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스모폴리스>의 억만장자 에릭(로버트 패틴슨)은,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으로 벽면을 채운 텍사스주 휴스턴의 로스코 채플을 통째로 사들이겠다고 억지를 부린다. ‘비매품’이라는 큐레이터(줄리엣 비노쉬)의 반론도 소용없다. 로스코 채플은 종교를 막론한 명상의 장소다. 미술사학자 제임스 엘킨스는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1장을, 색채만으로 울음을 부르는 로스코 채플 이야기에 온전히 바쳤다.
6/14
“내 영화도 하마터면 극장 개봉 못할 뻔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 입에서 이 말을 직접 들은 (졸업을 앞둔) 영화과 학생들은 얼마나 오싹했을까? 게다가 40년 전 회고담도 아니고 근작 <링컨> 이야기다. (정말이지 후학의 사기 따위 생각지 않는 냉정한 선배다.) 엊그제 USC영화예술학교 신축 건물 개관식에 참석한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가 밝힌 할리우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주목받고 있다. 무려 드림웍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영화는 영화다?
-
누구나 글을 쓸 때 특정한 버릇이 있다. 습관이라고 부를 수 있겠고, 원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들이라 불리는 이들의 버릇을 흔히 스타일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글을 빼어나게 잘 쓰는 한 선배에게 글을 쓸 때 버릇이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선배가 찬찬히 읊어준 자기만의 버릇들은 ‘작가 수업’ 몇장 몇절에 고스란히 옮겨 실어도 좋을 법한, 세심하고 명료한 주문이었다. 듣다 보니 일일이 번호를 매겨 외우고 싶단 생각까지 들었다. 듣고 나선 녹음이라도 해 둘걸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 선배의 글쓰기 버릇은 내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 글쓰기 버릇은 강박에 가깝다. 습관에도 원칙에도 스타일에도 강박 기제가 작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강박에는 어쨌거나 이유가 있다. 잠에서 깨자마자 한 시간씩 글을 쓰는 이가 있다 치자. 세수도 하지 않고, 눈곱도 떼지 않고 글을 쓰는 이에겐 그러한 행동의 근거와 효용이 있을 것이다. 남들을 설득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
[에디토리얼] 몹쓸 강박
-
올해 인디포럼영화제에 출품된 독립영화는 800여편. 역대 가장 많은 작품 수다. 다큐멘터리를 제외한다면 극영화가 700여편이다. 일단 상업영화를 셈에서 빼면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한해 동안 700편 안팎의 극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시대상을 기민하게 반영하는 독립영화답게 요즘의 화두는 단연 탈북, 조선족, 왕따, 편의점이다. 어떤 이는 왕따문제를 다룬 <파수꾼>과 탈북자영화 <무산일기>의 성취에서 비롯된 모방 열풍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그 사안들이 언론의 단골 메뉴가 된 지 꽤 오래됐다.
오히려 공통된 어떤 지반을 찾으라 한다면 바로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다. 뜬금없는가? 아니다, 현재 한국 독립 극영화들이 줄기차게 영향을 받고 모방하는 영화적 아이콘은 다르덴 형제다. 10여년 전 국내에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 소개된 이후, 독립-예술영화 연출자들은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 다르덴이 로제타의 뒷모습을 원테이크로 쫓아가듯, 현재 독립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지루한 모방, 위험한 욕망
-
전람회와 넥스트, 패닉의 팬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거침없이 무대를 장악하던 신해철이나, 대학만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선배처럼 수수하면서도 섬세해 보이던 서동욱에 비해 동글동글한 사촌오빠를 닮은 이적을 더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발매된 패닉의 2집은 특별히 거금을 들여 CD로 샀다. 괴기스런 일러스트와 ‘냄새’, ‘혀’,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 등 끔찍한 환상소설 같은 가사로 빼곡한 부클릿을 뜻도 모른 채 수없이 읽노라면 가슴이 뛰었다. 열일곱살이 느끼기에도 병들어 썩어 있던 세상, 아니 열일곱살이어서 더 추악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던 세상을 향한 이 강렬하고도 문학적인 은유라니, 그야말로 멋이 폭발했다!
그 뒤 십수년이 지난 뒤 대기업의 카드 광고 모델이 되어 “실용의 길을 배웁니다”라며 미소 짓는 이적은 내가 동경했던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지만, 타인의 삶과 선택에 대해 함부로 해석하고 실망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일 거라는 생각이
[최지은의 TVIEW] 오빠와 아저씨 사이
-
-
* 6월11일치 일기에 <월드워Z>, 6월12일치에 <버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맨 오브 스틸>에는 켄트씨네 외동아들이 붉은 천을 망토처럼 두르고 강아지와 뛰어노는 회상장면이 있다. 아련해지는 대목이다. 동생과 나도 꼬마였을 때… 하고 추억에 젖다 어리둥절해진다. 가만, 우리는 슈퍼맨 흉내를 낸 건데 슈퍼맨이 아직 오지 않은 우주에 속하는 어린 클라크는 어디서 영감을 얻은 걸까? 모태 기억?
6/10
영화 상영 10분 전. 극장에 입장하기도 커피를 마시러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요행히 로비에 빈자리가 보여 걸터앉았다. 같은 처지로 추정되는 옆 커플은 벌써 팝콘을 절반 이상 동내고 있었다. 콜라 한 모금과 팝콘 한 움큼 사이의 짧은 침묵을 깨고 여자가 문득 말했다. “지난번에 이 극장에 혼자 왔었거든. 근데 영화 끝나고 앞줄에서 누가 일어나는데, 우리 엄마인 거야. 엄마도 영화를 혼자 보러 왔더라고. 나, 그날 아침에 엄마랑 싸우고 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남의 침묵
-
“제한상영가 영화가 늘어난 데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서 허용하는 표현의 범위가 최근 들어 넓어진 것과 관련이 있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 박선이 위원장의 말이다(55쪽). 박 위원장은 5기 영등위 들어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영화 편수가 대폭 늘었다는 지적에 대해 “이 정도면 청소년 관람불가가 되더라, 하니까 그보다 더 센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진다”고 답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기준을 완화해서 적용했더니 제한상영가 영화들이 늘어났다는 설명이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청소년 관람불가 이상 등급 판정을 받은 영화는 29.2%, 2011년부터 2012년까지는 42.5%였다(53쪽). 그렇다면 박 위원장은 이 수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까. 청소년 관람불가 이상 등급의 영화가 늘어난 데는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에서 허용하는 표현의 범위가 최근 들어 넓어진 것과 관련이 있어서일까. 이 정도면 15세 관람가가 되더라, 하니까 그보다 더 센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에디토리얼]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
-
참으로 볼만했습니다. 맥줏집이 떠나가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모습이 참으로 볼만했습니다. 안주로 나온 골뱅이를 다른 사람이 한두점 집어먹을까 말까 할 때 입안으로 마치 쓸어담듯이 집어넣더군요. 더욱 가관인 것은 그 태도였습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으스대는 태도. 그는 그날 오후 분명 ‘착한 일’을 했습니다. 소아암 환우들을 위한 이벤트에 무료로 참가했으니까요. 예전처럼 공중파에 고정 출연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케이블TV와 라디오에 종종 얼굴을 내밀며 바빠죽겠다고 페이스북에 엄살과 자랑 반 섞인 포스팅을 하는 그에게 황금 같은 주말에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미국 담배회사는 자선활동에 10만달러를 쓰고 ‘자선활동을 했다는 걸 홍보하는’ 데에 200만달러를 쓴다고 합니다. 200여 가지 독극물로 구성된 자신들의 제품을 잘 포장된 선의로 감추려는 것이지요. 맥줏집 구석 자리에서 벽을 기대앉
[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이 남자를 고발합니다
-
*6월3일치 일기에 <에브리데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비디오로 여름나기’라는 제목으로 숨은 수작을 소개하는 기획은, 비디오 시대 영화잡지의 연례 행사였다.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1988)는 코미디 베스트에 빠지지 않던 작품. 5월25일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관객과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사의 걸작도, 흥행대작도 아닌 미들급 영화들이야말로 스크린에서 다시 보기 어렵다. 세대와 국경을 넘어 여전히 사람들을 웃기는 데에 성공하는 <완다…>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5/15
바즈 루어만 감독은 시대극 장르의 마이클 베이가 되고 싶은가보다. 3D로 만들어진 그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와 닉 일행이 뉴욕으로 차를 달리는 장면을 보다가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들의 드라이브는 역동적이다 못해 지금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보고 있나 혼동될 지경이다. 영화 내적으로 보나 외적으로 보나 불필요한 과속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개츠비 보러 갔다가…
-
‘어디서 봤더라?’ 2007년, 13살 핀란드 소년 월테리 세레틴은 TV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극으로 항해를 떠난 러시아 잠수함”에 관한 해외 뉴스를 본 소년은 갑자기 소장하고 있던 영화 <타이타닉>의 DVD를 돌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누군가 어이없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알아차렸다. 러시아 국영방송 <로시야>가 다루었고, <로이터>를 통해 전세계에 타전된 뉴스 속 잠수함은 실은 <타이타닉> 도입부에 등장하는 가짜 잠수함이었다.
조지프 핼리넌의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문학동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 하나다. 천재들만 모였다는 미국 항공우주국의 발표에 대해 계산 오류를 감히 제기한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였다. 권위를 자랑하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27년 동안 전시 실수를 저질렀음을 한눈에 발견한 이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코찔찔이였다. “초보자는 알지만 전문가는 모르는” 거대한 실수들, 서투르
[에디토리얼] 바로잡습니다
-
매년 돌아오는 6월6일은 당연한 말이지만 ‘현충일’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군 장병들에게 묵념하는 날. 조기를 게양하는 날. 국가적으로 많은 행사가 있는 날. 하지만 그건 1950년대 이후의 일이고, 1949년 6월6일은 현충일이 아니었다.
1949년 6월6일 새벽,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청사는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에게 포위된다. 몇 시간 뒤 출근하던 반민특위 요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들 경찰에 무장해제된다. 그 과정에서 조사관을 비롯한 주요 요인들은 뒤뜰에 끌려가 무릎이 꿇리고, 특경대 요인들은 서울 시내 경찰서에 나눠져- 돌려가며- 지독한 고문을 받게 된다.
친일 출신 경찰들에 의해 이루어진 반민특위 습격 사건. 이 습격 사건이 있은 뒤 반민특위는 급격하게 와해된다. 사실상 친일파 청산은 물건너가고, 잡혀왔던 친일파 대부분이 무죄로 풀려난다. 1기 위원들이 전원 사퇴하자 새롭게 들어선 2기는 오히려 친일파들에게 사법적 면죄부를 공식적으로 부여하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또 다른 6월6일
-
등장인물들이 늘어놓는 사적인 편견은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가 주는 ‘불쾌’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극화를 거친 편견은 인물간 대립을 통해 이야기 속에서 나름의 답을 찾기 마련이지만 그녀의 드라마 속에서 의미없이 반복되는 정교하지 못한 편견은 대개 갈등의 자리까지 치고 올라오지 못했다. 대화보다 일방적인 전달에 가까운 대사들은 제각기 성격을 지닌 캐릭터를 지켜보는 느낌보다 작가의 경험과 편견을 공유하는 임성한-a, 임성한-b, 임성한-c의 무한 반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잠깐 들어도 작가가 누군지 대번에 파악할 만큼 독특한 스타일에, 일상적인 대사가 많고 옹호하는 가치관이 강력하게 드러나는 점에서 김수현 작가와 임성한의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연인이든 혈육간이든 도덕의 화신이든 징글징글한 속물이든 간에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일 없이 자신의 온 존재를 건 듯 격렬하게 맞서는 김수현의 인물들에게 비하면, 임성한의 인물은 ‘피고름’ 등 강렬한 표현에 집착할 뿐 현실이라면 면박
[유선주의 TVIEW] 당신 정말 속물이로군요
-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는 유명한 먹자골목이 있다. 위치는 공덕시장 근처로, 전을 파는 가게와 족발 파는 가게가 특히 이름이 높다. 사시사철 장사진이고, 초저녁에도 바글바글이다. 사무실이 공덕동에 있던 시절, <씨네21>도 공덕동 먹자골목에서 빈번히 회식을 했다. 한번은 취재원과 그곳에 다녀온 남동철 선배가 “공덕시장 족발집에서 남기남 감독의 조감독을 만났다”고 했다. 남기남 감독의 조감독은 옆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손님이 아니라 음식을 내오는 식당 종업원이었다.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알아채고, “왕년에 나도∼” 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던 모양이다. 우리 주변에 혹시 왕년에 한가락 했던 영화인들이 많지 않을까. 스스로는 영화인이라고 자부하지만 누구도 영화인이라고 알아주지 않는, ‘충무로 넘버3’들을 지면에 모셔보자고 한참을 떠들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류승완 감독은 이런 궁금증을 끝내 참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에겐 궁금증이 아니라 사명감이었을 것이다. “
[에디토리얼] 이름 모를 배우
-
찔린 듯 눈물이 터진다. 지난 5월20일 재개된 밀양 송전탑 건설현장. 한전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모내기 바쁜 농번기에 기습적으로 공권력을 투입해 공사를 강행했다. 민의와 무관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행정집행이 있는 곳에 늘 모습을 드러내는 용역들과 경찰들. ‘용역’이라는 말의 섬뜩함과 그들 행태의 구체적 포악함. 마을 주민들의 부상이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현기증이 인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송전탑 투쟁 주민에 대한 인권침해를 조사할 때, 한 주민의 호소를 전해들은 적 있다. “우리가 인권이 어딨노. 돈 있는 사람이나 인권이 있재. 가진 거 없으면 인권도 없고 개만도 못한 취급받는 기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망할 놈의 세상 법’이 병증으로 자리 잡은 우리 마음의 깊은 비애. 어쩌나…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다른 지역은 송전탑과 송전선로가 가능한 마을을 우회하도록 진행되는데, 밀양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인 걸까. 어째서 여기는 마을 주민들
[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전력대란 아니고 인권대란
-
예쁘다고 말하기 좀 어려울 땐 귀엽다고 하듯, ‘웰 메이드’가 아닌 것에 대해 매력있다고 말하게 될 때가 있다. 빈말은 아니다. 다만 매력이란 너무나 개인적인 기준이어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내가 TV프로그램에서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 중 하나는 ‘남들이 안 하는 짓을 하는’ 경우다. 지상파는 물론 수많은 케이블 채널에 종편까지 더해지며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시청률이 존망의 제1 기준이 되는 정글에서 아이돌이면 아이돌, 시월드면 시월드 등 이미 히트한 아이템을 뒤따라가지 않고 뭔가 희한한 걸 해보려는 프로그램에는 좀더 호기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승부를 싫어해 가위바위보도 귀찮아하고 간식내기 사다리타기를 하느니 미리 돈을 내고 마는 게 편한 성격임에도 tvN <더 지니어스-게임의 법칙>(<더 지니어스…>)을 보게 된 건 출연자들의 흥미로운 면면 때문이었다. 항상 심드렁하고 떨떠름한 표정이지만 프로그램의 색깔만큼은 확실하게 만드는 김구라, 철들지 않은 중년 허세
[최지은의 TVIEW] 결국은 드라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