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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대낮에 동네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어떤 할머니가 “학생, 학생!”을 애타게 외치기에 거 참, 어떤 학생이 어르신 부르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못 들은 척하고 제 갈 길만 가는 건가,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에 노인 아닌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야, 나? 나, 학생? 빵끗 웃으며 뒤로 돌아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할머니, 내 얼굴을 보고 충격과 공포로 얼어붙으셨습니다. 죄송해요, 나이 생각 못하고 이따위로 옷을 입어서. 호숫가에서 2열 횡대로 도열하고 대기 중이던 할머니들 단체 사진을 찍어주고 나는 쓸쓸하게 돌아섰다. 내가 딱히 학생 차림을 하고 나간 건 아니었다(눈치는 없어도 양심은 있다). 그냥 흔한 전업주부로 보이고 싶어서 고심 끝에 고른 것이 레깅스였을 뿐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역시 주부들의 아이콘이라는 긴 니트가 없어서 대신 뒤집어쓰고 나간 후드 티와 엉덩이 가린답시고 걸친 데님스커트가 문제였을까. 벗이라곤 노처녀뿐이니 사면초가 막막하여도 물어볼 곳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학생~ 학생! 어이쿠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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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꿈>은 울산 조선소와 제철소의 풍경을 중심으로 몇 갈래의 이야기를 시도한다. 산업화 이전의 신적인 존재였던 동해의 고래, 노동운동사, 감독의 끝난 연애가 연결된다. 그러나 모든 서사적 구성을 압도하는 영화의 동력은, 거대 기계의 스펙터클에 대한 카메라의 감출 수 없는 매혹이다. 노동의 이미지인지 자본의 이미지인지 규정할 수 없는 장관은 하릴없이 아름답다. 왜 아니겠는가. 그것은 자체로 완결돼 있고 합목적적이며 무엇보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무관심하다. 산업이 자연에 강제한 변모를 비판적으로 촬영한 사진가 에드워드 버틴스키의 작품에서도 이 역설적 아름다움은 주제와 긴장을 빚는다.
10/27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극장에서 영화를 본 일은 손에 꼽는다. 가정용 VHS 플레이어가 한창 보급된 시절에 유년기를 보내서인지 80년대 이전 영화는 대개 안방에서 TV나 비디오로 처음 보았다. 덕분에 관람 등급에 대한 감이 희박하고- <써스페리아>를 열살에 아무 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애들 보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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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세월호 사건 관련 글을 읽은 독자가 메일을 보내왔다. “진보는 세월호를 그만 팔기를. 다른 부모들, 학교폭력으로 죽은 자식, 중증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 심정도 생각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나는 “진보가 아니며, 세월호를 산 적도 판 적도 없다. 그렇게 큰 배를 살 돈이 없다”라고 답장하고 싶었지만, 이런 농담을 하기에는 나름 심각한 문제제기다. 이는 ‘시체장사’ 류의 언설과 다르게, 다른 고통도 많은데 세월호만 조명받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얘기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많다. 그들의 고통이 세월호 유가족보다 ‘더한지, 덜한지’는 아무도 판단 할 수 없다. 독자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맞다. 고통에는 위계가 없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런 바다다. 그러나 세상 모든 자녀의 죽음이 뉴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드러나지 않는 고통의 당사자에게는 원통한 일이지만, 사건의 성격과 맥락에 따라 어떤 비극은 뉴스가 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뉴스 여부는 사회적 합의이자 정치적 선택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세월호를 ‘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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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KBS <해피선데이-1박2일>을 보는 날이면 십분을 못 견디고 절규한다. “아 왜 사람을 밥을 안 주냐고!” 원한다면 언제든 각지의 별미를 먹을 수 있는 유명 연예인들이고 ‘복불복’ 게임의 규칙 안에서만 행동의 제약이 걸린다는 것을 알지만, 배고픈 사람을 먹거리로 놀린다는 불쾌감 때문에 내게 <1박2일>은 채널 선택권이 없는 대중식당에서나 가끔씩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불판의 고기를 타지 않게 뒤집으며 이미 KBS를 나온 지 오래인 나영석 PD의 연출에 불만을 늘어놓던 어느 날, 세끼 밥만 해먹으면 된다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1박2일>이 아웃도어 캠핑의 낭만을 제공하듯, 텃밭에 먹거리를 키우는 호젓한 강원도 정선의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삼는 tvN <삼시세끼>는 도시 생활의 피로에 젖은 이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귀농 예능이다. 지나친 BGM에 인스턴트 감성 터지는 자막, 연출자를 비롯한 스탭과 카메라가 자주 노
[유선주의 TVIEW] 그는 미쳐 나는 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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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찾아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디자이너 테조 레미의 <당신의 기억은 버릴 수 없어요>(1991). 버려진 서랍들을 모아 새로 틀을 끼우고 밴드로 묶어 서랍장을 만들었다. 이 아름다운 수납가구의 덤은 쉽게 쓰고 버리는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레미는 손에 남은 물건들로 낙원을 건설한 표류자 로빈슨 크루소에게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혹시 <박스트롤>의 제작진도 레미의 작품을 본 적이 있을까? 영화 속 ‘상자요정’ 종족 역시 인간들의 고물을 수집해 재활용하고 발명하는 친환경적 재간둥이들인 데다가 유사시에는 오작교 짓듯 서로의 몸을 쌓아올려 근사한 구조물을 만들어낸다.
10/20
<나를 찾아줘>의 상영관 출구. “나쁜”, “사이코패스” 같은 단어가 웅성거림 속에서 불거져나온다. 그 말들은 어쩐지 에이미 던(로저먼드 파이크)에게 딱 들어맞지 않는 기분이다. 거기에는 에이미라는 캐릭터의 참담한 면모가 빠져 있다. 귀갓길에 에이미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애타게 에이미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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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은 꿈과 무의식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경력을 바쳤다. 기억을 잃어버린 채 복수의 열망만으로 움직이는 인간을 그린 <메멘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흐트러진 불면증의 세계에 관한 <인썸니아>, 삶 자체를 마술로 둔갑시킨 위대한 마술사들의 몸과 정신이 분열하는 과정을 좇는 <프레스티지>, 제목부터가 ‘무의식의 동기’인 <인셉션>. 심지어 그가 손댄 <배트맨> 시리즈조차 어둠과 박쥐로 표상되는 배트맨의 분열적 자아가 중요한 모티브다. 놀란의 배트맨은 도시의 영웅이라기보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투사해 악당을 살해하고 다니는 정의로운 미치광이에 가깝다. <인터스텔라>는 놀란의 필모그래피에서 무척 예외적인 영화에 속하는데, 블랙홀에 대한 묘사는 하드 SF 마니아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다. 영화 속 블랙홀의 특이점은 우주의 저편이라기보다 기억과 무의식의 저편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놀란이 그리는 꿈과 무의식은 언제나 고
[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무의식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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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의 현대사 다큐멘터리팀 막내로 일하던 시절, 나는 종종 사람들의 오래된 상처를 들춰내는 일을 해야 했다. 대개 국가 폭력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로부터 전화로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는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취재와 촬영을 마친 아이템이 기획과 맞지 않아 편집되었을 때였다. 나이에 비해 머리카락이 일찍 허옇게 세어버린 중년 여성이 남편과 딸을 허무하게 잃은 사연을 이야기하며 눈물짓던 순간은 방송에 나가지 않았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것은 방송을 만드는, 혹은 매체에서 일하는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내 고민의 뿌리가 되었다.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취재 윤리와 인간에 대한 예의는 어느 선에서 지켜져야 하는가.
아마도 SBS <피노키오>의 MSC 보도국 앵커 송차옥(진경)이라면 망설임 없이 답할 것 같다. “시청자한테 먹히는 건 팩트보다 임팩트야.” 대중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라면 조작, 과장, 감정적 연출을 서슴
[최지은의 TVIEW] 질문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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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좀’이란 말이 있다. ‘좌익좀비’의 줄임말이다. 반대말로는 수꼴이 있다. 좌좀의 어원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집권 1년차 이명박은 4대강 사업보다 더 멍청한 짓을 하고 말았다. 바로 쇠고기 파동이다. 다들 기억하겠지만,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막기 위해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꽉 찰 정도로 몰린 시민들은 군사정권 이래 최대 인파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이명박을 지지하는 이른바 우익쪽에선 그 시위대들이 달갑지 않았는데, 보수성향 온라인 사이트- 디시인사이드 혹은 노노데모- 에서 처음으로 시위대들을 좌좀이라 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감에서 알 수 있듯이, 좌좀은 시위대들을 비하하는 말이다. 시위대들의 운집한 형상을 떼지어다니는 좀비의 모습에 빗댄 것인데, 실은 게임이나 영화 속 좀비처럼 “단세포/무뇌아” 혹은 “척결대상”으로 바라보는 무시무시한 우익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조지 로메로의 자장에서 벗어날
[곡사의 아수라장] 좌좀 알레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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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깁슨의 심각한 대작 <아포칼립토>를 보고 있을 때였다. 낯선 땅으로 끌려갔다가 처자식 만나겠다며 열심히 도망치는 전사 ‘표범 발’이 밀림을 헤치고 나와 정면에 등장한 순간,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호나우지뉴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전부 웃음을 참느라 숨이 막혔다, 나만 빼고. 왜냐고? 호나우지뉴가 누군지 모르니까.
나는 스포츠에 있어서는 백치에 가깝다. 아는 외국 축구 선수라고는 마라도나와 펠레가 전부이고(나한테 베컴은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에서 지나가던 엑스트라, 지단은 <무한도전> 게스트, 호날두는 호나우지뉴 검색하다가 얻어 걸린 남자), 추신수가 <무릎팍 도사>에 나오기 전까지 ‘추 선수’는 대체 본명이 뭐길래 너도나도 이름 대신 직업으로만 부르는 건가 궁금해했다. 야구장 한번 가본 적이 없는 3X년 인생, 얼마 전에야 야구장 가면 농약처럼 생긴 생맥주 통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호스로 맥주를 뿜어준다는 걸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작은 물고기도 큰 물고기를 삼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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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이 다 산 나이도 아닌데 여기 아파 저기 아파 올봄부터 엄살깨나 부려왔던 나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특별한 병명이 없는데 왜 이렇게 통증을 호소하는지 모르겠다고 자신들이 무능해서 모르는 건 절대로 아니라는 억울한 표정으로 날 흘겨보고는 했다.
아마 잠을 못 자서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매일매일이 피곤한데 왜 못 자는 걸까요? 이 아줌마야, 당신의 이부자리 잠자리를 왜 내게 와서 펼치고 그러시나… 라고 몹쓸 대거리를 한 의사 선생님은 안 계셨지만 확실히 불면의 원인을 잡아내고 처방전을 내준 의사 선생님 또한 아니 계셨다.
요가를 해. 스쿼시를 해. 발레를 해. 수영을 해. 그런데 말이죠, 요가는 지루해요. 스쿼시는 힘들고요. 발레는 안 어울리던걸요. 수영은 볼륨이 없어가지고요. 운동을 권하는 이들에게 갖가지 핑계를 대던 어느 날 동네에 새로 간판 하나가 걸리는 걸 보았다. 에이스 탁구장. 어라, 탁구? 그래, 탁구로구나!
문득 거실 서랍장 속에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아무래도 덜 아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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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해봤지요? 나도 해봤어요.” “부장님이 마약 하자시는데?” 몹시 수상해 뵈는 저 대사는 실은 마약밀매사건을 맡은 검사들의 대화다. 폐쇄적인 조직, 업무 강도와 부담이 큰 직종일수록 내부인 사이에서 통용되는 줄임말과 권위를 절상하거나 절하하는 은어가 많은데, 검사들이 주인공인 MBC 드라마 <오만과 편견>에도 이런 화법이 빈번하다. “내가 총대 메는 덕에 큰 걱정 덜었다고 사장님이 직접 격려까지 해주셨잖아요.” 여기서 사장님은 인사와 예산을 쥐고 있는 법무부 검찰국장을 뜻한다.
<오만과 편견>은 앞서 마약 대화에서 생략된 검사의 ‘수사와 기소’ 과정을 상세하게 풀어가는 드라마다. 증거가 빈약한 사건들, 과중한 업무로 흘려보내기 쉬운 사건들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수습검사 한열무(백진희)와 수석검사 구동치(최진혁)의 모습은 검사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기는 현재 시점에서 보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다시피한 검사를 미화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다. 조
[유선주의 TVIEW] 우리 시대 검사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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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소년’ 대니얼 래드클리프는 세상이 해리 포터군을 잊을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느니, ‘머글’스러운 근면성으로 다양한 작품과 인물에 투신하는 편을 선택했다. 그간의 부지런한 여정이 있었기에 <킬 유어 달링>의 1940년대 컬럼비아 대학의 풍경이 환기하는 호그와트의 추억은, 관객에게 실소 대신 감회 어린 미소를 자아낸다. 아이비리그풍으로 차려입고 뿔테 안경을 쓴 래드클리프, 고풍스런 기숙사, 도서관의 금서 구역에 잠입하기 위한 소동, 그리고 무엇보다 동성애와 문학적 이상이라는 마법으로 이루어진 비밀스런 세계까지.
10/16
선댄스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보이후드>가 일으킨 선풍이 영화 자체의 특별함보다 제작 방식의 희소성에 기대고 있다는 불평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보이후드>가 ‘태도 점수’를 빼면 남는 게 없는 평이한 드라마라는 감상에는 동조하기 어렵다. 가령 메이슨(엘라 콜트레인) 역에 연령대가 다른 여러 명의 배우를 캐스팅해 통상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처음은 체험, 두 번째는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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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3학년 때다. 학교가 일제시대 때 지은 목조건물이라 찬바람 드는 계절이면 그 선연한 냉기에 잔뜩 몸을 움츠려야 했다. 교실에 있는 온기라곤 석탄난로 딱 하나. 담임은 우리를 성적순으로 그 난로 옆에 앉혔다. 성적이 안 좋을수록 난로에서 멀어졌고, 급기야 꼴찌는 뒷문쪽에 앉아 젖은 새처럼 몸을 떨어야 했다. 담임의 말을 기억한다. “공부 못하면 불을 쬘 자격이 없어.”
어찌나 끔찍한 기억인지 다른 담임들 이름은 죄 까먹었는데, 3학년 담임 이름은 평생 흉터마냥 마음자락에 각인되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엊그제, 경북 칠곡초등학교의 급식 뉴스를 접하자마자 단번에 그 기억들이 악몽처럼 되살아난다.
초딩들이 성적순으로 점심 급식을 받는단다. 항상 꼴찌한다는 아이 말이 눈을 찌른다. “전 성적이 안 올라서 1년 내내 꼴찌로 밥을 먹었어요.”
세상은 그렇게 변한 게 없다. 30년 전 난로에서 가장 멀리 앉은 채 불을 쬘 자격을 얻지 못했던 꼴찌와 1년 내내 배고픈 위장을 틀어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급식은 성적순이(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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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집에서 나가 살 날이 가까워지자 김치볶음밥과 떡볶이밖에 할 줄 모르는 자식이 걱정된 엄마는 식탁에서 자꾸 ‘오늘의 레시피’를 주입하려 애쓰신다. 시금치는 끓는 물에 너무 오래 데치지 말고 잠깐만 넣었다가 꺼낸 다음 꼭 짜서 깨소금과 참기름을 적당히 넣어 무쳐야 하고, 물김치를 담글 땐 칼로 배추 잎을 길쭉하게 슥슥 쳐낸 다음 살짝 절였다가 고춧가루와 매실 엑기스에 찹쌀 풀을 쑤어서… 네? 풀을 쑤어서? 마치 주기율표만 간신히 외운 학생에게 유기화학 응용문제를 제시하는 듯한 고난도 가르침에 점점 요리가 두려워지던 차, 구미 당기는 레시피를 들었다. “신동엽이랑 성시경 나오는 요리 프로에서 그러는데, 김치찌개 끓일 때 새우젓이랑 깨를 갈아서 돼지고기를 재우면 맛있대.”
40년 가까이 김치찌개를 끓여온 주부가 참고하는 요리 프로그램이라니, 뭔가 엄청난 비법을 가르쳐주는 건가? 그래서 올리브TV의 <오늘 뭐 먹지?>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오늘
[최지은의 TVIEW] 일단 완성하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