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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친구도 없이 혼자 조용히 앉아 있던 나에게 한 소년이 다가와 수줍게 뭔가를 내밀었다. 갱지 여러 장을 실로 묶어서 만든 만화책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만든 만화책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연필로 촘촘히 그린 만화책의 표지에는 ‘아까끼의 새 외투’란 제목과 글, 그림으로 소년의 이름이 있었다. 소년은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유심히 보고 친구가 되고 싶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었는데 만화 그리기를 그림 낙서 수준으로 하던 나로서는 경천동지의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무수히 많은 그림 낙서계의 만화의 신들을 만났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스쿨버스의 뒷좌석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서 마음에 드는 아이들에게만 그림을 그려주던 6학년 형. 그 형 앞에는 많은 아이들이 아부의 탄성을 내뱉으며 자신의 공책 뒷장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줄을 서 있었다. 그 형은 아이들의 공책에 일필휘지. 요괴인간의 뱀, 베라, 베로와 타이거 마스크를 그려주고 있었다.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베트남은 패망했고 나는 만화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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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국영화가 이렇게 됐단 말이냐!” 10년도 더 된 김상진 감독의 <신라의 달밤>(2001) 시사회가 끝난 다음 일부 평론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쏟아낸 말들이었다. 그보다 3개월 앞서 개봉한 <친구>(2001) 시사회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국영화계에 ‘조폭’이라는 좀비들을 불러낼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역시 ‘말세’를 외쳤다. 이른바 ‘저질 코미디’, ‘저질 깡패영화’의 양산체제가 시작된 것처럼 걱정들을 쏟아냈던 것. 그러다 몇해 전 우연히 케이블TV에서 시간차를 두고 <주유소 습격사건>과 <신라의 달밤>을 연달아 본 적 있다. 예전에 본 그 영화가 맞나 싶었다. 뭐랄까, 요즘 한국영화들에 비하면 오히려 순진한 구석이 많은 영화였다. 당시 과하다고 느꼈던 코미디는 외려 소박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친구>도 이후 나온 여러 아류작들에 비하면 오히려 클래시컬한 향기를 풍긴다. 유난히 세월의 때를 깊이 타는 영화의 특성 때문
[에디토리얼] 반가운 옛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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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에이프(KEITH APE)의 공개 싱글 <잊지마>(It G Ma)의 성공은 올해 상반기 한국 힙합을 통틀어 가장 화제가 된 사건이었다. 다들 잊지 마. 키스 에이프는 이 노래로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로서는 최초로 빌보드 차트 케이팝 영상 부문 순위에 들기도 했다. 이 노래의 인기 덕분에 그는 미국의 음악 축제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무대에 설 수 있었고, 현재는 본격적인 미국 활동을 위해 출국한 상태다.
<UNDERWATER REBELS>는 미국의 젊은 흑인 래퍼 켄 레벨(KEN REBEL)이 얼마 전 공개한 싱글이다. 그러나 곡의 주체가 켄 레벨로 표기되어 있는 것과 별개로 이 노래는 누가 들어도 키스 에이프의 <잊지마>의 연장선으로 들린다. 느릿한 트랩 비트와 동양적인 선율이 그렇고, <잊지마>의 주역(?)인 키스 에이프의 크루 ‘코홀트’(Cohort) 멤버들이 이번에도 참여한 것이 그렇다.
즉 <잊지마>
[마감인간의 music] 눈치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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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를 먹는다 생각하고 먹어라. 교수가 말했다. 교수가 내민 병에는 동료들의 인분이 들어 있었다. 인분을 먹고 인간이 되라는 게 교수의 주문이었다. 그는 먹어야 했다. 그가 당한 고통은 인분을 먹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시로 동료들과 교수에게 얼차려를 받았고 얼굴에 비닐봉지가 씌워진 상태에서 호신용 스프레이를 맞아야 했으며 피부가 괴사할 지경에 이를 때까지 야구방망이로 구타당하기도 했다. 며칠 동안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는 이 일을 지난 2년 동안 당해왔다. 교수가 지시했고 두명의 동료가 동참한 일이었다. 교수는 경찰 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 악마가 씌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이런 일을 마주했을 때 대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린다. 왜 당하고 있었을까. 동료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여자였다. 충분히 폭행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우선 권위와 위계에 의한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교수는 해당 분야의 권위자였다. 과거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그들은 모두 평범한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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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아웃>과 <숀더쉽>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인사이드 아웃>의 캐릭터 기쁨(Joy)과 슬픔(Sadness)은 일반명사와 구별하기 위해 ‘조이’와 ‘새드니스’로 표기합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태희(배두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시키는 것”을 일괄 주문하는 아버지에게 “때리는 것만 폭력이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파스카>의 가을(김소희)은 채식을 한 지 오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불고기를 들이민다. “비싼 거야, 먹어. 채식은 혼자 있을 때나 해!” 가을과 스무살 연하 요셉(성호준)의 관계는 멀쩡하다. 둘은 가난하지만 충분히 좋은 삶을 살고 있다. 성실히 일하고, 힘들어도 남에게 고통을 전가하지 않으며 더 약한 존재를 도울 ‘여력’마저 견지한다. 폐인과는 거리가 먼 이 평범한 커플을 위험한 국외자로, 비련의 주인공으로 몰아가는 건 “네게 뭐가 좋은지 내가 더 잘 안다”고 믿는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슬픔이랑 사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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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비평가(이하 ‘비’):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에서는 전자기력, 강력, 약력은 중력과 전혀 조화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세 힘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양자장 이론과 수학적으로 충돌하죠. 우주의 반쪽만을 설명하는, 말그대로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이론이지요. 요즘에는 똑똑한 학생들도 그 정도는 이해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과대평가되었어요.
과학자(이하 ‘과’): 요즘 학생들이 아인슈타인보다 똑똑해서 이해하는 게 아니에요. 아인슈타인이 중력이론을 완성해놓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창조와 이해는 차원이 다른 작업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 이론만큼 안정적인 이론이 얼마나 되죠?
비: 과학이론의 결함을 비판하고 채찍질하는 게 제 임무입니다. 불완전한 것을 다른 불완전한 것보다 덜 불완전하다고 칭찬할 수는 없습니다. 그 논리라면 거꾸로 과학비평가는 어떤 과학이론도 비판할 수 없게 됩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 고유의 업적이라고 해봐야 중력을 해석학적으로 설명해낸 아이디어 정도인데
[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과학자와 과학비평가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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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인터넷 서점의 음반 코너, ‘예약음반’란을 훑어본다. 1995년의 <신세기 에반게리온> O.S.T에 이어지는 예약목록은, 1979년 레드 제플린의 <In through the out door>. 이들은 모두 LP다. CD로, 그리고 SACD로 고음질과 간편함을 찾아 헤맸던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2015년 사람들은 LP를 듣고 있다. 턴테이블에 바늘을 올려놓고, 진공관 앰프의 불빛을 벗 삼아 흘러간 시간을 듣고 있다.
올리브 채널에서 약간은 다른 여행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다. <MAPS>. ‘로드뷰 지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다. 김희철과 쌈디가 한차에, 최강희와 유리가 다른 한차에 탑승해 제작진이 지시한 업데이트를 지켜가며 로드뷰를 만들어나간다. 이들에게는 다섯 가지 규칙이 주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40km 이하의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비게이션이 없는 여행을 해야 한다는’
[김호상의 TVIEW] 강제저속여행의 찜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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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 변이, 변신, 변용, 변형. 그 무엇으로 부르든지 간에 한동안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관심사는 일관되게 그곳에 있었다. 의식을 점령하는 영상의 문제를 다루든(<비디오드롬>), 과학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한 인간의 끔찍한 초상을 다루든(<플라이>), 자동차 충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성적 희열을 다루든(<크래쉬>), 그곳에서 인간은 변태가 된다.
<비디오드롬>(1983)에서 성인물 케이블 방송의 사장인 맥스(제임스 우드)는 가학적 (실제) 포르노물에 의식을 빼앗기자 그의 장기들은 어느새 비디오플레이어로 바뀌었고, 그의 공격성이 고개를 들 때 그의 손은 권총과의 기이한 결합물로 변이된다. 반면에 <플라이>(1986)는 변태의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다룬다. 획기적인 전기운송장치를 발명한 과학자 세스(제프 골드블럼)는 자신을 취중에 (이거 조심해야 한다) 직접 실험도구로 사용하다가 실험기기 안으로 날아든 파리와 합성되어 획
[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혼합과 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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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즐겨 듣는 팟캐스트는 <노유진의 정치카페>다. 노회찬, 진중권과 함께 출연자 중 하나인 유시민 작가가 늘 하는 얘기는 바로 ‘들으면서 공부가 되는 팟캐스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들의 말발에 취해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은근한 공부가 된다. 이제 편집장이 된 지 6개월 정도 된 것 같은데, 여러 인터뷰 혹은 사적으로 만난 이들이 으레 던지는 질문이 바로 편집 방향에 대한 것이다. 여전히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지만, 굳이 답을 하자면 그와 마찬가지로 공부가 되는 잡지를 만드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1003호 글쓰기 특집, 1009호 페미니즘 특집, 1010호 드론 특집, 1012호 표절 특집, 1013호 LGBT 특집 등이 그랬던 것 같다. 마니아 입장에서는 다소 성이 차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때문이었다는 소심한 변명을 해본다. 당연히 재미도 있어야겠지만 함께 공부하는 잡지를 만들고 싶다. 그런 고민과 더불어 이번호 특집은 한국형 DP 시스템에 대한
[에디토리얼] 공부하는 잡지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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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그래서 오랜만에 공포영화가 보고 싶었다. 슬래셔 고전 <스크림>이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가장 “공포영화”스럽기 때문이리라. 인트로부터 범인은 게임을 걸어온다. 공포영화 <할로윈>의 살인마 이름을 맞혀보라는 것. 마이클 마이어스. 딩동댕. 그렇다면 <나이트메어>의 살인마는? 프레디 크루거. 딩동댕. 그럼 <13일의 금요일>의 살인마는? 제이슨. 땡! 틀렸음. 뭐라고? 하키마스크를 쓴 살인마 제이슨 맞는데?(정답은 영화를 다시 보면서 확인 바람.) 어쨌든 요런 영퀴를 내면서 <스크림>은 시작되고, 게임의 유쾌함을 시리즈 내내 유지하면서 슬래셔영화의 고전이 되었던 것이다.
슬래셔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그 가벼움과 유쾌함일 것이다. 피해자의 사지가 절단되고 피가 낭자해도, 심지어 내 친구가 범인이었어도 관객은 팝콘을 먹으면서 비명을 지르며 즐거워하면 그만이다(이런 팝콘무비의 기원은 1970년대 드라이브 인 시어터 문화일 것이다
[곡사의 아수라장] 도축장과 지옥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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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의 애플 뮤직(Apple Music) 판올림 후, 처음 ‘본’ 음악은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의 <프리덤> 뮤직비디오였다(애플 뮤직에 단독 공개했다). 화면 속 도시와 오지를 오가는 푸른 작업복 차림의 그는 기아와 전쟁, 착취와 투쟁 같은 인류가 당면한 사회문제들과 <디스커버리 채널> 홍보 영상처럼 보이는 광활한 지구 풍경을 오간다. 화면은 다시 생명의 탄생과 우주인의 도시 착륙을 보여주고, 말버러 광고를 연상하게 하는 카우보이들과 거대한 고래를 바라보는 통통배 속 노인에 이르며 미지와 인간의 조우를 담는다. ‘Your first name is free, last name is dom’을 외치는 윌리엄스는 뮤직비디오가 정적에 들어서는 시점까지 자유, 자유, 자유를 외친다. 2014년을 휩쓴 싱글 《해피》(Happy)는 윌리엄스가 풀어내는 서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절친한 동료 음악가들처럼 부와 명성을 자랑하는 대신, 보편적인 인류 감
[마감인간의 music] 크리에이터와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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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을 하느라 학교를 떠났던 선배가 몇년 만에 돌아왔다. 1980년대 운동권 대학생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는 모두 두근두근했지만 여전히 노동운동을 하는 중이었던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1학년이 주로 듣는 전공 필수 과목 중간고사 날까지는. 과연 노동운동가답게 아저씨 기지 바지와 아저씨 광택 티셔츠를 입은 그는 무섭고도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강의실을 관찰하다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1학년이지? 내가 공부를 많이 못했다. 네 답안지 좀 볼 수 있겠냐.” 동기들은 경악했다. 고르고 골라 왜 하필 쟤야. 아아, 선배님, 눈빛만 날카로웠지 안목은 무디기 그지없으시군요.
공부를 매우 잘하게 생겼지만 겉모습만 보고 사람 판단하면 안 된다는 교훈의 살아 있는 증거인 나는 간신히 절반 채운 답안지를 내고 강의실을 떠났고, 선배는… 한 학기를 더 다녔다. 12년 공부해서 들어온 대학, 10년 만에 졸업했다. (워낙 글씨를 못 써서 선배는 내가 쓴 절반의 답, 그것의 절반도 알아볼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베짱이처럼 놀고 먹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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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흑백 그래픽 노블 같다. 소녀(실라 밴드)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며 너무 많은 것을 본 뱀파이어다. 차도르를 두른 소녀는 이란 어디쯤인지 미국의 이란계 이민공동체인지 모호한 ‘악의 도시’에서 무감동한 사냥을 이어간다. 검은 차도르는 소녀의 생을 휘감은 작은 적막처럼 보인다. 소녀는 사냥할 때 상대와 비슷한 속도와 자세로 다가간다. 이때 차도르는 그림자놀이의 ‘코스튬’으로 변한다. 스케이트보드를 탄 소녀가 밤거리를 미끄러지면 바람을 품은 차도르는 돌연 슈퍼히어로의 날개가 된다. 사물은 주어진 용도를 배반할 때 송곳니 같은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굴레가 무기로 변하는 경우야 말할 나위도 없다.
06/20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 개봉을 둘러싼 시끌벅적함을 지금도 기억한다. “공룡이 살아 움직여!”라는 탄성이 우선 전 지구적으로 울려 퍼졌고, 곧이어 사운드가 이미지 못지않은 스릴의 원천임을 입증하는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테마파크의 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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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 비행선을 띄우는 일과 지하로 철도를 달리게 하는 일… 인간이 상상하지 않았다면 불가했을, 무에서 유를 창조했으니 어쩌면 신비롭다 할 수도 있는 그 과정 속 지난한 결과물 가운데 후자인 지하철에 오늘도 나는 오른다. 물론 억만장자는 아니니 앞으로도 우주선을 타고 별들의 침묵 사이사이를 후비고 다닐 가능성은 아마 제로이지 싶다. 만약 돈이 생긴다 해도 나는 하늘이 아닌 땅에 투자했을 터, 어쨌거나 나는 내 발만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몸에만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저녁 7시 반 무렵인가, 휠체어 고정벨트 함이 있는 지하철 9호선의 한 칸에 서게 되었다. 쿠션은 아니지만 폭신한 등받이가 기둥으로 붙어 있어 가능할 때는 내 등을 기대도 된다는 의미로 읽었는데 순간 이 안내문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 ‘뚜껑을 열고 안전벨트를 당겨 휠체어 팔걸이에 걸고 고정하십시오. 사용 후에는 벨트를 원위치시키고 뚜껑을 닫아주십시오.’ 살피가 겹겹 붙게 쪄낸 만두처럼 내 살과 네 살이 붙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상식은 얼마나 어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