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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감독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로버트 알드리치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한 꿈이고 샘 페킨파 정도라면, 잘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난 2007년 구로사와 기요시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학교’라는 이름의 강연을 가졌다. 자신에게 영감을 준 감독을 이야기하며 의외로 로버트 알드리치를 가장 선두에 두면서 그보다 익숙한 이름인 샘 페킨파를 뒤에 뒀다. 또한 자신의 영화 <큐어>(1997)에 대해 “조너선 드미의 <양들의 침묵>(1991)을 보고 난 뒤 1시간 만에 써내려간 작품”이라고도 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올해 초 다시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 봉준호 감독과 대담을 가진 그는 <큐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인 리처드 플라이셔의 <보스턴 교살자>(1968)에 대해 긴 시간 얘기했다.
여기서 어떤 영화로부터의 영감이 진짜냐, 라는 걸 따져 물으려는 게 아니라 한편의 영화는
[주성철 편집장] 김기덕 감독 추모, 감독들의 감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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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이 도시 기능을 구분하는 공식적인 명칭이라면, 부자동네와 달동네 같은 이름은 구성원에 대한 비공식적인 구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 중에는 노인동네도 있다. 기대수명의 연장과 은퇴라는 제도적 규정은 노인이라는 생물학적 기간을 도시계획의 대상으로 변화시킨다. 젊은이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노인인 농어촌 지역이 아닌 고령화사회가 만들어낸 ‘노인들을 위한 마을’의 예로는 미국 남부 애리조나주에 위치한 선시티(Sun City)가 있다. 노인이 되기 전에는 알 수 없겠지만 신진대사 기능이 약화되는 고령자에게 추위는 견디기 힘든 문제다. 선벨트라 불리는 미국 남부지역은 따뜻한 날씨 덕분에 나이 든 은퇴자들을 위한 이상적인 주거환경을 제공한다.
1960년 한 개발회사에 의해서 애리조나주에 건설된 선시티는, 2016년 기준 평균 나이가 73살인 마을이다. 인구 3만7천명의 이 도시는 교회, 쇼핑센터, 레크리에이션센터, 그리고 8
[영화와 건축] 인구 비율이 바꾸는 건축 유형과 <유스>의 리조트, 그리고 건물의 수명이 연장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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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가장 자주 들었던 음악 중 하나를 검정치마가 만들었다. 열심히 공연장을 다녔고, 레코드숍에서 CD를 획득하는 성취감에 뿌듯해했던 시기였다(요즘 다시 부흥기처럼 보인다). 이 1인 밴드의 리더이자 핵심 구성원인 조휴일의 목소리는 흐느적거리지만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홀렸다. 검정치마라는 이름도 그랬다.
그는 다작하는 음악가는 아니었다. 첫 음반 이후 세장의 정규앨범을 냈지만 공백 혹은 여백이 제법 길었다. 그래서 내게는 어느샌가 좀 잊힌 음악가였다. 올봄 발매한 3집 《Team Baby》를 들은 건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인쇄 감리를 볼 일이 있어서 을지로 주변을 서성이던 밤, 일을 마치고 근처에 사무실이 있는 친구에게 커피를 사들고 갔다. 퇴근을 준비하는 꽤 늦은 시각, 스마트폰에 연결한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커다란 음량으로 조휴일의 목소리가 나왔다. 1집과 2집 노래를 수없이 들었기에 대번 “새 음악이냐”고 물었다. “맞아요, 형.” 몇곡은 특히 기억이 남았는데, 가사까지
[마감인간의 music] 검정치마 《Team Baby》, 그리움과 강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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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에도 우세종이라는 게 있다. 아마도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히 만들어지는 서사 중 하나는 아마도 ‘파국서사’(catastrophic narrative)일 것이다. 파국서사란 현재의 문명이 몰락해가는 과정(아포칼립스) 혹은 문명 몰락 이후의 세상(포스트아포칼립스)을 다루는 서사를 통칭하는 말이다. 영미권에서 2001년 9·11 테러 이후 급증했던 이러한 경향이 전세계로 퍼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최근 몇년 사이 한국에서도 <서울>(손홍규), <날짜 없음>(장은진), <해가 지는 곳으로>(최진영) 등의 소설이 발간되었고, 지난해 개봉한 최초의 한국 좀비 블록버스터 <부산행>은 크게 흥행하기도 했다.
파국서사가 우세종이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서사가 기본적으로 현실과 미메시스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상기해본다면, 파국서사의 유행은 세상 자체가 파국의 기미를 크게 보이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개념이 ‘인류
인류세 시대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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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다케 마사하루 / 출연 안도 사쿠라, 아라이 히로후미 / 제작연도 2014년
점을 보러 갔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속도로 각자 자기 영화 편집을 진행 중이던 동네 친구 모 감독과 함께. 여러 가지로 긴 터널 속에 갇힌 듯한 날들이었다. 영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마침 문화예술 계통에서 일하다 신내림을 받았다는 신녀님을 찾아갔다.
“올해 안에 제 영화를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내년으로 완성을 미룰까봐요.”
“내년에 완성해도 그다지 달라질 게 없으니 그냥 올해 안에 만들어라.”
그럴 때였다. 오랜 시간 축적된 실패의 경험들과 함께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편집은 풀리지 않고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져만 가고 동네 친구 모 감독과 매일 야식을 먹으며 서로의 처지를 안주 삼는 하루하루가 이어지던 때. 그때 만난 영화가 <백엔의 사랑>이다. 32살의 주인공 이치코는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살아가던
박소현의 <백엔의 사랑> 혼자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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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윈드 리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발레리안: 천개 행성의 도시>의 데인 드한은 올 들어 가장 이상한 캐스팅이다. 그가 연기하는 발레리안은 자칭 마성의 바람둥이로, 사귄 여자들의 목록을 ‘플레이리스트’라고 부르며 영화에 등장하자마자 로렐린(카라 델러빈)에게 대뜸 구혼을 한다. 이런 역을 성립시키려면 뻔뻔한 카리스마- 가령 톰 크루즈나 해리슨 포드 같은- 가 필요한데 그것은 데인 드한의 사전에 없는 자질이다. 이 영화에서 데인 드한의 발성은 곧장 키아누 리브스의 둔탁한 대사연기를 연상시킨다. 특히 조종간을 잡은 로렐린에게 간섭하는 장면에선 판박이다. 드한의 캐스팅을 납득하는 길은, 뤽 베송이 전통적 마초 남성 영웅의 공식을 해체하려 했다고 믿는 것이다. 베송은 이번 영화에서 진주족의 외양을 중성적으로 디자인하고 황제 목소리를 엘리자베스 데비키에게 맡기기도 했다. 하긴 그러고보면 엄청난 능력을 지닌 이 영화 속 다양한 우주 종족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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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클래식으로 부르는 영화나 책을 상상해본다. 일단 검고 길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큰 차의 시점에서 시작해보자. 벨이 울리고, 커다란 하얀 문이 양쪽으로 열린다. 한참을 잘 정돈된 잔디가 깔린 길을 따라가다 보면 미국 남부식의 커다란 저택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김없이 보이는 보타이를 착용한 집사. 역시 굵은 저음으로 우리를 맞는다. “여기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올리브TV의 4부작 파일럿 프로그램 <집사가 생겼다>에서 이런 내용을 다룬다는 것은 아니다. 상상은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내용 자체는 오히려 심부름꾼 리얼리티랄까. 여기서의 집사는 마치 해결사 같다. 집사장 김준현이 의뢰인과 매칭되는 집사들을 파견하고, 클레임도 받아들인다. 배우 임원희·장혁진·신승환, 가수 신원호가 그 집사들이다. 이들은 14마리의 닥스훈트를 돌보는가 하면 의뢰인의 고민을 들어주고, 산책길을 만들고 칼국수를 끓이면서 추억을 소환해준다. 이
[TVIEW] <집사가 생겼다> TV를 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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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들이 있다. 루저들이다. 자기들끼리 모여 작은 공동체를 만든다. 몰려다니다가 우연히 거대한 악과 마주한다. 그런 과거를 까맣게 잊고 성장해 저마다 나름의 사정을 가진 어른이 된다. 어느 날 이들은 저 옛날의 패거리 가운데 한명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다. 그것이 돌아왔다고.
앞서 요약한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 가지 제목이 떠오를 것이다. 누군가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이라고 생각할 거다. 누군가는 <스탠 바이 미>(1986)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의 조금 뒤틀린 기억이 아니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특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무튼 꽤 익숙한 설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건 스티븐 킹의 소설 <그것>(1986)의 설정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스티븐 킹의 <사계>에 수록된 <바디>(1982, 이후 <스탠 바이 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와 세르지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스티븐 킹의 원작에서 <그것>이 취한 것과 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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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 특집을 통해서 논란 속의 두 영화 <청년경찰>과 <브이아이피>를 중심으로 올해 상반기 한국영화에 대한 젠더 감수성을 더듬어봤다. <원더우먼> <청년경찰> <브이아이피>에 대해 썼던 20자평을 이유로 ‘남초’ 커뮤니티에서 ‘꼴페미’가 되어버린(특집 메인기사 참조) 임수연 기자가 전체 그림을 그리고, 김성훈 기자의 상반기 한국영화 분석과 김현수 기자가 진행한 20대 관객 대담, 그리고 ‘비윤리적 재현과 폭력적 연출에 대해 장르성을 핑계로 대지 말라’는 손희정 평론가의 원고까지 더해, 지난 몇달간의 분위기에 대해 냉정하게 전해보고자 했다. 분명한 것은 댓글들을 살펴보건대 테러를 가하는 사람들이 이성적이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비이성적이라는 기이한 모순의 풍경이다. 임수연 기자에 대해서는 신상 털기에 나선 네티즌까지 생겼고, 특집 대담에 참여한 ‘씨네플레이’의 유은진 에디터 또한 <청년경찰>의 불편함을 토로한 글에
[주성철 편집장] 세상의 중심에서 여혐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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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는 방랑자다. 20대 초반에 조국 아일랜드를 떠난 뒤 평생 외국에 머물렀다. 자전적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밝힌 대로, 조이스는 예술가로 살기 위해 ‘가족, 국가, 교회’와 결별한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의 가족과 조국 그리고 종교’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지 떠올리면 쉽게 짐작될 것이다. 게다가 조이스의 고국 아일랜드는 영국의 속국이었다. 아일랜드인이, 특히 조이스의 동창과 지인들이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이름 아래 대영(對英) 투쟁을 벌일 때다. 조이스는 오직 ‘예술’ 하나만 보고 이 모든 한계를 넘어가길 원했다. 영민한 아들 조이스가 가족과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모친은 평생의 상처를 안았다. 조이스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자발적인 망명길에 오른다. 조이스가 처음 정착한 곳이 트리에스테(Trieste), 이탈리아 북동부 끝에 있는 항구도시다. 1904년, 조이스의 나이 22살 때다(1904년은 조이
[트립 투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북동부 끝의 항구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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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앨범이 2013년이었으니 4년 만에 새 앨범을 내놓았다. 그사이 이 밴드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같은 밴드 맞나 싶은 앨범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전작 《YOUTH!》는 밝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일렉트로닉을 기반으로 하지만 록과 디스코를 퓨전해 대중적으로도 접점이 분명했다. 하지만 신작 《The Glen Check Experience》는 분위기가 가라앉았으며 힙합, 알앤비, 베이스 뮤직 비중이 높아졌다. 그들을 좋아하던 팬들 입장에선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멤버 김준원은 최근에 디제이 활동이 활발했다. 세계적인 디제잉 영상 플랫폼 보일러 룸에 나갈 정도로 성과도 좋았다. 전자음악과 흑인음악, 그중에서도 언더그라운드 취향의 뮤지션들과 ‘얼터 에고’란 크루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신작엔 그런 경험이 반영된 것 같다. 과거 히트곡 <Pacific>이나 <60’s Cardin>보다는 최근 그의 디제이 세트에서 들을 수 있던 음악에 더 가까워졌다. 댄스 신 전체의 변화
[마감인간의 music] 글렌 체크의 《The Glen Check Experience》, 뿌옇고 몽롱한 이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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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에 관해서라면 내게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생리 주기는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 것인가. 분명 끝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새 닥쳐와 당황하기를 20년째다. 생리통은 또 어떤가. 10대 초반부터 1년에 열두번씩, 매우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겪어온 고통이지만 이상하게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외려 나이가 들수록 또 몸의 컨디션에 따라, 매번 새롭고 다양한 통증이 세심하고 풍성하게 느껴지니 신비로운 영역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가장 알쏭달쏭 모르겠는 건, 도대체 왜 생리대는 아무리 많이 사다놓아도 필요할 때는 똑 떨어지고 없는가 하는 거다. 어디 다른 용도로 쓸 수도 없는 물건인데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이 의아함은 결국 첫 번째 미스터리와 만나는데, 결국 모든 문제는 거기서 발생하는 것 같다. 생리 주기는 너무 자주 지나치게 빨리 돌아온다.
얼마 전에도 갑자기 생리대가 떨어져 난감했다. 나름 마트나 드러그스토어의 세일 기간을 꼼꼼히 챙겨 몇달
안전하게 피 흘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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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 출연 제임스 스튜어트, 존 달 / 제작연도 1948년
언제부터 영화에 중독되기 시작하는 걸까? 부모님이 영화를 금하셨던 것도, 스스로 영화를 기피했던 것도 아니지만 어린 시절 내게 영화는 딱히 호기심이 생기거나 더 알고 싶은 존재는 아니었다. 요즘도 ‘내 인생의 영화’ 코너에서 어린 시절 제목도 모르고 본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이 원체험으로 남았다는 유의 글을 읽을 때면 희미한 결핍과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내겐 앎 이전의 본능적인 감각에서 우러난 매혹이 없었던 것 같은데.
대학에 가도록 영화 애호가가 될 조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내가 학내 영화 동아리에 발을 들이게 된 것도 순전히 친구의 강권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처음엔 가입만 해놓고 마음 없이 겉돈 터라 그곳에서 처음 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첫 경험’만은 확실하다. 그건 <로프>였다.
1948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에게는 일종의
홍지로의 <로프> 균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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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믹 블론드>와 <매혹당한 사람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래픽노블이 원작인 <아토믹 블론드>는 음악과 디자인에서는 과장된 1980년대 양식을 택하지만 액션에선 가차 없는 사실성을 추구한다. 주인공 로레인 역의 샤를리즈 테론이 대부분 직접 감당한 긴 호흡의 격투 시퀀스를 보고 있노라면 관객의 몸에도 상상의 피멍이 든다. 현란한 편집을 배제한 <아토믹 블론드>의 격투는 할리우드 평균치보다 느리고 힘겹다. 양쪽이 쓰러졌다 다시 맞붙기까지 몇초의 가쁜 호흡까지 그대로 살리는 식이다. 여성의 완력이 갖는 한계를 기물을 이용하고 급소 공격으로 돌파하는 로레인에게 적들은 여성혐오적 욕설을 내뱉는다. 특히 동베를린 탈출 도중 계단 액션의 끝에선 테론을 향한 존경이 솟는다. 원 테이크처럼 보이도록 살짝 봉합된 시퀀스이긴 하지만, 누가 그걸 신경 쓴단 말인가!
08/25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흔들리자 냉전 양 진영의 스파이들은 혼란에 빠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작은 아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