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도 숨어 컴컴한 한밤중이었다. 하얗고 커다란 불빛 두개가 비틀거리며 밭두렁을 따라 돌진하다 우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밭두렁 1m 앞에서 끼익, 하고 멈췄다(그 몇초 사이, 나는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추리닝 바람으로 객사하는 줄 알았다). 트럭 문을 열고 내린 붉은 얼굴의 아저씨는 학생들이 들고 있던 올망졸망한 종이컵을 보더니 피식 비웃었다. “야, 밥그릇 가져와!” 페트병에 담긴 30도짜리 소주를 사발에 따라 단번에 마신 아저씨는 학생들에게도 소주 한 사발씩을 돌리는 틈틈이 오이 몇쪽을 먹은 다음 마지막으로 다시 한 사발을 들이켜고는 트럭을 타고 떠났다, 비틀비틀. 나는 말리고 싶었다. “저기, 형님, 음주운전… 안 되는데….”(오빠라고 부르면 형수님이 화내고, 아저씨라고 부르면 형님이 화냄.) 아저씨는 다시 비웃었다. “이제 주차할 건데 음주운전은 무슨.” 그 주차장이라는 형님네 마당이 걸어서 20분 거리잖아요, 그것도 꼬불꼬불 울퉁불퉁 흙길 따라서. 먼 옛날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잡초가 몸에서 돋아나는 꿈을 꿨다
-
아직 크리스마스도 오지 않았는데 2016년 신년호의 에디토리얼을 쓰는 기분이 묘하다. 보통 에디토리얼은 최종 마감을 하는 목요일이면 부리나케 쓴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한주를 보내고는 목요일 저녁 식사를 끝낸 뒤, 마치 일주일 내내 그런 생각을 품어왔던 것인 양 단숨에 써내려간다. 이번주에는 어떤 내용으로 쓰면 좋을 것 같으냐고 함께 식사하는 기자들을 다그쳐 아이템을 캐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애꿎게도 내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급체가 왔던 기자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사과를 전한다, 고 말은 하지만 내가 묻기 전에 아이템을 여러 개 준비해오길 권하는 바이다.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이전 편집장들도 거의 대부분 그러했던 것 같다, 고 믿고 싶다. 아무튼 뭔가 1년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거창한 출사표를 내던지는 내용을 담고 싶은데 도통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아마도 밤 늦게까지 이어진 좌담 숙취의 영향인 것 같다. 2015년의 천만 영화 <암살>과 <베
[에디토리얼] 아가씨와 밀정이 군함도의 곡성을 들으러 가는 2016년
-
새벽 2시. 루시드폴이 귤 모양 모자를 뒤집어쓰고 홈쇼핑에 등장했다.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홈쇼핑에서 자신의 앨범을 판매하기 위함이었다. 신보이자 통산 7집인 《누군가를 위한,》의 CD에 더해 직접 재배한 귤과 직접 쓴 동화책을 묶은 패키지 상품. 반응은 놀라웠다. 1천 세트가 단 9분 만에 매진된 것이다. 스위스 개그의 왕자가 ‘완판남’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색다른 홍보 방식으로 화제를 모은 루시드폴의 앨범에는 총 15곡이 담겨 있다. 제주도에서 작업했다는 이유 때문일까. 물처럼 유유하게 흘러가는 노래들이 하나둘 이어진다. 그러나 나는 루시드폴의 음악을 이런 방식으로만 해석하는 것에 좀 반대하는 쪽이다. 언뜻 듣기에 그의 음악은 무심한 표정으로 낭만적 정취를 노래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의 곡들 중 일부를 파헤쳐보면 거기에는 참혹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이 송곳처럼 숨겨져 있다. 신보에서도 루시드폴은 타이틀곡 <아직, 있다>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마감인간의 music] “살아내주렴”
-
1975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해’였다. 국제사회에서 최초로 성별(여성문제) 이슈가 정치적 의제로 채택된 역사적인 해였다. 제1회 세계여성대회가 멕시코시티에서 열렸고, 138개국 2천명의 여성이 참가했다. 대회 주제였던 ‘평등•발전•평화’는 이후 각국 여성정책의 기본 좌표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프랑스 여성운동가들의 ‘세계 여성의 해’ 제정 반대 시위였다. 그들은 “1975년 여성의 해, 76년 염소의 해, 77년 닭의 해, 78년 말의 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경찰과 격렬히 대립했다. ‘여성의 해’는 여성을 보편적인 인간에서 제외하는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표준적 인간이 아니라 노인, 장애인, 어린이와 함께 ‘특수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남성의 해, 이성애자의 해, 비장애인의 해는 없다. ‘남성의 해’가 없는 것이 남성이 억압받는 증거인가. 이성애에 관한 책보다 동성애 관련 연구가 훨씬 많다. 이러한 현상은 이성애자 탄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여성의 해, 말의 해, 닭의 해
-
-
출근 준비를 마치고 고양이에게 인사한 후 합정역 입구에서 김밥을 사서 버스에 오르는 라여주(윤진서). 서른세살의 출판 편집자인 그녀는 일터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직장인의 하루는 늘 이렇다. 출근과 퇴근이 무한반복되는 인생. 시작과 끝이 없는 지하철 2호선처럼 말이다.”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 드라마가 주는 판타지도 이즈음이 아닐까 한다. 출퇴근이 무한히 반복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 잠깐의 시간. 일정 수준의 소비를 유지할 수 있고, 사람 구실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 속에서 나른하게 아침 햇살을 받는 출근길은 고용이 불안정한 사회에서 작동하는 판타지가 된다.
올리브TV와 UMAX에서 방영하는 <나에게 건배>가 아침의 출근 장면을 반복해 보여준다면, 원작인 일본 드라마 <와카코와 술>의 오프닝은 매일 오후 다섯시 정각의 퇴근길이다. 소고기덮밥에 맥주 한잔을 곁들이는 호젓한 시간을 사수하기 위해 회식 자리에서 가방 먼저 밖으
[유선주의 TVIEW] 혼자서 만끽하는 술의 행복
-
중학생이 되면서 나의 활동 범위가 종로와 중구, 광화문과 명동 일대로 넓어졌다. 몇달에 한번씩 짝이 바뀌고 친해지는 친구가 새로 생기면 으레 그래야 하는 것이 친구 집 방문하기였다. 반 친구들 중에는 충무로와 장충동, 남대문에 사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집에 놀러가면서 낯선 곳의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가장 기억나는 것이, 얼굴이 탁구공처럼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구김살 없고 재미있는 친구의 집에 간 일이었다. 그를 따라 서울역 건너편 대우빌딩의 으스스한 뒷골목으로 들어갔는데, 붉은 벽돌로 된 오래된 건물 벽에 빨랫줄이 못으로 박혀 있었고 그 줄에 여자 팬티와 브래지어들이 널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벽에 팬티와 브래지어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골목에는 커튼이 쳐진 유리문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고 이따금 만나는 사람들이라고는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들뿐이었는데, 친구는 그들에게 활기차게 인사를 하면서 통통 튀듯 오르막길을 걸어올라갔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직감적으로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독고탁을 기억하십니까
-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스타워즈> 광팬이다.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서 있다. 아주 오래전 우연히 돌려본 채널에서 <스타워즈>를 처음 보았다. 곧바로 제국군의 이미지에 압도되었다. 조금 큰 이후에는 제국군을 향한 열망이 내안에 파시즘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지 오랜 시간 고민하기도 했다. 전세대가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를 보며 내심 걱정했던 것들을 나는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을 보며 느꼈다.
밥벌이에 나선 이후로 <스타워즈>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집 전체가 그냥 <스타워즈> 프랜차이즈 상점에 가깝다. 옆에 사람이 없을 때는 늘 다스 베이더의 숨소리를 따라하면서 걷는다. 나는 심지어 제다이를 종교로 믿는 사람들의 해외 그룹에도 가입되어 있다. 고백하기 어렵지만, 나는, 아 나는 아직도, 집에서 혼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간증의 시간
-
드디어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봤다. 내가 느낀 여러 좋고 나쁜 지점들에 대해 이번 호 ‘허지웅의 경사기도권’이 속 시원히 써주었지만, 스포일러가 가득한 글이니 꼭 영화 관람 후 정독하시길. 아무튼 과거의 다스 베이더에 비하면 분노조절장애에 시달리는 것 같은 새로운 악당 카일로 렌부터 흥미진진했다. 츄이가 추위를 탈 때는 박장대소했고 30년 전의 배우들이 차례로 등장할 때는 눈물이 찔끔했다. 지엽적으로 파고들자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로 볼 때 실제 아버지 배우 브렌던 글리슨과 비교해 너무나도 다른 이미지를 가진 아들 돔놀 글리슨의 존재도 괜히 흥미로웠던 반면, <레이드> 시리즈의 이코 우웨이스와 야얀 루히안은 정말 단역이어서 우울했다. 후자의 그 둘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듣고 ‘쌍제이, 정말 안 보는 영화가 없구나’ 하며 얼마나 흥분했던가. 벌써부터 8편에 출연하기로 한 견자단의 분량이 심히 걱정되는 바이지만, 그는 제다이로 나온다니 미리 걱정하지는
[에디토리얼]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
그래. 인정한다. 난 현실적 불만족을 채워보려는 심산으로 정치영화를 사랑했었다. 현실정치에서 못 얻는 쾌감이 거기 있었고, 현실정치에 대해서는 못해본 비판의식이 거기 있었다. 이것은 마치 행정고시에서 연거푸 낙방한 만년 재수생이 미친 듯이 PC방 게임에 탐닉하는 것과도 같다. 내가 현실정치에선 못해보고, 못 느껴보는 현실감이 저기 저 스크린 속엔 있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나는 마치 커지는 불만족을 더욱더 격렬하게 다스려보려는 듯, 점점 더 센 정치영화들에 일부러 열광하기 시작했다. 비판의식과 내러티브적 재미를 적절하게 배합해주시는 웰메이드 정치극 영화들(앨런 파큘라, 코스타 가브라스, 켄 로치…)은 이미 나의 목록에서 하단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비판의식은 안드로메다 은하로, 그리고 내러티브 완결성은 켄타우로스 은하로 유배시키고서야 겨우 정치 얘기를 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 정치영화들(루이스 브뉘엘, 두샨 마카베예프, 얀 슈반크마예르…)이 오히려 나의 18번들로 급부상하고 있었던 것도
[곡사의 아수라장] 영화는 꿈을 꾼다
-
최근 몇년간의 빈지노는 실로 대단했다. 빈지노가 이뤄낸 것들은 마치 전에 없던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TV에 나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주류에 입성하기 위해 당연시되는 음악적 타협을 거부한 채, 이렇게까지 거대한 영향력을 갖게 된 래퍼는 대한민국에서 빈지노가 유일하다(또 있다면 그의 레이블 동료 두명 정도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빈지노를 ‘그냥 좀 모델 같이 생겨서 어쩌다 크게 뜬 래퍼’ 정도로 알고 있다면 이 가사를 곱씹어보는 편이 좋다. “난 아무거나 말하고 마는 가요 틈에 끼고 싶지 않아 몇번이고 말했듯, 난 지킬 거야 내 영역을,/ 잠시 떠들썩한 유행이 되는 것보다 어떤 유의 유형이 되는 게 much important.” 이 노래는 빈지노가 정규 앨범 발표에 앞서 먼저 공개한 곡이다. 지난 10월에 공개한 <Break>에 이어 이 노래까지 들은 후 드는 생각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빈지노의 정규 앨범은 얼마나 새롭고 대단할까?’ 늘 최고급 랩을
[마감인간의 music] 완결을 향한 전진
-
※<괴물의 아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론 하워드 감독의 전작 <러시: 더 라이벌> 정도는 아니지만 <하트 오브 더 씨>에서도 경쟁은 스토리의 중요한 동력이다. 선주 부친의 낙하산 인사로 포경선 에식스호의 선장이 된 조지 폴라드(벤자민 워커)와 탁월한 능력을 갖고도 캡틴 자리를 빼앗긴 1등 항해사 오웬 체이스(크리스 헴스워스)는 날카로운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조지와 오웬은 사적 분쟁으로 배를 산으로 몰고 갈 소인배들은 아니다. 선원들 앞에서 처음 충돌을 벌인 후 조지가 배를 돌려 오웬을 처벌하려들자, 항해사는 논쟁 대신 실리적 관점으로 설득한다. 파더 콤플렉스라는 공통점을 가졌기에 상대의 버튼이 어디서 눌리는지 알아본 것이다. 진짜 재앙은 갈등의 순간이 아니라 인정욕구과 성취욕에 사로잡힌 두 사내가 합의를 볼 때 찾아온다.
12/01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영화에는 고아나 유랑자의 삶에 대한 동경이 흐른다. 과거로부터 온 <시간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할머니의 잔해는 빗자루에 쓸려 납골함에 담겼다. 뼛가루가 스민 공기에 불쾌한 냄새가 스몄다. 이딴 곳, 아우성을 뒤로하고 납골함을 든 채 터벅터벅 걸어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딴 곳에서 인간의 소멸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순전히 억지다. 친척들과 선산 앞 동네로 나와서 나주곰탕을 먹었다. 국물에서 화장터 냄새가 나네. 젊은 사촌들은 내 말에 조용히 웃었다.
친구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발을 헛디뎌서 죽었다. 죽기 한달 전에 그를 만났다. 지하철 플랫폼에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눴다. 그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했고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나보다는 그가 유리했다. 그는 벌써 개성적인 촬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고 내 글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내가 쓰고 네가 찍어서 하나 만들어보자. 죽여주는 작품을!” 그래, 하면서 그는 피식 웃었고 나는 그 바람 새는 웃음에 모욕감을 살짝 느꼈다. 무표정한 얼굴과 무채색의 상복. 그의 장례식에서 나는 생각을 그만두자고 생각하면서 생각해나갔다. 대
[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민영
-
일본의 한 우유 회사의 지면광고였던가. 푸른 숲속에서 뛰놀고 있는 작은 아이의 사진, 그리고 그 옆의 카피는 이렇다. ‘어린 네가 올해의 여름을 잊어버려도, 엄마는 계속 기억해둘게.’ 최근 다시 조명받고 있는 사진집인 <윤미네 집>에서도 우리는 그 비슷한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윤미씨와 그 어머니의 사진으로 가득한 책 속에서 아버지의 사진은, 화장대의 거울에 비친 단 한장.
“남은 인생을 50년이라고 할 때, 일하는 시간 14년 9개월. 스마트폰 및 컴퓨터하는 시간이 10년 1개월. 그리고 취미생활 및 혼자 있는 시간이 7년 6개월….” 화면 한쪽에 흐르는 자막으로 우리의 인생을 각자 되돌아보게 만드는 프로그램이 MBC에서 방송 중이다. <위대한 유산>. 4명의 연예인이 나오고, 그들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연기자 강지섭은 아버지의 중화요릿 집에서 탕수육을 배우고, 배달을 한다. 걸그룹 AOA의 찬미는 세 자매를 혼자 키워온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초
[김호상의 TVIEW] 탕수육과 아버지
-
머리가 굵어졌다고 어머님께서 애지중지 물려주신 모태신앙을 저버릴 무렵 내 눈에 기이하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은 크리스마스의 풍경이었다. 인간들의 죄가 도무지 씻겨질 수 없을 만큼 흉악하고 더러워지자 신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산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다면 과연 그날은 그토록 기쁜 날일까? 맨날 빤질빤질 놀기만 하는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시골에 사는 아버지가 식구처럼 키우던 소를 팔았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숙연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인데 신께서 인간의 죄악을 보다보다 못해 번제물로 바칠 계획으로 순결한 아들을 이 땅에 내려보냈다면 그날을 기리는 우리는 과연 기뻐할 수 있겠는가? 마치 어린애들처럼 ‘와~ 죄 사함 받았다!’라고 즐거워하며 선물 주고받고 애인 만나서 밤새 놀려고 하는 이 풍경은 그야말로 엽기적이지 않은가.
물론 크리스마스에 대한 나의 이런 삐딱한 시선은 나이가 들면서, 풍습이라는 것이 원래 그 기원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모습으로 고착화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점점 무뎌져갔다
[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모든 참회는 비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