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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강우규 열사였다. 일제 요인 암살을 시도했던 독립운동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암살에 실패했던 강우규 열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요인 암살에 ‘성공’한 안중근, 윤봉길 의사만큼 사람들이 기억해주지 않았다. 그런 세상을 보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고 그래서 강우규 열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강우규 열사 기획안은 다큐프라임 공모에서 채택되지 못했다.
이후 기획방향을 수정해서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컨셉으로 다시 기획안을 제출했다. 강우규 열사와 결은 조금 다르지만 독립유공자 후손들 역시 사람들의 기억에서 소외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기획안이 공모에서 채택이 되었고, 본격적으로 다양한 후손들에 대한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반민특위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특히 후손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꽤 오랫동안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 PD 입장에서 가장 먼저 귀에 들어왔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럴 경우엔 제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주객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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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OO의 행보를 어떻게 보십니까?” 한 영화인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의견을 묻는다기보다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얼마 전 연락을 나눴을 때만 해도 영화계 안팎에 별다른 이슈가 없다고 잘라 말했던 그였다. “조금 더 지켜봐야 하지만”이라고 조심스럽게 운을 뗀 그는 민주통합당 최민희 의원이 발의 준비 중인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이하 영비법) 개정안을 문제삼았다. 이번 개정안은 특정 영화가 일정 스크린 이상을 점유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대기업의 영화상영업과 배급업 겸업 및 영화제작업 참여를 금지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고 있다. 그는 제2차 노사정 이행 협약(4월16일)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개정안이 발의되면 지난 8개월 동안 영화계 제 단체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고 걱정했다. 단계적으로 산업 내 산적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자고 1년 전에 약속했는데, 법안이 발의될 경우 그동안 협상 테이블에 참여해왔던 대기업들이 노사정 이행 협약을 끌어낸
[에디토리얼] 데자뷰와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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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광장’에 진입하려면 우선 고속도로를 타고 톨게이트를 통과해야 하는 법. 야근 중에 그가 내미는 초밥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일과 사랑을 성취하려면 우선 취직을 해야 한다. 이때 채용면접장은 여주인공이 유학파 본부장님 또는 실장님과 두 번째 조우하는 장소가 되고, 해프닝으로 쌓은 인연은 면접의 하이패스가 되어주는 셈. 이것이 처지를 보완하는 인맥과 연줄이란 것은 SBS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의 마지막 회에서 밝혀진다. 다시 취업전선에 나선 한세경(문근영)이 의류회사 면접에서 아르테미스 회장의 비공식 스타일리스트였다는 것을 어필하자 면접관들은 그녀가 한때 패션업계 거물의 피앙세였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점수를 고친다. ‘조금 전까지 난 D였을 거다. 그리고 이젠 A로 매겨지겠지. 헤어지고 나서야 난 정말 그 사람을 이용하게 되었다.’
트렌디 드라마에서 근사한 전문직으로 자아 실현하던 주인공들은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규모 실업사태를 꿈으로 버티는 백수시대를 지나, 취업경쟁
[유선주의 TVIEW] 현실이 어두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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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이 창간한 해. 아무것도 모르고 취재하러 간 칸영화제에서 정신을 추스르려 책방에 들어갔다가, 칸에 관한 로저 에버트의 에세이 <한낮의 태양 아래서 2주일>(Two Weeks in the Midday Sun)을 집었다. 저자 사인회라도 했는지 친필서명도 있다. 에버트는 이 책의 삽화도 직접 그렸는데, 당시 평론가들 사이에 유행했던 조명 들어오는 펜을 향한 울화통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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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결혼기념일에 공교롭게도 <안나 카레니나> 시사를 놓치고 <호프 스프링즈> 시사에 출석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해볼까 했으나, 역시 억지스러워서 그만두기로 한다. 세 자녀를 다 키워 독립시킨 결혼 30년차 케이(메릴 스트립)는 결혼의 낭만을 회복하고자 시도하지만 남편 아놀드(토미 리 존스)의 반응은 한마디로 “이 여편네가 뭘 새삼스럽게!”다. 케이는 온화하지만 결코 물렁한 여자가 아니다. 극히 비협조적인 남편을 한사코 카운슬링 여행에 끌고 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태엽 감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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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꽃의 계절이다. 봄꽃들이 까르륵대며 올라오는 중이다. 이맘때면 꽃을 사랑한 화가들이 떠오른다. 꽃을 사랑한 화가들은 꽃이 사랑한 화가들이기도 하다. 봄볕 속에 나른하고 비스듬히 앉은 채 뒤적거리게 되는 화집은 주로 조지아 오키프. 생명력 가득한 우아함과 힘, 관능적인 해방감, 건강한 욕망과 자유. 그녀가 그린 꽃들은 하나씩의 생생한 우주로 존재한다. 개화와 낙화로 대변되는 생로병사의 일반론에 파묻히지 않고 저마다의 고유한 에너지 파동으로 퍼덕거린다. 조지아 오키프는 자연의 존재방식이 인간의 모든 예술창조 행위의 근원임을 증명하는 탁월한 예술가 중 하나다. 꽃, 조개껍질, 돌멩이, 나뭇조각 등에서 그녀가 발견해내는 새로운 우주는 한없이 매혹적이다. 평생토록 일관되게 그녀가 말해온 것처럼 “세상의 광활함과 경이로움을 가장 잘 깨닫게 해주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봄의 꽃 폭풍 속에서 조지아 오키프의 꽃들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감사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봄이면 어쩔
[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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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원본이 어딨어? 10년이 다 됐는데….” 한정연 디자이너가 쓸데없는 거 찾지 말라면서 찡긋한다. 목요일만 되면 편집장을 대신해 마감 독촉에 앞장서는 그에게 괜한 걸 물었다. 오래전엔 꽤 다정다감했는데 어쩌다 다혈질 헐크가 됐는지. 애먼 요구 하지 말고 기사나 빨리 출고해달라는 눈총에 떠밀려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로 돌아왔다.
2005년 봄, <씨네21>은 열돌을 맞았다. 전 편집장들에게 특별한 선물도 전달했다. 그들의 사진을 <씨네21> 표지처럼 디자인해 액자로 만들었다. 우스개 표제도 여러 개 얹혔다. “수지침의 달인 안정숙, 김정일을 살리다”, “일주일 완전정복 허문영의 슬로 스피킹 580”. 기사 마감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선물 포장하느라 온 정신을 팔았다. 그때 가짜 표지를 같이 만들었던 이가 한정연 디자이너다.
가짜 표지 만들던 가짜 편집장이 지금은 진짜 에디토리얼을 쓰고 있다. 인간 심보는 필시 이기(利己)의 부레다. 되로 준 선물, 말로
[에디토리얼] 생일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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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 출신 배우, 음주단속 적발”이라는 기사 제목을 보는 순간 불길한 기운이 뉴런을 타고 대뇌의 전두엽을 강타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tvN <푸른 거탑>의 최종훈 병장(a.k.a ‘말년’) 역을 맡고 있는 연기자 최종훈이 집 근처에서 대리운전기사를 보낸 뒤 500m가량을 운전해 주차를 하려다 음주운전 단속에 적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최 병장이 영창에 가는 설정으로 잠시 하차하게 된다는 제작진의 발표에 오장육부로부터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휘몰아쳤다. 말년에 군기교육대도 아니고 영창이라니, 추억록 만들다 14박15일 영창 갔던 것도 모자라 또 영창이라니! 이런 제엔장! 이 나이에 군인 걱정을 하고 있다니 이게 바로 ‘곰신’의 마음… 아, 아닌가.
어쨌든 KBS <유머1번지> ‘동작 그만’ 이후 최고의 군대 코미디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푸른 거탑>은 요즘 가장 눈에 띄는 만듦새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3소대라는, 작지만
[최지은의 TVIEW] 웃고 있어도 웃고 싶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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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바디스>와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우 출신으로 첫 장편 <디어 한나>(2011)로 연출력을 과시한 패디 콘시다인이 차기작 시나리오 <The Years of the Locust>의 탈고를 트위터로 알렸다. “이제 제작비 2천만달러만 있으면 된다”는 글귀에, 성취감과 근심이 뒤섞인 심호흡이 배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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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장애를 만나 비로소 로맨스라는 ‘서사’가 된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사랑의 걸림돌은 종족이다. 더구나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사랑을 가로막는 방해물인 동시에, 에드워드가 지닌 힘과 아름다움의 근원이기도 하다. 뭇사람이 보기에는 박해받아 마땅한 괴물이지만 내 눈에는 완벽한 왕자님이라. 소녀들에게 이보다 아련하고 치명적인 사랑은 없다. 뱀파이어 남친의 자리에 좀비를 데려다놓은 <웜바디스>는 핸디캡을 안고 출발한다. 순백의 낯빛에 유난히 붉은 입술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너무 후져서 예술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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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담배가 ‘악마의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장 폴 사르트르는 담배를 ‘신의 축복’이라고 찬양했다.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담배에 관해 옥신각신 입씨름을 벌여왔지만 적어도 현대사회는 톨스토이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데 이견이 있을까나. 나 역시 지독한 골초지만 막 담배를 배우는 사람들을 뜯어말리곤 한다. 거리에서 웬만하면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하고, 공공장소를 금연화하자는 데에 대체적으로 찬성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못마땅한 게 있다. 담뱃값이 오른단다. 실은 간접세가 오르는 것이다. 소득에 따른 직접세가 아니라, 담배와 술에 붙은 간접세를 끌어모아 국가 재정을 채우려는 정부의 얄팍한 꼼수는 결국 빈부격차를 가중시킬 뿐이다. 게다가 담뱃값 인상이 흡연율 감소로 이어진다는 확증적인 연구 결과도 미약하거니와 언제는 국가 재정을 위해 시민들을 담배에 중독시켰다가 이제 와서 그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 떠맡기는 것 역시 입 잘 닦는 얌체 같다. 하지만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나를 더럽힐 권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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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개편호부터 들어갈 짧은 에세이를 보내왔다. 며칠 전 디자인 작업을 위해 전화로 몇 가지를 물었는데,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기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이미 써둔 원고가 있으니 참고하라며 일종의 샘플 글을 내주었다. 메일에 달린 첨부파일을 열면서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이었다. 기대가 큰 만큼 불안도 컸다. 다른 동료들과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비밀리에 성사시킨 청탁인지라 적잖이 부담도 됐다.
그날 밤 그에게 메일을 써야 했다. 메일을 쓰면서 그렇게 진땀 흘리긴 처음이었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애초 지면의 성격과 글의 방향을 분명하게 요구했다면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자책에 한번 발목이 잡히자 글을 수정해달라는 간단한 메일을 보내는 일이 인쇄 사고 내고 시말서라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메일을 발송하는 데 적어도 2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이튿날 오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욕심과 게으름이 빚어낸 무례에 대해 다시 사과했다. 통화 초반에는 나도,
[에디토리얼] 개편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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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에서 극적인 상황과 양식적인 표현을 걷어낸다면 뭐가 남아 있을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나 맥락이 충분했던가? 같은 한국인이니까 읽어낼 수 있는 뉘앙스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JTBC 드라마 <세계의 끝>을 보면서 깨달았다. 극적인 상황의 일차적인 감정에 치중하다 보니 삭제되고 또 눈감게 되었던 리얼리티의 쾌감을. 배영익의 소설 <전염병>을 원작으로 한 <세계의 끝>은 북태평양 베링해에서 명태잡이 조업을 하던 원양어선 문양호가 귀환 도중 기관고장으로 인해 침몰하고 선원 어기영을 제외한 129명의 선원이 실종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뒤 어기영과 접촉한 인물들이 차례차례 원인 모를 바이러스로 죽어가고, 질병관리본부는 월면을 닮은 괴바이러스를 ‘M바이러스’라 명명하고 감염자를 추적한다.
<세계의 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이러스 재난에 대응하는 절차와 시스템 안의 인간을 대단히 성실하게 짚는
[유선주의 TVIEW] 안판석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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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트레일러’(honest trailers)는 영화의 단점과 놀림거리까지 망라한 예고편 패러디로 ‘스크린정키스’ (이용자명 screenjunkies, www.screenjunkies.com) 사이트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표를 산 다음에야 대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리라”고 시작하는 <레미제라블> 예고편은 아예 노래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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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의 자전적 영화 <가족의 나라>를 보고 종로 거리를 걸으며,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삶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속절없이 흘러가버릴 수 있는지 생각한다. 1950년대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동포 성호(아라타)와 일본에 남은 가족은 그들의 선택이 어긋났다는 사실을 진즉에 깨닫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가져올 본인의 행복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초래할 불행의 총합이 크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제자리에 멈춘 채 더 나빠지지만 않길 바란다. 수술해야 하지만 북한으로 돌아간 뒤의 부작용이 염려되어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먼 나라 이웃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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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제 신상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tbs 교통방송에서 제가 진행하던 <김남훈의 SNS쇼>가 봄 개편을 맞이해 하차를 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 새로 생긴 프로그램이었는데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소재로 삼는 매우 혁신적인 라디오 프로그램이었죠. 매일 생방송으로 진행을 하다보니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재미도 만만치 않았던 프로그램인데 참 많이 아쉽더군요. 마침 그때 야간대학원에 입학을 한 상태였는데 출연 결정이 너무 갑작스럽게 나는 바람에 휴학도 하지 못하고 대학원 전 과목 F를 맞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학비는 학비대로 날아갔고요.
방송가에서는 3월에 봄 개편을 합니다. 이 시기에는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나기 마련이지요. 저는 라디오 진행을 하면서 다른 프로그램에 게스트로도 출연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했던 것이, 2년 넘게 했던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입니다. 토요일 코너인 ‘주간 이슈 뒤집기 한판’인데 이번에 아예 토요일 방송이 없
[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진짜 디스토피아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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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사 5층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과거엔 도서관 안쪽에 또 다른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오래된 신문들을 연도별로 모아놓은 자료실이었다. 가장 오래된 신문은 1961년 무렵의 것으로 기억한다. 설 혹은 추석 합본호를 만들려고 하면, 무슨 이벤트처럼 30, 40년 전 한국영화에 관한 기사들을 써야 했는데, 그때마다 이 자료실을 들락거렸다. 옛날 신문 말곤 변변한 자료가 없었다. <씨네21> 사무실은 도서관 바로 아래층이었지만, 신문 스크랩 뭉치들을 몽땅 나르진 못했다. 책상 위에 커다란 신문 더미들을 펼쳐둘 여유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담당 직원분께 양해를 구하고 그곳에서 밤샘 마감을 한 적이 그래서 여러 번이다. 마감 쪼는 데스크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공간은 요긴했다. 회사 안에 있으나 누구도 오가지 않는, 그야말로 비밀 아지트였던 셈이다.
이 난공불락의 요새에도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몇 차례 밤샘을 끝내고
[에디토리얼] 마법의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