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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1차대전의 패배로 식민지를 모두 잃고 거대한 전쟁배상금을 빚져 만신창이가 된 채 대공황 시대를 맞았다. 나치가 급부상한 배경이다. 군사적 전체주의와 순혈주의, 그리고 극우 민족주의는 2류 시대를 지나는 공동체의 풍경이며 열패감의 거울상이었다. 더 우월한 것을 쫓기보다는 더 열등한 것을 찾아 위안받는 쪽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훨씬 편리한 치유방법이기 때문이다. 냉전 이후 네오나치즘이 제1세계의 저소득층과 자본주의의 위력 앞에 급작스럽게 노출된 공산권 국가를 중심으로 떠오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에 등장한 ‘일베’는 변형 나치즘에 가까워 보인다. “여자들이 지나치게 보호받고 있다. 남자가 역차별당하고 있다. 무능한 여자들이 사회의 요직을 가져가려 한다. 여자는 남자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일 뿐이다. 이 나라는 우리 남자들의 것이다!” 차별이 공상적 피해의식으로 전화되는 현상은 하나의 공식과도 같다. ‘여자’를 ‘유대인’으로, ‘남자’를 ‘독일인’으로 바꾸면 빼거
[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일베여, 세계로 뻗어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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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일, 주당 최소 133시간 근무에 요리, 언어, 운전, 교육 등 다양한 자격이 필요함. 휴가는 없고 휴일에는 더 많은 업무가 주어짐. 연봉으로 환산하면 3천만원이네, 4천만원이네 하며 가끔씩 언론에서 언급하지만, 사회에서 동등한 노동력으로 인정되기는 아직도 갈 길이 아주 먼, 심신이 고단한 바로 그 직업.
‘격한 공감 엄마 예능’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tvN에서 방송되고 있는 프로그램, <엄마사람>은 바로 그 직업인 ‘엄마’를 다룬다. 세명의 연예인 엄마가 출연한다. ‘투투’의 황혜영, ‘쥬얼리’의 이지현, 그리고 ‘만능MC’였던 현영. 그들은 연예인의 모습을 벗고 화면에서 민낯으로 시청자와 만난다. 하지만 우리와 굳이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도, 감정을 공유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극히 평범한 삶의 순간을 우리와 공유한다. 아이를 재우고, 씻기고, 유치원 보내고, 짬짬이 식은 국에 만 밥을 입에 옮기고, 가끔은 과도하게 행복한 표정으
[김호상의 TVIEW] 엄마들이여 여기로 모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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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스물다섯 시절, 얼굴이 깡패(그리고 하는 짓도 깡패)인 선배가 지령을 내렸다. “반드시 현장에 잠입해서 내밀한 사정을 담은 기사를 써와라.” 내밀이 아니라 은밀이겠지, 그렇게 궁금하면 지가 가든가, 투덜투덜. 선배가 알고 싶었던 그 현장이라는 것은 어느 저예산영화의 베드신 촬영현장이었다.
사진기자도 없이 왠지 부끄러워 혼자 볼을 붉히며 현장에 갔더니 장소가 좁아서 밖에 나와 놀고 있던 스탭 아저씨들이 나를 반겼다. “마침 잘 왔어요, 사람이 부족했는데.”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나는 다시 한번 볼을 붉혔다. “전 취재하러 온 사람인데요?” “뭐가 궁금해, 남자배우 사이즈가 궁금해? 걔가 얼마나 작은가 하면 말이야…. 아무튼 우리가 다 알려줄 테니까 한판만 타자, 응?” 그래서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카드를 잡았다. 부하들이 일하는 사이 심심했던 대장들은 ‘말(馬) 타기’라고 부르던 자체 개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회사나 남의 회사나 대장들이란….
몇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쫄리면 뒈지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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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셜포비아>와 <팔로우>의 중요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데르센과 동시대를 산 덴마크 화가 크리스텐 콥케(Christen Købke, 1810~48)의 <도세링겐에서 바라본 풍경>(1838)이다. 오랫동안 나는 이 그림을, 떠나가는 나룻배를 선창의 두 여자가 전송하는 풍경이라고 이해해왔다. 저쪽 기슭에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전 무심코 꺼내 본 이 그림은 무사히 돌아오는 배를 기다리는 광경으로 홀연히 바뀌어 있었다. 다가오는 배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는 두 사람의 뒷모습과 작은 국기가 걸린 곧은 깃대가, 이 구도 정연한 그림의 축이다.
03/13
홍석재 감독의 <소셜포비아>에는 서늘한 두 그림이 있다. 하나는 타인을 간단히 규정짓고 단죄하는 집단 권력에 중독된, 살아 있는 군상이다. 신상정보를 털어 ‘현피’를 뜨러갔던 일군의 SNS 이용자들은, 승리 대신 상대 민하영(하윤경)의 시신을 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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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16일, 그날로부터 1년이 지났다. 어제 일만 같은데 그새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갔다. 여전히 배는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고 유가족이 되고 싶어 드러누운 실종자 가족이 아홉 가정이나 되며 어처구니없는 일 처리로 질타의 대상이 되었던 그 대통령은 여전히 그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나는 어땠나. 처음엔 팽목항 언저리라도 가서 바다 냄새를 맡아야지 했었다. 울분에 차서 정부를 향한 쓴소리에 목소리를 얹고 또 얹어가며 시급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는 했었다. 뒤져보니 다 지난해 봄에 쏠려 한 일이었지 여름부터는, 가을과 겨울을 넘어서부터는, 내 살기에 급급한 흔적뿐이었다. 전세대란이 컸다. 장기불황의 여파는 밥벌이로 삼은 출판계를 먹구름처럼 뒤덮은 지 오래라서 사지도 않을 책을 만들기 위한 무기한의 무력한 노동은 결국 여러 병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병원 신세를 지며 아픈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은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그들 또한 앓고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죄책감, 다음에는 뭐라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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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역을 맡은 명사의 강연이나 감성 에세이의 상투적인 문구 중에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말이 있다. 삶의 주도권을 잃지 말고 자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충고와 깨달음이 오가는 자리에서 잠시 이탈해, 어떻게 하면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내가 서술자이자 주인공이 되어 인생을 극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만의 느낌과 감정으로 사소한 일상의 파문을 증폭하다보면 어느새 친구가 등짝을 후려치며 ‘드라마퀸’ 같다고 놀린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지만, 쟤 인생의 나는 사소한 일에 호들갑 떨고 모든 화제를 자기 위주로 빨아들이는 대화의 블랙홀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을 드라마에 빗대야 한다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배역을 품앗이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김인영 작가의 KBS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각자가 서술자가 되고 또 서술의 대상이 되는 촘촘한 관계망 속의 여성을 다룬다. 남편을 사이에 둔 연적 관계에서 시작해 모녀, 자매,
[유선주의 TVIEW] 타인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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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줍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지 않았다. 불편했기 때문이다. 길을 다니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창피했다. 어색한 미소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누군가 그를 이렇게 부르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브라이언이다!”
묘한 일이었다. 그 이름이 들려오면 모든 게 달라졌다. 그것은 그에게 많은 걸 환기시키는 이름이었다. 그는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했다.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브라이언을 연기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역할로 최악의 배우에 노미네이트되었던 기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브라이언 오코너를 사랑했다. 어쩌면 돔보다 더 말이다. 당장 닷지 차저와 나란히 질주하는 닛산 GT-R의 배기음이 들려올 것만 같다. 2013년 11월30일 토요일, 재능 있는 배우이자 훌륭한 레이서였던 폴 워커가 차에서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에게 <분노의 질주>는 그저 얄팍하고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시적으로 이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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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일본 <후지TV>에서 방송된 드라마가 있다. <오리엔트 급행 살인 사건>. 단출하게 2부작으로 기획되어 방영된 특집극이었지만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웃음의 대학>의 재기발랄한 각본가 미타니 고키가 각색했고 다마키 히로시, 마쓰시마 나나코 등 특급배우의 출연으로 일본 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원작 소설을 일본의 실정에 맞게 각색한 이 드라마는 결국 16%를 상회하는 시청률로 관심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 전설적인 추리소설의 진정한 맛은, 밀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건에 대해 말하지만, 그 말이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들이 누구인지까지도.
‘음치도 최후의 1인이 될 수 있는 대국민 추리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시작한 음악 프로그램이 있다. 아니,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Mnet에서 방송되는 <너의 목소리가 보여>가 그것이다. 목소리는 듣는 것이지 보는 것이
[김호상의 TVIEW] 영리한 포맷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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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눈사태가 스키장 레스토랑을 덮친다. 사상자는 없다. 깔려죽은 것은 위기의 순간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혼자 줄행랑을 쳤던 남자의 에고다. 가족의 공기엔 살얼음이 끼기 시작하고 이윽고 “나는 생존 본능의 희생자야!”라는 남자의 울부짖음이 쾌적한 호텔 복도에 울려퍼진다. 루벤 외스트룬드 감독은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의 배경인 스키 리조트를, 사나운 자연과 그것을 길들이려는 문명이 부딪치는 장소로 소개한다. 광막한 설산과 5성급 호텔의 편의시설, 동물적 본능과 문화적으로 구성된 셀프 이미지가 대조된다. 특히, 네 식구가 쓰는 같은 상표의 전동칫솔은 부유한 핵가족의 일체감과 잘 관리된 라이프 스타일을 함축한다. 그러나 청결한 침묵 가운데 울려 퍼지는 진동음은 기괴하게 위협적이다.
02/24
“꺼져! 이 흉악한 인간아. 나는 아빠랑 집에 가겠어.”
<위플래쉬>의 클라이맥스인 카네기홀 공연에서 플레처 선생(J. K. 시먼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앤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거저 얻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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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비극들이 폭죽처럼 매일 터지는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살면서 누군가가 ‘한국이 싫다, 이민 가야겠다’고 말할 때마다 속으로 비겁한 회피라고 생각했다. 어디를 가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발 딛고 있는 곳에서 새롭게 각오를 다지는 게 그나마 슬기로운 삶의 해법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요즘 그 생각이 뒤집어졌다. 한국 땅을 도망치고 싶다는 간절함이 울컥울컥 목울대까지 차오르곤 한다. 바로 세월호 때문이다. 절망을 목격한 사건, 사고들이야 부지기수지만, 세월호 문제만큼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한국 현대사의 정당성을 통째로 익사시킨 저 검은 심연 앞에서, 생명보다 이윤을 앞세운 부조리한 사회가 아이들을 집어삼킨 저 비명의 블랙홀 앞에서 우리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아이들을 구조하지 못한 우리는 1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그저 서서히 기억을 지우는 것뿐이었다. 피고석에는 책임질 그 누구도 소환하지 못했고, 선체는 바다 속에서 녹슬어가고, 실종자 9명은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41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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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 판에 박힌 표현이란 뜻이다. 누가 먼저 썼냐 할 거 없이, 너도나도 써먹어서 닳고 닳았기도 하거니와, 얼마나 닳고 닳았는고 하니 안 써주면 그 누군가에겐 예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막연한 죄책감마저 유발하는 그런 식상한 아이템. 어떤 장르에도 클리셰가 있다. 과감히 바꿔 말해보면 그 장르를 대표하는, 그래서 이게 빠지면 장르 자체의 정체성을 잃을 수도 있는 클리셰가 있다는 말이렷다.
예를 드는 것도 무척이다 쉽다. 어떤 장르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상황, 사건, 설정이 바로 클리셰니깐. 예컨대 스릴러의 경우, 범인에게 추격당하던 주인공이 겁나 몸을 숨겼는데(대부분 화장실이나 침대 밑), 틈새를 통해서 범인의 발이 지나가는 것을 본 후, 안심하는 순간, 두눈딱 개심쿵. 더 간단한 클리셰도 있다. 범행현장 혹은 범인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금살금 걷는 발, 반대로 범행의 흔적을 모두 숨겼다고 생각하고 안심하는 순간 미처 놓치고 있었던 얼룩이나 흔적. 공포영화의 클리
[곡사의 아수라장]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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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X년을 살면서 한번도 연애편지를 써본 적이 없다. (연애는 했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던데 나는 웬일인지 상대가 시인이 되면 그나마 있던 사랑도 달아나곤 했다. 아직은 젊었던 30대 초반, 애인으로부터 “그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키스를”이라는 문자를 받고는 너무 부끄러워 아무도 없는데 이불 속에 숨었다가 오밤중에 뭐하냐, 빨리 자라고 답한 사람이 나다. (경상도 남자냐.) 이렇게 돌이켜보니 내가 지금껏 결혼을 못한 데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로맨틱이 성공적이지 않아.
하지만 한때 내게도 하루에 몇통씩 연애편지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남의 연애편지를. 한창 잘 먹(고 그게 몽땅 살로 가)던 중학교 2학년, 2교시가 끝나면 도시락을 까먹고 점심시간엔 기아에 허덕이던 나는 저울 좀 보고 살면서 작작 좀 먹으라며 용돈을 주지 않던 엄마에게 대항하여 스스로 식비를 벌기 시작했다. 연애편지 대필 한번에 사발면 한개, 가끔은 모아서 떡볶이 한번. “내 마음엔 의자가 한개 있어.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부끄럽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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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학대받은 개들의 반란을 그린 <화이트 갓>은 흔히 <혹성탈출> 시리즈에 비교되지만 판타지가 아니며 공간도 한 도시로 한정돼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달리 말하면 갈등을 서사적으로 해소할 출구가 제한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코르넬 문드루초 감독은 이 난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미지와 음악을 통해 초월적으로 해결해버리는 몇 차례의 경이로운 순간을 창조했다. 몸을 낮추어 다른 종족과 눈높이를 맞추고 땅과 나란해진 인간과 동물의 이미지는 그중에서도 백미다.
02/20
내가 다닌 중학교는 예술 학교였다. 기억 속의 나는 3년 내내 음악부 연습실에서 흘러나오는 악기 소리를 들으며 등교했다. 주번이라서, 잠이 오지 않아서, 유별나게 일찍 집을 나선 어둑한 아침에도 음악부의 이름 모를 누군가는 반드시 나보다 먼저 학교에 와서 악기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래서 “좋아, 지지 않겠어! 나도 방과 후에 석고상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악마는 까만 쫄티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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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인간관계다. 인간관계는 모든 행불행의 원인. 영원한 제도인 가족이 ‘평생 원수’인 경우가 최악일 테고 직장 상사, 동료, 연인, 지나가다 부딪친 사람까지.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내 입장에서 너무나 억울할 때 상대방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도대체 왜 저럴까? 미친 걸까? 아픈 걸까? 나쁜 걸까?
인간의 본질은 없다는 말은 하나마나한 얘기. 내가 경험한 그 순간이 상대의 본질이다. 나열하기 민망한 다양한 저질 행동이 일상인 사람들, ‘사회 지도층’의 탐욕과 갑질, 일부 ‘진보 인사’의 인간성 바닥에 직면할 때가 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미친 사람이라고 치부하면 마음 편하다.
그런데 미친 사람이 아픈 사람이라면 다시 골치가 아파진다. 정신적 질병(mental disease)은 기분, 감정, 인식에 장애가 생기는 병이다. 정신 질환자는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폭력적이라는 편견이 강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암이나 당뇨병의 증상이 다 다르듯 정신적 질병도 마찬가지다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아픈 사람, 미친 사람, 나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