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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때가 어디 하루이틀이겠냐만 이번 주는 더더욱 그렇다. 선선한 가을바람과 함께, 라고 쓰고 싶지만 낮은 아직도 한여름인 추석 때 고향을 다녀와 그렇고, 영화의 전당 비프힐 1층에 자리를 마련한 <씨네21이 기록한 BIFF 20년의 기억> 사진전을 채운 사진들을 보면서도 그렇다. 물론 이번 주 특집도 그렇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요즘은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라는 <무서운 집>의 양병간 감독, 구윤희 배우를 인터뷰하고 ‘변화하는 1인 미디어’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일부 기능이 종료된다 하여 서둘러 백업을 받고 있는 상반된 기분이라니. 하이텔을 쓰다가 프리챌의 굴비를 보면서 신세계라 감탄하고, 또 아이러브스쿨을 시작하면서 ‘차라리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을’이라며 피천득스러운 울분을 쏟아냈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도저히 하루 만에 백업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마우스질을 그만두었다. 이
[에디토리얼] 흑역사 조정하여 추억피크제 도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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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악을 설명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탁월한 선배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너도나도 써먹은 방법론이기에 잘못 카드를 꺼냈다가는 자칫 고루함을 면치 못할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런 표현은 어떤가. “제임스 브라운이 리드하는 레드 제플린 같은 밴드.” 궁금증이 확 일지 않는가? 이 낚시질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미국의 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이 빈티지 트러블이라는 밴드를 향해 내린 평가다.
빈티지 트러블은 2010년에 결성된 미국 출신 밴드다. 그들은 누가 들어도 제임스 브라운을 연상케 하는 보컬 타이 타일러를 중심으로 역동적인 음악을 선보이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들의 커리어 하이는 아마도 <데이비드 레터먼 쇼> 출연이었을 것이다. 이 무대에서 그들은 제임스 브라운과 레드 제플린이 빙의된 듯 엄청난 라이브를 들려줬다. 영상을 보면 강력한 솔을 탑재한 보컬이 난리 법석을 부리면서 관객석까지 휘젓고 다니는 와중에
[마감인간의 music] 농축된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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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판타스틱4>에 관련된 어마어마한 이야기 두 가지를 들려주겠다. 첫 번째. 극 초반 소년 리드가 공간이동 기계를 발명하고 있던 창고는, <백 투 더 퓨처2>에서 비프가 자기 차를 주차해놓고 쓰던 차고와 같은 곳이다! 소오름! 두 번째. 앞선 첫 번째 이야기를 제외하고 나면 이 거대한 쓰레기 더미 같은 영화에 대해 더이상 언급할 만한 게 없다는 사실이다. 소오름!
정말 소름끼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창작자의 과도하고 구체적이지 않은 비전은 때로 영화 제작 전반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킨다. 창작자의 머릿속에서만 성립하고 정작 밖으로 끄집어냈을 때 아무도 알아먹을 수 없는 비문 같은 영화들이 존재한다. 잘 통제된 비전과 그렇지 못한 비전의 차이는 크로넨버그와 타셈 싱의 영화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자의식 강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이 종종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건 그 때문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스튜디오 시스템은 그러한 불확실성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누가 이 똥을 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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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나 결혼에서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는 경향을 사회심리학에선 유사성의 원리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 원리에 맞지 않아. 유사성이 클수록 관계의 만족도가 큰 법인데 우린 태생적으로 다르네.” 십수년간 아침 옷 수발해줬던 대학교수 남편이 드라마 <아줌마> 속 장진구(강석우)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이혼을 요구한다면 우선은 무슨 미친 소리인가 비웃으며 옷걸이로 후려치고 싶지만, tvN <두번째 스무살>의 하노라(최지우)는 그러지 못했다. 수준이 맞고 대화가 통하는 아내가 되면 이혼을 피할 수 있겠다 생각한 노라는 수능을 준비해 서른여덟에 늦깎이 대학생이 된다.
오랫동안 가정에 고립되었던 여자. 허울만 좋은 지식인 남편 곁에서 살아온 여자가 남편의 외도로 세상에 다시 나오는 이야기가 다루는 재활과 자립이 판타지 이상을 성취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기성세대가 대중매체를 통해 지나간 시간, 하지 못한 경험을 되살리는 시도 역시 퇴행의 혐의를 지우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선주의 TVIEW] 서른여덟에 다시 시작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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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봄. 어린이 잡지 <소년중앙>의 별책부록 만화에 새로운 만화가 연재되었다. 이두호 글•그림. 도전자 허리케인. 그 당시 내가 어머니에게 다리몽둥이가 부러질 정도로 매를 맞는 일은 단 하나. 만화 때문이었다. 만홧가게에서 만화를 보는 것보다는 만화를 빌려와 이불을 깔고 엎드려서 보는 맛이 최고인데 어머니는 만화를 집으로 빌려오는 것을 싫어하셨다. 기회를 노려 만화를 빌려와 다락방에 숨겨놓고 몰래 만화를 보았는데 대개 나의 의심스런 행동 때문에 항상 들키고 말았고 매를 맞았다. 그런데 아들이 만화 보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어머니는 소년 잡지의 별책부록으로 나온 만화를 보는 것은 너그러이 넘어갔다. 게다가 달마다 소년 잡지가 나오면 돈까지 쥐어주었다. 만홧가게의 만화와 소년 잡지 부록만화 모두 만화인데 말이다.
60년대 말에 창간하기 시작한 소년 잡지들은 저마다 별책부록 만화로 소년들을 유혹했다. <소년중앙>에서는 <타이거 마스크>를 비롯해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지독한 원념(怨念)의 완전연소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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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면 괴롭다. 지금 <씨네21>은 연중 가장 바쁜 주간이라 할 수 있는, 추석 합본호 마감이 한창이다. 기자들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하나하나 생사를 확인하고 있다. 평소보다 2배 정도의 작업을 하고 있는 데다 추석 연휴가 지나면 곧장 부산국제영화제 출장을 가야 한다. 취재, 사진, 편집, 디자인팀 모두 개막식도 열리기 이틀 전에 부산으로 향한다. 게다가 올해는 해마다 해오던 영화제 공식 데일리 작업 외에 ‘씨네21이 기록한 BIFF의 20년’(가제)이라는 뜻깊은 사진전까지 열 계획이다. 무려 진짜 지난 20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라고 쓰고 싶지만 3년 정도는 부산을 가지 않은 손홍주 사진부장이 있기에 든든하다. 모처럼 ‘부산행’을 결심한 김은 아트디렉터도 마찬가지다. 무려 2007년 부산 데일리에 객원기자로 참여하며 일을 시작한 장영엽 팀장도 어느덧 데일리를 책임지는 주무 팀장이 되었다. 나 또한 1회 영화제에서 오구리 고헤이의
[에디토리얼] 추석과 부산, 바쁘다 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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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힙합 프로듀서 코드쿤스트가 미국의 래퍼 조이배드애스(Joey Bada $$)와 작업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어울리겠군’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이들의 작업에 타블로가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선택의 범위가 넓진 않았겠지만 그 안에서 가장 좋은 그림이 나왔군’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루미넌트엔터테인먼트가 ‘한국 힙합의 세계화’를 표방하며 야심차게 추진한 프로젝트이기에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한국 래퍼여야 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랩도 잘해야 하고, 만약 유명하기까지 하다면 마케팅에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만족하는 한국 래퍼 중 최선은 타블로다.
<Hood>는 타블로와 조이배드애스가 중립지대에서 만나 만들어낸 곡 같다. 기존의 자기 스타일을 내세우거나 날뛰지 않는다. 특히 1995년생이지만 1995년 스타일의 힙합을 추구해온 조이배드애스는 예의 그 역동적인 ‘빡센’ 랩을 선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둘은 회색빛 코드쿤스트의 사운드
[마감인간의 music] ‘소울’, 우리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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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과정에 있던 선배에게 불행이 닥쳤다. 갑자기 지도 교수가 일년 반의 시간을 쏟은 논문(과 더불어 선배가 그 논문에서 도맡았던 온갖 허드렛일)을 버리고 나서 세상이 억울해진 나머지 책장을 덮고는 날마다 신경질로 소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예민 교수는 원래 신경질 대마왕이잖아.” “그게 오십배쯤 늘었다고 생각해봐.” 그렇다면… 애도를. 설마 못 먹을 걸 먹는다거나 맞고 산다거나 허공으로 사라진 연구비 벌어오라며 파견 노동 나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선배의 교수가 논문 발표를 포기한 건 쓰다 보니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경제에 밝은 (다시 말해 돈이 많은) 부친의 강요로 선택한 학부 전공 경제학이 싫어서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자네 같은 인재를 기다렸네! 우리가 경제사 연구자가 없어, 허허허”라며 기뻐하는 교수들 덕분에 도로 경제사를 전공한, 시작부터 억울했던 교수는 식민지 시대 조선 경제에 일제가 미친 영향을 연구하다가 의도치 않게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친일’이라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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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는 월터 살레스 감독이 지구 반대편 동료 시네아스트를 취재한 다큐멘터리다. 극장에서 못 튼다는 사실만 빼면 오늘날에는 디지털 촬영 복제 기술로 누구나 영화를 만들고 볼 수 있으니 정부의 상영 금지도 무의미하다고 인터뷰하던 지아장커는, 문득 다른 기억에 사로잡혔다. “어느 카페에서 개봉하지 못한 <플랫폼>을 틀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막상 가보니 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통유리창이라 영화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랴부랴 검은 천을 구해 가리고 나니 비가 새기 시작했어요. 정상적 영사로, 진짜 의자에 앉아, 불 꺼진 방에서 볼 수 없는 내 영화가 슬펐습니다. 극장에서 틀 수 없는 내 영화가 정말 슬펐습니다.”
08/27
저녁 7시 명동. <침묵의 시선>을 알리기 위해 서울을 찾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을 만났다. 그의 첫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을 보고 다들 놀랐던 점은 대량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잘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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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전자음악 그룹 탠저린 드림을 이끌고 있던 에드거 프로스는 1973년 영국의 버진 레코드로부터 계약을 맺자는 전화를 받는다. 보통 크라우트 록(Kraut Rock)이라고 불리는, 독일 전자음악에 심취된 소수 팬들을 겨냥해서 음악을 만들던 프로스의 입장에서는 당시 신생 레이블로 성공을 거둬 영국과 미국에 배급망을 갖추기 시작한 버진 레코드의 제안에 아마도 무척 고무되었을 것이다.
버진 레코드는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음반 제작사가 아니라 런던 노팅힐 게이트에 위치한 작은 레코드 가게였다. 이 가게의 문을 연 리처드 브랜슨과 닉 파월은 유럽 대륙의 프로그레시브 록과 전자음악 음반들을 직접 수입해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 사업은 소수지만 광적인 런던 컬트팬들로 인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브랜슨과 파월은 음반 가게에 머물지 않고 음반 제작에 직접 뛰어들기로 결심했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제작한 첫 번째 음반은 당시 열아홉살의 마이크 올드필드가 여러 악기를 연주하고 이
[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음악은 악몽 혹은 일장춘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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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와 얼굴들의 <우리 지금 만나>가 깔린다. 나영석 PD가 탑승한 콤비버스에 차례로 올라타는 사람들은 그의 옛 동료들, <해피투게더-1박2일>의 전 멤버들이다. 이승기, 강호동, 은지원, 그리고 도박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키고 자숙 중이던 이수근. 이들이 함께할 프로젝트는 중국 고전 <서유기>를 패러디한 웹 예능물 <신서유기>다.
tvN과 네이버가 합작해 네이버 TV캐스트에서 볼 수 있는 <신서유기>는 글을 쓰는 시점에 이미 조회수 1500만회를 바라보는 대성공을 이루어냈다. 나 PD 특유의 여행, 미션, 그리고 벌칙으로 이어지는 진행 코드는 여전하다. 손오공을 이수근으로 정하고, 머리에 금고아를 씌운 후 저주파 치료기를 부착해 작동 권한을 삼장법사에게 준다는, 코믹하지만 의미심장한 설정에 이어지는 첫 미션은, 손오공의 고향인 서안에서 바로 그 삼장법사를 정하는 것이다. 웹 콘텐츠라는 태생과 목적에 맞게 모든 에피소드의 상영
[김호상의 TVIEW] 면죄부 논란에 대처하는 영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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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에서 우연히 케이크숍의 주방보조 겸 견습생 기범(유아인)을 맞닥뜨린 복싱 선수(조희봉)는 순간 얼어버린다. 과거 최연소 동양웰터급 챔피언이기도 했던 기범을 링 위에서 만난 적 있는 그의 회고에 따르면, 기범은 수많은 여성 팬을 몰고 다니던 ‘링의 아이돌’이면서도 상대 선수에게는 더없이 가혹했던 ‘냉혈 꽃사슴’이었다. 당시 영화에서 유아인을 묘사했던 냉혈 꽃사슴이라는 별명다운 느낌을, 세월이 흐르고 흘러 <베테랑>에 와서야 확인한 것 같다. 그런데 <사도>에서는 또 다른 얼굴이다.
그처럼 요즘 유아인이라는 배우를 다시 보고 있다. <씨네21>과의 인터뷰(지난 1021호 <사도> 커버스토리)에서도 그 스스로 얘기하듯 ‘소년성’이라는 특질을 온전히 간직한 채로 여러 캐릭터들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디카프리오’라는 표현도 어색하지 않은 것 같고, 개인적으로는 유약하고
[에디토리얼] 유아인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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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 에드거 앨런 포의 이미지를 검색해보면 예상한 대로 검은 고양이, 갈가마귀 혹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포의 사진이 나온다. 그리고 구글에서 다시 러브크래프트의 이미지를 검새해보면 역시 예상한 대로 러브크래프트의 사진과 함께 그가 창조한 무시무시한 괴물들의 이미지가 나온다. 물론 그가 창조한 악마의 서적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도 함께다. 자, 그럼 이번엔 “포&러브크래프트”로 검색해보자. 예상한 대로 둘을 함께 그린 일러스트레이션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데, 둘을 동업자/형제/라이벌 등으로 묘사한 그림들이다(한번 찾아보라. 졸귀).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오른쪽 그림이다. 포는 갈가마귀를 머리에 얹고 있고, 러브크래프트는 어항에 그의 피조물- 크툴루- 을 담아서 가지고 있는데, 러브크래프트가 말을 걸고 있다. “포씨, 머리 위에 갈가마귀가 앉아 있는 거 아세요?” 포가 대답하길, “네, 알아요”. 그러자 러브크래프트의 반응은… “
[곡사의 아수라장] 어느 지옥행 열차에 타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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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들은 음악을 다시 들으면 좋아했던 곡들 중 어렴풋한 기억을 동반할 때가 있다. 특별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어도, 냄새나 감각의 한 종류 같은 무엇이 그 안에 있다.
요즘 음악은 예전보다 훨씬 쉽고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 깊은 조예가 없어도 취향과 기분에 맞춰 알아서 모르는 곡들을 알려준다. 음반은 죽어간다지만, 음악과 음원이 여전한 시대에 역설적으로 내게 특별한 노래는 어쩐지 적어진다. 음악이 어떠한 상황의 중심이 아니라 극 전반에 깔리는 배경처럼 되어서일까. 어느 ‘문화’들의 변천을 생각할 때, 주어나 주체만 다르지 엇비슷하게 엇비슷한 방향으로 ‘대세’가 되어 흐르는 걸 함께 떠올리면 얘기의 주어를 패션이나 옷으로 바꿔도 별반 지장은 없을 것이다.
더 포스탈 서비스(The Postal Service)는 2001년 미국 시애틀에서 결성한 인디 록 밴드다. 총 7장의 싱글을 발매했지만, 정규 음반은 2003년 《Give Up》 딱 한장만 냈다.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마감인간의 music] 10년 전 그 멜로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