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클래식으로 부르는 영화나 책을 상상해본다. 일단 검고 길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큰 차의 시점에서 시작해보자. 벨이 울리고, 커다란 하얀 문이 양쪽으로 열린다. 한참을 잘 정돈된 잔디가 깔린 길을 따라가다 보면 미국 남부식의 커다란 저택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김없이 보이는 보타이를 착용한 집사. 역시 굵은 저음으로 우리를 맞는다. “여기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올리브TV의 4부작 파일럿 프로그램 <집사가 생겼다>에서 이런 내용을 다룬다는 것은 아니다. 상상은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내용 자체는 오히려 심부름꾼 리얼리티랄까. 여기서의 집사는 마치 해결사 같다. 집사장 김준현이 의뢰인과 매칭되는 집사들을 파견하고, 클레임도 받아들인다. 배우 임원희·장혁진·신승환, 가수 신원호가 그 집사들이다. 이들은 14마리의 닥스훈트를 돌보는가 하면 의뢰인의 고민을 들어주고, 산책길을 만들고 칼국수를 끓이면서 추억을 소환해준다. 이
[TVIEW] <집사가 생겼다> TV를 보는 이유
-
소년, 소녀들이 있다. 루저들이다. 자기들끼리 모여 작은 공동체를 만든다. 몰려다니다가 우연히 거대한 악과 마주한다. 그런 과거를 까맣게 잊고 성장해 저마다 나름의 사정을 가진 어른이 된다. 어느 날 이들은 저 옛날의 패거리 가운데 한명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다. 그것이 돌아왔다고.
앞서 요약한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 가지 제목이 떠오를 것이다. 누군가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이라고 생각할 거다. 누군가는 <스탠 바이 미>(1986)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의 조금 뒤틀린 기억이 아니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특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무튼 꽤 익숙한 설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건 스티븐 킹의 소설 <그것>(1986)의 설정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스티븐 킹의 <사계>에 수록된 <바디>(1982, 이후 <스탠 바이 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와 세르지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스티븐 킹의 원작에서 <그것>이 취한 것과 버린 것
-
이번호 특집을 통해서 논란 속의 두 영화 <청년경찰>과 <브이아이피>를 중심으로 올해 상반기 한국영화에 대한 젠더 감수성을 더듬어봤다. <원더우먼> <청년경찰> <브이아이피>에 대해 썼던 20자평을 이유로 ‘남초’ 커뮤니티에서 ‘꼴페미’가 되어버린(특집 메인기사 참조) 임수연 기자가 전체 그림을 그리고, 김성훈 기자의 상반기 한국영화 분석과 김현수 기자가 진행한 20대 관객 대담, 그리고 ‘비윤리적 재현과 폭력적 연출에 대해 장르성을 핑계로 대지 말라’는 손희정 평론가의 원고까지 더해, 지난 몇달간의 분위기에 대해 냉정하게 전해보고자 했다. 분명한 것은 댓글들을 살펴보건대 테러를 가하는 사람들이 이성적이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비이성적이라는 기이한 모순의 풍경이다. 임수연 기자에 대해서는 신상 털기에 나선 네티즌까지 생겼고, 특집 대담에 참여한 ‘씨네플레이’의 유은진 에디터 또한 <청년경찰>의 불편함을 토로한 글에
[주성철 편집장] 세상의 중심에서 여혐을 외치다
-
제임스 조이스는 방랑자다. 20대 초반에 조국 아일랜드를 떠난 뒤 평생 외국에 머물렀다. 자전적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밝힌 대로, 조이스는 예술가로 살기 위해 ‘가족, 국가, 교회’와 결별한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의 가족과 조국 그리고 종교’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지 떠올리면 쉽게 짐작될 것이다. 게다가 조이스의 고국 아일랜드는 영국의 속국이었다. 아일랜드인이, 특히 조이스의 동창과 지인들이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이름 아래 대영(對英) 투쟁을 벌일 때다. 조이스는 오직 ‘예술’ 하나만 보고 이 모든 한계를 넘어가길 원했다. 영민한 아들 조이스가 가족과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모친은 평생의 상처를 안았다. 조이스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자발적인 망명길에 오른다. 조이스가 처음 정착한 곳이 트리에스테(Trieste), 이탈리아 북동부 끝에 있는 항구도시다. 1904년, 조이스의 나이 22살 때다(1904년은 조이
[트립 투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북동부 끝의 항구도시
-
-
마지막 앨범이 2013년이었으니 4년 만에 새 앨범을 내놓았다. 그사이 이 밴드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같은 밴드 맞나 싶은 앨범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전작 《YOUTH!》는 밝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일렉트로닉을 기반으로 하지만 록과 디스코를 퓨전해 대중적으로도 접점이 분명했다. 하지만 신작 《The Glen Check Experience》는 분위기가 가라앉았으며 힙합, 알앤비, 베이스 뮤직 비중이 높아졌다. 그들을 좋아하던 팬들 입장에선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멤버 김준원은 최근에 디제이 활동이 활발했다. 세계적인 디제잉 영상 플랫폼 보일러 룸에 나갈 정도로 성과도 좋았다. 전자음악과 흑인음악, 그중에서도 언더그라운드 취향의 뮤지션들과 ‘얼터 에고’란 크루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신작엔 그런 경험이 반영된 것 같다. 과거 히트곡 <Pacific>이나 <60’s Cardin>보다는 최근 그의 디제이 세트에서 들을 수 있던 음악에 더 가까워졌다. 댄스 신 전체의 변화
[마감인간의 music] 글렌 체크의 《The Glen Check Experience》, 뿌옇고 몽롱한 이 맛
-
생리에 관해서라면 내게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생리 주기는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 것인가. 분명 끝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새 닥쳐와 당황하기를 20년째다. 생리통은 또 어떤가. 10대 초반부터 1년에 열두번씩, 매우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겪어온 고통이지만 이상하게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외려 나이가 들수록 또 몸의 컨디션에 따라, 매번 새롭고 다양한 통증이 세심하고 풍성하게 느껴지니 신비로운 영역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가장 알쏭달쏭 모르겠는 건, 도대체 왜 생리대는 아무리 많이 사다놓아도 필요할 때는 똑 떨어지고 없는가 하는 거다. 어디 다른 용도로 쓸 수도 없는 물건인데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이 의아함은 결국 첫 번째 미스터리와 만나는데, 결국 모든 문제는 거기서 발생하는 것 같다. 생리 주기는 너무 자주 지나치게 빨리 돌아온다.
얼마 전에도 갑자기 생리대가 떨어져 난감했다. 나름 마트나 드러그스토어의 세일 기간을 꼼꼼히 챙겨 몇달
안전하게 피 흘리고 싶다
-
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 출연 제임스 스튜어트, 존 달 / 제작연도 1948년
언제부터 영화에 중독되기 시작하는 걸까? 부모님이 영화를 금하셨던 것도, 스스로 영화를 기피했던 것도 아니지만 어린 시절 내게 영화는 딱히 호기심이 생기거나 더 알고 싶은 존재는 아니었다. 요즘도 ‘내 인생의 영화’ 코너에서 어린 시절 제목도 모르고 본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이 원체험으로 남았다는 유의 글을 읽을 때면 희미한 결핍과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내겐 앎 이전의 본능적인 감각에서 우러난 매혹이 없었던 것 같은데.
대학에 가도록 영화 애호가가 될 조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내가 학내 영화 동아리에 발을 들이게 된 것도 순전히 친구의 강권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처음엔 가입만 해놓고 마음 없이 겉돈 터라 그곳에서 처음 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첫 경험’만은 확실하다. 그건 <로프>였다.
1948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에게는 일종의
홍지로의 <로프> 균열의 시작
-
※<아토믹 블론드>와 <매혹당한 사람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래픽노블이 원작인 <아토믹 블론드>는 음악과 디자인에서는 과장된 1980년대 양식을 택하지만 액션에선 가차 없는 사실성을 추구한다. 주인공 로레인 역의 샤를리즈 테론이 대부분 직접 감당한 긴 호흡의 격투 시퀀스를 보고 있노라면 관객의 몸에도 상상의 피멍이 든다. 현란한 편집을 배제한 <아토믹 블론드>의 격투는 할리우드 평균치보다 느리고 힘겹다. 양쪽이 쓰러졌다 다시 맞붙기까지 몇초의 가쁜 호흡까지 그대로 살리는 식이다. 여성의 완력이 갖는 한계를 기물을 이용하고 급소 공격으로 돌파하는 로레인에게 적들은 여성혐오적 욕설을 내뱉는다. 특히 동베를린 탈출 도중 계단 액션의 끝에선 테론을 향한 존경이 솟는다. 원 테이크처럼 보이도록 살짝 봉합된 시퀀스이긴 하지만, 누가 그걸 신경 쓴단 말인가!
08/25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흔들리자 냉전 양 진영의 스파이들은 혼란에 빠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작은 아씨들
-
400년 전 조선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2017년 서울에서 눈을 뜬 사람을 기겁하게 하려면 무엇을 먼저 보여주는 게 좋을까? tvN <명불허전>은 어의 허준(엄효섭)의 추천으로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할 기회를 얻었으나 실수를 하고 관군에 쫓기던 혜민서 의원 허임(김남길)을 현재의 서울로 불러들였다.
모전교에서 화살을 맞고 떨어진 허임이 물에 흠뻑 젖은 채로 정신을 차린 곳은 2017년의 청계천. 조선시대 사람이니까 종로의 빌딩과 자동차, 과거와 다른 옷차림을 보고 놀랄 줄 알았는데, 한복을 차려입은 흑인과 백인 관광객이 한국말로 “괜찮아요?” 하고 말을 거는 장면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터졌다. 처음부터 자극이 너무 세잖아!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워낙 많다보니 흥미도 떨어지고 이야기의 흐름도 짐작을 벗어나지 않지만 <명불허전>의 허임이 겪는 현대의 풍경은 꽤 신선하게 다가온다. 막연한 고층 빌딩보다 서린동과 무교동의 낙지음식점 간판처럼 구체적인
[TVIEW] <명불허전> 신선함에 관하여
-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보며 가장 흥미로웠던 에피소드 중 하나는 2회 순천 편이었다. 유시민이 항소이유서에 얽힌 비화를 공개했는데 “보름 정도 쓸 시간이 있었다. 첫 문장부터 초고를 다 쓸 때까지 순수하게 쓴 시간은 14시간 정도다. 한번에 써야 해서 퇴고는 안 했다”라고 말해 출연자 모두 깜짝 놀랐다. 감옥에 누워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머릿속에서 다 구상했고, 한자도 오자가 나지 않게 미리 연습하여 일필휘지로 쓸 수 있었던 것. 초고와 수정고까지 이미 머릿속에서 작업을 끝냈던 것이다.
하지만 일행 중 김영하 작가만이 별로 놀라지 않았다. 작가들이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그것이 ‘글쓰기’의 일반적인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과거 펜과 종이가 비싸서 ‘썼다 없애는’ 일 자체가 큰맘 먹고 하는 일이었던 시절, 작가에게 마치 연극이나 뮤지컬 배우가 실수 없이 라이브 연기를 하듯 ‘단 한번’에 써내려갈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한 덕목이었다
[주성철 편집장] 영화 뇌 사용법
-
티베트에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어느 고승(高僧)의 선문답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걱정을 안 하고 살 수가 있나. 날이 갈수록 번뇌만 가득 쌓이는 인생. 산다는 건 끝내 버티는 일인데, 버티다 보면 뭐라도 되거나 어딘가 가닿지 않으려나? 글쎄, 대체 언제? 아니면 할 수 없고, 라는 식으로 버텨보지만 특히 여름은 무더워서 버티기 짜증난다. 인생 자체를 어쩌다 받은 긴 휴가처럼 느끼는 사람은 피서를 못 떠난다. 하나도 이룬 일이 없으니 스스로 죄스러워 일상에서 도망가질 못한다. 내 경우 골방에 홀로 갇혀 한평생 치르는 벌을 여름 내내 또 받는다. 허튼 꿈을 꾼 죄, 한낱 기술을 몇푼 술값에 팔아치운 죄, 절대 사랑하면 안 될 인간들만 골라서 사랑한 죄. 모두 유죄! 꽝꽝꽝!!!
자, 진정하려면 결국 또 영화를 봐야 한다. 산에 올라가 스님이 되기엔 늦었고 욕망덩어리 세속의 인간이 한여름 번뇌를 다스리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늦여름
왕가위 <아비정전>과 임권택 <만다라>
-
서머소닉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한국에서도 많은 음악 팬이 해마다 방문하는 페스티벌이니 굳이 자랑할 의도는 없다. 이틀 동안 대략 10개 조금 넘는 무대를 본 것 같은데, 최고는 역시 푸 파이터스였다. 뭐랄까. 그들은 그야말로 순도 100%의 라이브 밴드였다. (사운드를 통해 추측해보건대) 흔히들 사용하는 반주 테이프도 쓰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인간의 육체를 경유한 격정적인 연주를 통해 푸 파이터스는 관객을 뒤흔들고 이내 찢어버렸다. 거대한 공룡. 우리 시대의 레드 제플린. 그러나 가장 많은 관객이 모인 무대는 푸 파이터스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EDM계의 최고 갑부이자 히트곡 제조기 캘빈 해리스였다. 그 무대를 보면서 “정말 끝내준다”는 감탄을 계속 내뱉었다. 때로는 격렬한 비트로 관객을 움직이고, 때로는 팝적인 멜로디로 호응을 이끌어내는 모습은 과연 베테랑의 그것다웠다. 게다가 히트곡도 좀 많나. 이 아저씨, 영국 차트 톱10곡만 무려 21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무대가 먼
[마감인간의 music] 푸 파이터스,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
-
결국,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걸 몰랐을까.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뻔한 미래였으니까. 강자는 언제나 약자를 이겨왔다. 그들의 다른 이름은 승자였고, 약자는 패자였다. 번번이 그래왔다. 꾸준히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싸움은 왜 반복되는가. 왜 이어지는가. 왜 멈추지 않는가. 강자는 이김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데, 약자는 짐의 역사에서 왜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강자에겐 선택지가 있었다. 약자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강자가 골라 빼앗은 그것이, 약자에겐 고를 수 없는, 둘도 없는 무엇이었다. 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싸운 게 아니라, 지건 말건 싸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실낱같은 희망마저 없었겠는가. 그렇지는 않다. “질긴 놈이 이긴다”는 구호는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면 저들도 탐욕을 멈추고 말 거라는,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구호, 허나 세상물정 모르는 그 외침. 강자는 질길 수 있었다. 약자는 질길 수 없었다. 질긴 놈이 이긴다는 그 말은 틀
[노순택의 사진의 털] 절망의 눈앞
-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 출연 리처드 드레퓌스, 프랑수아 트뤼포 / 제작연도 1977년
어릴 때 난 멀미가 심했다. 버스에 타기 위해서는 구토용 비닐봉지를 한손에 챙겨야 할 정도였다. 영화를 보러 가던 그날도 그랬다. 집이 종점 근처라 버스에 앉아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영화 광고가 나왔다. 어머니였던가 아버지였던가 “지금 저 영화를 보러 가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시흥동에서 광화문 국제극장까지 상당한 장거리 여정,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그날도 난 멀미를 심하게 했을 것이다. 잔뜩 지쳐서 극장으로 들어갔고 의자에 앉자 곧 주위가 어둑해졌다. 그리고 무슨 영화인지도 모를, 버스 라디오에서 광고로 들었던 그 영화가 시작됐다. 부모님이 내 멀미를 감수하고라도 꼭 보여줘야겠다고 했던 그 영화가.
저학년 초등학생이 보기에 그 영화는 무척 길었다. 웃긴 장면도 없었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었다. 되레 으스스했다. 밤 장면이 많았고 날아다니는 불빛이 많이
유성관의 <미지와의 조우> 경이로운 빛