩌다보니 필자들이 모두 남자여서, 섹스와 결혼에 대한 생각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도서] 이 시대 명사 7인의 에세이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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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하다는 이유로 하자 있는 물건을 교환하거나 환불받는 대신 꾹 참고 써본 적 있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웬만해선 그녀의 컴플레인을 막을 수 없다>는 부당한 상황에 대해 똑 부러지게 따지는 법을 알려준다. AS 된다고 말해놓고 매대 상품은 안된다는 백화점 브랜드, 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구독 해지가 안된다는 학습지 회사 등,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노하우가 담겼다.
[도서] 부당한 상황에 대해 똑 부러지게 따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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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다. 재난을 대비하는 580만 가지 방법 중에 관련책 읽기는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36계 줄행랑은 비단 전쟁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재난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장을 가능한 한 빨리 빠져나가는 일만큼 확실한 안전책이 또 어딨을까. 그런데 <생존 지침서>라니. 하긴, <세계대전Z>를 쓴 작가 맥스 브룩스는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도 펴냈었다. 좀비 천지의 세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을 전수한(!)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에 비하면 <생존 지침서>는 은근히 써먹을 데가 많아 보인다. 허리케인, 태풍, 토네이도, 홍수, 쓰나미, 지진, 화산, 눈사태, 산사태, 산불, 가뭄과 폭염 등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처하는 법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해, 전염병과 납치, 전력 공급 중단 상황 대응법을 전하고, 나아가 건강한 몸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 대단원은 응급처치의 기술이 장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다고
[도서] 불필요한 책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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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초통령 강림
한때 팝계의 초통령으로 통했으나 이제 우리에게는 싸이와 빌보드 1위를 다툰 보이 싱어로 더 익숙한 저스틴 비버. 그가 ‘빌리브 월드투어’의 일환으로 10월10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첫 내한공연을 가진다. <베이비> <보이프렌드> 등 히트곡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다. 공연은 월드투어의 프로덕션과 동일한 수준으로 진행된다니 기대해봐도 좋겠다. 예매는 이미 진행 중.
신파를 벗고 장르를 입다
‘장르 컬렉션’을 꾸준히 제작 중인 한국영상자료원이 <1950년대 신상옥 멜로드라마> DVD 박스세트를 출시했다. 신상옥의 1950년대 대표작 중 신파성을 벗고 멜로드라마의 정점을 찍은 영화 세편,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동심초>(1959), <자매의 화원>(1959)을 묶은 것이다. 영화 평론가 박유희의 작품해설이 담긴 소책자와 관련 이미지 자료를 모은 서플먼트도 포함돼 있다.
동서
[culture highway] 원조 초통령 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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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기라는 것은 나 같은 범인에게는 유니콘과 같아서 그 존재에 대해 들어도 보고 읽어도 보았으나 몸으로 실체를 확인한 적은 없는 어떤 것이다. 색기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대학 때였는데, 상경대쪽에 유명한 남학생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나라인가의 교포였는데 나보다 한 학번 위고 일단 괜찮게 생겼지만 연예인을 갖다댈 만한 꽃미남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문이 돌기로는 그 애가 연상녀 킬러였다(고 한다). 부모가 외국에 있어서 그애 혼자 서울 생활을 한 지 3년인가 되었는데, 그때 같이 살던 여자가 세 번째 동거녀인가 그랬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가장 웃긴 대목은, 그 이야기를 하던 나와 친구들 모두 그 남자애를 한번 구경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것일 거다. 연상녀들을 압도한다는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잘생긴 것도 아니라는데 대체 뭐지? 그 이야기는 결국 ‘(얼굴이나 한번)보고 싶다’에서 ‘자보고 싶다’로 흘렀고 둘 다 불발에 그쳤다. 그때 그 대화가 생각난 것은 오쿠다 히데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있지, 걔 얘기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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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 AKIRA>가 정식으로 국내에 발간되었다. “너무 재미있어 속상하게 하고, 정말 감동적이어서 마음을 뒤흔드는 작품들 사이에서 아키라는 언제나 조용히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이다”라는 만화가 윤태호의 말처럼, 1982년 연재를 시작한 뒤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이 작품 속의 디스토피아, 그리고 사이버펑크의 세계는 시간이 지났어도 수명을 다하지 않고 힘을 갖고 있다. 주말을 통째로 바쳐도 좋을 만큼 재미있는 만화.
[도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힘을 갖고 있는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