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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와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자동차가 캣워크에 선 모델이라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차는 묘지에서 부활한 좀비, 시체 조각을 이어붙인 프랑켄슈타인이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는 350대 폐차 부품을 재활용한 차량도 나온다. 오로지 불모지에서 생존하고 전투할 목표로 변태한 기형의 ‘슈퍼 카’들은 질긴 생명력의 유기체처럼 보인다. 키네틱 아티스트 최우람의 <URC-1>은 150여개의 자동차 전조등을 주재료로 조형된 구체 조각이다. 호흡하듯 명멸하는 이 작품은 별 작명법에 따라 붙여진 제목에서 보듯 항성 같기도 하고 세포분열에 들어간 수정란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 작가는 자동차의 ‘눈’을 구하러 간 폐차장 풍경을, 죽은 동물이 해체되는 공간에 비유했다.
05/04
“나요? 대장은 아닌데 모든 것을 디자인하고 돈을 대고 모두를 더 쿨하게 보이도록 하죠.”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대단한 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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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산과 들은 꽃 천지일 터이나 5월의 주머니 사정은 빚 천지다.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고 스승의 날이 있고 여러 지인들의 생일에 날이 좋아 주말마다의 결혼식은 흔히 말해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애교. 물론 가장 쉬운 건 돈이다. 빠르고 간편하며 뒤끝도 없다. 그러나 그만큼 쉽게 잊고 잊힌다. 발품을 팔아가며 선물을 사러 돌아다녔던 이유는 단 하나, 그 순간만이라도 정을 나눈 이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와의 추억을 되새김하기 위해서다. 레고 블록보다 퍼즐 조각을 즐겨 만진다는 것, 콩나물보다 숙주를 즐겨 먹는다는 것, 장미보다 백합을 즐겨 꽂는다는 것, 라운드 티셔츠보다 브이넥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는 것처럼 누군가가 좋아하는 그 무엇을 안다는 일은 사실 얼마나 귀한가.
고민 끝에 올해 5월의 각종 기념일 선물을 ‘책’으로 통일했다. 편집자가 업이니 책이면 거저인 줄 아는 이들이 꽤 되는데 천만에, 내가 만든 책이라 해도 나 역시 서점에서 제값을 주고 산다. 책을 대하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5월은 ‘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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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대형마트가 생긴 즈음 잡다한 물건들 사이 생리대가 비치는 큰 비닐봉투를 들고 무심한 척 귀가하던 때의 작은 해방감을 기억한다. 새삼스럽지만, 내가 초경을 하던 무렵엔 생리대를 약국에서 팔았고 맞춤사이즈의 검은 비닐에 따로 담아주곤 했다. 되짚어보면, 검은색으로 생리대를 감추게 하고 흰색으로 생리 중인 여성이 체험하는 불편을 가리는 등 숨김과 은유로 가득한 여성용품 광고보다 의외로 진통제 TV 광고의 역사에서 생리 중인 여성과 일상의 통증을 가시화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격무에 지친 샐러리맨의 두통을 타깃으로 삼은 70년대 말의 사리돈 광고 이후, 80년대 중반부터는 홈드라마 형식과 연예인의 유명세를 빌린 진통제 광고들이 줄을 이었다. 대부분의 진통제 광고들이 두통, 치통, 생리통을 적용증으로 고지하고 있으나 펜잘이 빠르게 녹아 흡수되는 약효를 강조했다면 게보린은 통증의 부위를 세분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현재까지 이어오는 유명한 삼분할 화면, ‘두통, 치통, 생리통에 맞
[유선주의 TVIEW] 조롱은 멈출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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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5일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다. 그래서 뭘 할까 궁리하다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로보트태권브이>를 상영한다기에 갔다. 예상했던 대로 젊은 부모들과 아이들이 많이 왔고, 한편으론 1976년 개봉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을 중장년층도 상당수 극장을 찾았다. 상영 분위기는 예상보단 진지했지만 <로보트태권브이>가 발차기나 정권 찌르기를 할 때면 누군가는 환호성을 질렀고, 인조인간 메리가 시샘하거나 삐뚤어질 때 누군가는 탄식했다. 그만큼 <로보트태권브이>는 대한민국 영화 팬이라면, 아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가슴 한구석에 모셔놓은, 좀 과장해서 말해보면 <인터스텔라>와 유일하게 맞짱 뜰 수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애니메이션이다(누군가는 표절 어찌고저찌고하지만 깡통로봇 고춧가루 공격이나 맞고 다 꺼지라고 해).
초대박 히트작 <외계에서 온 우뢰매>와 <영구와 땡칠이>
정말이지 1970년대와 80년대는 극장용 애니메이
[곡사의 아수라장] 부활하라! <초합금로보트 쏠라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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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고.
다시 봐도 너무 근사한 첫 문장이 아닌가. 변형되거나 강화된 신체 이야기를 유독 좋아했던 청소년 시절. <기생수>는 언제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가운데 하나였다. <암스>나 <가이버>도 좋지만 <기생수>에 견주기에는 너무 길고 장황했다. <기생수>만큼 스스로 제기한 화두로부터 시종일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굵고 명확하게 이야기를 맺는 작품은 드물었다. 사실 <기생수>의 첫인상은 당시로서도 새롭지 않았다. <신체강탈자의 침입>과 같은 고전이나 <악마의 손> <이블 데드>, 특히 존 카펜터의 <괴물>의 잔상이 겹쳤다. 그럼에도 달랐다. <기생수>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인간, 임을 상기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 속으로 몰아넣었다(그렇게 우리는 중2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모두의 미래가 지켜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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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클론즈>는 레트로봇의 전작 <또봇>에 이어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보여준다. 부모가 행방불명된 후 가계부채에 쫓기며 생활하던 오씨네 5남매는 요금미납으로 끊긴 전기를 공짜로 얻어보려는 동기로 얼결에 지구방위대가 된다. 영웅의 의미 같은 것은 임무를 거듭하며 각기 성격에 맞는 경로로 찾아간다. 바쁘게 일하고 소소하게 행복한 5남매의 이야기는, 고전 만화 <비둘기 합창>이나 일하는 소년 소녀를 그린 이원수의 동화를 추억하게 만든다. 예쁠 것도 못날 것도 없이 그저 생생한 한국적 공간과 생활 문화의 묘사는 소박한 인류학의 경지다.
04/05
<팔로우>(It Follows)의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은 10대 후반이라는 인생의 특정 시기를 특정한 무드로 표현하기 위해 장르를 유용하고 호러의 장치를 횡령한다. 이를테면 <팔로우>의 소녀들은 과거 호러의 여배우들만큼 헐벗고 돌아다니지만 노출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실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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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한국 TV를 본 어느 유럽에서 온 외국인이 ‘한국은 게이 인권이 많이 보장된 국가 같다’고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수많은 남성 예능들, 게이 패션으로 치장한 남성 아이돌의 떼군무가 구라파 파란 눈에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 싶었다.
10년도 넘었다, 남성 예능들이 공중파를 장악한 게. 하긴 예능뿐이랴. 영화, 드라마에서 여배우 중심의 서사는 드물어졌을 뿐만 아니라 여배우가 원톱으로 나오는 영화들은 졸지에 천연기념물 신세가 됐다.
IMF 직후 집중 조명된 아버지들의 ‘눈물’은 남성 대서사시의 서문 격이었다. 이후 TV와 영화, 잡지 등 한국의 거의 모든 매체들은 경쟁적으로 남성의 서사를 재구축해왔다. 남성들이 아기를 돌보고, 함께 여행을 하고, 요리를 하고, 남자의 자격증을 따고, 연애와 결혼에 대해 훈수를 두고, 자아를 찾는 이 기나긴 서사의 여정은 지난 한반도 역사에는 남성이 아예 없었다는 듯 마치 한풀이처럼 계속 이어져왔다.
서사시의 역사가 그렇듯, 한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혐오와 억압으로 쓴 남성 대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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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아니 고등학생 시절까지 연결되는 추억 중에 일명 ‘책차’가 있다. 자그마한 크기의 빛바랜 베이지색 차에는 책이 가득 실려 있었고, 그 책들은 주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와 같은 베스트셀러이거나, 만화이거나, 세계문학 전집류가 아니라면 무협지였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내가 받게 되는 선물이 밤을 새워 무협지를 읽을 수 있다는 거였다. 김용 작가의 <대륙의 별>(원제 <천룡팔부>), <아! 만리성>(원제 <소오강호>) 같은 작품들을 이부자리 옆에 쌓아놓고, 한권씩 격파해나갔다. 그 책들의 종이 냄새와 새벽 3시10분을 가리키는 탁상시계의 바늘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난 그때 무언가로부터, 초인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tvN에서 매주 금요일 단 1회씩 방송되는 <초인시대>. <SNL 코리아>의 ‘극한직업’ 코너를 통해 청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한 유병재가 각본을 쓰고, 직접 주연까지 맡은
[김호상의 TVIEW] 아픈 청춘의 적나라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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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을 살면서 제법 많고도 다양하고도 강력한 인간 폭탄을 만나왔다고 자부하지만 아직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부류가 있으니, 바로 시어머니다. (이젠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날 것 같다.) 그래도 남의 시어머니 욕은 많이 들었다. 돌 지난 아기를 데리고 시댁에 갔던 동생이 돌아와 울면서 하소연했다. “아기가 어쩜 이렇게 볼품없이 마르고 못생겼냐는 거야. 그게 손녀한테 할 소리야? 엉엉.” 근데 동생아… 사실이잖아. 동생의 시어머니는 객관적이었다. 조카 얼굴이 그분 아들 판박이고 그분 아들 얼굴은 그분 판박이기는 했지만.
한번은 결혼한 친구가 공포에 질려 하소연했다. 그간 풍문으로만 들었던 시어머니의 폭력을 직접 목격했다는 것이었다. 시댁을 먹여살리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남편 패는 걸로 풀곤 했던 그 애의 시어머니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손아래 시누이들도 때리기 시작했는데, 며느리를 새로 들인 다음부터는 참고 살다가, 결국 성질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시고모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질질 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내 아들은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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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아니, 이성애자 페미니즘. 아니, 이성애 중산층 고학력 비장애인 젊은 백인 여성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여성 인구만큼이나 많다. 지향도 다 다르다. 페미니즘은 다양하지만 공통 이해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아는 한, 페미니즘은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사유 체계다.
마르크스주의부터 채식주의까지 모든 주장은 ‘가장 올바름’을 경합하는 성질이 있다. 정통(authenticity)과 기원 논쟁은 위험하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선언이 실천으로서 요구되는 상황을 제외하면, 인간의 행위가 있을 뿐 고정된 행위자는 없다.
페미니스트라는 지칭은 그에 합당한 행동을 일관되게 했을 때 남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문제다. 스스로 자칭하는 것은 국어에도 맞지 않고 민망한 일이다. 여성학 강사나 여성학 교수라는 직업이 여성주의 면허증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실천 속에서 검증되고 변화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어느 ‘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여자로 살기, 여자로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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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단위 이야기에서 정서적 공감과 소재를 찾는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다보면 상속 분쟁이나 결혼까지 이르는 갈등을 부풀리려고 대가족을 끌어들이는지, 이미 낡아버린 대가족 설정을 지속시키기 위해 상속과 결혼 갈등을 반복하는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어쨌거나 사람이 모여야 이야깃거리가 생기는 게 드라마라, 예전 같지 않은 가족의 영향력을 과장하면서 생기는 무리수가 빈번한 와중에, 생활고로 인해 부모 집에 얹혀사는 연어족이나 셰어하우스 형태로 유사가족을 이루는 드라마도 한동안 꽤 유행이었다. 결혼과 출산이 계속 감소하면서 서울시 1인 가구 비율은 27%에 이르렀고, 결혼 전까지 잠시 독립해 사는 정거장처럼 다루던 드라마 속 1인 가구의 삶 역시 수정되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가장 빠른 답을 내놓은 tvN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는 서울 도심의 오피스텔에서 정부 청사 이전으로 한국에서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아진 세종시로 무대를 옮기며 시즌2를 맞았다.
밥은 외식
[유선주의 TVIEW] 삶을 혼자 감당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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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 일이다.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놀던 나는, 배수관에 숨었다가 몸이 끼고 말았다. 옴짝달싹 못한 채 구해달라고 소리치며(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혼자서 몸부림치다가 5분 만에 스스로 기어나오긴 했지만, 그 5분은 정말이지 5시간, 5일, 5달, 아니 5년 같았다. 시간은 마치 무한히 느려져서 정지된 것 같았다. 시간 감각 대신에 나의 측두엽을 강타한 것은 끊임없는 인과적 반성이었다. 내가 왜 이 지경에 처하게 됐을까, 어떤 루트를 탔더라면 여기에 오지 않게 되었을까, 내가 이 지경이 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을까, 지금쯤 친구들은 날 찾을까, 엄마는 내가 이 지경이 된 걸 알고 있을까…. 온갖 인과적 추론으로 위장된 망상들 말이다. 5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흡사 정지된 것처럼 퇴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겹겹이 퇴적되어가는 망상들이다. 물론 이 지층에도 두 계파가 있다. 한편에는 지금쯤 친구들이 날 찾기 시작했을 테니 구조대를 기다리자는 순진파가 있고, 다른 한편
[곡사의 아수라장] 우리 모두 죄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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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다. 오래전 일이다. 자정이 넘도록 잠이 오지 않아 TV를 틀었다.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맞추다 2번에 가서 시선이 멈추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가늠할 수 없는 누군가가 거기 있었다. 얼굴 가득 두껍게 분칠을 하고 빨갛다 못해 검정에 가까운 립스틱을 칠한 채 엄청나게 큰 두눈과 입을 껌벅이며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렇게 생긴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런 목소리도 처음 들었다. 게다가 자꾸만, 브라운관 너머의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영화 속 인물이 왜 상대역을 보지 않고 내쪽을 바라보며 말을 하고 윙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공뿐만이 아니었다. 그 영화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상했다. 이상했다, 라는 말 이외에 저 모든 광경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내 또래가 90년대 초반에 이 영화를 봤다면 그 경로가 대개 이와 비슷할 것이다. <록키 호러 픽쳐 쇼>(1975)였다.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팀 커리의 이십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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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로우>의 결말을 포함해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전철역 사물함에 핏덩이일 때 버려져 ‘엄마’(김혜수)의 조직에서 길러진 <차이나타운>의 일영(김고은)에게는, 쓸모가 곧 존재 이유다. 과연 매우 유용한 존재로 자란 소녀의 견고한 세계는, 딱 한번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 머문 시선으로 인해 균열한다. 우리는 이런 분기점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차이나타운>의 일영은 종종 <달콤한 인생>의 선우(이병헌)가 섰던 자리에 정확히 당도한다. 선우는 첼로 켜는 여자를, 일영은 요리하는 남자를 응시한다. 그래서 비슷한 궤적 안의 차이를 살피는 일이 더 흥미롭다.
04/02
“이제부터 ‘그것’이 널 따라올 거야. 나도 누군가에게 받았고 방금 너한테 넘겼어. 새로운 상대와 섹스해야만 저주를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다음 사람이 ‘그것’한테 잡히면 저주는 네게 돌아와.”
사귀는 청년 휴(제이크 위어리)와 첫 섹스를 나누고 깨어난 제이(마이카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장르라는 은유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