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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품위있는 그녀>는 극에서 모사하는 교양과 품위가 마티스나 칸딘스키, 팝아트를 언급하는 수준으로 대단치 않다. ‘타로보살’의 말을 듣고 남편에게 외도 방지용 눈썹 문신을 시키는 강남 부유층의 모습이 딱히 부러울 것도 없이 그려지고, 진짜 저럴까 싶은 모습도 많지만 그야 우리로선 알 수 없다. 리얼리티를 구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면 <아내의 자격>과 <밀회> 속 강남 부유층과 닮은 듯 결이 다른 세계에서 “대박”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휴지 회사 사주 집안의 작은며느리 우아진(김희선)를 만날 수 있다. 그녀를 선망하고, 그 집안을 집어삼키려 간병인으로 회장(김용건)에게 접근한 박복자(김선아)도.
고용주와 고용인으로 만난 둘은 이제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가 될 참이다. 나이 일흔의 회장을 ‘ 서게’ 만든 간병인이 안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그저 그런 통속극이 스릴러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순간은 복자의 저돌성에서 나온다. 누군가가 자신의 계략을 눈
[TVIEW] <품위있는 그녀> 그녀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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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후에 다시 만나요.”
로라 팔머가 말했다. <트윈 픽스>를 사랑했던 우리 모두는 그 붉은 방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사춘기는 여전히 그 붉은 방 안에 머물러 있을지 모른다. FBI 요원 데일 쿠퍼는 그대로 붉은 방 안에 갇혔다. 시간이 흘렀다. 정확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밝혀두자면, 빼고 더할 것 없이 25년 11개월 11일 전의 일이다. 쿠퍼는 여전히 붉은 방에 갇혀 있다. 그런 그 앞에 로라 팔머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 여기서 나가도 돼요.” 이제, 데일 쿠퍼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 이렇게 쓸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고 벅차다. <트윈 픽스>의 새로운 시즌이 공개되었다. 1991년 두 번째 시즌이 종영한 이후 정확히 25년 만의 일이다.
1991년에 방영된 시즌2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데일 쿠퍼의 인격은 둘로 나뉘었다. 본래의 쿠퍼 요원은 붉은 방에 갇혔다. 살인마 밥이 빙의된 악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25년 만에 돌아온 <트윈 픽스>를 격하게 환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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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의 개봉을 기다린 건 영화 속 한국 로케이션 촬영 장면에 대한 궁금증보다 줄리 델피가 출연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당시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 참석 배우 명단에 포함돼 있었고 디즈니사는 그에 대해 잘못 표기된 정보가 아님을 밝혔다. 완성된 영화에서 줄리 델피는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스칼렛 위치(엘리자베스 올슨)로 인해 드러난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의 과거 플래시백 장면에서 교육관 마담 B로 등장했다. 스파이 용병으로 훈련받던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가 등장하면서, 블랙 위도우만의 단독 시리즈를 기대하게끔 했다. 줄리 델피를 캐스팅하여 그렇게 끝내버리면 얼마나 황망한 일이란 말인가. 이후 블랙 위도우 단독 시리즈는 여전히 ‘검토 중’이란 소식만 전해왔고, 그런 가운데 스칼렛 요한슨 단독 주연의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2017)을 먼저 만난 셈이다. 이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특집을 꾸리며 가장 궁금한
[주성철 편집장]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그리고 창간 22주년 페스티벌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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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식당에 가면 별 고민 없이 즐겨 고르는 메뉴가 제육덮밥이다. 제육덮밥은 내게 미각의 정체성이고, 솔푸드이며, 완벽한 물질(?)이다. 나는 삶에서 아주 오랫동안 제육덮밥을 즐겨왔고, 다른 어떤 육류보다 돼지고기를 선호한다. 십몇년 전의 언젠가, 무슨 얼어죽을 체육대회의 만찬 준비를 위해 암퇘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굽는 작업을 감독한 적이 있다. 나는 한 마리 짐승을 밤새 골고루 익히고 그 해체를 지켜보면서 계속 술을 들이켰고, 부산물을 포함해 거의 모든 부위를 맛보았다. 돼지는 정말로 버릴 게 없다. 근처 정육식당에서 초빙한 통구이 전문가 아저씨는 내게 말했다. “돼지에서 안 먹는 부위는 없어. 딱 두개만 빼고.” 그게 뭐냐고 내가 묻자 그는 “눈알”이라 답했다. 나는 윽 하는 리액션을 했을 뿐, 이후에도 고기를 멀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무튼 올해 6월 29일, 0시가 되길 기다려 나는 TV에 연결된 엑스박스 원을 켜고 넷플릭스를 통해 기대해 마지않았던 <옥자>를 보
봉준호의 <옥자>를 보고 떠올린 리처드 플라이셔의 <소일렌트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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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든 해외든 대중음악 최후의 전성기는 1990년대였다. 수많은 걸작들이 발표되었으며, 이 걸작들이 거의 대부분 ‘엄청나게’ 팔린 마지막 호시절이란 의미다. 그 걸작의 목록 중에 바로 이 앨범,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를 최정상에 올려놓는 건 이제 일종의 상식 비슷한 게 되어버렸다.
얼마 전 몇몇 평론가와의 만남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OK Computer》 이후로 한정해서 이것보다 더 끝내주는 음반, 솔직히 있다고 생각해?” 그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고, 이 앨범에 대한 나의 뜨거운 사랑을 확인받은 것 같아 행복했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마니아와 비평가들은 적어도 지난 20년간 이 음반보다 영향력 있는 작품은 없었다는 데 동의한다. 이 앨범의 진가를 알기 위해선 멀리 갈 필요도 없다. 70년대의 더브(dub)와 디제이 섀도(DJ Shadow)의 작법을 끌어들인 <Airbag>, 라디오헤드판 <Bohemian Rhapsody>라 할
[마감인간의 music] 라디오헤드 《OK Computer: OKNOTOK 1997 2017》, 오래된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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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름은 내게 언제나 서늘한 기억이다. 개인 홈페이지에 쓴 잡글 덕에 ‘<디 워> 사태’ 한복판에 끌려갔고 곧장 매국노로 단죄되었다. 충무로로부터 배척당한 코미디언이라는 피해자 서사에 빙의된 대중의 분노는 졸지에 일개 무명감독인 나를 충무로 대표 주류라고 몰아세웠다. 어쩌면 그때부터 민감해졌나 보다. 왜 대중은 피해자 서사에 열광할까. 반면 정작 다른 약자들 서사에는 왜 그토록 둔감해졌을까.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질문은 아직 유효한 것 같다.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어떤 종류이든 사회의 시선을 끌려면 스타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자유주의하에서 대중이 앞다투어 ‘피해자 되기’에 골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누가 더 피해자인지를 경쟁적으로 전시하는 인정투쟁의 세계.
누군가는 이것이 형식적 민주주의가 가져온 ‘평등’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형식적으론 평등하지만, 실제로는 불평등이 격화되면서 모든 권위와 전문가 집단에 대한 불신
우리는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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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보니 그의 이름을 안 지 꼭 30년이다. 그때 나는 어렸다.
얼굴을 본 건 오랜 시간이 흐르기 전이었다. 그때도 나는 어렸지만, 성인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그를 거리에서 보았다. 처음 사진기를 들이댄 건 길어야 20년 짧다면 15년 전이리라.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의 인상은 편치 않았다. 사진기를 둘러멘 자들이 잠시 앞을 가릴라치면 “야, 이놈들아!”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불편했다. 나를 지칭한 나무람이 아니라 해도 모욕감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사진기를 든 양아치거나 훼방꾼인가. 나 자신이 싫었다. 동시에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됐다.
3년 전, 해고됐다 복직한 노동자 김수억이 다시 받은 첫 월급을 털어 ‘스승의 날’을 마련하고 싶다 말하고, 함께하자는 손들이 웅성댈 때 사진쟁이들에게 요청이 날아왔다. 그에 관한 사진영상을 만들어 달라는 거였다. 기꺼이 도왔지만 그가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날 밤, 주름진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날 밤 노동
[노순택의 사진의 털] 나는 백기완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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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박흥식 / 출연 문소리, 이재응, 윤진서 / 제작연도 2005년
나는 90년생이지만 어렸을 적부터 70, 80년대에 대한 향수가 짙었다. 그때의 노래들, 그때의 도시 풍경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차분해지고 뭉클해졌다. 게다가 난 엄마에 대한 사랑도 유독 짙다.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사람이라서 그냥 횡단보도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걷는 것만 봐도 너무 귀엽다. 이런 나에게 <사랑해, 말순씨>는 그야말로 제격인 영화가 아닐 수 없었다.
70년대 말. 주인공 광호(이재응)에겐 엄마 말순(문소리)과 4살 된 여동생 혜숙이 있다. 중학교 2학년인 광호는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다. 동생은 귀찮고 엄마는 더 귀찮다. 바보라 불리는 동네 형 재명 때문에 아침부터 창피를 겪는 광호. 같은 집에 하숙하는 누나 은숙(윤진서)은 그런 광호가 귀여운지 종종 말상대를 해준다. 광호는 은숙이 좋다. 광호의 시점에서 그 시절 자연스럽게 광호를 스쳐가는 소소한 일부터 소소하지
정가영 감독의 <사랑해, 말순씨> 엄마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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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네이딘(헤일리 스타인펠드)은 내게 동조해주지 않는 세상에 화가 난 17살이다. 소녀는 타인을 상처주는 표현을 포함해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말로 쏟아냄으로써 본인의 괴로움을 세상에 퍼뜨리려 한다. 설상가상으로 잘난 오빠에게 유일한 친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내 인생 망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망치련다”는 자세로 좌충우돌에 박차를 가한다. 비장한 소녀에게 꼭 필요한 것은 불행의 목격자. 그러나 네이딘에게 적임자로 점찍힌 브루너 선생(우디 해럴슨)은 녹록지 않다. 쉽게 연민하지도 꾸짖지도 않는 그의 대응은 네이딘의 폭주를 이상하게 와해시켜버린다. 뛰어난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극명한 리듬의 대조는 <지랄발광 17세>의 큰 즐거움이다.
06/11
무단 침입한 괴한에게 집에서 성폭행을 당한 미셸(이자벨 위페르)은 범인이 사라지자 부서진 세간을 쓸어담고 속옷을 버리고 욕조에 몸을 담근다. 그리고 초밥집에 주문전화를 걸어서 묻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최종병기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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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이었던 것 같다. 신간 <두 남자의 집짓기>의 소개글을 보고 방송에 초대하고 싶어 담당하던 프로그램의 인터뷰 코너에 섭외한 사람이 바로 <한겨레>의 고 구본준 건축전문기자였다. 깔끔한 옷차림에 편한 미소로 스튜디오에 들어온 그는 전문 분야인 ‘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달변가로, 열정적인 해설자로 돌변했다. 그가 그때 가져온 아이템이 좁은 땅에 최소의 비용으로 두채의 집을 엇갈려 세우는 ‘땅콩집’.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인의 기본 주거 형태인 아파트에 대한, 그리고 단독주택에 대한 통념을 깬 그의 혜안이 지금에서야 절실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방송에서도 올 상반기 최고의 아이템 욜로(YOLO)족의 생활 형태와 맞물려 주거 형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O tvN의 <이 집 사람들-당신은 어떤 삶을 짓고 싶나요?>가 그 프로그램이다. 방송인 노홍철과 배우 엄지원의 진행으로 만나는 사람들과 그들의 집은,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판교 운중동의
[TVIEW] <이 집 사람들-당신은 어떤 삶을 짓고 싶나요?> 집과 소통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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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영화’라는 표현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처럼 ‘정부’가 정해버린 표현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라는 말이다. ‘일하는 주체이자 권리자’로서의 노동자를 악착같이 ‘순종적으로 성실하게 일하는’ 근로자로 부르려는 시도 아래에서, 5월 1일의 ‘공식’ 명칭은 바로 1994년 제정된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에 따라 ‘근로자의 날’이다. 물론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부르건 노동절로 부르건 간에, 근로기준법에 따라 ‘유급 휴일’이란 약속이 지켜지기만을 바랄지도 모른다. 아무튼 다양성영화도 2007년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시네마워크 사업계획안’에 언급된 용어로 독립영화, 예술영화, 다큐멘터리영화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국내 제작 영화에 한해 극영화건 다큐멘터리이건 일정 제작비 이하의 영화를 ‘독립영화’라고 지칭하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어쨌건 새 정부에서 새롭게 꾸려질 문화정책 담당자들이
[주성철 편집장] 다양성영화 지원사업에 동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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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카페라는 곳이 있다. 만화책을 누워서도 보고 엎드려서도 볼 수 있는 데다 음료수와 주전부리까지 옆에 두고 내 집보다 더 편하게 원하는 만화를 골라 볼 수 있다. 게다가 실내 공기도 쾌적하고, 분위기도 좋다. 20여년 전, 만화방에서 라면을 끓여준다는 것이 놀라웠던 그 시절 만홧가게에서는 오뎅 국물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구릿구릿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밴 만화책을 어둠침침한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보던 경험을 이야기하면 ‘저 꼰대 놈이!’ 하면서 아무도 상대 안 해줄 것이다.
만화 카페의 주인들이 만화 애호가들이 분명한 것처럼 그 옛날 만화방과 만홧가게 주인들도 만화 애호가들이었다고 기억한다. 내가 30대 중반이었던 때, 동네 상가 안에 있던 만화방의 주인은 후덕한 몸에 인상 좋은 30대 중반의 아줌마였는데, 그녀의 만화방에는 손님들의 손이 닿지 않는 책장의 맨 위칸에 자신만의 명예의 전당이 있었다. 맨 위칸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에어리어 88>을 꺼내달라고
[뒷골목 만화방] 고바야시 마코토 <다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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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깨어 있던 나는 인터넷으로 커피머신을 고르는 중이었다. 그러다 습관적으로 켠 페이스북을 보고 문자 그대로 눈을 의심했다. 프로디지가 죽었다고? 프로디지가 죽었다. 맙 딥의 절반, 90년대 힙합의 아이콘, 뉴욕의 왕이 마흔을 갓 넘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힙합 팬에게 프로디지는 거의 영웅이었다. 나중에야 그의 키가 나보다 작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런 것 따윈 상관없었다. 이보다 삭막하고 황량할 수 없는 비트 위에서 프로디지는 늘 자신이 자라온 지독하게 위험한 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는 늘 거리의 진짜배기 사나이였고, 동시에 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다. 스무살 때부터 지속된 그 범상치 않은 어둡고 진지한 기운의 무게 뒤에는 그가 실제로 앓고 있는 병이 있었다. ‘sickle cell anemia.’ 우리말로 하면 겸상 적혈구성(性) 빈혈. 흑인의 유전병이자 불치병이었다. 프로디지의 병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투팍 때
[마감인간의 music] 프로디지, <You Can Never Feel My 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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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뇌와 남자의 뇌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인기를 끄는 주제다. 여자의 뇌는 무드에 약하고 남자의 뇌는 누드에 약하다는 수준으로 쓰여진 국가 수준 학교성교육표준안은 아직도 폐기되지 않았고, 한국의 최상층 남성 엘리트들은 여전히 수렵채집시대의 남자 뇌, 여자 뇌에 집착한다. 사실 뇌의 성차를 주제로 나온 논문들은 성차보다 개체 차가 더 중요한 변수라는 결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매체는 이렇게 보도한다. “이런저런 차이들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은 수준이다”라는 내용에서 마지막을 빼고 “이런저런 차이가 발견!”이라는 제목을 다는 식이다. 얼마 전 서울시 교육청이 주관한 초등교사 연수의 강의 자료에는, 남녀의 특성이 우뇌와 좌뇌를 연결시키는 뇌량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독일의 신경생물학자 마르틴 코르테의 주장이 일부만 잘려서 실렸다. 그는 결론에서 성별간 차이보다는 개인별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며 부모의 성차별적 편견이 아이의 잠재력
[디스토피아로부터] 여자의 뇌, 남자의 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