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게 원본이 어딨어? 10년이 다 됐는데….” 한정연 디자이너가 쓸데없는 거 찾지 말라면서 찡긋한다. 목요일만 되면 편집장을 대신해 마감 독촉에 앞장서는 그에게 괜한 걸 물었다. 오래전엔 꽤 다정다감했는데 어쩌다 다혈질 헐크가 됐는지. 애먼 요구 하지 말고 기사나 빨리 출고해달라는 눈총에 떠밀려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로 돌아왔다.
2005년 봄, <씨네21>은 열돌을 맞았다. 전 편집장들에게 특별한 선물도 전달했다. 그들의 사진을 <씨네21> 표지처럼 디자인해 액자로 만들었다. 우스개 표제도 여러 개 얹혔다. “수지침의 달인 안정숙, 김정일을 살리다”, “일주일 완전정복 허문영의 슬로 스피킹 580”. 기사 마감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선물 포장하느라 온 정신을 팔았다. 그때 가짜 표지를 같이 만들었던 이가 한정연 디자이너다.
가짜 표지 만들던 가짜 편집장이 지금은 진짜 에디토리얼을 쓰고 있다. 인간 심보는 필시 이기(利己)의 부레다. 되로 준 선물, 말로
[에디토리얼] 생일선물
-
“매니저 출신 배우, 음주단속 적발”이라는 기사 제목을 보는 순간 불길한 기운이 뉴런을 타고 대뇌의 전두엽을 강타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tvN <푸른 거탑>의 최종훈 병장(a.k.a ‘말년’) 역을 맡고 있는 연기자 최종훈이 집 근처에서 대리운전기사를 보낸 뒤 500m가량을 운전해 주차를 하려다 음주운전 단속에 적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최 병장이 영창에 가는 설정으로 잠시 하차하게 된다는 제작진의 발표에 오장육부로부터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휘몰아쳤다. 말년에 군기교육대도 아니고 영창이라니, 추억록 만들다 14박15일 영창 갔던 것도 모자라 또 영창이라니! 이런 제엔장! 이 나이에 군인 걱정을 하고 있다니 이게 바로 ‘곰신’의 마음… 아, 아닌가.
어쨌든 KBS <유머1번지> ‘동작 그만’ 이후 최고의 군대 코미디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푸른 거탑>은 요즘 가장 눈에 띄는 만듦새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3소대라는, 작지만
[최지은의 TVIEW] 웃고 있어도 웃고 싶어도
-
*<웜바디스>와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우 출신으로 첫 장편 <디어 한나>(2011)로 연출력을 과시한 패디 콘시다인이 차기작 시나리오 <The Years of the Locust>의 탈고를 트위터로 알렸다. “이제 제작비 2천만달러만 있으면 된다”는 글귀에, 성취감과 근심이 뒤섞인 심호흡이 배어난다.
3/8
열정은 장애를 만나 비로소 로맨스라는 ‘서사’가 된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사랑의 걸림돌은 종족이다. 더구나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사랑을 가로막는 방해물인 동시에, 에드워드가 지닌 힘과 아름다움의 근원이기도 하다. 뭇사람이 보기에는 박해받아 마땅한 괴물이지만 내 눈에는 완벽한 왕자님이라. 소녀들에게 이보다 아련하고 치명적인 사랑은 없다. 뱀파이어 남친의 자리에 좀비를 데려다놓은 <웜바디스>는 핸디캡을 안고 출발한다. 순백의 낯빛에 유난히 붉은 입술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너무 후져서 예술인 영화
-
톨스토이는 담배가 ‘악마의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장 폴 사르트르는 담배를 ‘신의 축복’이라고 찬양했다.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담배에 관해 옥신각신 입씨름을 벌여왔지만 적어도 현대사회는 톨스토이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데 이견이 있을까나. 나 역시 지독한 골초지만 막 담배를 배우는 사람들을 뜯어말리곤 한다. 거리에서 웬만하면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하고, 공공장소를 금연화하자는 데에 대체적으로 찬성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못마땅한 게 있다. 담뱃값이 오른단다. 실은 간접세가 오르는 것이다. 소득에 따른 직접세가 아니라, 담배와 술에 붙은 간접세를 끌어모아 국가 재정을 채우려는 정부의 얄팍한 꼼수는 결국 빈부격차를 가중시킬 뿐이다. 게다가 담뱃값 인상이 흡연율 감소로 이어진다는 확증적인 연구 결과도 미약하거니와 언제는 국가 재정을 위해 시민들을 담배에 중독시켰다가 이제 와서 그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 떠맡기는 것 역시 입 잘 닦는 얌체 같다. 하지만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나를 더럽힐 권리(1)
-
-
○○○ 시인이 개편호부터 들어갈 짧은 에세이를 보내왔다. 며칠 전 디자인 작업을 위해 전화로 몇 가지를 물었는데,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기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이미 써둔 원고가 있으니 참고하라며 일종의 샘플 글을 내주었다. 메일에 달린 첨부파일을 열면서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이었다. 기대가 큰 만큼 불안도 컸다. 다른 동료들과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비밀리에 성사시킨 청탁인지라 적잖이 부담도 됐다.
그날 밤 그에게 메일을 써야 했다. 메일을 쓰면서 그렇게 진땀 흘리긴 처음이었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애초 지면의 성격과 글의 방향을 분명하게 요구했다면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자책에 한번 발목이 잡히자 글을 수정해달라는 간단한 메일을 보내는 일이 인쇄 사고 내고 시말서라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메일을 발송하는 데 적어도 2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이튿날 오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욕심과 게으름이 빚어낸 무례에 대해 다시 사과했다. 통화 초반에는 나도,
[에디토리얼] 개편전야
-
한국 드라마에서 극적인 상황과 양식적인 표현을 걷어낸다면 뭐가 남아 있을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나 맥락이 충분했던가? 같은 한국인이니까 읽어낼 수 있는 뉘앙스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JTBC 드라마 <세계의 끝>을 보면서 깨달았다. 극적인 상황의 일차적인 감정에 치중하다 보니 삭제되고 또 눈감게 되었던 리얼리티의 쾌감을. 배영익의 소설 <전염병>을 원작으로 한 <세계의 끝>은 북태평양 베링해에서 명태잡이 조업을 하던 원양어선 문양호가 귀환 도중 기관고장으로 인해 침몰하고 선원 어기영을 제외한 129명의 선원이 실종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뒤 어기영과 접촉한 인물들이 차례차례 원인 모를 바이러스로 죽어가고, 질병관리본부는 월면을 닮은 괴바이러스를 ‘M바이러스’라 명명하고 감염자를 추적한다.
<세계의 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이러스 재난에 대응하는 절차와 시스템 안의 인간을 대단히 성실하게 짚는
[유선주의 TVIEW] 안판석 스타일
-
▲솔직한 트레일러’(honest trailers)는 영화의 단점과 놀림거리까지 망라한 예고편 패러디로 ‘스크린정키스’ (이용자명 screenjunkies, www.screenjunkies.com) 사이트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표를 산 다음에야 대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리라”고 시작하는 <레미제라블> 예고편은 아예 노래로 이뤄져 있다.
2/23
양영희 감독의 자전적 영화 <가족의 나라>를 보고 종로 거리를 걸으며,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삶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속절없이 흘러가버릴 수 있는지 생각한다. 1950년대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동포 성호(아라타)와 일본에 남은 가족은 그들의 선택이 어긋났다는 사실을 진즉에 깨닫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가져올 본인의 행복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초래할 불행의 총합이 크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제자리에 멈춘 채 더 나빠지지만 않길 바란다. 수술해야 하지만 북한으로 돌아간 뒤의 부작용이 염려되어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먼 나라 이웃 나라
-
최근 제 신상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tbs 교통방송에서 제가 진행하던 <김남훈의 SNS쇼>가 봄 개편을 맞이해 하차를 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 새로 생긴 프로그램이었는데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소재로 삼는 매우 혁신적인 라디오 프로그램이었죠. 매일 생방송으로 진행을 하다보니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재미도 만만치 않았던 프로그램인데 참 많이 아쉽더군요. 마침 그때 야간대학원에 입학을 한 상태였는데 출연 결정이 너무 갑작스럽게 나는 바람에 휴학도 하지 못하고 대학원 전 과목 F를 맞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학비는 학비대로 날아갔고요.
방송가에서는 3월에 봄 개편을 합니다. 이 시기에는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나기 마련이지요. 저는 라디오 진행을 하면서 다른 프로그램에 게스트로도 출연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했던 것이, 2년 넘게 했던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입니다. 토요일 코너인 ‘주간 이슈 뒤집기 한판’인데 이번에 아예 토요일 방송이 없
[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진짜 디스토피아로부터
-
한겨레신문사 5층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과거엔 도서관 안쪽에 또 다른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오래된 신문들을 연도별로 모아놓은 자료실이었다. 가장 오래된 신문은 1961년 무렵의 것으로 기억한다. 설 혹은 추석 합본호를 만들려고 하면, 무슨 이벤트처럼 30, 40년 전 한국영화에 관한 기사들을 써야 했는데, 그때마다 이 자료실을 들락거렸다. 옛날 신문 말곤 변변한 자료가 없었다. <씨네21> 사무실은 도서관 바로 아래층이었지만, 신문 스크랩 뭉치들을 몽땅 나르진 못했다. 책상 위에 커다란 신문 더미들을 펼쳐둘 여유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담당 직원분께 양해를 구하고 그곳에서 밤샘 마감을 한 적이 그래서 여러 번이다. 마감 쪼는 데스크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공간은 요긴했다. 회사 안에 있으나 누구도 오가지 않는, 그야말로 비밀 아지트였던 셈이다.
이 난공불락의 요새에도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몇 차례 밤샘을 끝내고
[에디토리얼] 마법의 도서관
-
요즘 예능 프로그램이 재미없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솔직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재테크와 성형에 대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공유하며 권장하는 분위기는 또 다른 의미의 솔직함일 수도 있다. 가족 안에서의 갈등과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문제를 재미있는 해프닝으로 소비하는 대담함은 신기할 정도다. 연예인은 공식석상에서의 모습뿐 아니라 사생활과 과거의 사소한 실수에 대해서도 낱낱이 밝힐 것을 요구받는다. 대중과 언론이 작심하면 누구든 투명하게 탈탈 털어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그 어떤 공직자보다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에 의해 ‘공인’으로서의 본분과 역할에 끼워 맞춰지는 스타와 프로그램들은 점점 얄팍해지거나 비슷하게 지루해진다. 흥미로운 것 이전에 비난을 피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천박함은 널리 용인되지만 시청률이 기대에 못 미치면 금세 목이 날아간다. 솔직한 취향과 선명한 색깔을 만나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진다.
JTBC <썰전>은 이 와중에 튀어나온
[최지은의 TVEW] 긴장하라 지상파
-
벌써 3번째 시즌을 맞이한 뉴스타파를 보고 있으면 참 많은 생각, 또 많은 감정이 교차한다. 이명박 정권 초기 해직되었던 언론인들이 모여서 만든 뉴스타파였기에 부디 단명(?)하는 프로그램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명은커녕 3번째 시즌을 맞이했고, 심지어 인력이 더 보강된 것을 보면서 마냥 즐겁게 프로그램을 시청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막상 프로그램을 시청하기 시작하면 다 사라지고, 그저 프로그램의 수준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굳이 김용진 기자나 최승호 PD라는 이름을 열거하지 않아도 아이템 선정에서부터 최종 편집에 이르기까지 흠잡을 데 없는 프로그램의 완성도는 같은 언론인으로서 샘이 날 지경이다. 할 말을 다 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으니 비판을 주로 하는 탐사보도에 있어 가히 교과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 좋은 방송을 공중파나 케이블 채널을 통해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다행히 최근 시민방송 <RTV&g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뉴스타파와 뉴 플랫폼
-
“1984년인가, 1985년인가에 디스켓에다 저장해놓았던 게 분명한 내 작품 <푸코의 진자>의 첫 번째 버전을 절망적으로 찾다가 결국 실패한 일이 있어요. 타자기로 쳐놨더라면 그것은 아직 남아 있을 텐데 말이죠.” <책의 우주>(2011)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컴퓨터와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같은 책에서 대담자인 장 클로드 카리에르 역시 우리는 “5세기 전에 인쇄된 텍스트를 아직도 읽을 수 있지만” “몇년도 안된 카세트테이프나 시디롬은 더이상 읽을 수도 볼 수도 없다”면서 테크놀로지의 불완전성에 대해 성토한다.
3월20일, MBC, KBS, YTN 등 주요 방송사 전산망에 사이버 테러가 자행됐다. 북한의 소행인지, 추가 공격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큰 관심도 없다. 다만, ‘해킹 폭탄’을 맞은 뒤 전화로 기사를 불러야 했던 기자들의 짜증과 PC방에서 원고를 마감해야 했던 작가들의 탄식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에디토리얼] Delete & Reboot
-
SBS 드라마 <돈의 화신>은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흔한 복수극으로 출발하는가 싶더니 이내 적대하는 인물간의 선악을 흐려놓고 감정이입 이상의 생각을 요구하며, 불안의 씨앗을 던져놓은 채 능청스럽게 딴 이야기로 돌려 혼을 빼놓는다. 정극과 코미디를 오가는 건 예사. 치정, 복수, 패러디, 법정, 수사, 추리, 스릴러, 세태풍자 등 다양한 소재의 거침없는 접붙이기에 거듭 놀라다보니 벌써 이야기의 전환점인 12회까지 왔다. ‘사극 빼고 다 하는구나’ 싶던 차에 주인공 이차돈 역의 강지환은 소복 차림에 사극 머리를 하고 외치더라. “나는 조선의 국모다!”
물론 그는 국모가 아니다. 여기저기 뒷돈을 받아 챙기다 들통난 전직 검사 이차돈이 변호사 개업 뒤 사설요양원에 강제입원된 박기순(박순천)의 100억원대 상속건을 수임하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계책을 짜낸 것. 드라마 <명성황후> 패러디야 수도 없이 봤고 강지환의 여장은 예고편에서 흘린 장면이라 크게 웃을 일도
[유선주의 TVIEW] 거참 꼼꼼하구나
-
▲어른들은 동화의 수위를 염려하지만 아이들은 동화에서 장차 삶에 그들을 기다리는 공포와 그로테스크, 죽음을 다루는 예행연습을 한다. <오즈 그레이트 앤드 파워풀>의 시각효과 중 단연 사랑스러운 도자기소녀는 다리가 바스라진 채 등장한다.
2/22
케이블TV에서 방영한 <코드명 제로니모>를 시청하다 집중에 실패하고 채널을 돌린 적이 있다. 똑같이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소재로 취한 <제로 다크 서티>는 취재에 기초한 르포르타주의 성격이 강한 영화라곤 하지만, <코드명 제로니모>와 대조적으로 고도의 영화적 쾌감을 주는 엔터테인먼트이기도 하다. 주인공 마야(제시카 채스테인) 또한 실제 CIA 요원을 모델로 한 인물인 동시에 엄연히 영화적 캐릭터다. <제로 다크 서티>를 보며 인식한 한 가지는 마야의 성별이 ‘전혀’라고 할 만큼 이슈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미인이지?”라는 직장 동료들의 언급이 일회적으로 지나가는 정도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인생은 짧고 러닝타임은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