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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클론즈>는 레트로봇의 전작 <또봇>에 이어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보여준다. 부모가 행방불명된 후 가계부채에 쫓기며 생활하던 오씨네 5남매는 요금미납으로 끊긴 전기를 공짜로 얻어보려는 동기로 얼결에 지구방위대가 된다. 영웅의 의미 같은 것은 임무를 거듭하며 각기 성격에 맞는 경로로 찾아간다. 바쁘게 일하고 소소하게 행복한 5남매의 이야기는, 고전 만화 <비둘기 합창>이나 일하는 소년 소녀를 그린 이원수의 동화를 추억하게 만든다. 예쁠 것도 못날 것도 없이 그저 생생한 한국적 공간과 생활 문화의 묘사는 소박한 인류학의 경지다.
04/05
<팔로우>(It Follows)의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은 10대 후반이라는 인생의 특정 시기를 특정한 무드로 표현하기 위해 장르를 유용하고 호러의 장치를 횡령한다. 이를테면 <팔로우>의 소녀들은 과거 호러의 여배우들만큼 헐벗고 돌아다니지만 노출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실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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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한국 TV를 본 어느 유럽에서 온 외국인이 ‘한국은 게이 인권이 많이 보장된 국가 같다’고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수많은 남성 예능들, 게이 패션으로 치장한 남성 아이돌의 떼군무가 구라파 파란 눈에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 싶었다.
10년도 넘었다, 남성 예능들이 공중파를 장악한 게. 하긴 예능뿐이랴. 영화, 드라마에서 여배우 중심의 서사는 드물어졌을 뿐만 아니라 여배우가 원톱으로 나오는 영화들은 졸지에 천연기념물 신세가 됐다.
IMF 직후 집중 조명된 아버지들의 ‘눈물’은 남성 대서사시의 서문 격이었다. 이후 TV와 영화, 잡지 등 한국의 거의 모든 매체들은 경쟁적으로 남성의 서사를 재구축해왔다. 남성들이 아기를 돌보고, 함께 여행을 하고, 요리를 하고, 남자의 자격증을 따고, 연애와 결혼에 대해 훈수를 두고, 자아를 찾는 이 기나긴 서사의 여정은 지난 한반도 역사에는 남성이 아예 없었다는 듯 마치 한풀이처럼 계속 이어져왔다.
서사시의 역사가 그렇듯, 한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혐오와 억압으로 쓴 남성 대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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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아니 고등학생 시절까지 연결되는 추억 중에 일명 ‘책차’가 있다. 자그마한 크기의 빛바랜 베이지색 차에는 책이 가득 실려 있었고, 그 책들은 주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와 같은 베스트셀러이거나, 만화이거나, 세계문학 전집류가 아니라면 무협지였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내가 받게 되는 선물이 밤을 새워 무협지를 읽을 수 있다는 거였다. 김용 작가의 <대륙의 별>(원제 <천룡팔부>), <아! 만리성>(원제 <소오강호>) 같은 작품들을 이부자리 옆에 쌓아놓고, 한권씩 격파해나갔다. 그 책들의 종이 냄새와 새벽 3시10분을 가리키는 탁상시계의 바늘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난 그때 무언가로부터, 초인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tvN에서 매주 금요일 단 1회씩 방송되는 <초인시대>. <SNL 코리아>의 ‘극한직업’ 코너를 통해 청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한 유병재가 각본을 쓰고, 직접 주연까지 맡은
[김호상의 TVIEW] 아픈 청춘의 적나라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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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을 살면서 제법 많고도 다양하고도 강력한 인간 폭탄을 만나왔다고 자부하지만 아직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부류가 있으니, 바로 시어머니다. (이젠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날 것 같다.) 그래도 남의 시어머니 욕은 많이 들었다. 돌 지난 아기를 데리고 시댁에 갔던 동생이 돌아와 울면서 하소연했다. “아기가 어쩜 이렇게 볼품없이 마르고 못생겼냐는 거야. 그게 손녀한테 할 소리야? 엉엉.” 근데 동생아… 사실이잖아. 동생의 시어머니는 객관적이었다. 조카 얼굴이 그분 아들 판박이고 그분 아들 얼굴은 그분 판박이기는 했지만.
한번은 결혼한 친구가 공포에 질려 하소연했다. 그간 풍문으로만 들었던 시어머니의 폭력을 직접 목격했다는 것이었다. 시댁을 먹여살리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남편 패는 걸로 풀곤 했던 그 애의 시어머니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손아래 시누이들도 때리기 시작했는데, 며느리를 새로 들인 다음부터는 참고 살다가, 결국 성질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시고모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질질 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내 아들은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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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아니, 이성애자 페미니즘. 아니, 이성애 중산층 고학력 비장애인 젊은 백인 여성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여성 인구만큼이나 많다. 지향도 다 다르다. 페미니즘은 다양하지만 공통 이해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아는 한, 페미니즘은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사유 체계다.
마르크스주의부터 채식주의까지 모든 주장은 ‘가장 올바름’을 경합하는 성질이 있다. 정통(authenticity)과 기원 논쟁은 위험하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선언이 실천으로서 요구되는 상황을 제외하면, 인간의 행위가 있을 뿐 고정된 행위자는 없다.
페미니스트라는 지칭은 그에 합당한 행동을 일관되게 했을 때 남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문제다. 스스로 자칭하는 것은 국어에도 맞지 않고 민망한 일이다. 여성학 강사나 여성학 교수라는 직업이 여성주의 면허증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실천 속에서 검증되고 변화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어느 ‘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여자로 살기, 여자로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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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단위 이야기에서 정서적 공감과 소재를 찾는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다보면 상속 분쟁이나 결혼까지 이르는 갈등을 부풀리려고 대가족을 끌어들이는지, 이미 낡아버린 대가족 설정을 지속시키기 위해 상속과 결혼 갈등을 반복하는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어쨌거나 사람이 모여야 이야깃거리가 생기는 게 드라마라, 예전 같지 않은 가족의 영향력을 과장하면서 생기는 무리수가 빈번한 와중에, 생활고로 인해 부모 집에 얹혀사는 연어족이나 셰어하우스 형태로 유사가족을 이루는 드라마도 한동안 꽤 유행이었다. 결혼과 출산이 계속 감소하면서 서울시 1인 가구 비율은 27%에 이르렀고, 결혼 전까지 잠시 독립해 사는 정거장처럼 다루던 드라마 속 1인 가구의 삶 역시 수정되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가장 빠른 답을 내놓은 tvN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는 서울 도심의 오피스텔에서 정부 청사 이전으로 한국에서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아진 세종시로 무대를 옮기며 시즌2를 맞았다.
밥은 외식
[유선주의 TVIEW] 삶을 혼자 감당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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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 일이다.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놀던 나는, 배수관에 숨었다가 몸이 끼고 말았다. 옴짝달싹 못한 채 구해달라고 소리치며(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혼자서 몸부림치다가 5분 만에 스스로 기어나오긴 했지만, 그 5분은 정말이지 5시간, 5일, 5달, 아니 5년 같았다. 시간은 마치 무한히 느려져서 정지된 것 같았다. 시간 감각 대신에 나의 측두엽을 강타한 것은 끊임없는 인과적 반성이었다. 내가 왜 이 지경에 처하게 됐을까, 어떤 루트를 탔더라면 여기에 오지 않게 되었을까, 내가 이 지경이 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을까, 지금쯤 친구들은 날 찾을까, 엄마는 내가 이 지경이 된 걸 알고 있을까…. 온갖 인과적 추론으로 위장된 망상들 말이다. 5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흡사 정지된 것처럼 퇴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겹겹이 퇴적되어가는 망상들이다. 물론 이 지층에도 두 계파가 있다. 한편에는 지금쯤 친구들이 날 찾기 시작했을 테니 구조대를 기다리자는 순진파가 있고, 다른 한편
[곡사의 아수라장] 우리 모두 죄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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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다. 오래전 일이다. 자정이 넘도록 잠이 오지 않아 TV를 틀었다.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맞추다 2번에 가서 시선이 멈추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가늠할 수 없는 누군가가 거기 있었다. 얼굴 가득 두껍게 분칠을 하고 빨갛다 못해 검정에 가까운 립스틱을 칠한 채 엄청나게 큰 두눈과 입을 껌벅이며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렇게 생긴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런 목소리도 처음 들었다. 게다가 자꾸만, 브라운관 너머의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영화 속 인물이 왜 상대역을 보지 않고 내쪽을 바라보며 말을 하고 윙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공뿐만이 아니었다. 그 영화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상했다. 이상했다, 라는 말 이외에 저 모든 광경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내 또래가 90년대 초반에 이 영화를 봤다면 그 경로가 대개 이와 비슷할 것이다. <록키 호러 픽쳐 쇼>(1975)였다.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팀 커리의 이십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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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로우>의 결말을 포함해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전철역 사물함에 핏덩이일 때 버려져 ‘엄마’(김혜수)의 조직에서 길러진 <차이나타운>의 일영(김고은)에게는, 쓸모가 곧 존재 이유다. 과연 매우 유용한 존재로 자란 소녀의 견고한 세계는, 딱 한번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 머문 시선으로 인해 균열한다. 우리는 이런 분기점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차이나타운>의 일영은 종종 <달콤한 인생>의 선우(이병헌)가 섰던 자리에 정확히 당도한다. 선우는 첼로 켜는 여자를, 일영은 요리하는 남자를 응시한다. 그래서 비슷한 궤적 안의 차이를 살피는 일이 더 흥미롭다.
04/02
“이제부터 ‘그것’이 널 따라올 거야. 나도 누군가에게 받았고 방금 너한테 넘겼어. 새로운 상대와 섹스해야만 저주를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다음 사람이 ‘그것’한테 잡히면 저주는 네게 돌아와.”
사귀는 청년 휴(제이크 위어리)와 첫 섹스를 나누고 깨어난 제이(마이카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장르라는 은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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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1차대전의 패배로 식민지를 모두 잃고 거대한 전쟁배상금을 빚져 만신창이가 된 채 대공황 시대를 맞았다. 나치가 급부상한 배경이다. 군사적 전체주의와 순혈주의, 그리고 극우 민족주의는 2류 시대를 지나는 공동체의 풍경이며 열패감의 거울상이었다. 더 우월한 것을 쫓기보다는 더 열등한 것을 찾아 위안받는 쪽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훨씬 편리한 치유방법이기 때문이다. 냉전 이후 네오나치즘이 제1세계의 저소득층과 자본주의의 위력 앞에 급작스럽게 노출된 공산권 국가를 중심으로 떠오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에 등장한 ‘일베’는 변형 나치즘에 가까워 보인다. “여자들이 지나치게 보호받고 있다. 남자가 역차별당하고 있다. 무능한 여자들이 사회의 요직을 가져가려 한다. 여자는 남자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일 뿐이다. 이 나라는 우리 남자들의 것이다!” 차별이 공상적 피해의식으로 전화되는 현상은 하나의 공식과도 같다. ‘여자’를 ‘유대인’으로, ‘남자’를 ‘독일인’으로 바꾸면 빼거
[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일베여, 세계로 뻗어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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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일, 주당 최소 133시간 근무에 요리, 언어, 운전, 교육 등 다양한 자격이 필요함. 휴가는 없고 휴일에는 더 많은 업무가 주어짐. 연봉으로 환산하면 3천만원이네, 4천만원이네 하며 가끔씩 언론에서 언급하지만, 사회에서 동등한 노동력으로 인정되기는 아직도 갈 길이 아주 먼, 심신이 고단한 바로 그 직업.
‘격한 공감 엄마 예능’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tvN에서 방송되고 있는 프로그램, <엄마사람>은 바로 그 직업인 ‘엄마’를 다룬다. 세명의 연예인 엄마가 출연한다. ‘투투’의 황혜영, ‘쥬얼리’의 이지현, 그리고 ‘만능MC’였던 현영. 그들은 연예인의 모습을 벗고 화면에서 민낯으로 시청자와 만난다. 하지만 우리와 굳이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도, 감정을 공유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극히 평범한 삶의 순간을 우리와 공유한다. 아이를 재우고, 씻기고, 유치원 보내고, 짬짬이 식은 국에 만 밥을 입에 옮기고, 가끔은 과도하게 행복한 표정으
[김호상의 TVIEW] 엄마들이여 여기로 모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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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스물다섯 시절, 얼굴이 깡패(그리고 하는 짓도 깡패)인 선배가 지령을 내렸다. “반드시 현장에 잠입해서 내밀한 사정을 담은 기사를 써와라.” 내밀이 아니라 은밀이겠지, 그렇게 궁금하면 지가 가든가, 투덜투덜. 선배가 알고 싶었던 그 현장이라는 것은 어느 저예산영화의 베드신 촬영현장이었다.
사진기자도 없이 왠지 부끄러워 혼자 볼을 붉히며 현장에 갔더니 장소가 좁아서 밖에 나와 놀고 있던 스탭 아저씨들이 나를 반겼다. “마침 잘 왔어요, 사람이 부족했는데.”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나는 다시 한번 볼을 붉혔다. “전 취재하러 온 사람인데요?” “뭐가 궁금해, 남자배우 사이즈가 궁금해? 걔가 얼마나 작은가 하면 말이야…. 아무튼 우리가 다 알려줄 테니까 한판만 타자, 응?” 그래서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카드를 잡았다. 부하들이 일하는 사이 심심했던 대장들은 ‘말(馬) 타기’라고 부르던 자체 개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회사나 남의 회사나 대장들이란….
몇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쫄리면 뒈지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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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셜포비아>와 <팔로우>의 중요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데르센과 동시대를 산 덴마크 화가 크리스텐 콥케(Christen Købke, 1810~48)의 <도세링겐에서 바라본 풍경>(1838)이다. 오랫동안 나는 이 그림을, 떠나가는 나룻배를 선창의 두 여자가 전송하는 풍경이라고 이해해왔다. 저쪽 기슭에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전 무심코 꺼내 본 이 그림은 무사히 돌아오는 배를 기다리는 광경으로 홀연히 바뀌어 있었다. 다가오는 배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는 두 사람의 뒷모습과 작은 국기가 걸린 곧은 깃대가, 이 구도 정연한 그림의 축이다.
03/13
홍석재 감독의 <소셜포비아>에는 서늘한 두 그림이 있다. 하나는 타인을 간단히 규정짓고 단죄하는 집단 권력에 중독된, 살아 있는 군상이다. 신상정보를 털어 ‘현피’를 뜨러갔던 일군의 SNS 이용자들은, 승리 대신 상대 민하영(하윤경)의 시신을 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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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16일, 그날로부터 1년이 지났다. 어제 일만 같은데 그새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갔다. 여전히 배는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고 유가족이 되고 싶어 드러누운 실종자 가족이 아홉 가정이나 되며 어처구니없는 일 처리로 질타의 대상이 되었던 그 대통령은 여전히 그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나는 어땠나. 처음엔 팽목항 언저리라도 가서 바다 냄새를 맡아야지 했었다. 울분에 차서 정부를 향한 쓴소리에 목소리를 얹고 또 얹어가며 시급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는 했었다. 뒤져보니 다 지난해 봄에 쏠려 한 일이었지 여름부터는, 가을과 겨울을 넘어서부터는, 내 살기에 급급한 흔적뿐이었다. 전세대란이 컸다. 장기불황의 여파는 밥벌이로 삼은 출판계를 먹구름처럼 뒤덮은 지 오래라서 사지도 않을 책을 만들기 위한 무기한의 무력한 노동은 결국 여러 병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병원 신세를 지며 아픈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은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그들 또한 앓고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죄책감, 다음에는 뭐라 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