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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제작자를 만났다. 스릴러를 만들었지만 맨날 보는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였던 그는(당시 나이 40대 중반, 남성) 그 영화의 반전과 그런 반전을 창조한 감독의 재능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기가 막히지 않아? 그런 반전 한번이라도 본 적 있어요?” “두번.” 그는 당황했다. “**** **하고 *** ***. **** **는 지금 극장에서 해요, 가서 보세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아니, 그걸 베꼈다는 얘기가 아니라….” 아아, 그 말만은 하지 말 것을 그랬습니다.
그와의 대화를 원고지 36매로 옮겨야 월급이 나오는 밥벌이의 절박함도 잊고 잠시 혼자만의 세계에 침잠해 한없이 가벼운 나의 조동아리를 뉘우치고 있자니 그가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그래도 이거 들으면 놀랄걸?” 같은 감독이 준비하고 있다는 엄청난 연쇄살인 이야기를 신이 나서 들려주던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진짜 살인자는 저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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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휴가를 다녀왔다.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관광차 다녀온 7박9일 미국서부 패키지 투어였다.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샌프란시스코와 라스베이거스, 그리고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그랜드캐니언 등을 경유하여 로스앤젤레스까지 샅샅이 훑는 여행이었다. 처음에는 의무감 절반으로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확실히 영화 촬영지들을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미국 땅에서 거의 매일 한식을 먹는 한식대첩을 찍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 촬영지를 돌아다니는 여행을 즐기기에 더없이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존 포드의 영화적 고향 모뉴먼트 밸리까지 가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더 록>의 샌프란시스코 알카트라즈 감옥과 <행복을 찾아서>의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행오버>의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과 <오션스 일레븐>의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 등 남부럽지 않은 휴가의 마침표를 찍었다.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와 가장 다른 점 중 하
[에디토리얼] 겨울이 왔다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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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바두가 오랜만에 새 음반 《But You Caint Use My Phone》을 선보였다. 정확히는 믹스테이프(mixtape) 형태로 출시되었는데, 오는 2015년 12월4일 정식 출시에 앞서 미국 블랙 프라이데이 시즌이 한창이던 11월27일, 아이튠즈와 애플 뮤직에 먼저 공개했다. 총 11곡을 담은 음반은 2010년 에리카 바두의 다섯 번째 정규 음반 이후 처음으로 정규 음반에 버금가는 규모이다. 흥미로운 점은 음반 제목처럼 ‘전화’(phone)를 중심으로 구성한 하나의 컨셉 앨범이라는 점이다. 첫곡 <Caint Use My Phone(Suite)>은 반복하는 전화 송신음이 화음을 갖춘 멜로디로 변하며 풍성한 음색을 띤 목소리와 어우러진다. <Phone Down> <Mr. Telephone Man> 등 거의 모든 곡의 제목이 직접 ‘전화’라는 컨셉을 언급하는데, 수록곡의 배경음악 역시 전화에서 발생하는 소리 요소들과 기성 음악 장르의 비트를 결
[마감인간의 music] 전설의 트렌디한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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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그걸 내면 뭐가 좋은데?” 열여섯살의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천진하게 반문한다. 당시 열아홉살의 기획사 신입사원이었던 닉 시멘스키는 소녀를 녹음실로 데려갔고, 다음 일은 모두가 아는 대로다. 두 사람은 동료이자 친구가 된다. 뒷날 닉이 매니저를 그만둔 후 에이미의 약물 중독은 악화된다.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에이미>에 담긴 인터뷰에서 닉은 한번도 본인의 마음을 언급하지 않지만, 그가 찍은 비디오와 회고담을 보고 듣는 동안 우리는 이 매니저가 에이미를 어떤 식으로든 사랑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에이미는 닉이 촬영한 영상 속에서 가장 건강하고 아름답다. “에이미, 네 작은 중심엔 뭐가 있어?” 화면 밖에서 닉이 묻는다. 멋쩍게 답을 피하며 담요 아래 숨는 소녀의 이마 위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영원의 햇빛이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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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브릿지>에서 톰 행크스의 연기는 <다빈치 코드>와 <레이디킬러>를 한꺼번에 면책하고도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백 투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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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연말이면 다사다난했던 한해라고 일년을 정리하곤 하지요. 나는 살짝 비틀어 이렇게 말해보고 싶네요. 올 열두달이 아주 ‘가지가지’하더라고. 워낙에 가지를 좋아해서 그 보라에 반해서 요 가지에게만큼은 불평을 싣지 않으려 했으나 어쩌겠어요. 그게 딱 그 맨홀에 그 구멍인 것을요. 생각해보니 집 앞 손바닥만 한 텃밭에 심었던 가지 농사도 올해는 가뭄이 들어 망조였지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요. 가만, 여러분들은 괜찮았는데 나만 매번 실패를 실패에다 감아댔던 걸까요.
며칠 전 3호선 지하철을 탔는데요, 도르르 노란색 실이 두툼히 감긴 실패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거였어요. 철로의 덜컹거림에 따라 노란 실패는 바퀴도 아니면서 전투적으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지 뭐예요. 그런데 서서 가는 사람이나 앉아 가는 사람이나 누구 하나 줍지를 않아요. 그게 특별한 재주여서 그 묘미를 감상하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누군가가 실수로 흘린 실패였을 텐데 나 몰라라 그저 쳐다보고들 있는 거예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날 보러와요? 점집으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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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행아(정려원)와 리환(이동욱). 놀이터에는 그들의 이름처럼 예쁘장한 빨간 공중전화박스가 서 있다. 어릴 때 부모를 암으로 잃고 혼자가 된 행아는 리환의 집에서 그의 어머니를 이모라고 부르며 자랐다. 리환은 행아를 지켜달라는 행아 아빠의 유언을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지켜왔다. 남매처럼 자란 사이, 유년기의 트라우마, 위암과 알츠하이머 등 난치병의 그림자가 드리운 인연의 시작은 행아의 아버지와 리환의 어머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중 공공연하게 KBS <가을동화>(2000)와 <느낌>(1994)을 불러내는 tvN <풍선껌>은 그야말로 공중전화를 쓰던 즈음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시효가 다했다고 생각한 이야기는 꽤 성공적으로 부활했다. 유사한 멜로드라마에서 가족은 버릴 수 없는 무거운 짐의 자리에 위치하고 <풍선껌> 역시 마찬가지다. 모성애나 효심을 인간의 본성으로 세팅하고, 그로 말미암은 집
[유선주의 TVIEW] 뻔해 보여서 더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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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라면, 시칠리아는 약간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비칠 것 같다. 양떼들이 거니는 아름다운 자연과 순수한 얼굴들에 대한 인상 같은 거다. 시칠리아의 ‘신화’가 전세계로 확산된 데는 <대부>(1972)의 역할이 컸다. 주로 유럽인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시칠리아는 <대부>가 발표된 뒤, ‘지중해의 낭만’을 자극하는 데 있어서는 그리스와 맞먹는 세계적 명소로 격상된다. 알다시피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이탈리아 이주민의 아들이다. 그는 시칠리아를 신화의 공간으로 바라보고 있다. 마이클(알 파치노)이 전쟁 같은 경쟁을 벌이던 살벌한 도시 뉴욕을 벗어나자마자 도착한 곳이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 코를레오네(Corleone)이다. 부친 비토 코를레오네(말론 브랜도)의 이름은 이 고향의 지명에서 비롯됐다. 이곳은 동시대의 공간이기보다는 그리스의 신화를 그린 풍경화처럼 제시된다. 니노 로타의 감성적인 음악은 그런 기분을 증폭시켰는데, 뉴욕에서 시칠리아로의 이동은 마치 비
[한창호의 트립 투 이탈리아] 고대 그리스의 목가적 이상향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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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송곳>은 <미생>이 되지 못했나. 드라마 <송곳>이 종영되자마자 가장 먼저 들려온 질문이었다. 그럴 만하다. 시작부터 <송곳>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이 드라마가 <미생>의 인기를 재현할 수 있을 것이냐에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가 종영한 이 시점에서 돌아보건대 시청자들의 호감과 상찬에도 불구하고 <송곳>은 <미생>만큼의 인기를 끌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 들려오는 이 질문. 왜 <송곳>은 <미생>이 되지 못했나.
그러나 이 질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왜 <송곳>이 <미생>이 되지 못했는지에 관한 질문이 성립하려면, 먼저 ‘<송곳>은 <미생>이 되려고 했는가’에 대한 해석상의 합의가 먼저 이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송곳>이 <미생>을, 아니 <미생>이 <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왜 <송곳>은 <미생>이 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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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포스티노>(1994)에서 대시인 파블로 네루다(필립 누아레)가 망명생활을 위해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로 오게 된다(원작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무대인 칠레를 이탈리아로 옮겼다). 모든 인민이 사랑하는 위대한 시인이자 사회주의자인 그가 오면서 마을은 들썩거린다. 그에게 편지를 전해줄 우체부를 고용한다는 말을 들은 마리오(마시모 트로이시)는, 마을 여자들이 흠뻑 빠져 있는 그가 도대체 누군가 싶어 담당 우체부가 됨과 동시에 처음으로 작품을 찾아 읽어본다. “난 시들고 멍한 느낌으로 영화 구경을 가고 양복점에 들른다. 독선과 주장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고 있는 덩치만 큰 백조처럼 이발소에서 담배를 피우며 피투성이 살인을 외친다. 인간으로 살기도 힘들다.”
우편배달부는 그 마지막 문장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깊은 인상을 받는다. 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많았지만 도저히 뭐라 표현할 수 없었던 그 기분을 ‘인간으로 살기도 힘들다’라고 표현한 마지막 시구
[에디토리얼] 당신의 올해의 한국소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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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비버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2010년에 그는 <Baby>를 통해 사랑스런 꼬마 이미지로 통했다. 하지만 지금은 잘해야 ‘악동’, 보통은 ‘비호감’으로 불리는 중이다. 저스틴 비버는 이런 시선에 대답을 내놓고 싶었던 모양이다. 11월에 발표한 신곡 <I’ll Show You>에서 그는 왜 자신이 철없는 행동들을 일삼았는지 털어놓고 있다. 그것도 변하겠다는 의지를 담고서.
“내 삶은 영화 같아. 모두가 지켜보지. 번개처럼 압박감이 찾아올 때 항상 옳은 행동을 하기란 쉽지 않아. 그건 마치 내가 완벽해지길 바라는 거야. 사람들은 내가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몰라. 삶이란 쉽지가 않더라고. 난 강철로 만들어지지 않았어. 내가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줘. 하지만 넌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지.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해. 내가 보여주겠어. 내가 보여주겠어.”그래서일까. <I’ll Show You>의 뮤직비디오는 예전처럼 파티 걸들로 가득한
[마감인간의 music] 비버가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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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브릿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연말 결산을 대비해 놓친 수작을 따라잡는 이삭줍기철이 돌아왔다. VOD로 직행한 오스트레일리아 공포영화 <바바둑>은, 분만하러 가는 길에 사고로 남편을 잃고 7년째 싱글맘으로 과로하며 살고 있는 아멜리아의 이야기다. 엄마를 짓누르는 피로와 우울을 감지한 아들 사무엘은, 밤마다 동화 속 괴물 바바둑의 끔찍한 노크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호러에 과연 초자연적 현상이 있긴 한 걸까? <악마의 씨>나 <케빈에 대하여>와 동시상영해도 어울릴 영화지만 <바바둑>은 충분히 독창적이다. 아멜리아 역의 에시 데이비스는 발성부터 액션까지 모든 수단을 구사해, 여성 심리의 넓은 스펙트럼을 서슴없이 표현한다. 미술팀이 제작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팝업(pop-up) 동화책을 들춰보는 재미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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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냉전시대 첩보영화 <스파이 브릿지>에는, 흔한 의미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둘, 그리고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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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형제의 동화 <황금 거위>에는 ‘웃지 않는 공주’가 등장한다. 걱정이 된 왕은 공주를 웃기는 사람에게 공주와의 결혼을 약속한다. 수많은 구애자들의 실패 끝에, 욕심을 부리느라 황금 거위에 줄지어 손이 붙은 사람들의 행렬을 보고야 공주의 봉인된 웃음이 터지게 된다.
웃지 않는 공주와 여왕에 관한 민담과 동화는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공주를 웃긴 것은 거지, 두꺼비, 때론 어떤 특정한 상황이 되기도 한다. 어느 잔혹동화에서는 공주를 웃기려고 줄타기를 하던 광대가 발을 헛디뎌 목이 부러진다. 그제야 공주가 깔깔 웃는다.
짐작건대 ‘웃지 않는 공주’ 이야기는 웃음을 추방한 근엄한 중세 권력에 대한 민중의 풍자에서 비롯됐을 거다. “예수는 웃지 않았다”는 통설에 기반해 웃음을 금지한 중세 엄숙주의에 대한 조롱과 해학.
하지만 이 우화는 실제 역사에도 등장한다. 공주 대신 왕후다. 중국 주나라 유왕은 포나라를 정벌하고, 아름다운 ‘포사’를 얻게 된다. 포사에 빠진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공주를 웃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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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디트로이트 출신의 포크록 가수 시토 디아스 로드리게스는 1970년대 초 두장의 음반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 음반들은 대중의 무관심 속에 잊혀지고, 로드리게스 본인도 가수로서의 입신에는 실패한다. 스토리는 여기서 시작된다. 미국에서 묻힌 그의 노래는 지구 반대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고, 그 사실을 20여년 후에야 알게 된 그는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된다. 이 드라마틱한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영화가 바로 2012년 개봉해 우리나라에서도 나름의 반향을 일으킨 말릭 벤젤룰 감독의 <서칭 포 슈가맨>이다.
우리나라에도, 아니 로드리게스가 유명해진 남아공에도 그들만의 슈가맨은 존재한다. 그리고 JTBC가 새로 만들어낸 프로그램,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은 그 영화의 모티브를 가지고 우리 마음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지만 현재는 잊힌 노래와 가수를 찾아내 재조명한다. 이지의 <응급실>, 최용준의 <아마도 그건>, 리치의 <사랑해
[김호상의 TVIEW] 우리나라의 슈가맨, 슈가송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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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가을이 사라져 긴 겨울로 접어드는 이 시기는 추위에 대한 육체의 감각이 마음으로 곧장 이어진다. 고독한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간에 홀로 혹은 둘이서 연애영화를 보기 좋은 때다. <이터널 선샤인>(2004)의 재개봉 흥행이 개봉 성적을 넘어섰다는 소식을 접하니, 누군가가 시기를 읽는 수완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동안 시네마테크에 한두번 걸릴 때면 몇몇 관객이 마치 유적처럼 이 영화를 다시 찾곤 했다. 어떤 영화들은 개인의 유적이 되고, 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유적지가 된다. 이것은 현대 도시에서 우리가 떠날 수 있는 일종의 순례다.
순례자들의 영화에서 열성 팬의 프랜차이즈, 오타쿠의 컬트, 근본주의자의 클래식과 외골수의 외사랑을 받는 외로운 영화들을 빼고 나면 연애영화가 남는다. 극장 안은 대략 이런 모습이다. 자기 인생의 영화라며 당신도 감화, 감동받을 거라 동행에게 말하는 사람의 달뜬 미소와 외딴 자리에 홀로 앉아 침묵하며 그대도 언젠가 혼자서 이 영화를 다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순례자들의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